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을 이기는 신앙

버가모 교회는 두 얼굴을 가진 교회였다. 한쪽은 자랑스러웠다. 적대적 환경 속에서도 그들은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고, 순교자 안디바는 그들의 신앙의 본보기가 되었다. 반면, 부끄러운 얼굴도 있었다. 발람과 니골라 당의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어 우상 숭배와 음행에 빠진 이들도 있었다. 이 두 얼굴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 자신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현대인의 신앙은 버가모 교회의 현실처럼 양면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표면적 박해는 덜할지 모르지만, 거짓된 가르침과 세속적 유혹이 교묘히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있다. 세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괜찮아,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모두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러나 그 속삭임은 때로 신앙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하고, 부지불식간에 진리를 버리게 만든다.

우리는 오늘날 무수한 '발람의 가르침' 속에 살고 있다. 그 가르침은 편리함을 약속한다. 타협하면 더 쉽게,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에 주어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회개하고, 거짓된 가르침에서 떠나 바른 믿음 위에 서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생명의 초대이다. 이 초대는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배부르게 하는 '감춰진 만나'와, 하늘의 잔치에 들어갈 '흰 돌'을 약속한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삶의 피로와 분주함, 세속적 유혹, 그리고 교회에 대한 실망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감춰진 만나를 줄 것이다. 흰 돌을 줄 것이다." 이는 단순한 약속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소망이다. 우리가 흔들릴 때 붙잡을 수 있는 반석과도 같은 말씀이다.

버가모 교회의 순교자 안디바처럼, 우리의 믿음도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그 고난 속에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 거짓된 속삭임 속에서 진리를 붙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주님께서 준비하신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 우리 각자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이기는 자로 부름받았다. 이김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 던지는 거짓 속에서도,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오직 그리스도께 집중하자. 우리가 주님을 붙들 때, 주님은 우리를 승리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감춰진 만나와 흰 돌을 소망하며, 오늘도 믿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당신에게 주님의 평안과 은혜가 가득하기를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죽도록 충성하라: 신앙은 집중력의 문제이다

역사 속에서 서머나 교회는 고난의 상징이었다. 박해와 빈곤, 그리고 비방이라는 삼중고 속에서도 그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서머나 교회의 이야기는 단순한 고대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생생한 도전을 던지는 메시지이다.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실 때, 이는 단순한 신학적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서머나 교회 성도들의 삶을 가득 채운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건네진 위로의 속삭임이었다. 그분은 그들의 고난을 아셨다. 그들의 빈곤을, 그리고 그들을 죽음의 문턱으로 내몬 비방의 고통을 아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역설적이다. 세상은 충성의 한계를 요구한다. 이 정도면 됐다, 여기까지 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충성에는 한계가 없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신실하셨던 그분처럼, 우리 역시 끝까지 충성하라는 도전을 받는다. 이는 신앙이 단순히 머릿속에 머무는 사상이 아니라, 삶의 전부를 요구하는 헌신임을 깨닫게 한다.

서머나 교회가 그토록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부유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평가하는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들은 생명의 관을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영원한 가치를 발견했다. "네가 실상은 부유한 자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선언이다.

오늘날 우리는 서머나 교회처럼 극심한 박해를 경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의 박해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피로와 분주함, 세속적 유혹, 그리고 교회에 대한 실망이 우리의 신앙을 흔든다. 정신을 딴 데로 돌리게 만드는 이 시대의 스펙타클(화려한 이미지) 속에서,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도전이다.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신앙은 우리를 생명의 관으로 인도하며, 둘째 사망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끈다.

"죽도록 충성하라." 이 말은 단지 고난을 감내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신실함의 본질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 끝까지 집중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충성(집중)하셨듯, 우리도 끝까지 그분께 충성(집중)할 때, 생명의 관이라는 약속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집중하고 있는가? 우리의 충성은 어디까지인가? 이 질문에 답하며, 우리는 서머나 교회의 유산을 살아내야 한다. 죽도록 충성하는 믿음이야말로, 참된 부요함과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길이다.

Posted by 장준식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에 대한 한마디 논평]

1. 유승원 목사가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에 대하여 '유감'이라며 쓴 글이 이슈가 된 듯하다. 

2.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헤이스의 용어로는 '회개')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한 유승원 목사의 입장에 대하여 나는 도리어 '유감'을 표명하고 싶다. 

3. 보수적인 한인 장로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면서 '감'을 잃으셨나,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4. 리처드 헤이스가 성소수자들에게 사과한 이유는 리처드 헤이스의 성경 주석이 성소수자들을 공격하는데 근거로 쓰였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노벨이 '노벨상'을 만든 데에는 자신의 다이너마이트 발명이 선하게 쓰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는데 쓰이는 것에 대한 '회개'의 마음이 담겨 있다.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에 대한 유승원 목사의 '유감' 표명은 한국의 보수 교회에 그렇게 쓰일 것이다. 성소수자들을 공격하는데 근거로 쓰일 것이다. '거 봐라, E. P. 샌더스와 리처드 헤이스의 제자인 유승원 목사도 동성애를 반대한다!' 

5. 유승원 목사는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에 대한 근거로 감리교 신학(사변형)을 들고 있다. 유승원 목사 본인이 나사렛 교단 출신이고, 그곳의 교수를 지냈는데, 감리교 신학의 사변형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나사렛 교단도 웨슬리언이기 때문이다.

6. 성경, 전통, 이성, 경험, 이 네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이다. 어떤 것이 다른 것에 대하여 우위를 점하지 않는다. 

7. 보수 신학이 계속 난항을 겪는 이유는 성경의 절대적 우위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보수 기독교 신앙이 자꾸 세상과 충돌을 일으키고, 발목을 잡고, 뒤처지는 이유는 성경을 고착된 '이데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8. 그런데, 좀 솔직해지면 좋겠다. 성경은 하늘에 뚝 떨어진 하나님 말씀 자체가 아니지 않는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성의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과 성경을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을 말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비이성적 행위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컨텍스트 안에서 '해석'의 작업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9. 내 눈에는 동성애 문제를 성경에 근거하여 확정적으로 보는 것은 창세기에 근거해서 창조의 문제를 확정적으로 보면서 현대 과학의 발견을 배척하는 것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 

10. 성경에서 동성애에 대한 평가는 이방인, 노예, 여성의 문제처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없다는 진술은 매우 폭력적이다.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동성애는 '죄'라는 목소리를 내니까, 동성애는 죄가 맞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허용되지 않는다.'라는 말은 성경을 폭력의 도구로 사용하는 일이다.  게다가 미국은 한국의 상황과 달리 동성애를 법으로 보호하는 사회이다. 

11. 성경에서 몇 군데 언급되고 있는 동성애 관련 구절을 들어 현대 사회의 동성애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전형적인 침소봉대이다. 만약 성경 시대에 동성애 문제가 현대 사회처럼 주목 받는 문제였다면 성경은 다르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성경이 그 당시 사회적 약자들(이방인, 노예, 고아, 과부)을 따스하게 품었던 것처럼 그렇게 따스하게 품었을 것이다. 

12.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국가 폭력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국가 폭력은 인류에게 가장 큰 과제이다. 국가 폭력이 발생하는 것에 대해서는 광화문에 100만명 모아 놓고 한 마디도 성토하지 않으면서, 성경에서 거의 포착되지도 않는 동성애 문제를 가지고서는 광화문에 100만명 모아 놓고 성토하는 집단이 정말 성경을 공경하는 정상적인 집단인가. 

13. 리처드 헤이스의 '회개'를 배워 목회 현장에서 싸워볼 의지 없이 그냥 '유감'을 표명하는 일, 그것도 매우 수사적으로 유감을 표명하는 일이 좀 유감스럽다. 

14. 한국교회가 지금 싸워야 할 대상은 분명한데, 난데없이 동성애 이슈를 말하는 것도 불편하다. 약자는 좀 내버려두고, 국가와 헌법을 유린하는 사악하고 힘센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는 데 힘을 모으면 좋겠다.

 

(2025년 2월 21일에 쓴 글을 늦게 올림)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3. 13. 06:30

라오디게아 교회를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
(요한계시록 3:14-22)

주님,
라오디게아 교회가 받은 책망을 
마음 깊이 새깁니다.
쓸모가 없어 내뱉음을 받았던 교회.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미지근한 우리를 발견합니다.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지 않고
마치 우리는 아무런 도움이 없는 것처럼
순간순간 기도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주님,
회개합니다.
주님께서 문 밖에 서서 기다리시는데
우리는 ‘기도’라는 행동을 통해 문을 열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달라지겠습니다.
작은 일에라도 쓸모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무엇을 하든,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겠습니다.
무엇을 하든, 기도로 시작하겠습니다.
기도를 통해 문을 열어 드리고
내 안에 들어오신 주님과 동행하겠습니다.
우리의 쓸모를 생각하겠습니다.
주여,
우리를 통하여 주의 뜻을 이루소서.
아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3. 13. 06:25

빌라델비아 교회를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
(요한계시록 3:7-13)

주님,
인내만큼 좋은 것이 또 어디에 있는가 싶습니다.
험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그것을 이길 힘은 인내 밖에 없는 듯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
참으로 보잘것없는 교회였지만,
주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가장 크게 칭찬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으니, 나도 너를 지키리라!”
이 말씀이 너무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세상의 인내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인내는 소망이고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인내는 주의 따스한 손길을
경험하는 통로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인내하게 하시고
그 인내 안에서
주의 따스한 손을 붙잡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인내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5. 2. 16. 08:27

그리스도인의 역사인식
ㅡ 저항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요한계시록 6:1-8)

봉인은 은폐된 역사와 진실이다. 봉인을 떼는 것은 은폐된 역사와 진실이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 일을 어린 양, 즉 그리스도께서 하신다. 드러나는 역사의 진실을 서술하는데 헬라어 문법의 신적 수동태가 쓰였다. 행동이 모두 신적 수동태로 표현됐다. 그들(로마제국/지배자)의 행동 또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악행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반드시 심판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어린 양이 일곱 개의 봉인을 차례 대로 떼면서 은폐된 역사와 진실을 드러내신다. 첫째 인에서 넷째 인은 은폐된 로마 제국의 정치 경제 상황 폭로하고 있다. 악하고 폭력적인 체제가 드러난다. 이러한 것을 토대로 보면,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것은 ‘역사인식’이 분명하다. 은폐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 드러내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소양 아니겠는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역사에 눈을 감고,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가면 끝이라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은폐된 역사와 진실에 눈을 뜬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에 맞서 저항하고 싸운다는 뜻이다. 신앙은 성육신이지, 탈육신이 아니다. 신앙은 성역사이지, 탈역사가 아니다. 신앙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것인 지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실천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창작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대응이다. 특별히 제국주의에 대한 대응이다. 구약성경은 바벨론 제국에 대한 대응이고, 신약성경은 로마제국에 대한 대응이다. 인간의 역사는 곧 제국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국은 폭력적인 체제의 현실이고 상징이다. 인간의 역사는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창세기는 폭력적인 바벨론 창조 이야기에 대한 거부이고 저항이다. 이 세상이 폭력적으로 창조되었다면, 세상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모두 정당화되고 만다.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평화롭게, 전혀 폭력적이지 않게, 아름답게 창조하셨다. 우리는 이 창조 이야기에 따라 평화를 간구하며, 평화를 창조하며 살아야 하는 당위성을 갖는다.

출애굽기는 폭력적인 지배에 대한 거부이고 저항이다. 복음서는 로마 제국의 폭력에 대한 거부이고 저항이다. 로마의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힘에 의한 평화)는 거짓 평화다. 폭력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었다는 것은 제국의 폭력에 대한 거부이고 저항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국의 폭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즉, 우리 인간의 삶의 지향은 비폭력이어야 하고, 정의로운 사랑이어야 한다. 

왜 12.3 비상계엄이 잘못된 것인지, 그것을 왜 거부해야 하고, 왜 거기에 저항해야 하는지, 아직도 헷갈려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계엄이 아니라 계몽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양심이 없거나, 공부가 부족하거나, 성경을 지독히 오해/오독하고 있는 것이다. 계엄(Martial Law)은 전형적인 국가 폭력이다. 계엄은 군사력(폭력)을 동원하여 통치하겠다는 선포이다. 폭력을 사용하여 국민들을 다스리겠다는 것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발상이다. 이것은 성경이 그토록 경계하고, 거부하고, 저항한 것이다.  

봉인을 떼는 것은 로마제국의 실상에 대한 폭로이다. 
1) 첫째 봉인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2절). 면류관이라는 용어 때문에 오해하면 안 된다. 여기서의 면류관은 좋은 뜻이 아니다. 흰색은 승리를 상징한다. 활은 전쟁 무기에 대한 상징이다. 면류관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말한다. 흰말을 탄 자가 ‘이기고 또 이기려 했다’는 것은 제국주의적 전쟁을 통해 주변 나라들을 식민지화하는 로마제국의 군사적 승리를 폭로하는 것이다. 첫째 봉인의 뗌은 로마제국의 군사주의 폭로이고, 폭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드는 것에 대한 폭로이다. 제국의 군사주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나쁜 것이다. 성경은 군사주의를 거부하고 거기에 저항한다. 

2) 둘째 봉인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4절). 붉은 말은 유혈사태를 보여준다. 큰 칼을 들고 붉은 말을 타고 있는 것은 정치적 억압을 말한다. 일제시대 때 일본군이 한국인들을 짓밟은 거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큰 칼은 ‘마카이라’ 칼이다. 로마군의 전쟁칼은 롬파이아이다. 마카이라 칼은 권력으로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땅에서 화평(서로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없애고, 서로 죽이게 한다.  둘째 봉인의 뗌은 정치적 억압과 살육의 현실 폭로한다. 

3) 셋째 봉인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5절).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6절) 저울은 로마제국의 경제를 상징한다. 식량 가격의 폭등을 폭로한다. 되(코이닉스)는 남자 군인 한 사람에 필요한 하루치 식량의 양이다. 데나리온은 남자 노동자의 하루 임금 (여자는 반데나리온)이다. 남자가 하루 종일 일하여 자기 먹을 만큼 식량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면, 가족들은 굶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한 이유는 전쟁 때문이다. 흉년 때문이 아니다. 부자들의 음식인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는 가격 변동 없고 충분히 공급된다(해치지 말라). 세 번째 봉인의 뗌은 부자들/지배자들에게는 별로 타격이 없지만, 서민들을 빈곤과 기아와 죽음으로 몰아넣는 불의한 경제 체제 폭로하고 있다.

4) 넷째 봉인
ㅡ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이러한 것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죽이더라”(8절). 청황색은 시체의 색이다. 청황색 말을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다. 이는 제죽의 체제가 죽음의 체제라는 것을 폭로한다. 음부가 뒤 따른 이유는 로마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사회에서 배제하기 위함이다. 로마 제국의 정복 전쟁은 정복지 초토화시키고, 학살이 자행되며, 희생자들을 망각한다. 네 가지 살상 도구는 검(무기), 흉년(기근), 사망(전염병/온역/흑사병), 땅의 짐승들(부역자들/을사오적같은 인간들)이다. 네 번째 봉인의 뗌은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자들에 대한 폭력적 죽임과 사회적 배제를 폭로 한다.

성경이 묵시의 형태로 로마제국의 불의한 역사에 대해서 기록하고, 그것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로마제국의 폭력에 희생당한 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까! 네 개의 봉인은 다음의 네 가지 로마 제국주의의 살인적 현실 폭로한다. 1) 군사적 침략, 2) 정치적 억압, 3) 경제적 착취, 4) 사회적 배제. 이러한 내용이 담긴 책을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신앙하는 그리스도인의 역사인식은 어떠해야 하는지 너무도 자명하지 않나? 어떠한 형태로든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발생하고 있는 폭력들을 포착하고 거부하고 저항하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평화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역사인식이고, 신앙의 실제적 실천이다.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신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이 땅의 불의한 현실을 파악하고 보듬어,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스교 신앙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것이 아닐까? "저항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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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2. 16. 08:10

사데 교회를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

(요한계시록 3:1-6)

 

우리를 살게 하시는 주님,
주의 말씀을 통해 신앙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평판이 좋고 명성이 있었지만
실상은 죽어 있는 사데 교회를 보며,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돌아봅니다.
깨어 있지 못해 뒤처진 사데 교회를 보며,
깨어 있기를 원합니다.
주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우리의 믿음이 과거의 평판과 명성에 머물러 있으려 할 때, 
주께서 다시 일깨워 주시고,
기도의 자리에서,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의 감각들이 살아나게 하소서.
주님,
서로 소통하며 살아 있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서로를 돌아보며, 
뒤처진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따뜻한 교회가 되게 하소서.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회복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더 긴밀한 소통을 이루게 하소서.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듯, 
우리도 받은 은혜를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삶의 순간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깨어 있는 신앙을 지켜나가도록 힘을 주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우리의 손을 붙드시고 다시 일으켜 주실 줄 믿습니다.
살아 있는 신앙, 살아 있는 교회로 부흥케 하실 줄 믿으며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2. 16. 07:59

두아디라 교회를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
(요한계시록 2:18-29)

그 따뜻한 품으로 우리를 불러주시는 주님,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세벨의 이야기를 통해, 
잘못된 지식이 우리를 어떻게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지켜냈던 것처럼,
우리도 흔들리지 말고 따스함을 지켜나가게 하소서.
우리의 지식이 교만을 낳지 않게 하시고,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지혜를 주소서.
주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따스함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잘못된 지식이 우리의 마음을 차갑게 만들고, 
서로를 상처 입히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참된 길을 가르쳐 주셨사오니,
주여,
우리의 말과 행동이 사랑을 드러내며,
우리의 삶이 주님의 따뜻한 품이 되게 하소서.
주님, 
우리의 교회를 붙들어 주소서.
주신 말씀을 마음에 품고
따스함을 잃지 않도록
신앙을 지키며 서로를 보듬는
두아디라 교회처럼 칭찬 받는 교회 되게 하소서.
그 따스한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2. 16. 07:54

버가모 교회를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
(요한계시록 2:12-17)

사랑의 주님,
말씀을 통해 우리를 깨우시고
버가모 교회를 통해 주의 뜻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자랑스러운 순교자 안디바를 배출한 버가모 교회가 그랬듯이,
우리도 신앙의 고백을 지키며 
세상의 유혹 속에서 주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게 하소서.
하지만 주님, 우리는 부끄러운 약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거짓된 가르침과 세상의 유혹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 때가 있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주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길로 나아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거짓 속삭임에 귀 기울이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붙들어 주소서.
주님, 우리를 회개로 이끌어 주소서.
발람의 가르침에서 떠나 주께서 주시는 감춰진 만나를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의 욕심과 거짓된 만족 대신,
하늘의 양식을 먹으며 참된 배부름에 이르게 하소서.
흰 돌에 새겨진 이름으로 주의 잔치에 초대받는 영광스러운 자들이 되게 하소서.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주의 말씀에 따라 살겠다는 결단을 마음에 새깁니다.
세상의 거짓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게 하소서.
승리하는 자가 되어 주님 앞에 서게 하실 그날을 소망하며,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2. 16. 07:51

서머나 교회를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
(요한계시록 2:8-11)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위로와 주권 아래 
우리가 있음을 감사합니다.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신실하라고 
도전하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나아갑니다.
서머나 교회가 보여준 믿음을 묵상합니다.
환난과 궁핍, 비방 속에서도 부요하다는
주님의 칭찬을 받았던 그들의 삶을 바라보며, 
우리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주님, 오늘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세상의 유혹과 분주함 속에서도 
그리스도께 집중하며 충성하게 하소서.
죽도록 충성하라 하신 주님의 음성을 마음에 새깁니다.
한계를 정하지 않으시고 십자가까지 신실하셨던 주님의 본을 따라
우리도 끝까지 신실하게 하옵소서.
현대의 박해가 우리를 흔들어도
생명의 관을 약속하신 주님만을 바라보며 달려가게 하소서.
삶의 어려움과 피로 속에서도,
교회와 세상에서의 실망 속에서도,
우리의 눈이 오직 주께만 고정되게 하소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주님,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영광에 이르도록 한 것에 감사드리며,
그리스도께 더욱 집중하며 살게 하소서.
오늘 우리의 충성이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까지도 아시는 주님께서
새 힘과 용기를 부어 주셔서
끝까지 신실함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게 하소서.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며
생명의 면류관을 소망하며 살아가기를 결단합니다.
우리의 삶을 붙들어 주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길로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