바이블 오디세이 I2025. 6. 28. 20:00

거대한 교회론
(요한계시록 14:1-5)

1. 신정국가
‘신정국가’: ‘신이 통치하는 국가’라는 개념은 사실 아시아인들에게는 조금 낯선 개념이다. 물론 이제는 서구 개념인 ‘신정국가’라는 용어와 사상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지만, 우리에게 낯선 개념인 것은 여전하다. 신정국가 개념은 두 국가 개념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서구 사회는 오랫동안 세속국가와 신정국가(교회)가 공존했다. 두 권력이 갈등 관계에 있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였다. 그러다, 사무엘 시대에 이르러, ‘왕’(세속권력)이 나타난다. 사무엘은 이러한 두 권력 체제(세속 권력과 신정 권력)의 위험성을 말한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은 ‘왕’을 원한다. 

로마의 정치 체제를 보면, 신정일치 체제였다. 황제가 마치 신처럼 군림했다. 그것에 대한 폐해는 대단했다. 황제가 신처럼 숭배되면서, 차별과 배제와 폭력이 난무했다. 황제가 저지르는 신적 폭력 앞에 감히 아무도 저항할 수 없었다. 신적 폭력은 저항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누구든지, 자신의 권력 또는 권위를 신에 투영해서 행사하려는 이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신적 폭력만큼 합법적 폭력도 없다. 정말 조심해야 한다. 이러한 정치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읽어야, 요한계시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2. 십사만사천
14장 1절을 보면, 요한이 본 새로운 환상이 묘사되어 있다.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서 있다. 그와 함께 십사만사천명이 서 있다. 그런데, 그 십사만사천명에게는 아주 특별한 특징이 있다.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이런 이름을 이마에 새기고 다니지 않는다. 왜? 그러면 웃기니까.

이것은 상징이다. 이마에 이름이 새겨 있다는 것은 그 존재에게 ‘속했다’는 뜻이다. 속한다는 것은 보호를 받는다는 뜻이다. 어떤 가문에 속해 있다. 그 가문의 보호를 받는다. 어느 국가에 속해 있다. 그 나라의 보호를 받는다. 아버지(하나님)와 아들(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 아버지와 아들,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보호를 받는다는 뜻이다.

14,400은 666과 더불어 문제적 숫자이다. 크게 잘못 유통되어 사람들을 교묘히 속이는 숫자이다. 14,400이라는 숫자는 12 곱하기 12 곱하기 1,000이다. 12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고, 1,000은 많은 수를 상징한다. 여기에서 표현된 ’14,400명’은 짐승의 숭배자들이 오른손이나 이마에 받은 짐승의 표와는 달리, 즉 짐승(폭력을 저지르는 황제, 그래서 황제/체제의 폭력에 가담하는 짐승 같은 인간들)과는 달리 하나님께 속해 있는, 세례를 받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성경과 기독교 신앙을 가장 우습게 만들고 왜곡하는 자들은 이러한 상징을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자들이다. 14,400명만 구원 받는다고 말하는 것, 그 숫자에 포함되어야 구원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 그 숫자에 포함되기 위하여 열심을 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이렇게 말하며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채근하고, 착취하는 인간들은 짐승 중의 짐승이다. 그러한 자들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다고 깝치고, 그러한 저질 인간들, 짐승 같은 인간들에게 현혹되어 삶을 빼앗긴 자들은 참으로 불쌍한 인생을 사는 자들이다. 제발, 현혹되지 말고, 혹시 그러한 짐승들에게 인생을 빼앗긴 자들이 있다면, 어서 빨리 탈출하라. 시온산에 어린 양과 함께 서 있는 14,400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그런 짐승들에게 저항하며, 자유와 사랑을 지킨다. 

3. 하늘 예배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
14장 2절은 하늘 예배의 장면을 묘사한다. 많은 물소리, 큰 우렛 소리 같은 것, 거문고 타는 자들이 연주가 등장한다. (거문고는 한국 정서에 맞게 번역한 것) 하늘 예배의 풍경이다. 이러한 풍경은 기독교에서 음악이 발전하고, 교회에서 음악이 중요하게 쓰일 수밖에 없는 배경들을 보여준다.

4. 새노래
14장 3절은 ‘음악’의 중요성을 더 부각시킨다. 하늘 예배의 예배자들은 보좌 앞과 네 생물, 그리고 이십사 장로들 앞에서 ‘새노래’를 부른다. 어린 양과 함께 서 있는 ‘십사만사천명’(그리스도인 공동체)은 이 새노래를 배워야 한다. 이 새노래는 이미 요한계시록 5장 9-10절에 나와 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우리가 이 가삿말로 노래를 지어 예배 시간에 부르고 있지만, 여기서 ‘새노래’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 가삿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새노래는 옛노래가 있었다는 뜻이다. 옛노래는 무엇일까? 로마 제국(황제)의 권력과 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다. 로마 제국(황제)의 권력과 힘에 무릎 꿇고, 그들이 만들어 낸 가짜 평화에 순응하며, 그 세상을 노래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세계를 전복시키셨다. 힘과 폭력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자유와 사랑의 나라를 세우셨다. 

세속 권력은 힘과 폭력으로 사람들을 다스리지만, 하나님은 자유와 사랑을 사람들에게 주신다. 새노래는 하나님의 이러한 통치를 찬양하는 것이다. 새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폭력과 전쟁과 배제와 차별과 억압을 반대하고 거기에 저항하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와 사랑으로 평화와 정의와 형제 사랑을 실천한다. 이것이 새노래이다. 새로 작곡해서 부르는 노래가 새노래가 아니다. 폭력과 전쟁과 배제와 차별과 억압을 반대하고 거기에 저항하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자유와 사랑에 힘입어, 생명과 평화와 정의와 형제 사랑이 넘치는 삶,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새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5. 조심해야 할 해석
14장 4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사람들’은 십사만사천명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두 가지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1) 십사만사천명은 남자들만을 가리킨다. 2) 여자와 성행위를 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명백히 공부 안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질 안 좋은 사람이다. 이러한 구절은 나쁜 사람들의 해석에 의해, 여성에 대한 혐오를 조장한다. 그리고 남녀간의 성관계를 저급한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자’는 생물학적 여자(여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로마의 여신, 또는 로마를 상징하는 “땅의 음녀들의 가증한 것들의 어미’(계 17:5-6)을 가리킨다. 여자와 더불어 더럽혀졌다는 뜻은 로마 제국의 우상 숭배적 체계, 즉 폭력과 혐오와 배제, 차별과 전쟁과 억압의 체제에 순응한 자들, 그러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은 문학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순결한 자’는 그러한 체제에 물들지 않고 저항하면서 사는 자들을 가리킨다. 십사만사천명, 즉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러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6. 거대한 교회론
14장 4절 후반부와 5절은 이렇게 말한다.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이것은 거대한 교회론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로 모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어떠한 세상을 꿈꾸는가 등을 말해주는 거대한 교회론이다. 여기서 거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교회의 지향점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 보면,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어둠을 비추는 빛을 마음에 품은 자들이 모인 곳이고, 짠 맛을 내는 소금을 마음을 품은 자들이 모인 곳이다.  우리 안에 빛이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어둠을 비추고 있는가. 그 빛이 얼마나 밝은 빛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은 빛은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기에 충분하다. 우리 안에 소금이 있는가. 소금은 맛을 낸다. 지치고 힘들 때 소금 한 알을 입에 넣어보라. 입 안에서 맛이 돌고 생기가 돈다. 이러한 사람을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라고 요한계시록은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에게 속한 자들, 그래서 새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이렇게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 세상이 어둡고, 세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에게 속해 있고, 새노래를 부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 안에 빛과 소금이 화수분처럼 솟아날 것이고, 그것을 삶에 지친 자들과 나누면서 좀 더 밝은 세상, 좀 더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이러한 삶을 함께 살아가는 길벗이 된 여러분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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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