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3. 8. 8. 08:27

주일을 위한 기도

(출 6:9, 16:23-30)

 

주님,

우리를 자유케 하소서.

주일을 지키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를

지키게 하소서.

몸과 마음이 걍퍅해지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날마다 주님께 내어드리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고,

주일을 잘 지키는 자유인이 되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를 선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8. 8. 08:24

주일과 자유

(출애굽기 6:9, 16:23-30)

 

1.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최근 기사를 보면, 미국인의 기대 수명이 최근 2년 사이에 2.7세나 감소했다. (Horrifying numbers of Americans will not make it to old age/7.31.2023) 현재 미국인의 기대수명은 76.1세다. 세계 최고의 암 치료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인이 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암 때문이다. 굉장히 아니러니컬한 현상인데, 암 때문에 죽는 이유는 의료에 대한 불평등한 접근성 때문이다. 암에 걸려도 돈이 없는 사람은 최고 수준의 암 치료 기술의 혜택을 받을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2. 그리고, 미국인의 기대 수명을 갉아먹는 요인으로 총기사고와 교통사고가 있다. 미국인은 2022년도에만 교통사고로 43,000명 정도가 죽었다. 총기사고로 죽은 사람은 2023년도 현재까지 25,000명 정도 된다. 그리고, 미국인의 기대 수명을 갉아먹는 요인이 또 있다. 약물중독이다. CDC의 발표에 따르면, 2021년에 약물과다복용으로 죽은 사람이 무려 107,000명이나 된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미국인의 기대 수명을 갉아먹는 요인 중의 하나로 젊은 층의 죽음이 지목됐다는 것이다. 2021년도에만 15세에서 24세의 젊은이 38,307명이 죽었다.

 

3. 이렇게 충격적인 사망이 발생하는 원인과 기대수명 감소에 대해서 이코노미스트가 제시하고 있는 분석이 흥미롭다. 이렇게 된 이유는 미국인들이 중시하는 자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자유를 중시하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데, 더불어, 정부의 개입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지난 4월, 미국 청년 보수단체 ‘터닝포인트 USA’ 설립자 겸 회장 찰리 커크는 “수정헌법 2조를 지키기 위해서는 매년 총기 사망의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다”고 말할 정도다. 한마디로, 총기 소유에 대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한 해에 몇 만 명이 총기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은 감수해야 할 사항이지, 수정해야 할 사항이 아니라는 뜻이다.

 

4. 미국에서는 ‘자유’가 이념으로 작동하여 정치 싸움에 이용된다. 그래서 미국식으로 이해하는 ‘자유’의 개념은 잘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비판적으로 미국식 자유를 받아들이면 바로 그 자유 때문에 소중한 생명을 잃을 수 있다. 자유는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생명을 지켜내려는 의지인데, 그 자유가 오히려 생명을 헤치고 죽인다면,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런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자유 말고,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생각해 보려 한다. 하나님의 자유를 통해서 이 땅에서 왜곡되어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자유를 바로잡는, 좋은 일이 많이 생겨나면 좋겠다.

 

5. 출애굽기는 우리들에게 ‘해방’이라는 개념을 가져다 주었다. 남미신학자들을 통해서 발전된 해방신학은 성경의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발전된 신학이다. 해방신학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출애굽기는 해방과 자유의 이야기다. 해방되었다는 것은 자유를 얻었다는 뜻이다. 해방을 갈망하는 이유는 지금 삶이 어딘가에 억압되어 있다는 뜻이다. 억압되어 있어 자유가 없고, 자유가 없다보니, 삶이 괴롭다는 뜻이다. 행복하고 편안해야 하는데, 무엇인가에 억눌린 사람은 자유가 없어 삶이 괴롭다.

 

6. 400여년 동안 애굽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에는 그곳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갔는데, 어느 순간 상황이 바뀌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왕조가 들어서는 바람에) 노예로 전락하여 괴로운 삶을 살았다. 길지 않은 삶이지만, 우리의 삶이 이런 것 같다.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 같이 행복하다가도, 어느 순간 상황이 바뀌어 지옥을 사는 것처럼 괴롭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시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한다.

 

7. 이스라엘은 애굽의 학대에 너무 괴로워 날마다 울부짖었다. 성경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성품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학대를 싫어하신다는 것이다. ‘학대’는 히브리어 ‘라하츠’에 해당된다. 성경에서 ‘라하츠’라는 말이 나오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 라하츠는 ‘괴롭힘’, ‘학대’, ‘압박’이라는 우리말로 옮길 수 있고, 영어로는 ‘oppression’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학대받는 자들의 하나님(God of the oppressed)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은 학대를 싫어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인가에 학대 받는다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된다. 반대로, 절대로 우리는 누군가를 학대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대적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대적이 되면 인생에 이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

 

8. 학대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행동하는 학대이고, 다른 하나는 행동 안 하는 학대이다. 행동하는 학대는 ‘괴롭힘’이다. 누군가를 어려움 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주 나쁜 짓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행동하는 학대’만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학대에는 다른 유형이 있는데, 그것은 ‘행동 안 하는 학대’이다. 다른 말로 방치라고 한다. 누군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모른 척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동하는 학대’를 안 하고 산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행동을 돌아보면, 우리는 ‘행동 안 하는 학대’를 자행하고 살 때가 많다. 내가 직접 도와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학대 당하고 있는 존재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라도 해야 한다. 그러면, 그 기도 안에서 그 학대 당하는 존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반드시 입을 것이다.

 

9. 학대 당하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학대를 보시고 가만히 있지 않으시고, 그의 종 모세를 보내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다. 그런데 출애굽기 6장을 보면 아주 기이한 일이 발생한다. 학대 당하여 괴로운 마음을 표출하던 이스라엘이 정작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 그들을 애굽에서 꺼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겠다는 메시지를 전했을 때,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discouragement)과 가혹한 노역(cruel bondage)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출 6:9).

 

10. 학대가 나쁜 이유, 그리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학대를 싫어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보이는 반응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학대는 몸과 마음의 자유를 빼앗는다. 그래서 생명의 존엄성을 형편없이 훼손시킨다. 생명의 존엄성이 훼손되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다른 생명과 소통이 안 된다. 특별히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소통이 안 된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해방과 자유를 약속하시고 말씀하시는데, 학대 당하여 존엄성을 훼손 당한 이스라엘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 마음 아픈 일이다.

 

11.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는 과정은 널리 알려져 있기에 다시 반복하여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출애굽 사건을 가장 발목 잡았던 것은 ‘걍퍅한 마음(discouraged /stubborn/hardened/heart)’이었다. 두 강퍅한 마음이 출애굽을 가로막았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강퍅한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애굽의 바로 왕이 가졌던 강퍅한 마음이었다. 우리가 강퍅한 마음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내 앞에 이미 와 있다. 다만, 내가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임하느냐 구원이 임하지 않느냐의 차이를 낳는다. 마음을 부드럽게 하라. 마음을 풀라.

 

12.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강권적 은혜(걍퍅한 마음을 넘어서는)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인도 아래 마침내 홍해를 건너 출애굽 한다. 그리고, 그들이 광야에 들어서면서 그 광야에서 받은 첫 번째 훈련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다.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은 우리가 잘 아는 만나 사건과 엮여 있다. 만나 사건이 발생한 이유는 안식일 훈련을 위함이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쉬는 날’이다. 쉼이다. 쉰다는 것은 어딘가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쉰다는 것은 곧 자유를 뜻한다.

 

13. 오랜 세월 동안 애굽에서 학대당하며 마음이 상하고 고된 노역으로 고통당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못하는 것, 그들에게 없는 개념은 ‘쉼’(sabbat)이었다. 그들에게 쉼이라는 것이 없었다. 즉, 그들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그래서 쉬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자유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만나 사건을 일으키신다. 만나 사건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다는 단순한 사실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나 사건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나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쉼’, 즉 ‘자유’를 가르쳐 주신다.

 

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일하지 않으면 생명을 부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살기 위하여,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학대를 받으면서도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만나 사건을 통해서 이들은 더 이상 학대를 받지 않으면서도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은 평일에 나가서 만나를 거두어들이기만 하면 됐다. 거기에는 무슨 학대가 있지 않았다. 거두어들이는 노동만 존재할 뿐이었다. 거두어들일 때 그냥 하루치 먹을 양식만 거두어들이면 됐다. 더 많이 거두어들이느라 불필요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6일에는 두 배를 거두어들이는 노동만 조금 더 하면 됐다. 그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제 일곱 번째 날은 만나를 거두어들이는 일조차 하지 않고, 그냥 쉬면 되었다.

 

15.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 사건을 통해 안식일을 지키면서 비로소 ‘자유’를 알게 되었다. 안식일을 통해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절대로 애굽에서와 같은 삶을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은 그 이후에 그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않는 삶을 살기 원했다. 자유의 삶은 우상숭배를 거부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는 인간의 삶에서 자유를 빼앗아가는 상황을 지칭하는 것이다. 우상숭배가 나쁜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는 불경을 저질렀다는 뜻이 아니라, 참 자유를 주지 않고 가짜 자유는 주는 악한 것에 몸과 마음이 빼앗겼다는 뜻이다.

 

16.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이후 그리스도인에게 ‘주일’(The Lord’s Day)로 계승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더 깊은 자유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처럼 주일을 지킨다. 유대인은 안식일을 지켰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고백은 한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켰더니, 우리가 안식일을 지킨 것보다 안식일이 우리를 더 많이 지켜주었습니다.’ 유대인의 이러한 고백은 그리스도인 경험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주일을 지켰더니, 우리가 주일을 지킨 것보다 주일이 우리를 더 많이 지켜주었습니다.’

 

17. 표면상으로는 다종교의 국가이지만, 심층상으로는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성행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런데, 결국 그 노예 제도를 뒤집을 수 있었던 이유도 기독교 정신 때문이다. 노예 제도가 존재할 때 미국인들의 종교성은 유난했다. 그들은 노예 제도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아직 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노예 제도를 운영했던 미국인들조차도 ‘주일을 지켰다.’ 그들은 주일을 지키면서 아주 종교적인 마음으로 주일에는 노예를 쉬게 했다. 그들이 무슨 좋은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노예에 대한 사랑으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 하게도 노예들은 주일에 쉬는 것을 통해서, 그 옛날, 출애굽기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키면서 ‘자유’를 배웠던 것처럼, 그들은 ‘자유’를 배워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노예들이 갈망하는 자유를 막을 길이 없었다. 결국, 미국은 노예 제도를 포기하고, 노예들에게 자유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했던 역사인식 방법)

 

18.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지킨다. 우리가 누리는 생명의 자유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면,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보다 주일이 우리를 더 많이 지켜준다. 절대, 절대, 주일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고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주일을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는 내 영혼의 건강에 대한 바로미터다. 주일을 지키지 못하면, 그것은 내가 지금 어딘가에 속박당하여 있다는 뜻이다. 하루 빨리 그 결박에서 풀려나도록 주님께 구원을 간구하라. 참된 자유를 주시고,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는 주님 외에, 그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말라.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하겠다는 신앙의 결단이다. 주일을 지키라. 그러면 주일이 여러분을 지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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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인류세 신학]

 

인류세. 영어로는 Anthropocene(안트로포씬). 2000년,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과 생물학자 유진 스토머가 기후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새로 고안한 개념입니다. 지난 7월 27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비장한 목소리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지구 온난화가 끝나고, 끓는 지구의 시대가 왔습니다!” 대개 우리는 더 좋은 시대가 도래했다는 ‘선언’을 듣고 싶어하지만, 그와는 달리, 유엔 사무총장의 선언은 비극적입니다. 지난 1만년 동안 기후는 인간에게 따뜻했습니다. 기후는 인간이 살아가기에 매우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1만년 동안 인류는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를 거치면서 찬란한 문명을 이루어 왔습니다. 지난 1만년 동안의 지질시대를 일컬어 ‘홀로세’(Holocene)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기후가 안정적이었던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epoch), 인류세가 도래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류세’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또다른 세금(tax)이 생겨난 줄 알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평온한 삶을 살아왔다는 뜻입니다. 기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인류세’가 기후에 대한 용어라는 것을 전혀 상상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인류세’는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용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이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가장 눈에 띄는 용어는 ‘인류세’와 더불어 ‘전례없는’(unprecedented)이라는 용어입니다. 인류세를 맞아 인류는 전례없는 경험을 합니다. 모두 기후 변화 때문에 겪게 되는 경험입니다.

 

왜 ‘인류세’라는 용어가 중요하고, 왜 인류는 ‘인류세’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그동안 지질시대를 구분하는 용어들은 모두 인간의 활동과 관계없는, 자연적인 활동에 근거한 용어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빙하기’(Ice Age)’가 끝나고 홀로세로 들어서게 된 것은 그냥 자연의 원리였지, 거기에 인류가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활동이 지질시대가 바뀌는 데 1도 관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인류세는 완전히 다릅니다. 인간의 활동이 지질시대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인류보다 몇 배나 더 강력한 생명체였던 공룡조차도 그들의 활동을 통해 지질시대를 바꾸어 놓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구생명체 중 유일하게 인류(인간)만 지질시대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는 정말 대단해!’라고 칭찬할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지금 자신들의 활동 때문에 스스로 죽을 위기에 처해졌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인류는 어떻게 활동을 했길래, 생명을 풍성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멸종을 가져왔는가?’ 이렇게 우리는 아주 깊은 반성의 시간이 필요한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제가 마음에 늘 품고 있는 문장 하나가 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말입니다. “If you want to change your way of life, acquiring the right image is far more important than diligently exercising willpower.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이 말 때문에 저는 어느 순간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인간은 머리속에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머리속에서 올바른 개념이 확립되지 않으면 인간은 의지력으로 자신의 삶을 바꾸거나, 자신의 행동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인간은 생각에 따라 행동합니다. 생각(사고)이 중요합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행동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먹고 하는 행동이나 또는 무심코 하는 행동 모두는 우리의 생각에 대한 반영입니다. 이것을 기후 변화 문제에 적용해 보면, 우리의 행동이 기후 변화의 원인이 되었다는 뜻은, 우리가 기후 변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다시피, 생각을 바꾸는 일은 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일만큼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이 바뀌면 ‘다시 태어났다’라는 말로 묘사할 정도로, 어떤 이의 생각이 바뀐 것을 보면서, ‘저 사람 다시 태어난 것 같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다시 태어난다’라는 말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중생, 거듭남’을 뜻하는 신학적 용어로 인식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을 일컬어서 ‘거듭났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인류세를 맞아 이 ‘거듭남’이라는 용어를 조금 다르게 사용할 필요가 생긴 듯합니다. 예수 믿고 거듭났는데, 그 거듭난 신앙인의 행동이 기후 변화를 불러왔다면, 그것은 진정 거듭난 것일까요? 거듭났다는 것은 생명이 풍성해졌다, 생명이 온전해졌다는 뜻인데, 실상, 인류세를 맞은 인류는 생명이 쪼그라들어, 생명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아주 큰 모순이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해야 할까요?

 

1990년을 전후로 서구권 나라에서는 ‘지구’에 대한 인문학적 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일컬어 ‘지구인문학’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인문학의 주제는 인간이나 국가(정치)였는데, 인문학 주제에 ‘지구’가 대두된 것이죠. 그동안 인문학의 주어는 인간 또는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지구인문학에 대한 논의가 일면서, 인문학의 주어가 인간 또는 국가에서 지구로 바뀐 것입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만의” 인문학에서, 이제는 지구가 주어로 등장하여, 모든 논의에서 지구를 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규정하는 ‘신학’도 마찬가지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기독교 신학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만의” 신학이었습니다. 신학의 주어는 하나님과 인간이었습니다.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더 나은 인간의 삶의 조건을 ‘신적인 삶(신에게 잇대어 있는 삶)’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지구를 주어에서 뺀 신학이 결국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만들었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죠. 우리는 이러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우리는 인류세를 맞아, 아주 깊은 신학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저는 ‘인류세 신학’이라고 명명합니다. 인류세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만 주어로 삼아 생각을 전개시키는 게 아니라 ‘지구’도 주어를 삼아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그러면 지난 2천년 동안 전개된 기독교 신학은 매우 다르게 재구성될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8. 1. 04:14

영성을 간구하는 기도
(출 3:1-12)

 

우리를 우리보다 더 큰 존재에 연결시켜

우리의 존재를 보듬어 주시는 주님,

우리가 살아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갇혀

나보다 더 큰 존재에로 나아가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삽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영성이 사라진 시대에 살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두려움과 떨림의 마음을 갖지 못해

폭력과 고통이 난무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나그네로 살아가던 모세를 더 큰 존재에 연결시켜

삶의 의미를 회복하게 하시고

그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펼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눈으로 봅니다.

주여, 우리도 영성을 갈망하게 하시고

매일매일 나보다 더 큰 존재에게 나를 열어 성장하게 하시며

바깥의 모든 존재가 나보다 더 큰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셔서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주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가장 큰 존재인

하나님에게로 연결시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선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8. 1. 04:13

영성

(출애굽기 3:1-12)

 

1. Ted Runyon. 에모리대학교 조직신학자. 2017년 5월 11일 소천하셨다. 저서 중에 <New Creation>이라고, 웨슬리 신학에 대한 저술이 있다. 이 책은 산타클라라UMC 담임목사를 하셨던 김고광 목사님이 한국말로 번역했다. 나중에 개정판을 낼 때, 개정된 부분이 잘 번역됐는지, 런연 교수님이 봐달라고 하셔서 확인해 드린 적이 있다. 나는 Ted라는 이름과 인연이 깊은 듯싶다. 에모리의 Ted Runyon이 추천서를 써주시고, GTU의 Ted Peters가 나를 제자로 받아주셨다. 에모리에서 공부할 때, Ted Runyon에게서 두 개의 수업을 들었다. 하나는 실존주의철학(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성례전신학(Sacramental Theology)이었다. 런연 교수님은 늘 수업시간에 지난 주 신문의 주요 토픽을 이야기하고, 기도하고 시작했다. 인상적이었다.

 

2. 지난 주 신문의 주요 토픽은 단연, ‘폭염’(Heatwave)이다. 미국만 해도 폭염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인구가 1억 7천만명에 달한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구 온난화가 끝났다. 끓는 지구의 시대가 왔다 We've Gone Beyond Global Warming and Into Global Boiling"고 발표하기도 했다. 폭염, 또는 홍수 피해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무엇보다, 농작물의 타격이 심하다. 한국 뉴스를 보니, 상추 100그램에 2,428원이고 삼겹살 100그램에 2,555원이다. 그래서 우스갯말로, 상추에 삼겹살을 싸 먹는 게 아니라, 삼겹살에 상추를 싸 먹는 시절이 왔다고 한다. 이제 베트남 쌀국수 집에 가면, 스리라차를 보기 힘들다. 기후변화로 칠리 페퍼 제배가 안 되기 때문이다.

 

3. 이런 문제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아마도, ‘먹고사니즘’ 때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먹고사니즘이 아니더라도, 우리 삶에 발생하고 있는 ‘개인적인 문제들’에 파묻혀,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떻게 보면, 나와 상관없는 일 같은, 그런 일이 전혀 눈에 안 들어왔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재,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삶이 그런 것 같다. 우리는 나 자신의 문제와 나의 문제다 보다 더 큰 문제들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산다. 그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4. 출애굽기 1장을 보면, 창세기의 마지막 축복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출 1:7).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atmosphere)가 바뀐다. 이는 마치, 기후변화를 맞이한 것과 같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니”(출 1:8).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애굽에서 400년 동안 생육하고 번성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고통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애굽을 통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5. 요셉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요셉의 가치를 전혀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치 있던 것이 가치 없는 순간이 된 것이다. 이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 따뜻함이 없어지고, 냉대가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새 왕은 이스라엘을 차갑게 대했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출 1:11).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출 1:14). 이렇게 엄한 노동과 괴로움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는 것을 그치지 않으니, 급기야는 아예 산아제한을 두려고 한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라는 끔찍한 명령까지 내려진다.

 

6. 모세는 이런 난세에 태어난 인물이다. 태어나면 곧바로 죽을 운명을 안고 태어났지만,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애굽의 왕, 바로의 딸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모세는 왕자 대접을 받으며 성장한다. 왕궁에서 귀하게 자란 몸이지만, 태생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출애굽기 2장 11절 이하는 모세의 장성한 시절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어느 날, 모세는 자기 동족 히브리 사람이 애굽 사람에게 핍박을 받고 있는 보고 의분이 일어 자기 딴에는 히브리 동족 편을 든다고 애굽 사람을 쳐죽인다. 그런데, 나중에 이 일이 탄로나서 모세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7. 애굽에서 떠나온 모세는 이제 자기 삶에 집중하게 된다. 생존의 문제. 미디안 광야에서 떠돌던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이드로)을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거하며, 결국 그의 일곱 딸 중 하나인 십보라와 결혼을 하여 미디안 광야에 정착해서 살게 된다. 이제 모세는 더 이상 애굽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히브리 사람들과 만날 일도 없을 것 같은 삶은 산다. 그렇게 모세는 그냥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는 듯싶다.

 

8.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은 한 개인으로의 인생을 살아가던 모세가 자기보다 더 큰 존재, 자기보다 더 큰 문제에 연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것을 ‘영성’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가 교회에서, 또는 삶을 살아가면서 ‘영성’(spirituality)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영성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영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없을 때가 있다. 그리고 요즘 많이 유행하는 말이 이런 것이다. ‘Spiritual but not religious.’ 줄여서 ‘SBNR’이라고 한다. 나는 영성을 추구하지만(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다.

 

9. 영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대개 ‘영성’하면 뭔가 신령한 것으로만 생각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을 추구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만다. 요즘엔 영성을 ‘명상’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그냥 혼자 조용한 곳에서 가서 명상을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을 영성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우리는 영성이라는 말을 자주 쓰고, 자주 듣는데도 불구하고 영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거나, 영성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영성이 아주 막연해졌다.

 

10. 영성이란 무엇인가? 이해하기 쉬운 말도 풀어서 설명하면, 영성이란 나보다 더 큰 존재에 연결되는 것이다. 출애굽기를 보면, 영성과 영성이 아닌 것을 잘 보여준다. 출애굽기는 나보다 더 큰 존재에게 연결되면서 커가던 존재가 어느 새 모든 관계가 끊기고 고통에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나서 나보다 더 큰 존재인 부모에게 연결되면서 커가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부모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아기는 부모를 통해서 ‘영성’을 배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기에게 최초의 영성이다. 인간은 처음 경험이 중요하다.

 

11. 아기는 어느 정도 성장하면서 자기보다 큰 존재인 부모보다 더 큰 존재에게 접속하기 시작한다. 친구를 통해서, 주변 인물들을 통해서, 그리고 학교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등등, 이제 아이는 자기의 존재를 확장해 간다. 그렇게 성장해 가던 아이가 어려움에 부딪히기도 한다.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는데, 나보다 더 큰 존재에게 연결되어 가면서 성장하던 존재가 어느 때부터 더 큰 존재에로 연결되어 나가는 것이 막히고,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만 축소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더 큰 존재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자기 자신 안에 갇히게 될 때, 인간은 고통받는다. 애굽의 이스라엘이 딱 그랬다. 고된 노동과 생존을 위한 투쟁에 내몰리다 보니, 어느새 이스라엘은 자기보다 더 큰 존재에 잇대어 사는 법을 잃어버렸다.

 

12. 모세의 삶은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죽을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왕궁에서 왕자로 자란 모세는 자기보다 더 큰 존재에 연결되면서 성장해 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더 이상 성장하는 존재가 되지 못하고, 왕궁과 애굽에서 도망쳐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는 목동으로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듯했다. 더 이상 그에게 하나님도, 동족 이스라엘도 온데간데없어지고, 그냥 그렇게 미디안에서 고립된 인생을 사는 듯했다. 그의 삶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힘들었을까. 그러한 그의 삶과 마음이 그가 십보라에게서 낳은 아들의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게르솜.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alien)가 되었음이라.”

 

13. 내가 요즘 읽은 책 중에 <연결된 고통>이라는 책이 있다. 한 번 읽어보길, 적극 추천하는 책이다. 이 책의 부제는 ‘현대 의학의 그릇에 담기지 않는 고유하고 다양한 아픈 몸들의 인류학’이다. 한 의사(이기병)가 외국인노동자진료소에서 근무하며 환자를 돌보면서 경험한 것을 인류학의 관점에서 풀어낸 책이다. 외국인노동자들의 이야기니까, 기본적으로 마음 아프다. 낯선 땅에 와서,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 일인가. 그 중에서 내가 예전에 담임하던 교회의 한 교인을 생각나게 하는 일화가 눈에 띄었다. 네팔 사람인데, 한국의 외국인노동자로 와서 살던 사람 이야기다. 이 사람이 외국인노동자진료소에 와서 받은 진단은 ‘심부전증’이었다. 심부전증이 온 직접적인 원인은 술 때문이었다.

 

14. 그런데, 이 사람이 술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네팔은 가부장주의가 심한 나라라고 한다. 청소년기에 아버지를 여의고 일찍 가장이 된 이 네팔 남성은 가족들을 뒤로 하고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한국에 왔다. 한국에 외노자로 와서 농장 일을 시작으로, 직물 공장, 비료 공장 등지에서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받았다. 스트레스를 받은 이유는 자명하다. 원하지 않는 곳에 와서 원하지 않은 일을 억지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시간이 좀 날 때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빈도와 양이 늘어갔다.

 

15. 그런데, 문제는 과음을 하고 난 다음 날 술 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채 업무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공장의 오너나 주변 동료들에게 달갑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다 음주 경력이 길어지면서 결국 심부전증에 걸리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일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니까. 그래서 아픈 몸을 숨기고 가까스로 일을 해오다가 병원을 찾은 것이고, 금주 권고를 받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청천병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회사에서 해고가 된 것이다. 계약 갱신이 안 된 것이다. 술 먹는 것 때문에 회사에 근심이 되었던 터라, 계약 갱신에서 탈락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이후로 술을 더 먹게 되었고 결국, 그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16. 조지아에서 목회할 때 딱 이런 분이 있었다. 서울시 공무원을 지내신 분인데, 자녀 중 한 명이 지체장애자여서, 아이를 위해서 한국을 떠나 미국에 온 분이었다. 아이는 미국에 와서 돌봄을 잘 받아 UC 샌디에고 대학에 들어갔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아빠는 그렇지 못했다. 자녀를 위해서 미국에 오긴 왔지만, 와서 말도 잘 안통하고, 일거리도 없어서, 말 그대로, 나그네로 힘들고 어렵게 살았다. 그러다, 막노동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흘러흘러 조지아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 분도 자신의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시간 날때마다 술을 마셨다. 술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마셨다. 나는 술병 난 이 분을 달래 주러 심방을 참 많이도 나녔다.

 

17. 그렇게 공사장 인부로 살아가던 이 분이 엘에이 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잘 사는 가 싶었다. 어느 날 나에게 전화가 와서, “목사님, 영주권이 나왔습니다. 이제 곧 건유찬유 좋아하는 뻥튀기 사들고 조지아에 목사님 뵈러 한 번 가겠습니다.”라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분의 부인에게 전화가 왔다. 반갑게 받았는데, 소식은 비통했다. “목사님, 남편이 죽었어요. 술병을 이기지 못해서, 집에서 술만 먹다가 죽었어요. 그동안 남편을 위해서 힘써주시고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비통한 소식이어서,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이 분의 술주정 때문에 내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미운정 고운정 다 들었는데, 그냥 그렇게 세상을 떠나셔서, 마음이 침울했다.

 

18.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 버리면 결국 고통 당하면서 죽는다. 요즘 시대가 악마 같은 이유는 ‘자기’에게만 갇혀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보다 더 큰 존재, 나보다 더 큰 문제에 나를 연결시키지 못하게 만든다. 요즘 시대에 가장 편만한 감정이 무엇인가? 무관심과 무기력이다. 요즘 시대, 사람들이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 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영성’이 상실됐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큰 존재가 없는 시대, 내가 제일 큰 존재인 시대, 즉, 나보다 더 큰 존재, 나보다 더 큰 문제에 연결되지 못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큰 존재가 없고, 내가 제일 큰 존재이다 보니, 자기 바깥의 존재를 향한 두려움과 떨림이 없다. 부모도 무시하고, 선생님도 무시하고, 누구든지, 마음에 거리끼면 무시한다. ‘니가 뭔데?’

 

19. 모세가 호렙산 사건을 통해서 회복한 것은 영성이다. 나보다 더 큰 존재에 연결된 것이다. 그는 자기가 큰 존재인 줄 알고 이집트 왕자로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고통스럽게 살던 히브리인들의 고통을 자신이 덜어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그 일로 인해서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해서, 결국 미디안 광야에서 나그네로 살아갔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모세를 더 큰 존재에 연결시킨다. 그 큰 존재는 하나님이었고, 더 나아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었고, 그들을 통하여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이었다. 그렇게 모세는 더 큰 존재와 연결되면서 삶의 의미를 회복한다.

 

20. 영성은 나보다 더 큰 존재에 연결되는 것이다. 영성의 궁극은 가장 큰 존재인 하나님에게 연결되는 것이다. 영성은 다른 말로, 겸손을 배우는 일이다. 나는 나 스스로 큰 존재가 아니라 바깥의 존재와 연결되면서 커가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보다 작은 존재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존재를 만나든지, 그와 연결되면서 두려움과 떨림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모세와 야곱에게서 극명하게 배울 수 있는데, 모세는 자기보다 더 큰 존재와 연결되면서 그 앞에서 신발을 벗었고, 야곱은 얍복강에서 어떤 존재(천사)와 연결되면서 이렇게 외쳤다. “당신이 나를 축복하기 전까지는 내가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영성의 욕구가 없으면 우리는 성장하기 힘들다. 영성을 통해 성장한 사람은 존재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존재를 대한다.

 

21.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폭력의 문제(정치적 폭력)나 기후변화의 문제를 겪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영성의 부재 때문이다. 자기가 가장 큰 존재라고 생각을 하니, 나의 바깥 존재를 함부로 대한다. 나라와 나라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사물의 관계들 생각해 보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나보다 큰 존재라고 생각하면, 땅에 묻혀 있는 광물이 나보다 큰 존재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모두 거기에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우리가 현재 경험하며 고통스러워 하는 폭력의 문제나 기후변화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나보다 큽니다.” 서로가 서로를 두려움과 떨림으로 대하는, 영성을 회복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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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7. 28. 05:24

이야기 회복을 간구하는 기도

(출 12:21-28)

 

주님,

이야기를 상실하여 모두가 아픔과 고통 가운데 살고 있는 이 때에

우리에게 여전히

주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의 이야기를 통해 구원 받았고

여전히 예수의 이야기를 통해서 삶을 세워 나가는 우리들,

이야기를 상실하여 아픔과 고통이 많은 이 세상을 향하여

빛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먼저 더욱더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게 하시고

우리 자신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열고 개방하여 나보다 더 큰 존재에게로 나를 자꾸 확장시켜

이야기가 풍성한 아름다운 삶을 일구어 나가게 하옵소서.

우리들의 풍성한 이야기가

나의 삶을 살리고 이웃의 삶을 살리게 될 줄 믿습니다.

내가 서 있는 그곳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셔서

나를 통하여

가장 큰 생명의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에 가득하도록,

그래서 슬픔과 고통이 물러가고

평화가 사랑과 기쁨이 가득한 하나님 나라가 오시도록,

우리의 삶에 복을 내려 주옵소서.

이야기의 처음과 끝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7. 28. 05:20

이야기 상실의 시대

(출애굽기 12:21-28)

 

1. 전세계가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기후변화는 독립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엮여 있는 하나의 이야기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상들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로 진행되고 있다. 이야기에는 흐름이 있다. 소설이든, 드라마든, 또는 어떤 논문이든, 이야기에는 흐름이 있다. 이야기의 진행 방향에 맞지 않는 생뚱맞은 이야기가 등장하면 그것은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는 흐름을 타고 흐른다. 이야기를 보면, 우리가 어떠한 현실, 또는 어떠한 현상을 맞닥뜨리게 될 것인지를 알 수 있다.

 

2. 하루 이틀 듣는 뉴스 거리는 아니지만, 지난 주 한국 사회를 강타했던 큰 뉴스 중 하나는 학교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하나는 교사가 초등학교 6학년 학생에게 구타를 당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교사가 학교에서 자살한 이야기이다. 모두 학교에서 발생한 일이다. 이것 때문에 전국의 교사들은 학교의 현실을 알아달라며 들고 일어섰고, 정치권에서는 서로 상대 진영 탓만 하는 공방이 일고 있다. 교사들 입장에서 이 문제를 묘사하면, 그야말로 ‘선생님들 수난시대’다. 이는 군사부일체의 이념 아래서 살던 우리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현상이다. 학교에서는 학생의 인권과 교사의 교권이 심하게 충돌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3. 정치가 진보와 보수로 양분되어 있는 것처럼, 교원단체도 크게 두 곳으로 양분되어 있다. 하나는 진보를 대표하는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 1989년 설립 / 77,000명 가입 / 31%)이고, 다른 하나는 보수를 대표하는 교총(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 1947년 설립 / 120,000명 가입 / 64%)이다. 전교조에서 이룬/이루고 있는 일 중 대표적인 것은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는 것이다. 지금 정치권에서는 학생인권조례와 교권(교사의 권한/권리)가 충돌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참 안타까운 게, 이는 마치 학생과 교사가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4. 여기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누가 맞느냐를 따지는 게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발생을 했고, 어떻게 하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를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서 살펴보는 것이다. 왜 우리는 지금 이렇게 학생과 교사가 대립하는 것 같은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가? 왜 우리는 교사들의 수난시대를 경험하고 있는가? 왜 이렇게 아이들은 선생님을 공경하지 못하고 막돼먹은 것 같은 현상을 보이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학교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학교만의 현상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이 겪고 있는, 우울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 모든 질문/의문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는 지금 이야기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산다. 이야기 상실의 시대.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 인가?

 

5. 우리 외할아버지, 오지섭 목사님이 지으신 책이 여러 권 있는데, 어릴 때 그 책을 읽으며 많은 감동을 받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주로 한시를 지으셨는데, 시 중에 한글시로 지으신, 아주 위트 있고 아름다운 시가 있다. 그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감람산 기슭에 웃는 백합되었다가

우리 주 근심할 때 내보일까 하노라

 

6. 나는 이 시를 흉내 내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은 적이 있다. 이것은 10대 후반에 지은 시이다.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우리님 마음속에 웃는 추억 되었다가

우리님 그릴때만 내보일까 하노라

 

그리고, 다음 시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지은 시이다. 제목은 ‘추모’이다. 내 나이 스무살에 지은 시이다.

 

달빛도 외로이 한숨만 내쉬는 이 밤

한세상 모든 시름 이곳에 모아 두고

먼저 가신 님 다시 만나 適人從父 하소서 (삼종지도: 재가종부, 적인종부, 부사종자)

 

7. 이야기란 내가 나보다 커지고 성장하는 사건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책을 통해서 할아버지를 경험하게 되고 거기에 연결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또한 그 정체성을 점점 키워 나가며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내가 지은 시들은 ‘나’를 키워나가면서 만들어낸 나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란 나의 바깥으로 나를 확장시키는 일이다. 이야기란 나보다 큰 존재에 나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혼자서, 독립적으로, 고립된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보다 훨씬 더 큰 세상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과 사랑을 키워 나가는 것이다. ‘이야기 상실의 시대’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상실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뜻이다.

 

8. 출애굽기는 우리에게 ‘이야기’에 대하여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창세기는 수많은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족장들의 이야기를 읽어 나가다 보면, 족장들이 각자의 아버지 이야기로부터 출발해 자기의 정체성을 키워 나가며 또다른 이야기를 창조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요셉의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루고,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 고센 땅으로 이주하고, 야곱이 죽으면서 자녀들을 축복하는 이야기에서 끝난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야곱의 축복에 따라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얼마나 축복 가운데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족보로 시작한다.

 

9. 그런데, 오랜 세월(430년) 애굽에 살면서, 점점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뒤안길로 밀려났다. 급기야 그들의 이야기는 온데간데없어지고, 고된 노동만이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이스라엘은 이야기 상실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이야기를 상실하니까, 삶 속에 탄식만 흘러나왔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출 2:23).

 

10. 출애굽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야기를 되찾아 주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출 2:24-25). 이야기를 상실하면, 죽음이 난무한다. 우리도 21세기 우리의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상실하면 자기 자신 밖에 남지 않는다. 인간은 극도로 개인화되고, 고립된다. 이야기를 상실하면 나보다 더 큰 존재에 나를 잇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비대해진다. 이런 존재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폭력이다. 자기 자신이 가장 크고 유일한 존재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 바깥에 있는 모든 존재를 자기 발 밑에 두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시대에는 폭력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폭력은 아주 가까운 관계에서도 발생한다. 부모에게, 선생님에게, 친구에게. 우리가 목격하는 현상들이다.

 

11. 출애굽은 ‘자기’를 더 큰 존재에 잇대는 작업이다. 노동에 파묻혀 고통 가운데 신음하다 보니, 자기 자신의 생존만 생각하며 살게 된 이스라엘은 어느새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렸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게 하신다. 이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의 자손이다. 또한, 더 나아가서, 조상들의 이야기에 기대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창도하도록 이끈다. 그 이야기는 모세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오랜 세월 동안 사라졌던 그들의 삶의 이야기가 다시 꽃을 피운다. 모세가 등장한 이후, 이스라엘은 이야기로 다시 가득 찬다.

 

12. 이야기가 사라져 고통 받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야기를 회복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지, 모세의 사역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운다. 출애굽기 12장은 이야기가 어떻게 회복되고, 어떻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지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고 있다. 모세는 애굽에서 어느 순간부터 노예로 전락하여 고통스럽게 살면서 이야기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야기를 다시 회복해 준다.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의 아들딸이 여러분에게 ‘이 예식은 무엇을 뜻합니까?’하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일러주십시오! 이것은 야훼께 드리는 과월절(유월절) 제사라고 일러주십시오. 이집트인을 치실 때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을 그냥 지나가시어 우리의 집을 건져주신 야훼께 드리는 것이라고 일러주십시오”(26-27).

 

13. 모세가 행하는 일은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먼 훗날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부모와 자녀 간에 이렇게 이야기가 매개가 된다면, 부모와 자녀 세대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연결되고, 서로의 공통된 정체성을 마련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은 그 정체성을 발판 삼아 자기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야기 안으로 자기를 위치시키면 자기도 더 명확히 보이고, 다른 이들도 보이고, 무엇보다 자기보다 큰 존재가 보인다. 인생은 나 혼자 써 나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삶이란 존재하는 것 모두가 함께 이야기를 써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함께 이야기를 써 나갈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사랑의 존재가 될 수 있다.

 

14. 학교에서 발생하고 있는 교사와 학생 간의 대립, 이들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는 폭력과 비인간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보겠다고, 학생인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또는 교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책을 마련하고 정쟁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를 상실한 시대에서는 학생과 교사의 이야기가 회복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정책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나보다 더 큰 존재에게 자신을 연결시켜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는 시대이다. 즉, 이야기를 상실한 시대이다. 자아가 고립된 시대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주 두꺼운 벽이 세워져 있다. 함께 즐겨야 할 볼링을 혼자서 즐기고 있는 시대이다. (로버트 퍼트넘 / <나 홀로 볼링 Bowling Alone>)

 

15. 우리는 정말로 유례없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전쟁의 시대에는 적군과 아군이 서로를 죽이지만, 요즘 우리는 스스로 죽는 시대(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자기의 그 외로움과 분노를 어쩌지 못해, 상대가 누구인지를 막론하고(부모든, 선생이든, 친구든) 화를 분출하여 상대방에게 폭력을 무차별적으로 행하는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가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이야기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나를 더 큰 존재, 나의 바깥의 존재에 연결시키는 일을 잘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상을 먼 데서 찾을 필요도 없다. 나 자신에게서,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우리 사회에서, 우리는 그것을 부지불식간에 경험하며, 또는 실행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우리 사회도, 심지어 지구도, 모두 위기에 처해 있다.

 

16.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지구도,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야기 안으로 자기를 위치시키면 자기도 더 명확히 보이고, 다른 이들도 보이고, 무엇보다 자기보다 큰 존재가 보인다. 인생은 더 큰 이야기로 확장해 가는 여정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부모의 이야기를 입고, 친구, 사회, 우주, 하나님의 이야기에 편입되면서 성장해 간다. 근데 요즘은 반대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하나님, 우주, 사회, 친구, 가족의 이야기로부터 탈퇴하여, 나 자신으로만 고립되어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야말로, 이야기 상실의 시대다.

 

17. 가정이 평안 하려면 가정에 이야기가 풍성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된 사건이 많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가정의 풍경은 어떤가? 각자 방에 들어가서 각자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산다. 밥도 각자 따로 먹는다. 가장 가까이 곁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멀다. 인터넷을 통해서 멀리 있는 사람과 연결된다. 그런데, 그 연결은 허구일 뿐이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이야기가 풍성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된 사건(친교/fellowship)이 많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의 풍경은 어떤가? 흩어져 살다, 주일에 정해진 시간에 모여 예배만 드리고, 또다시 흩어진다. 서로의 생사, 서로의 삶이 궁금하지 않다. 예배도 같이 드리고, 밥도 같이 먹고, 사역도 같이 하고, 서로의 희로애락을 나누며 눈물로 흘리고 기도도 함께 하고,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서 함께 동고동락해야 하는데, 우리는 서로 연결되는 것을 귀찮아 하고 싫어한다. 귀찮아 하고 싫어한다기 보다, ‘연결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렇게, 이야기 상실은 우리 안에 이미 깊이 와 있다.

 

18. 이렇게 이야기가 상실된 시대에서 기독교 신앙이 그래도 희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아주 강력한 이야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이야기. 그 중에서도 예수의 이야기.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주일에라도 다른 데 가지 않고 모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의 이야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의 이야기를 통해서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 아닌가. 이야기를 상실하여 모두가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명백하다. 이야기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이야기 안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열심히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더 긴밀히 연결되어, 이야기를 만들자. 이야기가 우리의 삶, 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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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총제적 문제: 기독교만 문제가 아니다]

 

의료사회학자 아서 프랭크(Arthur W. Frank)는 이러한 의학의 효율적인 통제를 "모더니즘적 의료"가 지닌 하나의 특질로 설명한다. 모더니즘적인 의료는 환자의 몸을 통제하는 대신 환자에게 완치 가능성을 약속했다. 환자는 '낫기' 위해서 의료에 몸을 맡긴 채 "환자 역할 sick role"을 할 뿐, 그 외의 몸짓이나 목소리는 축소되거나 소거되었다...... 완치의 개념이 질병이 '끝나는 것' 아니라 '조절 가능한 질병과 함께 무난히 살아가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문제는 '완치 불가'라는 한계가 드러났음에도 현대 의학이 효율적인 통제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기병, <연결된 고통>, 42-23쪽)

 

한국이 서구의 모더니티 사회 속으로 편입되면서 여러가지 진통을 겪어왔다. 한국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깊숙이 빨려들어가면서 모더니티가 안고 있는 모순과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 문제점을 교회를 통해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그러면서 기독교 신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문제들을 한탄하며 괴로워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여러가지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기독교를 갱신할 수 있을까?

 

기독교 내부에 있는 기득권자들도 문제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본인들의 권력과 밥그릇이 달린 문제라 사실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교회의 문제를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이 문제를 일으키는 바로 그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람쥐 쳇 바퀴 도는 꼴이다. 그렇다 보니,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우스운 꼴이 된다.

가령, 교단의 지도자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내세우는 단골 메뉴는 '영적 대각성'이라는 워딩 아래 벌이는 '스펙터클'이다. 복음주의권에서는 '로잔대회'를 준비하고 있고, 감리교에서는 '하디 영적대각성운동' 같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얼마 전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빌리 그래함 방한 50주년 행사를 거하게 치르기도 했다. 이들은 정말 이런 운동을 통해서 교회의 갱신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 열심을 낸다.

 

그러나, 열심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방향이 틀렸는데, 열심을 낸다면 틀린 방향으로 더 깊이, 더 멀리 가, 돌이킬 수 없을 뿐이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열심보다 방향이다. 방향을 바꾸느라 좀 느리고 더디더라도, 열심을 내려놓고, 방향을 제대로 잡는 작업이 중요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소위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그러한 안목이 전혀 없는 듯하다. 관심도 없는 것 같다.

 

기독교가 경험하는 위기는 사실 기독교만 경험하고 있는 게 아니다. 위의 인용문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의학계에서도 동일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의사를 성직자로, 환자를 교인으로 바꾸어서 진술하면, 이것은 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문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모더니티가 안고 있는 문제, 신자유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가 기독교라는 구체적 사회를 통해서, 의료라는 구체적 사회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더니티'라는 '바다'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이다보니 동일한 질병을 앓게 된다.

 

지금은 모더니티 식으로 스펙터클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면 안 되는 때이다. 프랑스 68혁명의 기수 중 한 명이었던 기 드보르(Guy Debord)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드러내주고 있듯이, 스텍터클은 현대 사회의 통치 기술이다. 스텍터클을 일으키는 것은 통지 욕망에 대한 표출일 뿐, 인간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여전히 스펙터클을 일으켜 '영적대각성'을 도모하겠다는 것은, 그저 그들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며, 모더니티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통치하겠다는 권력의지만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문제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스펙터클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물론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이것부터).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냥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진심을 다해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일상을, 그 지루한 일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자기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 것이다. 누구도 통제하고 통치하려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것이다. "질환 서사 속에는 가난, 고통, 성차별, 구조적 폭력이나 사회적 고통 등의 문제가 거의 언제나 상존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 삶에 담긴, 가난, 고통, 성차별, 구조적 폭력이나 사회적 고통 등에 귀를 기울이고, 그러한 문제를 통해 고통 받으며 사는 내 삶의 이웃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것이다. 그냥, 손잡아 주는 것이다. 폭력에 가담하지 않고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매체 중 스펙터클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우리의 삶을 보듬어주고 바꾸어 주는 것은 단연 '책'이다. 책 이외의 다른 매체들은 끊거나 줄이는 게 좋다. 그리고 시간을 할애하여 '책 읽기'에 전념하는 게 좋다.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스펙터클을 일으킬 시간과 에너지를 책 읽는데 진지하게 쓴다면, 한국교회는 갱신을 이룰 토양을 일굴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을 도구로 사용하면 망하듯이, 책읽기를 도구로 사용하면 망한다.

 

사실, 이런 글도 쓰지 말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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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해방신학과 언어문제]

 

해방신학에서 기본 원칙은 가난한 자들이 우리의 선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기술이나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희망을 배운다. 가난한 자들은 역사의 피해자들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당파성'(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함께 그들을 위하여 계시고 어떤 경우에서든지 억눌리고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존재한다.

(도로테 죌레, <현대신학의 패러다임>, 34-35쪽)

 

독일의 저명한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위와 같이 해방신학이 가진 의미를 아주 명료하게 풀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the poor'에 대한 한국어 번역입니다. the poor를 '가난한 자들'이라고 번역을 하면, 이것은 한국인의 인식 속에서 경제적 가난에 처한 이들을 떠올리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방신학에서 말하고 있는 '가난한 자들(the poor)'는 단순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죄'로까지 여겨질 정도로 사람들은 '가난'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해방신학이 단순히 경제의 개념 안에서만 '가난한 자들'이 우리의 선생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주장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일반 시민들에게 별로 설득력을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해방신학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가난한 자들’과 동일시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념을 담고 있는 언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대상을 인식하고 사고를 하고 그것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입니다. 언어가 사물, 또는 대상 자체를 잘 표현해 내지 못하거나, 잘 드러내지 못하면, 인간은 사물 또는 대상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삶 속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해방신학이 말하는 기본 원칙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우리의 선생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편이다." "사건의 인식과 해석의 기준은 가난한 자들이어야 한다."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이러한 원칙들은 너무 중요한 것이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the poor'를 '가난한 자들'로 번역한 한국말에 있습니다. 이 용어는 명백하게 경제적 가난을 연상시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난하게 살면 삶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청빈은 경제적 부담이 큽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영성가 중 청빈한 삶을 산 사람들은 본인의 청빈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짐을 지웠는지 모릅니다. 이는 유기농 식단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가능한 것과 같습니다.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the poor'란 단순히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만 가리키는 용어가 아닙니다. 이것을 한국어로 '가난한 자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the poor'의 의미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the poor를 '가난한 자들' 이외의 다른 용어로 옮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땅한 용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딜레마입니다.

 

그래서 죌레가 위에서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풀어서 말한 다음 문장은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들'이 누구인지를 인식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역사의 피해자들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이다."

 

이것은 경제적 가난의 유무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경제적 가난에 처해진 사람들 대다수가 역사의 피해자들이고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 이외에도 역사의 피해자들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것은 한 개인일 수도 있고, 한 가정일 수도 있고, 어떤 집단이나 또는 한 나라 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피해자들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은 오늘날 우리의 삶의 현장/현실에서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늘 가난한 자들의 편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피해자,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의 편이십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은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는 부단히 가난한 자들 곁에 서서 그들과 함께 서 있는 하나님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삶의 파괴를 경험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우리는 너무도 자주 삶의 파괴를 경험하고, 삶의 파괴를 경험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시방 위험’합니다.

 

역사의 피해자가 되는 일,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삶을 떠안는 일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희망을 만들어 가는 일은 남을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 한국의 수해 피해자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은총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하여 곡물 수출이 안 돼 굶고 있는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 국민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 이 땅의 모든 역사의 피해자,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삶을 떠안고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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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7. 20. 03:42

성경 이야기를 마음에 품게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창 50:19-21)

 

주님,

우리에게 신앙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신앙은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성경의 이야기를 하나도 품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주님,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성경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생각을 바꾸게 하시고,

그동안 보지 못하던 것을 보이게 하심으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 놀라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우리가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 첫걸음은 신앙을 통해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게 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주고,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줄,

성경의 이야기, 주님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게 하소서.

우리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주신 아름다운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