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네스 팰트로(Gwyneth Paltrow)의 소신발언과 교회]

 

기네스 팰트로가 마블 히어로물에서 떠난 뒤, 미국의 토크쇼에 나와서 다음과 같이 소신 발언을 했다.

 

"요즘 영화계는 질보다는 양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독창적으로 느껴지는 좋은 영화들도 많다. 슈퍼히어로 영화 전반적으로 본다면 큰 압박이 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다 보니 때때로 영화의 작품성이나 독창성 등 진짜 관점이 방해를 받는 경우가 있다. 독립영화가 블록버스터 대작에 비해 예술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이해관계가 적을 때 예술의 다양성이 더 커진다.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를 표현하고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영화들이 더 큰 울림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것을 '상품'을 만들어 팔아 매출을 올려야 살 수 있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모든 생태계가 망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인식을 잘 하지 못해서 그렇지, 교회도 복음도 '상품'이 된 지 오래됐다. 교회도 복음도 하나의 '상품'으로 사람들에게 어필하지 않으면 '구매'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돌아보면, 기네스 팰트로가 영화계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교회도 질보다 양에 더 중점을 둔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더 좋은 교회이고 더 부흥한 것이라고 말한다.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다가서려 하다보니 교회는 '작품성이나 독창성'을 잃어버린다. 일부러 작품성과 독창성을 포기한다.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을 받고 '부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복음의 진짜 관점이 방해를 받는다.

 

기네스 팰트로의 다음 발언은 이 시대에 교회가 사는 길에 대한 제언과 일치한다. "독립영화가 블록버스터 대작에 비해 예술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이해관계가 적을 때 예술의 다양성이 더 커진다."

 

블록버스터 대작은 요즘 우리가 '대형교회'라 부르는 것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우리는 아주 큰 실수를 범하고 있는데, 대형교회를 기준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구분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형교회를 기준으로, 사이즈가 작으면, '작은 교회'라고 부른다. 어떤 교회는 자신들은 형편없는 대형교회와 같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건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건강한 작은 교회'.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작은 교회라니. 작다는 것은 '크다'라는 다른 기준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인데, 교회의 기준이 '대형교회'이다보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작은 교회'라는 용어가 남발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생긴 것이다. '교회는 두 종류의 교회만 존재한다. 대형교회와 대형교회가 되고 싶은 교회. 목사는 두 종류의 목사만 존재한다. 대형교회 목사와 대형교회 목사가 되고 싶은 목사.' 이 모두, 교회가 자본주의에 포획되었다는 뜻이다. 

 

독립영화가 예술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고, 이해관계가 적을 때 예술의 다양성이 커진다는 기네스 팰트로의 말은 영화계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교회의 현실에도 절실하게 필요한 말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다양성을 말살시킨다는 것이다. 일례로 유행은 개성의 표현인 것 같지만 결국 같은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여 매출을 극대화시키는 상술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콜린 건턴은 자신의 삼위일체론인 <하나 셋 여럿>에서 밝힌 바 있다.

 

교회가 위기를 맞이한 이유는 다양성이 형편없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모두 자본주의의 기획에 당한 것이다. 모든 교회가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어처구니없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보니, 복음은 대중들의 구미에 맞는 것으로 양념이 버무려지고 팔린다. 그래야 상품화된 교회와 복음이 일반 대중들의 구매력을 자극하여 선택 받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교회가 위기에서 탈출하여 교회도 살리고 세상도 살리는 방법은 자본주의의 기획에 저항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기획은 다양성의 말살이다. 교회가 블록버스터 대작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작품성과 독창성이 살아있는 독립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생태계에 다양성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해관계를 최소화하여 다양성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나는 교회에서 '작은 교회'라는 용어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그 앞에 자신들의 고유한 성격/성품을 드러내는 이름만 있으면 된다. 교회 앞에 '작은'이라는 것이 붙는다는 것은 결국 교회의 기준이 '대형교회'라는 뜻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 사이즈가 어떻게 교회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너무 천박한 생각이다.

 

작고 건강한 교회를 세우지 말라. 건강으로 따지면 대형교회를 따라갈 수 있나? 가난한 자가 부자들의 건강을 따라갈 수 있나? 작품성과 독창성이 있는 교회를 세우라. 이해관계가 적은 교회를 세우라. 그래야 복음이 '상품'으로 팔리지 않고, 이 시대를 향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스데반 사건이 말해주는 복음의 핵심

 

스데반 사건의 보편성

스데반 사건은 스데반의 순교에만 너무 집중되어 그 사건이 말해주고 있는 의미를 놓치기 쉽습니다. 일곱 집사의 선출을 마친 뒤, 스데반 순교 이야기가 곧바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스데반의 특별한 사역을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다른 여섯 집사 모두 스데반처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고, 스데반 이야기가 대표격으로 소개되는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극적이면서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스데반처럼 복음을 전하다 고난 당하는 일이 매우 보편적인 일이었습니다. 스데반만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모든 ‘보편’ 그리스도인들이 스데반처럼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 현상을 계속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스데반과 헬라파 유대인의 갈등

스데반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스데반이 전한 복음이 왜 헬라파 유대인 공동체와 충돌을 일으켰는가 입니다. 우리는 ‘왜’를 물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은 그 정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자,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논쟁을 합니다. 이 논쟁은 점점 과격해집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지만 스데반의 기세를 꺾지 못하자 불법과 폭력을 통해 스데반을 죽음으로 몰아세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왜, 무엇이 헬라파 유대인들을 그토록 분노하게 만들었을까요? 이것에 대한 답을 찾아가다 보면 복음의 핵심을 만나게 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고소 이유

스데반이 야비하게 헬라파 유대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막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은 말 그대로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헬라파 유대인들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유대당국에 고소를 하는데, 스데반이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했다고 하면서 고소합니다. 스데반은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한 적이 없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욕을 한 적도 없고 성전을 향하여 침을 뱉은 적도 없습니다. 스데반은 그냥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이 말은 복음이 유대인들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하고 있다고, 헬라파 유대인들이 느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복음이 무엇이길래 헬라파 유대인들이 그렇게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요?

 

복음이 뭐길래

헬라파 유대인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가진 특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복음이 유대인들의 특권을 빼앗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과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속에 있고, 자신들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인들과는 다른 처지의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선민의식’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과 성전을 통해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전한 복음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정체성과 세계관을 무참히 깨뜨리고 있는 듯했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통해 은혜의 보편성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한 마디로 은혜의 보편화입니다.

 

스데반이 죽은 이유

복음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말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과 온 우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이 말을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은혜의 보편성이 불편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가진 특권이 무너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은 특권의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게 되자 폭발합니다. 복음을 통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에 대하여 시기(jealousy)가 발생된 것입니다. 시기는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갑니다. 시기는 반드시 폭력을 불러옵니다. 스데반이 죽게 된 이유는 복음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희생자가 된 것이죠.

 

복음과 죄악의 보편성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죄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저 사람과 내가 같다는 평등성을 참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차별을 두어야 속시원합니다. 인간은 저 사람이 나랑 같아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내가 저사람보다 못하게 되는 것도 참지 못합니다. 관계가 평등하면 불편해합니다. 오히려 차별이 발생해야 속시원해합니다. 복음은 이러한 인간의 교만, 즉 죄악에 대한 치유입니다. 복음을 삶에 받아들인 스데반은 자신의 죽음이 어떠한 특권을 불러오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죽을 때 자신에게 저질러진 폭력의 책임을 그 폭력의 가해자들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죽음은 의로운 죽음이고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가해자들은 불의한 자가 되어,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사이에 차별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데반이 죽으면서까지 전하고 싶었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인과 죄인에게 동일하게 내린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편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데반처럼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복음은 특별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도 평화롭게 지내는 것입니다.

 

기이한 현상

요즘 (기독교) 교회를 보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헬라파 유대인’이 된 것 같습니다. 마치 복음이 누군가를 차별하는 도구인 양, 그리고 교회만이 하나님을 독점하고 있는 양, 복음의 이름으로 다른 존재를 차별하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복음의 왜곡입니다. 성경을 신실하게 읽지 않고 자의적으로 읽고 해석하여 자기의 의(righteousness)와 기득권을 보호하고 자랑하는데 사용하는 범죄입니다. 복음은 은혜의 보편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동일하게 내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인들과 죄인들에게 동일하게 내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남녀노소, 자유인이나 종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인데, 교회가 무슨 권리로 하나님의 은혜를 차등 적용하여 사람들을 차별하고 정죄합니까. 우리 모두 복음 앞에서 겸손해지고, 감사하며, 힘껏 서로 축복해주고 사랑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러시아의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 P. Mussorgsky, 1839-81).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강력한 음악을 남긴,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19세기는 ‘낭만주의’ 사조가 예술계를 휩쓸던 시기입니다. 이성에 경도되어 모든 것을 ‘과학적 사실’로 증명하려고 했던 시대에 사실, 또는 현실을 초월한 공간을 창조함으로 사람의 마음과 삶에 숨쉴 공간을 제공했던 것이 낭만주의입니다. 그런 낭만주의에 가장 가까웠던 예술은 음악이었습니다. 반대로 사실주의에서 가장 먼 것도 음악이었습니다. 음표로 세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림과 비교해 보면 이게 무슨 뜻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좋은 도구입니다. (물론 그림도 사진이나 동영상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긴 했지만요.) 그러나 음악의 음표를 통해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있죠.

 

무소르그스키는 그림(회화)에 비해 음악의 표현력은 제한된다는 생각에 도전장을 내밉니다. 음악을 그림처럼 눈에 보이듯이 표현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낭만주의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낭만주의 음악가들 사이에서 무소르크스키의 지위는 독특합니다. 남들이 하지 않던 것, 시도해 보지 않았던 것, 시도해 볼 생각조차 못하던 것을 통해서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무소르그스키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전람회의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그의 절친 빅토르 하르트만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작품입니다.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빅토르 하르트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무소르크스키는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죽은 친구의 유작을 모아 전시회를 엽니다. 전시회의 작품 중 깊은 인상을 받은 10개의 작품을 골라, 무소르그스키는 친구의 작품을 음악으로 표현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전람회의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전람회의 그림>에는 죽은 친구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담겨 있는 동시에 음악적 제약을 뛰어넘은 혁신-창조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후 수많은 음악가들이 원래 피아노 독주곡으로 작곡된 <전람회의 그림>을 여러 버전으로 편곡하여 연주합니다. <전람회의 그림>은 음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것이죠. 그 중에서 모리스 라벨(J. M. Ravel)의 관현악 편곡 연주가 가장 유명합니다.

 

<전람회의 그림> 열 개의 작품 중 여덟 번째 작품의 표제가 ‘카타콤’(Catacombae)입니다. 이 곡은 하르트만이 랜턴을 들고 파리의 카타콤을 조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카타콤(지하 공동묘지)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곳은 로마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곳이라 그리스도교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카타콤에서 예배드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우리는 카타콤교회라 부릅니다. 카타콤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산 자와 죽은 자를 포용하는 공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하 공동묘지에서 예배드리며 삶과 죽음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주 현실적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런 깨달음은 그들의 신앙을 더 깊고 단단하고 여유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더 이상 신앙의 핍박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삶과 죽음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죽은 자들과 교통하고, 마치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과 교통하면서 그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눌 줄 알았던 카타콤교회의 교인들의 신앙에 비추어 볼 때, 우리들의 신앙은 얼마나 보잘것없고 세속적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100세 시대를 살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영원히 살 것처럼 삶에만 집착하는 우리들의 욕망, 그리고 죽은 자들과 교통하는 영성을 잃은 시대에 살다 보니, 마치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약자들을 향한 우리들의 무관심 등이 우리의 신앙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런 우리의 자화상을 반성하며, 오늘은,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한 번 감상해 보면 어떨까요.

Posted by 장준식

교회에 있으면 안 되는 것

 

신약성경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제자들이 많아지면서 발생한 문제와 그 해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제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스도교의 제자는 헬라어의 ‘마세테스’를 번역한 말입니다. 영어로는 ‘disciple’이라고 합니다. 보통 우리는 ‘제자’를 ‘배우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당시 소피스트들이 철학교사로서 대중적인 활동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종속적인 관계’로 만들어 스승으로서 자신들이 행한 가르침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금전적인 요구를 했기 때문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이러한 종속적인 관계가 마음에 안 들었던 소크라테스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민주적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하여 ‘제자’를’ 함께 알아가는 동료(companion)’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그는 ‘마세테스’와는 다른 용어, 즉 ‘헤타이로스’라는 용어를 통해 제자를 표현합니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의 관계 재정립을 통해 소피스트들을 비판하며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대가를 제자들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의 제자 개념은 이보다 더 깊어집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한창 가르침을 주실 때 예수님의 가족이 방문합니다. 그때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께 가족들이 찾아온 것을 알립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그런 후,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위의 소피스트들이나 소크라테스의 제자 개념과는 확연히 다른 ‘제자’의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에게 제자란 ‘가족’입니다. 가족처럼 친밀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제자의 의미입니다.

 

사도행전 6장은 이런 가족과 같은 제자들 사이에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하여 보도합니다. “그들 가운데 헬라파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파 유대 사람들에 대해 불평이 생겼습니다. 매일 음식을 분배 받는 일에서 헬라파 유대 사람 과부들이 빠졌기 때문입니다.”(1절b) 한 마디로, 제자 공동체에 ‘차별’(discrimination)이 발생한 것입니다. 일반 사회 안에서 차별이 발생해도 기쁨이 없어지고 삶이 힘들어지는데, 가족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차별이 발생했으니 차별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 지, 그리스도교의 제자 개념에 비추어 보면, 정말 큰 일이 교회 내에 발생한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도들이 지혜를 냅니다.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집중하고, 구제(봉사/디아코노스)하는 일을 전담할 사람들을 선발하는데,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제자들로 칭찬 받는 사람들 중에서 일곱 명을 선출합니다. 여기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기도와 말씀 사역이 희미해지면 ‘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충만하지 못한 이들이 봉사의 자리에 있으면 ‘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리더십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집중하고, 성령과 믿음과 지혜가 늘 충만하도록 날마다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교회(제자 공동체)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은 차별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제자’는 단순히 ‘배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제자는 ‘가족’입니다. 친밀한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제자를 생각하고, 교회를 떠올릴 때 ‘가족 메타포’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는 가족 메타포를 통해 표현됩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서 가족만큼 친밀한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메타포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가족이 지닌 친밀한 사랑의 메타포를 떠올린다면, 교회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은 차별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현저히 부족한 요즘, 사회 곳곳에서 차별만 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선취(미리 맛보기)이므로, 교회는 차별이 늘어가는 세상에서 피난처가 되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별을 물리치고 우리가 서로 더 사랑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더 많아지고, 세상은 더 따스해질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3. 5. 13:38

리추얼을 간구하는 기도

(여호수아 5:9-15)

 

리추얼을 통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주님,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서 행한 리추얼을 통해

그들이 주님께 받았던 은총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에 있는 리추얼들을 통하여

주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겸비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가져다주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수 있도록 이끄시는

주님의 은총을 사모합니다.

우리를 멈춰 세우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일들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습니다.

리추얼을 통해 주님을 만나게 하시고

주님의 새롭게 하시는 구원의 은총을 입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예배의 목적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4. 3. 5. 13:36

길갈에서의 리추얼

(여호수아 5:9-15)

 

1. 리추얼

리추얼(Ritual)은 한국 말로 의식(儀式) 또는 의례(儀禮)를 뜻한다. 리추얼은 두 가지 큰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기억(remember)의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작(New Start)의 기능이다. 리추얼은 우리의 삶에 마디를 제공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게 도와준다. 그리스도교인에게 예배는 대표적인 리추얼이다. 충분한 리추얼이 없으면 새로운 시작은 불가능하다. 리추얼을 잘 하는 사람은 인생을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예를 들어, 김현관/이영주 집사님네 개 해리가 2년 전에 죽었을 때 내가 집전한 리추얼을 통해 두 분이 많은 위로를 받았고 해리를 잘 떠나 보낼 수 있었다는 간증을 들었다. 그래서 집사님네는 리추얼을 통해 형성된 정서적 안정감을 바탕으로 새로운 반려견 아리를 데려와 잘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신태숙 권사님 댁 자녀분들도 동일한 고백을 한다. 리추얼(장례예배)을 통해서 엄마를 떠나 보내고 자녀들끼리 한동안 본인들만의 리추얼을 통해서 어머니를 추억하며 잘 떠나 보낼 수 있어 이제 어머니 없는 삶을 잘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2. 여호수아서의 대표적인 리추얼: 길갈 리추얼

성경책 민수기 하면 떠올라야 하는 것이 가데스 바네아인 것처럼, 성경책 여호수아 하면 떠올라야 하는 것은 길갈이다. 길갈의 뜻는 “굴러갔다”, 또는 “떠나갔다”이다. 여호수아서의 대표적인 리추얼은 길갈의 리추얼이다. 길갈의 리추얼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전과 같은 삶을 살지 않고, 아주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다. 길갈의 리추얼은 지난 애굽에서의 종살이와 광야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이제 시작된 가나안 땅에서의 삶으로 새롭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 길갈의 리추얼이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보자.

 

3. 요단강 도하 후 이스라엘이 행한 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 안으로 들어가자 요단강물이 흐르는 것을 멈추고 바닥을 드러낸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순조롭게 건널 수 있었다. 이것은 약속의 성취다. 출애굽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이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순간이다. 약속이 성취되는 순간은 성스럽고 순조로웠다. 이들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서서 행한 일은 두 가지이다. 첫째, 이스라엘은 요단강 바닥에서 열 두 개의 돌을 가져다가 강변 서쪽에 기념물로 쌓아 놓는다. 이것은 징표의 역할을 한다. 후일에 자손들이 이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요단강을 건널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말해주고 기억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둘째, 이스라엘은 할례를 시행한다. 출애굽한 백성 중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았지만,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태어난 백성 중 남자들은 할례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요단강을 건넌 후 이들은 할례를 시행한다.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할례를 시행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수없이 많은 적들과 전쟁을 벌여야 하는 일촉즉발 상황에서 전투에 임해야 할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 것은 굉장히 위험부담이 있는 일이었다. 할례를 받아 회복하는 동안 적군이 쳐들어 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 창세기 34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고향으로 돌아온 야곱과 그의 가족은 세겜 땅에 정착하는데, 그곳에서 나쁜 일이 발생한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의 히위 족속의 족장 하몰의 아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디나와 같은 어머니(레아) 밑에서 태어났기에 분노를 참지 못한 시므온과 레위는 복수의 계획을 세운다. 디나를 아내로 달라는 하몰의 요청에 응하는 척하면서, 그러면, 히위 족속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 요청에 응하겠다고 꾀를 낸다. 그 딜은 받아들여졌고, 히위 족속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다. 바로 그때, 할례를 받고 회복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시므온과 레위는 히위 족속의 성읍에 기습하여 들어가 모든 남자를 죽인다. 이만큼, 할례 받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요단강 도하 후, 전열을 가다듬은 것이 아니라, 할례를 시행했다. 이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가나안 땅에서 시작될 전쟁을 맡긴다는 뜻이고,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신앙의 고백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신앙이다. 우리가 주일에 나와서 예배 드리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삶을 주님께 맡기겠다는 결단 아닌가? 삶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일들 앞에서 주눅들거나 낙심하거나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겠다는 신앙의 고백이 우리의 예배 가운데 담겨야 한다.

 

4. 길갈의 리추얼을 통해 발생한 첫 번째 역사

길갈에서의 리추얼이 이스라엘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다. 이스라엘이 할례를 통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을 때, 하나님은 그 할례를 통해 애굽의 수치를 그들에게서 떠나게 하셨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이 길갈이다. ‘수치를 굴러가게 하셨다.’ ‘수치를 떠나가게 하셨다.’는 뜻이다. 얼마나 위대하고 은혜로운 이름인가! 길갈! 꼭 기억하라.

 

대한민국의 가장 큰 어려움은 일제시대의 수치가 아직까지 한국인들의 삶에서 굴러가지 못하고 떠나가지 못한 것에 있다. 아직까지도 친일논쟁을 벌이는 것은 국력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수치다. 만약, 해방 후에, 적절한 리추얼을 통해 국가의 수치를 온전히 굴려보내고 떠나보냈다면 한국이 아직까지 친일문제로 시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이 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나라가 애굽의 수치 때문에 국론이 분열되고 싸우는 일이 없다. 이스라엘 역사에 여러 다툼이 있었지만, 적어도 애굽의 수치 때문에 싸우는 일은 없었다. 왜 그랬는가? 바로 길갈에서 할례의 리추얼을 통해 애굽의 수치를 굴려보내고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5. 길갈의 리추얼을 통해서 발생한 두 번째 역사

길갈에 진을 치고 여리고 평지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선 이래 처음으로 유월절을 지켰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의 소산물을 통해 유월절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부터 만나가 그쳤다. 광야에서는 긴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나라는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자기의 힘으로 먹거리를 구해야 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 일어서도록 도우신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신앙은 어린 아이의 신앙이었지만, 이제 가나안 땅에서의 신앙은 어른의 신앙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개입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삶을 이끌어 나갈 줄 알아야 한다.

 

6. 길갈의 리추얼을 통해서 발생한 세 번째 역사

애굽의 수치를 굴려보내주시고(떠나보내 주시고), 만나를 그쳐 이제 자립하게 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의 정복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여호수아 5장 13절 이하의 짧은 에피소드는 강력한 인상을 준다.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칼을 손에 쥔 한 사람이 여호수아의 눈에 들어왔다. 여호수아는 그 사람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그 사람은 대답한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라고 보내신 천사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명백한 징표였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 앞에서 신발을 벗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그곳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리고 전쟁을 시작으로 이제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하는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 장관을 만나고 얼마나 든든했겠나. 두려움이 눈 녹듯 물러가고 그의 마음에는 용기가 솟아올랐을 것이다.

 

7. 리추얼의 중요성

여리고성 전투를 앞두고, 길갈에서 발생한 이 모든 감격스러운 일들은 리추얼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리추얼은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우리가 ‘예배’라는 형태로 드리는 리추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우리가 정기적으로 행하는 리추얼에 삶의 무게를 실으라. 이스라엘이 길갈에서 리추얼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간 것처럼, 새롭게 시작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리추얼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 한다. 삶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속상한 일들, 삶을 가로막고 있는 일들,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리추얼을 통해서 모두 굴려보내고 떠나보내라. 그래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공적인 리추얼도 있지만, 각자 삶 속에서 나만 아는 소소한 리추얼이 필요할 때도 있다. 답답하고 어렵고 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거든 삶 속에서 자신만의 리추얼을 만들어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해 보라. 리추얼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통로이다. 리추얼을 통해서 새롭게 시작하고, 새로운 삶을 열어가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멋지고 활기찬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  (0) 2024.03.05
강하고 담대하라  (0) 2024.03.05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  (0) 2023.10.24
그리고 그분이 부르셨다  (0) 2023.09.19
브살렐과 오홀리압  (0) 2023.09.05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3. 5. 13:34

연약궤를 멘 제사장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여호수아 3:7-17)

 

주님,

여호수아서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밝히 보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이 먼저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갔을 때

요단강이 마르고 그 마른 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서

가나안 땅에 입성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제사장 나라로 부르시고

언약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메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주님의 백성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아

제사장으로 세움 받았으니,

주여,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그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우리의 봉사와 섬김을 통하여

주님 나라가 드러나게 하소서.

교회 공동체로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제사장의 역할 잘 감당하게 하시고,

교회 내에서도 솔선수범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 나가는

주의 신실한 제사장이 되게 하시고,

가정에서도 주의 사랑으로 모범이 되는

제사장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소서. 우리가 따르겠나이다.

언약궤를 메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들에게

하늘의 복을 내려 주소서.

언약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4. 3. 5. 13:32

연약궤를 멘 제사장들

(여호수아 3:7-17)

 

1.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는 이스라엘

민수기(광야에서)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가데스 바네아 사건이다. 출애굽하여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견한다. 야곱 가족들의 애굽 이주 이후 430년 동안 가나안 땅에 가보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그 땅이 어떠한 땅인지 알지 못했다. 가데스 바네아 사건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등장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성경은 신명기를 지나, 여호수아서에 이르러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정탐꾼을 파견하는 이야기를 또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데스 바네아 사건 때와는 달리 두 명만 파견한다. 이것은 명백히 여호수아와 갈렙 연상시키는 정탐꾼 파견 사건이다. 여러고 성에 정탐 다녀온 두 정탐꾼의 보고는 그것을 확증해 준다. 왜냐하면 여리고 성에 파견되었던 정탐꾼 두명의 보고는 가데스 바네아 사건의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수 2:24)

 

여리고 성에 파견되었던 정탐꾼의 이야기는 광야를 지나면서 믿음이 성장한 이스라엘을 보여준다. 이제 이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단강 앞에서 섰다. 감격의 순간이다.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가 생각난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요단강 도하를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 속에서는 지난 40년간의 광야생활이 주마등처럼 흘러갔을 것이다.

 

2. 요단강을 건너는 역사적 순간

요단강 도하를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을 행하시리라”(수 3:5). 그리고 여호수아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제사장들에게 명령한다.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가라”(수 3:6). 제사장들이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언약궤를 메고 앞서 간다. 그리고 요단 물 가에 이르러서 거기에 멈춰 서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간다.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갈 때에, 여호수아는 다시 한 번 말씀을 선포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족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수 3:10)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가나안 땅에서의 삶의 여정을 앞두고, 그리고 정복전쟁을 앞두고 이스라엘이 얼마나 두려웠겠나. 그들의 마음에 용기를 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반드시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정복전쟁이라는 용어가 많이 폭력적으로 들린다. 그래서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을 정당화시켜 주는 용어가 절대 아니다. 의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의롭지 못한 세상 질서를 몰아내는, 구원행위에 대한 강력한 비유적 용어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라합의 해방일지’를 통해서 보았다.

 

3.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간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이 온전히 끊어졌다. 그래서 요단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기 좋게 바닥이 드러났다. 물이 끊겨 마른 땅이 된 요단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갔다. 여기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역할을 주목해 보자.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 부름 받았다.[1] 이 개념은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적용이 된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리스도인은 연약궤를 멘 제사장이다.

 

4. 그리스도인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의 성취이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메고 있는 것은 언약궤,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의 은혜와 복을 받고 누리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제사장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제사장 나라/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은혜와 복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 언약궤를 메고 제일 먼저 요단강에 들어가는 마인트셋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신명기에서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강 동편에서 먼저 땅을 분배 받지만, 그들이 가나안 땅에 함께 들어가 정복전쟁을 할 때 선봉에 서서 모든 이스라엘이 약속의 성취를 이룰 때까지 노력하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5.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으로 산다는 뜻이다. 교회 공동체로서 인류를 위한 봉사와 섬김에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내에서는 솔선수범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가정에서는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부담을 주려는 게 아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입으면 저절로 되는 일이다. 히브리서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 자신을 봉사와 섬김, 즉 구원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이다. 이 험한 세상에 이러한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세상의 희망이다.

 

6. 마이드셋의 변화

요단강 도하 사건은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그리고 입성하면서 이스라엘의 마인드셋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의 마인드와 광야에서 40년 유리할 때의 마인드가 같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제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이스라엘의 마인드는 애굽에서 살 때와 광야에서 살 때의 마인드와 같을 수 없다. 우리도 그렇다. 팬데믹 이전의 마인드와 팬데믹 동안의 마인드는 같지 않다. 이제 우리는 팬데믹 이후를 살면서 팬데믹 동안의 마인드로 살 수 없다. 무엇보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여호수아의 말씀처럼, 언약궤를 멘 제사장의 마인드로 우리는 전진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처럼 섬길 때, 우리에게 내리실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처럼 섬길 때,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우리 지역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 함께,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요단강을 건너가자!



[1] 성경의 이스라엘과 지금 역사의 이스라엘을 혼동하면 안 된다. 성경의 이스라엘은 신앙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이스라엘이지만, 지금 역사의 이스라엘은 성경에서 보여주는 신앙의 보편성을 성취해야 할 개별적인 나라에 불과하다. 보편성의 개념과 개별성의 개념을 혼동하면 안된다. 더불어 성경의 이스라엘과 지금 역사의 이스라엘 둘 사이에 있는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잘 가려서 성경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갈에서의 리추얼  (0) 2024.03.05
강하고 담대하라  (0) 2024.03.05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  (0) 2023.10.24
그리고 그분이 부르셨다  (0) 2023.09.19
브살렐과 오홀리압  (0) 2023.09.05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3. 5. 13:29

라합처럼 해방일지 쓰기를 간구하는 기도

(수 2:1-14)

 

주님,

라합의 놀라운 해방일지를 보았습니다.

여리고 성에서 비천한 자로 살아가던 그가

신앙을 가진 뒤 질서가 역전된 하나님 나라에서

존귀한 자로 거듭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괴로운 삶을 살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주님,

낙심치 말게 하시고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라합처럼 우리도 놀라운 해방일지를 써 나가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라합의 삶 속에서 이루신

아름다운 역설과 역전의 해방일지를

우리의 삶에도 써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주 안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그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3. 5. 13:28

라합의 해방일지

(여호수아 2:1-14)

 

라합의 해방일지를 참고 삼아 우리 자신의 해방일지를 써 나가자.

 

1. 라합을 소개하는 신약 성경

라합은 성경에서 중요한 인물로 소개된다. 라합을 소개하는 신약성경도 세 군데나 된다. 라합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신약성경은 마태복음의 족보에서이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마 1:5). 다른 한 곳은 믿음을 강조하는 성경 히브리서이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11:31). 마지막 한 곳은 행함을 강조하는 성경 야고보서이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4). 신약성경 두 군데서 소개되고 있을 만큼 라합은 중요하다.

 

2. 믿음이냐 행함이냐의 논쟁은 이제 그만

위에서 보듯이 라합은 믿음을 강조하는 성경 히브리서와 행함을 강조하는 성경 야고보서에서 동시에 등장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질병 중 하나는 믿음과 행함을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을 때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지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팽배하다. 이것은 명백히 구원과 믿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믿음이 자꾸 사변화되는 것(어떤 교리에 동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쓰여진 성경이 야고보서이다. 믿음은 어떤 교리에 대한 동의가 아니다. 믿음은 한 인격(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이다. 믿음은 사랑의 깊이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래서 믿음은 행함 그 자체이다. 교리는 필요하지만, 믿음을 교리와 결부시켜 교리와의 관계 안에서만 믿음을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오해하는 것이다.

 

3. 라합은 어떤 인물인가

한국어 성경에서 라합을 ‘기생’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그것은 히브리 원어에 표현된 라합을 순화시켜서 표현한 것이다. 히브리서나 영어 성경이나 세계 어느 나라 성경이든 라합을 ‘창녀’라고 소개한다. 우리는 라합의 직업(?)이 창녀(기생/prostitute)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창녀는 고대 사회에서 ‘빚진 자’의 대표 인물이었다. 창녀는 사회적 약자를 나타내는 명칭의 대표 중 하나였다. 성경이 라합을 소개하면서 구체적으로 그녀를 ‘창녀’라고 밝히는 것은 빚을 지게 만들고, 그 빚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드는 악한 구조에 대한 고발의 성격을 담고 있다.

 

4. 이스라엘과 라합의 상관관계

이스라엘과 라합은 매우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 당시 대표적인 노예 계급이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로 전락한 일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요셉이 총리로 있을 때와 애굽 사람들이 요셉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고 있었을 때만해도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 계급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요셉을 아는 애굽 사람이 사라지고 요셉을 전혀 모르는 새왕조가 애굽에 들어서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 계급으로 강등되었다. 이스라엘은 노예 계급으로서 약자의 대표였다. 애굽의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였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창녀로서 약자의 대표였고, 여리고 성의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였다.

 

5. 왜 라합은 이스라엘에게 관심과 소망을 두게 되었을까?

라합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라합은 자신과 같은 약자들이 결박을 풀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여리고 성의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였던 라합의 고민은 매우 분명했다. ‘어떻게 하면 이 지긋지긋한 삶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이스라엘의 행보는 라합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홍해를 가르고 탈출에 성공했고, 그 당시 이름을 날렸던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격파했다. 라합은 궁금했다.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길래 이렇게 힘없는 약자, 노예계급이 이토록큰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이끄는가? 라합은 정탐꾼에게 고백한다. “우리가 듣고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다”(수 2:11). 이 고백의 속뜻은 이런 것이다. ‘와 이런 분이 계시구나. 이런 분을 믿고 의지하고 모시면, 나의 삶에도 해가 비추겠구나! 내가 이 지긋지긋한 창녀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나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 받을 수 있겠구나!’

 

6. 라합의 신앙고백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도구원해 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합은 정탐꾼에게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다음처럼 고백한다. 매우 강력한 신앙고백이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수 2:11). 라합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한다. 그 믿음은 정탐꾼을 돕는 데서 드러난다. 라합의 행동에서 드러나듯이, 믿음은 행함 그 자체이다. 발각되면 여리고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하겠지만, 이렇게 사악한 여리고 성의 창녀로 사느니 자신의 인생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걸어보겠다는 라합의 결기가 보이는 장면이다.

 

7. 우리의 삶에 있는 우리를 괴롭히는 일들

무엇이 우리를 괴롭히는가? 나를 노예처럼 만드는 일이 무엇인가? 나를 힘들게 만들고,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나를 아무것도 아닌 자로 만드는 일이 무엇인가? 그러한 것이 있다면, 라합처럼 해방일지를 써보자. 현대인에게는 자유가 있는 것 같으나, 가만히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자유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현대성의 문제는 많은 현대 철학자/신학자들을 통해서 제기되어 왔다. 대표적인 예가 소비문화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로 소비생활을 하는 것 같으나, 소비사회를 들여다 보면 우리의 의식은 남들이 하는 대로 소비하도록 지배당하고 있다. 이러한 것만 아니다. 현대인은 자유로우나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신자유주의 소비문화 체제의 구조적 폭력에 교묘하게 희생당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우리를 구원할 자인지를 온전히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8. 믿음이란

믿음이란 행함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믿음이란 내가 지금 무엇을 갈망하고 무슨 일을 하고 있고 무엇에 마음을 주고 있는지를 보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는가를 진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고백은 이런 것이다. ‘다른 것들은 온전한 구원을 주지 못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정확한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 우리의 믿음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이 믿음이 우리를 해방으로 이끈다.

 

9. 라합의 해방

라합은 지긋지긋한 창녀의 삶에서 벗어난다. 여리고 성이 함락되어 더 이상 라합은 그 성이 정해 놓은 법에 따라 창녀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다. 라합은 여리고 성에서는 한낱 창녀/빚진 자/사회적 약자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난 뒤에(새로운 질서가 들어선 뒤에는) 라합의 인생은 역전된다. 라합은 정탐꾼 중 한 명(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는다. 보아스는 구약성경 룻기의 주인공이다.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여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는다. 여리고 성에서 라합은 그저 비천한 창녀에 불과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라합은 완전 역전된 삶을 산다. 그는 다윗의 조상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선조가 되었다.

 

10. 성경은 전복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호수아서에서 전개되는 정복 전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막 쳐들어가서 사람을 무차별하게 죽이는 무지막지한 정복이야기가 아니다. 정복 전쟁이라는 용어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용어를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정복 전쟁은 한 사회에서 비천했던 인생이 어떻게 역전을 이루어 하나님 나라에서 존귀해지는지를 보여주는 해방일지이다. 강한 자가 하나님을 등에 업고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는 이야기는 성경에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약자 편이시고, 약자의 눈물과 고통을 닦아주시고 위로해주시고 회복시키시고 역전시키시는 분이다. 라합의 해방일지는 바로 이것을 보여준다.

 

자신이 강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져야 한다. 주신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있는 곳을 섬겨야 한다. 자신이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소망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나라에서 역전될 인생을 생각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일 뿐이다.

 

라합의 해방일지는 아름답다. 이런 역설과 역전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라합의 이야기와 끈이 닿아 있는 룻기에서도 우리는 라합의 해방일지와 같은 역설과 역전의 드라마를 본다. 이 아름답고 놀라운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의 해방일지는 어떠한가를 생각해 본다. 현실이 힘들고 어렵지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라합의 해방일지를 참고삼아, 아름다운 역설과 역전이 있는 해방일지를 써 나가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