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카이 토모아키의 <신학을 다시 묻다>를 다시 읽다

ㅡ 신학은 종말론적 지성이다.

 

"신학은 인간이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그때까지 인간을 잠정적인 존재로 깨닫도록 도움을 주는 학문이다. 모든 학문적인 작업은 가설이며 언제나 상대화될 수밖에 없음을 신학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역사도, 현실도 끝나지 않은 이때, 죄인인, 불완전한 인간은 진리의 일부만을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신학적 지성'이며 달리 말하면 '종말론적 지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194쪽)

 

3년 여 전, 일본학자가 쓴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오자마자 구입해서 읽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지난 3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의 학문도 성장한 바, 다시 읽어본 이 책은 '여전히' 참 좋은 책이었다.

 

부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사회사를 통해 본 신학의 기능과 의미'를 묻는 책이다. 기독교 역사 초기, 신학이 생겨나게 된 배경을 시작으로 중세와 종교개혁, 그리고 근대를 거쳐, 미국에 도착한 기독교의 사회사를 심도 있게 보여준다.

 

실전에서 목회하는 이들에게는 제7장 '실용주의로서의 신학'이 매우 도움될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온 기독교 신학이 청교도 DNA에 따라 세워진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어떻게 '실용주의'와 조화를 이루게 되었는지, 그리고 '쓸모'에 방점을 두는 미국의 실용주의 사상 안에서 기독교 신학과 교회를 어떠한 방식으로 세워나가는 것이 '실제적' 도움이 될지, 상당한 통찰을 전해준다.

 

그러나 '미국적 기독교'가 가져다준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기에, 신학을 진지하게 공부한 사람은 미국적 기독교를 마냥 환영하고 수용할 수만은 없는 입장에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 또한 떠맡게 된다. "즉 시장화된 신학계에서 그 신학의 좋음과 나쁨, 진리성을 결정하는 것은 교회, 교파의 지도자, 대학교의 신학자들, 국가기관이 아니라 소비자들, '대중(교인/나의 첨가)'이다."(174쪽). 이 말은, 곧 시장화된 교회에서 목회자가 '장사꾼'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무엇이 될 것인가의 기로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적 기독교를 받아들인 한국교회에서 목회자의 성공은 '시장화된 교회'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면 성취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다만, 바로 그것 때문에 한국교회가 망가졌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목회의 성공 신화'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지 또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먹히는 감동적인 스펙이나 부르주아적 스펙(자본가적 스펙/교회 운영을 잘 할 것 같은 스펙)을 쌓으면 시장화된 교회의 담임목사 자리에 청빙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이 원리를 아는 목회자는 감동적인 스펙이나 부르주아적 스펙을 쌓는데 심혈을 기울일 것이고, 목회 성공의 기회를 높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스펙 쌓기 때문에, 그렇게 스펙을 쌓은 목회자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되는 바람에 교회가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면, 교회와 목회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이 '신'이 되어버린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 동일한 고민에 빠져 있다. 시장의 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 저항할 것인가. 목회란 시장의 개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 저항하는 것인가. 성공이란 무엇인가? 시장이 보장해 주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삶일까, 아니면, 무엇인가? 시장의 권력은 강력하고, 우리는 벌거벗었고.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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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착각]

 

'주권-국민국가' 개념은 근대의 산물이다. 주권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 국민을 이루고, 그 국민이 자신들의 주권을 국가에 (계약에 의해) 위탁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개념이 바로 근대에 생겨난 '국가'의 개념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산다. 그래서 '국가'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에 세금도 내고 징집도 되고 열심히 일한다. 현대 정치철학은 국가에 대한 그러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신자유주의의 출현 때문이다.

 

정치 철학자들의 비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주권-국민국가'의 신념을 산산이 부서뜨린다. 대신, 국가를 '주권-국민'에서 분리시킨다. 이것은 더 이상 국가 주권을 가진 국민을 보호하는 존재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국가는 시장과 대립관계에 있으며, 국가는 시장에 대하여 간섭하는 존재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는 더이상 국가가 시장을 간섭하는 기구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국가는 시장의 하위 주체로서 잔인한 경쟁 원리를 내장한 시장 질서를 국민들에게 관철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국가는 시장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시장원리, 즉 무한경쟁 원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주권-국민'을 통제하며 법을 무기 삼아 시장원리에 국민들이 지배되도록 강제한다.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주권-국민'은 국가의 변절로 인하여 당황스럽고 황당한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시장질서에 의하여 자신이 시장의 하위 주체로 전락한 것을 숨기기 위하여 국가는 각종 복지혜택을 국민들에게 제공한다. 현대 정치가 포퓰리즘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백신 접종 문제를 통해서 이것을 좀 더 살펴보자면, 국가가 백신 접종을 무료로 제공하고 접종을 권고하는 것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 국가는 국민의 건강을 염려하여 그러한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보이나, 전혀 그렇지 않다. 국가가 백신 접종을 무료로, 즉 복지혜택으로 국민들에게 제공하는 이유는 시장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작동하는 방식 중 하나는 노동의 유연화이다. 즉 자본가가 노동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노동자를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노동자가 말랑말랑하지 않으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무한경쟁을 통한 이윤추구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국가의 임무는 시장의 요구에 따라 '주권-국민'을 자본이 원하는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항시 대기시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팬데믹 상황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노동력의 유연화에 불가피한 타격이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팬데믹 상황에서 국가의 역할은 '주권-국민'을 다시 자본이 원하는대로 쓸 수 있는 말랑말랑한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백신 개발을 위한 국가의 저돌적인 투자, 그리고 개발된 백신을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국민들에게 투여시키는 정책은 '주권-국민'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시장의 하위 주체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즉 시장을 위한 충성에 불과하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체제 하의 국가의 통치술을 '벌거벗은 생명'의 통치(생명정치biopolitics)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주권-국민'을 벌거벗은 상태로 만들어 시장의 경쟁과 이윤 추구를 위하여 국민들을 관리하고 규제하는 통치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국가가 행한 백신개발과 백신공급을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 착각하며 산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안에서 그것은 가장 큰 착각일 수밖에 없다. 국가는 더이상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참담한 현실 앞에서 국민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의 배신에 저항하려고 백신을 맞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은 이미 벌거벗겨져 있으며, 백신을 맞지 않으면 그 어느 곳에서도 자본의 선택을 받지 못해 살림살이를 꾸려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우리를 이 벌거벗겨진 상태에서 구원하리요.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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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약함(weakness)]

 

인간의 위약함이란 인간 이하로, 즉 존재의 무의미로 추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인간의 이러한 위약함을 존재론적으로(ontologically) 규정해 주는 신학 용어가 바로 '죄(sin)'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위약함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무의미로 추락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것은 어느 시대나, 어느 한 개인이나, 어느 집단이나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조에ζωή'라는 신학적 개념은 인간의 위약함을 극복하기 위한 신학적 제시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존재의 위약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장치를 마련한다. 우리를 유혹하는 모든 것은 유약함을 극복하게 해준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 인류사는 그렇게 진행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체계나 과학기술의 발전도 모두 인간의 유약함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유약함을 극복하게 해줄 것이라 기대했던 모든 것들이 인간의 유약함을 극복하게 만들어주기는 커녕, 인간에 대한 지배 통치술로 자리잡았다는 데 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해주겠다고 약속하는 바로 그것에 자신의 생명을 맡겨버림으로 인하여 그것에 의해 자유를 빼앗겨 버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가 자기를 '조에'라고,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주장한 것은 바로 그러한 지배 통치술에 대한 반기라고 볼 수 있다. 예수가 '조에'를 주장하는 이유는 인간의 유약함, 즉 존재의 무의미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지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선포이다. 하나님의 영 이외의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하지 않는 것은 궁극적인 구원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조에(하나님의 생명)'에 우리의 존재를 의탁하기 보다, 다른 것에 우리의 존재를 의탁한다. 가령, 건강, 경제적 풍요, 세련된 정치체계 등, 이러한 것들에 우리의 생명을 의탁하고 있으며, 우리는 점점 더 '조에'에서 멀어지고 있다.

 

현대인들이 겪는 이 끝간 데 없는 불안, 이것은 우리의 존재가 원래 유약한 것인데, 그 유약한 존재의 구원을 구원하지 못할 것들(우상)에게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불안은 이유모를 불안이 될 수밖에 없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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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재

    조에! 조예!! 심조!!!요즘 자주 희락당의 글을 자주 읽지 못하지만 글을 읽을 때 마다 절차탁마, 자강불식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예라는 말을 넘어 심히 깊은 조예에 이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최근에 쓰신 글들을 보니 희락당의 신학, 철학, 사상이 확장 되고 있다고 보입니다. 잘 통합되어 하나의 체계로 정립된다면 성도가 세상을 바라보는 큰 창의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2021.06.05 05:30 [ ADDR : EDIT/ DEL : REPLY ]

기도문2021. 5. 30. 20:51

조에를 찾아 나서기를 간구하는 기도

(롬 8:1-11)

 

주님, 우리는 무엇을 애통해 하며 살고 있습니까?

세상이 부추기는, 건강과 경제적 풍요가 없는 것에 대하여

애통해 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충분히 건강하고 충분히 풍요롭지만 우리의 욕심은 끝간 데 없어

만족을 모릅니다.

주님, 우리 안에 있던 ‘조에(하나님의 생명)’가 쪼그라든 것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도 우리 안에 있었던 조에가 쪼그라든 것을 바라보며 애통하게 하옵소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조에가 실종된 것을 바라보며 애통하게 하옵소서.

주님, 푸쉬케(건강)과 비오스(경제적 풍요)는 목적이 아니라

조에(하나님의 생명)를 위한 수단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옵소서.

목숨과 살림살이를 십자가 위에 바쳐

우리에게 조에(하나님의 생명)을 선물로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조에를 잃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조에를 잃어버리고 엉뚱한 것을 위하여 생명을 낭비하는 자들을 위하여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하는 신실한 주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조에를 찾아서 우리보다 먼저 앞서 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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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1. 5. 30. 20:48

조에를 찾아서 (Finding ZOE/ζω)

(로마서 8:1-11)

 

‘조에를 찾아서’는 ‘니모를 찾아서’의 패러디다. 아빠 물고기 말린(Marlin)은 낛시꾼에게 잡혀간 아들 물고기 니모(Nemo)를 찾아서 멀고도 험난한 여행을 떠난다.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는 비극적인 장면에서 시작된다. 말린과 코랄은 보금자리 해초 더미 안에 알 400개를 낳는다. 알이 부화되기 직전, 꼬치고기가 알들을 잡아먹기 위해 공격해 왔고, 알들을 지키려던 엄마 물고기 코랄과 400마리의 알은 모두 꼬치고기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그 중에 한 알만 살아남는데, 꼬치고기의 습격 때문에 상처를 입어 그 알에서 태어난 아기 물고기는 한쪽 지느러미에 장애를 입는다. 아빠 물고기는 엄마의 소원대로 살아남은 아들 물고기에게 ‘니모’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니모(nemo)는 라틴어로 ‘nobody’라는 뜻이다.

 

400개의 물고기 자식들에게 ‘니모’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자식들이 너무 많아 니모의 의미처럼 ‘nobody’였을 텐데, 이제 단 하나 살아남은 자식 물고기에게 ‘니모’라는 이름은 더 이상 ‘nobody’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빠 물고기 말린은 니모를 애지중지하며 키운다. 어느 날 불행하게도 니모가 어느 스쿠버다이버에게 포획되었을 때, 아빠 말린은 아들 니모를 찾기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더 이상 ‘노바디(아무도 아닌 존재’)가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생명과도 같은 아들 물고기 찾아 떠나는 모험을 그린 애니메이션이 바로 <니모를 찾아서 (Finding Nemo)>이다.

 

우리는 방금 ‘니모를 찾아서’에 대한 줄거리를 전개하면서, 아빠 물고기가 ‘생명’과도 같은 아들 물고기를 찾아 떠났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생명’이란 무엇일까? 로마서 본문에서도 보면 ‘생명’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본문에 나오는 생명이라는 단어는 함께 등장하는 ‘죄와 사망’과는 이질적인 것,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오늘, 이 생명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깊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다. 한 나라의 언어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언어는 그 지역 문화의 총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에 번역하는 것 자체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배이지역(San Francisco Bay Area)에서만 살던 아이에게 ‘산(mountain)’이라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당연히, 배이지역에서만 살던 아이에게 산은 민둥산일 것이다. 그런데, 강원도에서 살던 아이에게 산은 어떤 의미일까? 당연히 숲이 우거진 산일 것이다. 같은 ‘산(mountain)’이라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배이지역의 아이와 강원도의 아이에게 ‘산’이라는 언어를 매개로 하는 산의 이미지는 서로 다르다.

 

성경을 한국어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동시에 불행이기도 하다. 축복인 이유는 성경의 이야기를 우리 언어로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이지만, 불행인 이유는 성경의 원래 언어인 헬라어가 담고 있는 깊은 뜻을 한국어가 오롯이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 많은 오해가 발생한다. 대표적인 예로, ‘죄’라는 용어가 그렇다. 한국어로 번역한 성경의 ‘죄’는 헬라어로 ‘하르마티아’이다. 한국어의 ‘죄’는 불교용어이다. 불교용어로서 죄는 ‘도덕성’과 연관된 단어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죄’를 나타내는 ‘하르마티아’는 도덕성과 연관된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관된 단어이다. ‘하르마티아’는 신학적인 용어이다. ‘죄’를 도덕성과 연관시키면 뭔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죄’라고 부르지만, 성경에서 ‘죄/하르마티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성경에서의 ‘죄’의 개념을 파악할 수 있다. ‘죄’를 도덕성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당장 감옥에 가야할 인물이다. 어떻게 아들을 잡아서 제사를 지낼 수 있는가?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을 죄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그를 ‘의인’이라 부른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 불린다. 왜 그럴까? 그가 가진 하나님과의 관계성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여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한 사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발생한 ‘신앙사건’이지, 아들을 죽이려 한 파렴치한 아버지의 부도덕한 사건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죄(하르마티아)’는 문제적 용어이다. 우리는 함부로 누군가를 ‘죄인’이라고 정죄할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서, 즉 도덕성 문제를 가지고서 어떤 사람을 판단하기 쉽지 않다.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의인이 아니고, 비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죄인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매우 도덕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의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이 보여준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세리와 창녀들은 매우 비도덕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의인(구원받은 이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보여준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매우 놀라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경에는 우리의 상식과 다른 전복적인 이야기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성경은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된다고 말한다. 즉,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증진시키는 일이지, 그것과 상관없이 도덕성을 키우는 일은 ‘위선’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이다. 형편이 넉넉한 사람들은 도덕성을 키우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도덕성을 키우기 어렵다. 그러나 누가 더 하나님 나라를 더 간절히 원하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일까? 이것은 이미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이다. (부도덕적으로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는 차원이 다른 도덕적 삶이 요구된다.)

 

신약성경에는 우리말로 ‘생명’이라고 번역되는 단어가 셋이나 있다. 프쉬케(ψυχ), 비오스(βος), 조에(ζω)가 그것이다. 이 각 단어에 대응하는 한국어 단어가 마땅치 않다. 그래서 이 각 단어를 풀어서 설명하면, 우선, 프쉬케는 ‘생물학적 목숨’을 말한다. 이 단어가 쓰인 구절은 마태복음 6장 25절의 말씀이다. 프쉬케의 구체적인 뜻을 적용하여 그 구절을 풀이하면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생물학적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또한 요한복음의 말씀 중 프쉬케가 쓰이는 구절은 이런 것들이 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물학적 목숨’을 버린다”(요 10:11).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생물학적 목숨’을 버린다”(요 10:15).

 

다음, ‘비오스’는 우리말로 ‘살림, 또는 생활’에 가까운 말이다. 비오스는 살림살이, 생활수준의 뜻으로 바꾸어 생각하면 쉽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나오는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서 ‘이생’이라고 번역된 것이 ‘비오스’다. 우리가 보통 성경을 읽을 때 사용하는 개역개정판보다 새번역 또는 공동번역에서 이것을 좀 더 헬라어의 뜻에 가깝게 번역했다. 새번역은 ‘이생의 자랑’을 ‘세상 살림’, 즉 ‘살림살이, 생활수준’으로 번역을 했고, 공동번역에서는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이라고 번역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탕자)이 아버지에게서 ‘분깃’을 받아 나간 것, 그 분깃이 바로 ‘비오스’다. 즉,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살림살이/재산’을 분배 받아 나간 것이다. 아들은 그 살림살이/재산을 탕진했다. 요한일서의 언어로 옮기면, 탕자는 자신의 재산/살림살이를 세상에서 자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용어는 ‘조에’이다. 조에는 위의 푸쉬케와 비오스와는 완전히 다른 ‘생명’이다. 푸쉬케와 비오스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는 것이다. 물론 푸쉬케(생물학적 목숨)와 비오스(살림살이)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지만, 생물학적 목숨이나 살림살이(생활수준)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조에’는 하나님이 우리 존재 안에 넣어주신 생명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아주 원초적인 생명이다. 생명을 생명 답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숨결(루아흐)이다. ‘조에’라는 용어가 쓰인 신약의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나는 양들이 생명(조에)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 10:10). “내가 바로 생명(조에)의 빵이다”(요 6:35). (푸쉬케, 비오스, 조에에 대한 주석은 우진성 박사의 '일점일획 참조)

 

위에서 제시한 생명을 가리키는 신약성경의 세 용어, 푸쉬케, 비오스, 조에는 요즘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로 바꾸면, 푸쉬케(생물학적 목숨)는 ‘건강(외모)’으로, 비오스(살림살이)는 ‘경제적 풍요’로, 그리고 조에는 ‘영성(하나님의 생명과의 일치)’으로 옮길 수 있다. 건강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얼마나 우리에게 건강에 몰두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건강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가. 경제적 풍요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얼마나 우리에게 경제적 풍요에 몰두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경제적 풍요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가.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기도하고, 소망하고, 바라는 것, 즉,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대하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오셔서 우리를 건강하게 하시고, 우리가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도록, 또는 지금 누리고 있는 건강과 경제적 풍요를 계속해서 누릴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한다는 것이다. 아주 간절히. 이게 왜 문제가 되는가? 복음과 충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증거하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일차적으로 우리의 건강과 경제적 풍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에(하나님의 생명)’를 풍성하게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푸쉬케(건강)와 비오스(경제적 풍요)’를 찾아나서는 사람들은 즐비한데, 막상 가장 중요한 ‘조에(하나님의 생명)’을 찾아나서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데 있다. 왜 그럴까? 무엇이 진짜 생명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건강과 경제적 풍요가 생명이라고 생각하는데 머물고 만다. 그러나, 성경은 건강보다 경제적 풍요보다 더 중요한 생명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조에)’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니모의 아빠 말린이 니모를 찾아 그 험난한 여정을 떠난 것은 니모가 생명처럼 소중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로 ‘조에(하나님의 생명)’를 가장 중요한 생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푸쉬케와 비오스를 찾아나서는 것을 멈추고, ‘조에’를 찾아나설 것이다. 아니, 푸쉬케와 비오스를 찾는 것만을 강요하는 이 세상의 논리에 저항하며, 그러한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생명, 조에를 찾아나설 것이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고후 4:7a).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담긴 ‘보화’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조에’이다. 하나님의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프쉬케(생물학적 목숨)을 바쳐 십자가에서 죽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바로 그것, ‘조에’이다. 우리는 바로 그 조에를 우리 몸에 지니고 있다. 그렇게 ‘조에’를 지니고 있는 사람의 삶이 어떤가, 이어지는 구절을 보자.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조에를 지니고 있기에)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 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조에)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고후 4:7b-10).

 

예수님은 퓌쉬케(생물학적 목숨)와 비오스(재산/살림살이)를 바쳐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조에)를 가져다주셨다. 즉, 건강과 경제적 풍요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조에)를 찾아나서기 위한 수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하며 산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조에)을 주셨건만, 우리는 그것을 팔아 건강과 경제적 풍요를 사려고 한다. 우리의 목적은 어느새 ‘조에’가 아니라, ‘푸쉬케’와 ‘비오스’가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신앙의 비극이고 신앙의 소외다. 사실 이 비극과 소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푸쉬케의 정욕, 비오스의 자랑을 부추기는 세상을 따라갔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조에)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1-2절).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지 않고 자유인, 의인이 된 이유는 우리의 도덕성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물학적 목숨과 살림살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조에(하나님의 생명)’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성이 풍요롭기 때문이다. 건강(푸쉬케)과 비오스(경제적 풍요)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성의 풍요로움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조에가 그 풍요로움을 말해준다.

 

조에를 찾아서! ‘푸쉬케와 비오스만을 찾아나서!’라고 부추기는 이 시대에, 어느새 실종되고 만 ‘조에’를 찾아 나서는 일은 더욱더 긴급히 요청된다. 건강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경제적 풍요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조에’이다. 건강하지 못하면 인간취급 받지 못하고, 경제적 풍요가 없으면 무시당하는 이 세상, 그러나, 조에가 없는 것은 괜찮다고 말하는 이 세상! 건강하지 못한 것을 애통해 하고, 경제적 풍요가 없는 것을 마음 아파할 줄 알면서, 조에가 없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이 세상!  바로 우리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애통해 하며 사는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조에(하나님의 영원한 생명)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물로 받은 조에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이 세상에 저항하며, 우리가 가진 건강, 우리가 가진 경제적 풍요를 수단 삼아 ‘조에’를 찾아 나서야 한다. 조에를 잃어버린 이 세대를 놓아두고 애통해야 한다. 그리고 조에를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힘껏 전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 조에를 찾아서!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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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신학]

 

정치신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인류 역사가 모더니티(Modernity)를 거치면서 공공영역에서 '종교'를 몰아낸 행위를 뒤집는 것이다.

 

이성과 과학의 힘에 밀려 공공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난 '종교'는 더 이상 공공영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의견'을 내기 힘들어졌다. 공공영역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더이상 종교의 지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서는 현대 사회에 깊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공공영역에서 더 이상 종교의 지혜를 듣지 않게 된 것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특별히 허무주의의 문제, 물질의 노예가 되는 문제, 환경파괴의 문제 등)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이 맞닥뜨린 '파국' 앞에서 다시 생명의 가치를 되살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공공영역에서 종교의 지혜를 발현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해졌다.

 

정치신학은 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정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예전부터 '두 왕국 이론'은 이 세상에 마치 두 왕국(교회와 정부)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정하고, 두 영역 간의 파워게임이 발생하는 것처럼 사유되어 왔으나, 그것은 '두 왕국 이론'에 대한 비참한 오해이다. 이러한 조악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회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적대적으로 싸우고 있다.

 

정치신학은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어떻게 견인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종말론적 정치 비전이다. '주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고백은 이 세상에 대한 거부나 저항이 아니라, 우리가 두 발 딛고 사는 이 땅, 이 세상의 나라에 대한 긍정이며, 이 땅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소망이다.

 

정치신학은 이 죄악 많은 세상에 대한 비판이나 저주나 멸망의 선포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사랑의 보듬음이다. 공공영역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한복판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게끔 공공영역을 이끄는 것이 정치신학이다. 그러므로 요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정치신학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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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시 '소리의 뼈']

 

김교수님의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드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 1989년 3월 7일 새벽, 29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기형도, 그리고 그가 남긴 시는 그 이후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유고시집으로 발간된 <입 속의 검은 잎>을 읽는 것은 그당시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그의 시가 유명해진 것은 그의 시집의 제목을 정하기도 하고 그의 시에 대한 평론을 쓴, 당대 최고의 문학평론가 김현의 공로가 큽니다. 김현은 기형도 시에 녹아 있는 '죽음'의 모티브에 주목했고, 그래서 시집의 제목도 '입 속의 검은 잎'이라고 정했죠. 기형도의 시 '입 속의 검은 잎'이 그의 시 세계를 대표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기형도의 시는 한국 예술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시 제목을 딴 영화도 두 편이나 있습니다. "봄날은 간다"와 "질투는 나의 힘"이 그것이죠. 그리고 그의 시 "우리동네 목사님"은 '진보적인' 목사님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기도 했죠.

 

위의 시 "소리의 뼈"에 등장하는 김교수처럼, 때로는 저도 강단에 올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다가 내려오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칼 바르트가 말했듯이, 설교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설교'를 통해서 말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불완전하고 불가능한 작업입니다. 그래서 매주 '설교'를 해야하는 목회자로서, 불가능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아 늘 불안한 마음과 부족한 마음,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목사가 설교하려고 주일 강단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려오면, 교회가 갑자기 술렁대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런 심정으로 매주일 강단에 섭니다. 내가 지금 뭔가 설교를 하고 있으나, 나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는 심정. 나는 침묵할테니,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라는 심정. 우리 모두, 설교 시간에 발생하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집중하는, 좋은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침묵해야 하는데, 오늘도 말이 많았군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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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읽기 문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큐티의 영향으로 성경을 '구절구절' 읽고 묵상하는 데 익숙하다. 구절구절을 읽다 은혜되고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되는 구절에 밑줄을 진하게 긋고, 읊조리고, 외우고, 흐뭇해한다. 그리고 그 말씀 구절을 붙들고 하루를 승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구절구절 읽고 큐티하는 방식은 '은혜'가 될지는 몰라도 신앙의 성장을 가져오지 못한다. 한국교회가 영적인 성장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성경읽기 방식을 바꿔야 한다. 큐티식 구절구절 읽기 방식에서 벗어나 성경 각 권마다 발생하고 있는 목회적 또는 신학적 상황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 문제를 저자가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 지를 면밀히 살펴 봄으로써 현재 우리의 삶에서 또는 역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적용하여 삶과 역사를 조망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는 성경읽기를 해야 한다.

 

전체를 조망하는 성경읽기는 하루 아침에 되지 않는다. 인내와 열심을 가지고 믿음의 경주를 달리듯 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이 믿음의 경주에서 낙오되는 구성원이 없도록 서로를 돌보아야 한다.

 

믿음의 성장은 나이 먹어가는 것만큼 어렵다. 세심한 돌봄과 끈질긴 인내 없이는 불가능하다. 신앙의 성장을 일으키는 성경읽기가 아닌, 하루 반짝 은혜만 받고 마는 성경읽기는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그런 성경읽기로는 이 악의 시대를 건널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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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발전]

 

이성의 발전 역사를 보면, 이성은 사물(자기 바깥의 존재)을 '파악'하는 기능을 가지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파악'은 분석해서(또는 분해해서 / 조각조각 나누어) 손에 쥔다는 뜻이다. 이성의 파악 능력은 인간이 사물을 지배하는 능력을 갖게 해주었다. 즉, 인간이 사물을 지배하는 '지배자'의 입장에 올라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인간이 지닌 '이성의 능력' 때문이다.

 

그런데, 이성의 발전이 가져온 결과는 참담해 보인다. '사물'을 조각조각 내서(파악해서) 그것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고, 이성을 가진 인간은 우쭐해졌을지 모르나, 사물이 가진 '신비'는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인간의 마음과 현실을 황폐하게 만든 것이 분명하다. 파악해서 자기 아래 둔 존재에게서 '황홀감'을 느끼거나 '경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은 사물을 활용하거나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게 만드는 일에는 탁월해졌으나, 사물을 자기의 대화상대로, 즉 친구로 삼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이렇게 한 없이 외로운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성의 발전을 되돌아 보고, 이성을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사물을 지배하기 위해 이성을 발전시키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다. (외롭게)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인간은 이성을 발전시키되, 사물을 통전적으로 이해하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무엇보다 사물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그 사물과 거룩한 사귐을 갖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일찍이 신앙의 선조(선배)들은 '믿음'을 강조한 것이다. 믿음은 이성의 반대말이 아니라, 이성이 지향해야 할 방향성이다. 믿는다는 것은 사물을 파악하여 자기 아래 두는 행위가 아니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거기에서 신비를 발견하여 그 신비 안에 감추어진 신적 아름다움과 거룩한 사귐을 갖는 것이다.

 

인간이 이 우주에서 외롭게 쓸쓸히 죽어가지 않으려면, 이성을 버리고 믿음으로 회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발전시키되 믿음을 지향하는 이성을 발전시켜야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신비한 이 세계는 '파악'한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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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명칭의 의미]

 

'무기원'을 상정하는 온당한 이름은 '성부'입니다.

그리고 '무기원'을 지닌 낳음을 받은 자의 합당한 명칭은 '성자'입니다.

또한 무기원적으로 생기거나 발출 혹은 유출하는 존재의 적절한 이름은 '성령'입니다.

The Proper Name of the Unoriginate is Father, and that of the unoriginately Begotten is Son, and that of the unbegottenly Proceeding or going forth is The Holy Ghost.

(Gregory of Nazianzos, Fourth Theological Orations, 19)

.........................................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명칭을 '인간적인 관계'의 측면에서 이해하면 안 된다. 예수가 하나님의 '자식'이어서 '성자'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예수의 '아버지'여서 '성부'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성부'와 '성자'의 개념은 신학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의 본질,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더욱이, '성부'와 '성자'의 개념은 기독론의 발전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하기 위해서 고안된 언어이다.

 

성자를 '독생자(only begotten son)'이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님에게 자식이 단지 한 명 뿐이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독생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하기 위해 고안된 언어이다. 하나님에게 '낳음을 입은 자'는 오직 '성자' 밖에 없다. 그래서 성자는 성부와 동일본질을 갖는다. 즉, 성자는 하나님이다.

 

성령에게는 'unbegotten'이라는 용어가 붙는다. 이것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동일본질이기는 하나, 성자와 다른 위격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과 예수의 신성(Godhead)을 '성부'와 '성자'로 표현하는 것은 가부장적 표현 방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명칭을 굳이 여성적으로 바꾸려 한다면, '성모'와 '성녀'로 바꾸어야 할까?

 

'성모'는 이미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주어진 명칭이다. 그러면, 어떻게 바꿔야 할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명칭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과 관계를 더 잘 설명해 주는 명칭을 고안해 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려면, 교부들이 발전시킨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하여 일일히 반박하며 그 용어를 더 잘 개진시켜야 할텐데, 그게,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신학적 논의를 잘 간파하여, 이것이 가부장적인 표현이 아닌, 신학적 표현이라는 것을 충분히 숙지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더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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