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지 못한 교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어떤 교회는 살아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이다. 사데 교회가 그랬다. 겉으로는 번성했고, 명성이 있었으며, 평판도 좋았지만,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네가 살아 있다 하는 평판을 가졌으나, 너는 죽은 자다”(계 3:1).

이 말은 교회(신앙)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적용된다. 살아 있는 듯 보이지만, 정작 안에서는 메마르고 힘을 잃은 상태.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되며, 세상과도 멀어지는 삶. 그것은 곧 뒤처지는 삶이다.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생명이 단순한 습관이 되고, 숨은 쉬고 있으나 살아 있는 것 같이 않은 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삶은 점점 무력해진다.

뒤처지는 것은 무섭다. 한때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이 기쁨이었지만, 지금은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수 있다. 예배가 부담스럽고, 기도가 공허하게 느껴지며, 말씀을 들어도 마음 깊이 와닿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깨어 있지 못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방치하면, 결국 신앙은 점점 더 깊이 잠들어버리고 만다. 이러한 상태에 처해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는 인지하지 못한다.

혹시 이런 상태에 처해져 있을 지 모르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희망을 준다. "깨어 있으라. 굳건하게 하라. 기억하라. 순종하라. 회개하라" (계 3:2-3).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는 길, 뒤처진 신앙을 회복하는 길, 뒤처진 인생을 끌어 올리는 힘이 여기에 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눈을 뜨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 두고, 관계를 회복하며,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하는 것이다. 깨어 있는 신앙은 기계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성도들과 교제하며,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신앙이다. 신앙의 길에서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라이너 쿤체의 시 <뒤처진 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그는 뒤처진 새를 바라보며 그 새에게 자신의 힘을 보낸다고 말한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다. 우리가 뒤처졌을 때, 다시 날아오를 수 있도록 힘을 보내신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뒤처진 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기다려 주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 교회가 진정 살아 있으려면, 화려한 예배당이나 큰 행사보다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 먼저이다.

사데 교회처럼, 우리의 신앙도, 삶도 한때는 뜨거웠지만 지금은 식어버렸을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여전히 손을 내밀고 계신다. 일어나고 싶어도 잡아줄 손이 없을 때 우리는 절망의 늪에 빠져 죽음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은 절대 내민 손을 거두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 손을 잡을 때까지 손을 내밀고 계신다. 그러니, 그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길 바란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보내는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 우리 신앙이 다시 살아나는 날, 우리는 진정으로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걷는 자들이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서로를 돌보며, 살아 있는 교회를 만들어 가자. 이렇게 살아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