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3. 10. 26. 03:27

하루를 마감하며 드리는 기도

 

주님,

오늘 제가 한 모든 일이

주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한 일이었는지,

하루를 돌아보며 주의 은혜와 자비를 간구합니다.

제가 한 일 중에 저의 욕심과 교만에서 비롯된 일이 있었다면

용서하시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어 주소서.

그리하여 욕심과 교만으로 행한 일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주 안에서 선하게 사용되게 하옵소서.

 

오늘 있었던 억울한 일은 주님께서 갚아 주시고

오늘 있었던 슬픈 일은 위로해 주옵소서.

어려움에 처한 자를 조금 더 도와주지 못한 것을 용서하시고

제 손으로 살피지 못한 것들은 주님께서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살펴 주옵소서.

 

세상 모든 이들이 평화로운 잠자리에 들게 하옵소서.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주님을 생각하며

이렇게 평안하게 누워서 잘 수 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인 것을 잊지 말게 하시고,

자고 일어나 새힘을 얻어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주님께 받은 모든 은총을 아낌없이 나누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습니다.

오늘 맺은 열매는 내일을 위해 쓰이게 하시고

나의 생명이 주님 안에 있는 줄 믿사오니

자는 동안

모든 악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가져가시고

나의 생명을 새롭게 하사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열어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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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10. 24. 13:11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

(민수기 1:1-19)

 

1.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BC 587년 유다가 망하고, 헬라화가 되었을 때, BC 300년경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옮기는 작업이 진행됐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용하던 코이네 헬라어로 번역된 헬라어 성경은 ‘70인역(셉튜아진트)’로 불린다. 신약 성경 시대는 여전히 헬라 시대였으므로, 신약 성경도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AD 382경부터 성경은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한다. 히에로니무스(제롬)이 번역한 라틴어 성경을 불가타라 부른다. 로마 제국의 영향 아래 성경이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종교 개혁 때, 마르틴 루터에 의해 독일어로 성경이 번역되었고, 그 영향으로 각자 나라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길을 열었다. 아무튼, 성경은 크게,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의 영향 아래서 번역되고 발전되었다

 

2. 성경 중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셉튜아진트)가 특별히 중요하다. 예수님 당시, 신약 시대 때 성경은 ‘70인역’이었다. 사도 바울은 70인역 헬라어 성경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하며 자신의 편지들을 썼다. 70인역(헬라어 성경)에서 민수기를 ‘숫자들(아리테모이)’라고 번역했다. 70인역의 영향이 얼마나 광범위한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어 성경도 ‘민수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원래 히브리어에서 민수기는 ‘베미드마’, 즉 ‘광야에서’이다.

 

3. 민수기를 헬라어로 ‘숫자들’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민수기에 두 번에 걸친 인구 조사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민수기는 36장까지 있는데, 1장과 26장에 인구 조사 이야기나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인구 조사(Census)를 하는 이유는 병역과 조세 때문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인구 조사를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서서히 국가의 요소를 갖추어 갔다는 뜻이다. 인구 조사했더니, 장정(20세 이상/싸움에 나가서 싸울만한 남자)만 60만명 정도 되었다. 정확하게는 1차 조사 때 603,550명, 대략 40년 후에 시행된 2차 조사 때 601,730명이 계수되었다.

 

4. 민수기는 대략 40년 정도의 시간의 기록이 담겨 있다. 1차 조사는 출애굽 후 13개월 후에, 2차 조사는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고,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시행된다 민수기를 이해하려면, 인수 조사를 기준으로 보는 것보다, 지명을 중심으로 보는 게 좋다. 민수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가데스 바네아 사건이다. ‘가데스 바네아’를 꼭 기억해야 한다. 민수기는 크게 세 지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내산 – 가데스 바네아 – 모압 평지.

 

5. 시내산에서 발생한 일은 성막(어디에서 제사를 드리나), 제사법(제사법(어떻게 제사를 드리나), 제사장(누가 중재하나), 정결법(누가 제사에 참여할 수 있나), 절기법(언제 제사를 드리나), 인구조사, 진영 갖춤 드이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발생한 일은 정탐꾼 사건과 이스라엘의 반역이다. 이 사건 때문에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보내게 되고, 출애굽 1세대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놓고 모두 광야에서 죽는다. 모세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평지에서 죽는다. 모압 평지에서 제2차 인구조사(출애굽 2세대)가 시행되고, 모세는 출애굽 2세대들에게 설교를 한다. 그 설교의 구체적인 기록이 민수기 다음에 나오는 신명기이다.

 

6. 민수기는 ‘숫자들’이라는 관점보다, ‘광야에서’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우리에게 더 큰 유익이 있다. 성경의 가르침 대로 산다는 것,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사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성사적 존재/sacramental being라고 한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은 세속적 존재/non-God being/secular이다. 세속 사회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종교)와 관계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회다. 세속화는 근대의 개념이다. 근대(현대)의 특징은 신을 사회 활동에 신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사적 존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다고 믿는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결된 삶을 사 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광야란 하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고 하나님과의 동행이 필수적인 곳이다.

 

7. 광야는 온갖 소리(소음)로부터 자유로운 곳이다. 하나님의 음성,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데 있어 특징/속성이 있다.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세미하게 들려온다. 광야 같은 고요와 침묵이 없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엘리야 선지자도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왁자지껄한 한바탕 싸움을 벌인 후, 광야로 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새 힘을 얻었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역을 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며 사역을 준비하셨다. 광야는 궁극적 소통의 자리이다.  

 

8. 현대인들이 가장 애 먹는 일은 소통이다. 현대인들은 ‘말이 안 통한다’고 호소한다.
소통에는 상업적 판매 기술로서의 소통과 관계의 깊이를 위한 소통이 있는데, 특별히 관계의 깊이를 위한 소통의 부재는 심각하다. 현대인들은 주로 도시에서 생활을 한다. 도시는 온갖 소음이 난무하는 곳이다. 각종 기계음, 각종 언론 보도, 엔터테인먼트, 일자리 등에서 들려오는 소음들은 우리의 정신을 쏙 빼놓는 것들만 있다. 무엇보다 도시의 삶은 내 이야기가 상대방에게 먹히게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언어 표현이 유혹적이거나 폭력적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사는 현대인은 주체적이기 힘들고, 늘 누군가/무언가의 지배 아래 있다.

 

9. 도시인들을 보라. 주체적으로 소유하고 소비하는 사람이 있나? 우리는 불필요한 소비와 불필요한 말을 하면서 산다. 집에 놓여 있는 물건들을 보라. 소유를 보라. 우리는 정말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하기 보다, 온갖 유혹적이고 폭력적인 언어로 포장된 광고들에 의해서 물건을 구매하기 일쑤다. 게다가 도시인들은 바쁘게 살다 보니, 남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을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감정)에 귀기울여주거나,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더라도 기억하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의 삶의 문제를 나누고, 진지하게 기도하지 못한다. 우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세상)가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새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람이 된다. 소통이 안 된다. 말이 안 통함, 감정의 나눔 부재, 무관심은 관계의 상처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관계의 붕괴까지도 가져온다.

 

10. 현대 도시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영성은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이다. 물리적으로 광야 같은 환경 만들면 좋으나, 실제로 조용한 데를 찾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진짜 광야 같은 시골 같은 곳을 자주 찾는 것도 어렵다. 시간과 비용 문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도시의 삶 가운데서 광야처럼 사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를 배우고 실천하지 못하면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외로움과 괴로움을 벗어날 길이 묘연하다.

 

11. 다음은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의 방법들이다. 다음에 제시된 방법들을 하나씩 실천하다 보면, 하나님과의 소통도 이웃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소통도 조금씩 회복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1) 눈을 감고 심호흡 자주 하기

2) 모든 기기를 멀리하기 (스마트폰/TV)

3) 책 읽기 / 시 읽기 / 성경 읽기 (침묵과 집중이 저절로 된다)

4) 기도 시간 갖기 (기도문 읽기)

5) 상대방에게 귀기울이기 (공감)

6) 교회를 광야처럼 오기 (광야 나오는 행위)

 

12. 현대 도시인들은 숨을 잘 쉬지 않고 산다. 바쁘다 보니 숨쉬는 것도 잘 못한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자주 하는 일은 가장 손쉽게 광야로 가는 방법이다. 현대인들의 정신을 가장 혼미하게 만드는 것은 스마트폰이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통해서 세계 곳곳의 사람들과 연결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시각적으로 습득하는 정보는 흥미를 유발시키고 뭔가 강력한 지식을 구축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못하다. 자극적인 영상으로 획득된 정보들은 오히려 우리의 뇌를 조정한다. 그것들은 반성적/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막고 맹목적으로 따르게 만든다. 그러므로, 스마트폰이나 TV 같은 기기를 통해서 습득하는 정보보다, 책으로 습득하는 정보들이 삶을 더 깊게 만들고 소통을 원활하게 한다.

 

13. 현대인들은 책을 잘 읽지 않는다. 그래서 출판업계는 만년 불황에 시달리는 형편이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인하여 책을 읽을 기회는 더 줄어든 것 같다. 이것은 비판적 사고를 기르지 못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특별히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를 위한 방법으로 내가 가장 추천하는 독서는 ‘시 읽기’이다. 시 언어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시가 제시하는 세계에 갔다오는 것은 마치 광야에 다녀오는 것과 같다. 시 읽기는 현실에 파묻혀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구원해 준다.

 

14. 현대인들은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이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 이것을 특별히 방해하는 것은 도시의 소음과 스마트폰이다. 카페에서 만난 친구들 사이에서도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느라 서로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만나도 만난 게 아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오는 것을 습관처럼 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주일에 교회에 오는 습관은 좋은 습관이다. 그러나, 교회에 오는 것을 ‘광야에 나오는 행위’로 인식하면 큰 유익이 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일은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나 뭔가 특별한 것을 경험하는 일과 같다. 교회를 광야로 생각할 때 그곳은 하나님의 음성이 더 명확히 들리는 자리가 되고, 하늘의 은혜를 간구하지 않으면 살아갈 없는 인간의 운명을 더욱더 절실히 경험하는 자리이다.

 

15. 유대교 랍비 조너선 색스는 “믿음은 소음 아래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이 저명한 랍비가 정의하고 있는 믿음에 근거해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면, 우리가 얼마나 믿음 없는 삶을 사는가를 반성하게 된다. 우리는 온갖 소음에 파묻혀 소음 아래서 들려오는 음악을 듣지 못한다. 그 아름답고 즐거운 음악 소리를 듣지 못하니, 우리의 인생은 짜증나기만 하고, 소통의 부재 속에서 외로움과 괴로움 가운데 살아갈 뿐이다.

 

16. 시편 19편은 이렇게 노래한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준다.

낮마다 그것들은 말씀을 쏟아내고

밤마다 그것들은 지식을 전해 준다.

이야기도 없고 말소리도 없다.

그것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것들의 음악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

 

17. 우리는 도시의 소음 파묻혀, 온갖 만물들이 전해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외롭다. 어떻게 해야 할까? 외로움과 괴로움을 어떻게 하면 이겨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도시에서의 우리의 삶에서 기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발산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도시에 광야처럼 사는 데 있다. 무엇보다,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을 자주 물으라. 생각과 감정에 동감해주고, 위로해 주라.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아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킬 수 있고, 당신과 나의 삶이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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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10. 24. 12:09

도시에서 광야처럼 살기를 간구하는 기도

(민수기 1:1-19)

 

주님, 민수기의 말씀을 통하여

광야에서의 삶을 배우게 하옵소서.

깊은 도시의 삶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어느새 광야에서 사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온갖 소음에 시달리다 보니

정작 들어야 할 중요한 음성들을 듣지 못하고 삽니다.

하나님의 음성, 가까운 이들의 음성,

우리는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음성조차도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외롭고 아픕니다.

주님, 우리를 광야로 이끌어 주옵소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법,

이웃, 사랑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주님과 동행하며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보듬으며

깨어진 우리의 삶, 깨어진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주 안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옵소서.

도시에서 광야처럼 사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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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성경은 트러블 메이커인가?]

보편성과 역사성이라는 두 기둥을 잡고 신학을 했던 판넨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하나님, 예수가 믿는 하나님이 유일하고도 참된 하나님일 때, 바로 그때라야만 유대인이 아닌 사람도 하나님을 믿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생길 것입니다."
(조직신학 서론, 10쪽)

구약성경 설교를 많이 하는 저로서는 요즘 여간 괴로운 게 아닙니다. 유대인의 성경, 유대인의 하나님이 믿음의 보편 대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현재 유대교 또는 여호와 하나님 신앙과는 별개로 존재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을 성경과 분리시켜 생각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세워진 것도 성경에 근거한 시오니스트의 활동 때문이니까요.

이스라엘-하마스(팔레스타인)의 전쟁과 그들이 빚어내는 참상을 보면서 성경에 등장하는 온갖 '탄원'들이 팝콘처럼 떠오릅니다. 주변 나라들로부터 엄청난 시련을 당하며 실존적 탄원을 그치지 않았던 이스라엘과 그 탄원이 고스란히 담긴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참상은 어떤 탄원으로 치유될 수 있을 지, 도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보편성을 가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이 보편성을 역사 속에서 확보하려면 현재 이스라엘-하마스(팔레스타인) 전쟁의 참상을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가나안)을 둘러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은 십자가 고난의 현재적 역사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성이 발현되는 자리이고,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탄원의 자리입니다. 둘(유대인과 이방인/의인과 죄인)이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막힌 담을 허무신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십자가에 달려 계신 자리이기도 합니다.

성경이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성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평화와 자유가 입맞출 때까지 우리는 쉴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께서 그만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죄악과 폭력에 굴하지 말고, 희망 안에서 잘 버텨야 할 것입니다. 함께.

Posted by 장준식

[책 속에만 존재하는 기독교]

 

고급 기독교 서적들이 줄지어 출판되고 있다. 외국의 저명한 학자/목사/영성가들의 저작이 대부분이다. 기술의 발달로 출판 시장 접근이 용이해져, 경쟁적으로 기독교 서적이 출간되어 팔리기 위해 매력을 발산 중이다. 좋은 서적이 많이 발간되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더 많은 서적이 발간되면 좋겠다.

 

그런데, 우려되는 현실은 기독교가 자꾸 책 속으로만 들어가는 것 같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발간되는 기독교 서적은 꽤 수준 높은 것들이 많다. 특별히 영국 신학자들의 저서들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에서 볼 수 있는 기독교 현상은 신앙 '공동체'의 축소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공동체를 일구는 현실 사람들은 점점 줄어드는데,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식이 담긴 서적은 날로 수준이 높아져 간다.

 

나는 예전에 한국 기독교는 미국의 시민 종교화나 독일의 국교화 보다는 영국의 기독교 신앙의 매니아화와 같은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공동체는 축소되지만 몇몇의 기독교 매니아들이 아주 고급진 기독교 지식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갈 거라는 이야기다. 나는 이미 기독교 서적 출간의 경향을 보면서 그쪽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신앙은 공동체로 구현되어야 하는데, 공동체는 줄어들고 그 대신 기독교 신앙이 책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다. 요즘 출간되는 기독교 서적들을 읽어 보면, 모두 기독교의 진리를 깊고 수려하게 잘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기독교 공동체는 하루가 멀다 하고 무너지고 축소되고 있으니, 기독교의 진리가 아무리 깊고 수려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독서를 통해 기독교의 수려하고 깊은 진리를 깨달은들, 그것이 현실 세계의 공동체로 이어지지 못하고, 자기 만족에 그치거나, 엘리트화 되거나, '그들 만의 리그'에 그친다면, 기독교 신앙은 세상을 향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묘연해질 뿐이다.

 

요즘 출간되는 기독교 서적들을 읽으면 기독교 진리를 더 깊이 알게 되고,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신앙 상식을 교정할 수 있게 되어 좋다. 그만큼 기독교 신학도 많이 발전하고 분명해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수려하고 깊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현실 교회를 자꾸 부정하게 되거나 비판하게 되면서 오히려 '가나안 성도'만 배출하게 되는 것 같다. 현실 교회에 또는 현실에 참여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마치 참된 진리를 깨달아서 성화된 것처럼 생각하는 신앙은 분명 영지주의 신앙과 닮았다.

 

사실, 기독교 진리, 기독교 신앙만큼 단순한 것도 없다. 기독교 신앙은 무슨 도를 깨우치거나 무슨 위대한 일을 요구하지 않고 그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차별 없는 사랑'을 실천하면 된다. 기독교가 꿈 꾸는 세상은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어우러져 사는 대동세상이다. 그런데,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은 어떤가. '선교'라는 이름 하에, '전도'라는 이름 하에, 심하게는 '그리스도의 이름 하'에 온갖 차별과 배제와 혐오가 저질러지고, 사회(세상)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독교는 책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두 손에, 우리의 두 발에, 우리의 몸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를 수려하고 깊게 책 속에 기록해 두는 것도 좋으나, 자신의 손과 발에, 그리고 깊은 마음 속에 새기는 것이 진짜 신앙일 것이다. '공동체'는 없어지고 '개인'만 남아 도는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책 속이 아니라 사람 속으로 스며드는 신앙을 꿈꾼다.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3. 10. 14. 03:48

슬픔

 

눈이 멀었으니까 제 정신일리가 없지

눈이 멀었으니까 본 대로 말하지 못하고

입술이 움직이는 대로 말하는 거야

 

눈 먼 자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언제나 오지에서 먹는 음식물 같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맛보아야 하는

미각의 슬픔을 너는 상상이나 해봤니

 

눈 먼 아비의 손을 잡고

사막을 떠돌아야 했던 꽃다운 안티고네는

이미 성인의 반열에 올라 있어

“눈 먼 아버지는 눈이 먼 채로 혼자 걸어야 해요”*라고 말하는

너는 누구니

 

 

* 박연준 시 ‘안티고네의 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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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거룩]

 

다르게 살 용기.

 

체제가 제시하는 방향을 따라 가지 않으면 도태되고 소외 될까봐 불안에 빠져 전전긍긍하게 만들어 스스로 노예의지를 발휘하도록 만드는 이 시대에,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나의 삶/구원을 주님께 맡기고, 다르게 살아갈 용기를 갖는 것,

그것이 바로 거룩이다.

 

거룩을 도덕으로 이해하면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 니체가 간파하고 있듯이 도덕은 체제가 부과한 노예의지이다. 도덕은 필연적으로 차별을 만들고, 배제와 소외를 불러와, 서로 미워하게 만들어 사회를 분열시킨다. 거룩을 도덕적 요청으로 받아들여 자기를 다른 이와 구별하려드는 순간 그 사람은 자기 모순에 빠지고 말 것이다.

 

거룩(카도쉬)은 다르게 살 용기다. 거룩은 오히려 차별을 만드는 체제에 저항하여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발산하며 '너와 나'의 화해를 이끌어 평화를 일구어 낸다.

 

예수 그리스도가 거룩하신 분인 이유는 다르게 살 용기를 가지는 게 무엇인지를 십자가에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거룩은 온 세상을 화해로 이끌었다/이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다르게 살 용기를 요청한다. 거룩은 도덕이 아니다. 거룩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나는 저항한다. 고로 거룩하다.

 

다르게 살 용기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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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손 꼭 잡는 신앙]

 

히스기야 왕은 요시야 왕과 더불어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히스기야가 좋은 평가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종교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입니다. 바른 신앙을 갖는 일은 늘 어려운 듯합니다. 하루라도 자기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인간의 운명인 듯하고요. 그리고 신앙이란 영의 일이라 오롯이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인 듯합니다. 신앙인에게 자기 반성이란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간절한 겸손일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산당들 제거, 주상(돌기둥, 신 임재 표식) 깨뜨림, 아세라 목상 찍어 버림, 모세가 만든 놋뱀 철거 등의 외적인 형태를 갖추었지만, 종교개혁의 핵심은 산당신앙에서 벗어나 성전신앙으로 가는 것입니다. 산당신앙은 오늘날에도 신앙을 괴롭히는 신앙의 형태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보다 신앙심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산당신앙은 개별신앙, 사적신앙의 형태를 말합니다. 신앙을 통해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죠. 신앙의 방향이 ‘자기self’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사회분열을 조장합니다. 자기의 이익과 맞지 않는 사람과의 분열을 조장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한 배제와 혐오가 조장됩니다.

 

반면에, 성전신앙은 공동체 신앙, 공적신앙의 형태를 말합니다. 성전신앙의 방향성은 나의 바깥입니다. 관계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전신앙은 화합과 평화를 추구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시대보다 현재 우리의 삶이 더 산당신앙으로 기울기 쉬운 시대입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적나라하게 폭로했듯이, 우리가 사는 시대는 남을 죽여야만 자기가 사는 시대인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징어 게임 하듯,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남을 무너뜨립니다. 이런 시대에서 성전신앙을 세워 나가는 일은 고대 이스라엘에서보다 더 힘든 일입니다.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 시대에 북이스라엘이 망합니다. 열왕기하 18장에 그 내용이 담겨 있는데, 히스가야를 평가는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왕하 18:6). 그런데 북이스라엘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그의 언약과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더라”(왕하 18:12). 이게 바로 산당신앙과 성전신앙의 차이입니다. 산당신앙은 신앙을 사사로이 사리사욕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내가 당장은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것 같아도, 결국 사회를 분열시켜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정말 경계해야 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히스기야의 신앙은 성전신앙의 모범입니다. 히스기야의 신앙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타흐’이고, 다른 하나는 ‘다바크’입니다. ‘바타흐’는 의지하다로 번역되었는데, 신뢰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뢰하니까 안정감을 갖는 상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바타흐’(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안정감을 가졌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안정을 주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계속 ‘불안’하다면 나의 신앙을 조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바크’는 연합하다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혓바닥이 입천장에 붙어 있는 형상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어린 아이가 부모의 손을 붙잡고 그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입니다.

 

성전신앙은 산당신앙과 달리 하나님의 손을 꼭 잡는 신앙입니다. 손을 꼭 잡은 모습에서 ‘애정’을 봅니다. 성전신앙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 잘 되고, 나만 잘 살면 그만인 신앙이 아니라 더불어 잘 살고 더불어 힘든 일을 극복하는 신앙입니다. 삶을 함께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것, 동행하는 신앙이 성전신앙입니다. 공동체가 이런 모습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 신앙의 성장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가 이렇게 성전신앙을 통해서 공동체(서로의 삶을 보듬어 주는 삶의 형태)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성전신앙, 공동체 신앙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불안을 극복하고 삶에 자신감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삶은 내가 실패하더라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줄 공동체가 존재할 때 가능합니다. 히스기야의 삶은 형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복을 주셨습니다. 형통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안정감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도, 우리의 교회도, 우리의 사회도, 이렇게 형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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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근대의 의미: 보수 사회]

 

근대(modernity)의 의미는 다음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

(자연보다 인간의 힘이 더 강력해진 시대)

2) 국민국가의 탄생

(국가는 개인의 또다른 자아가 되었다. 애국심의 탄생)

3) 사유재산의 허용

(내 재산은 아무도 못 건드려! 이건 하나님도 못 건드려!)

 

이 외에도 근대를 규정하는 여러가지의 현상이 있겠지만, 그래도 이 세 가지가 근대를 규정하는 가장 큰 현상이 아닌가 싶다. 이런 현상을 볼 때 근대는 아무래도 근본적으로 '보수적'일수 밖에 없다. 인간중심주의, 국가중심주의, 자유(사유재산)중심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변화'의 문제는 결국 보수 사회가 가져온 파국이다. 보수적 사고와 보수 사회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인간의 성공, 국가의 성공, 자기의 성공은 찬란한 것 같으나, 그 성공이 지니고 있는 내부의 모순을 외부로 '전가'시키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한 연못에 물고기 두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두 마리 물고기가 어느날 싸워서 한 물 고기가 죽었다. 이제 혼자 남게 된 물고기는 자신이 연못을 모두 차지한 것 같고, 더이상 싸울 일도 없어서 평안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좋아한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가 썩어들어가고 그 썩은 물고기가 연못을 오염시켜 결국 혼자 남은 물고기마저 죽게 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성공, 다른 나라에 대한 우리 나라의 성공, 다른 인간에 대한 나의 성공은 모두 '수탈'과 '외부 전가'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수탈과 외부 전가는 끝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분명, 근대와 헤어질 결심을 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세(Anthropocene)'는 짧을수록 좋다.  '지배와 종속'에서 벗어나 '평등'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보수적인 사회로 가야 한다. 가치가 올바르면 그 가치를 지키는 '보수'는 좋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치가 올바르지 못하면 그 가치를 지키는 '보수'는 좋은 것이 될 수 없다. 그저 꼴통 소리를 들을 뿐이다. 지금 근대의 가치를 지키려는 존재는 그저 꼴통일 뿐이다.

 

좋은 가치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좋은 보수 사회가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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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아픈 철학]

 

좋은 문학은 '비극'이다. 좋은 철학은 '아픈 철학'이다. 좋은 문학은 비극을 보듬어 안아 희망으로 이끌어 준다. 좋은 철학은 아픈 마음을 안아 희망으로 이끌어 준다.

 

좋은 문학을 하고 좋은 철학을 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들여다 보면, 대개 개인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비극과 아픔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파국 또는 비극으로 몰고온 일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 보며, 왜 이러한 파국과 비극이 닥쳤는지를 파헤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원인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토대를 제공한다.

 

일례로,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놀이하는 인간>는 아픔이 담긴 철학이다. 나치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노동의 경험이 그를 '놀이하는 인간'으로의 사유로 이끌었다. 나치 포로수용소의 모토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였다. 노동하느라 죽다 살아난 하위징아는 노동과 대비되는 '놀이'에 주목하여, 인간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노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놀이하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새로운 삶의 토대를 제공하여 노동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이렇게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는 아픈 철학이다. 그의 철학에는 아픔이 배어있다. 

 

아픔을 일부러 경험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살면서 아픔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우리는 아픔을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쳐서는 안 된다. 모든 '좋은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아픔이 낳은 창조물이다.

 

아픈 철학이 좋다. 그가 왜 그런 철학을 하는 지, 인생의 뒤안길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의 아픔이 어떻게 새로운 길을 내고 있는지 세심하게 살피면 좋다. 그렇게 우리는 아픔을 이겨내기도 하고, 아픈 철학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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