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거와 마병이여!

 

최정례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를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어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적어봤습니다.

 

당신을 통해 나의 가난은 드러난다

당신 앞에서 나는 나의 가난을 감출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은 나의 구세주다

 

내 머리속을 맴돌던 문장인데, 이 문장이 맴돌던 시간, 또다른 문장을 만났습니다. 열왕기하 13장의 문장입니다. 거기에는 엘리사의 죽음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와 자기의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왕하 13:14).

 

한 사람의 죽음을 이토록 애도하는 문장을 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엘리사의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는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를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지칭합니다. 한 존재에 대한, 실로 엄청난 존경입니다. 병거와 마병.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국방력입니다. 엘리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런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존재감, 이러한 존경을 받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성경에서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표현한 것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엘리사의 죽음 이야기를 두고 한참 동안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묵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죽음에 비추어 나의 인생을 돌아보았습니다. 최정례의 시집을 읽으며 떠올랐던 문장이 스쳐갔습니다. “당신을 통해 나의 가난은 드러난다. 당신 앞에서 나는 나의 가난을 감출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은 나의 구세주다.” 엘리사의 죽음에 비춘 나의 삶은 참 가난합니다. 부끄럽고 보잘것없습니다. 누가 나의 존재를, 나의 삶을 이렇게 애도하며 평가해 줄까, 생각해 보면, 나의 삶은 그저 가난하기만 합니다.

 

엘리사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 말씀은 그래서 구세주이기도 합니다. 존재의 가난함에서 벗어나, 지향해야 할 존재의 목적을 가리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래, 엘리사처럼 누군가에게 병거와 마병이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 한 사람만이라도 나를 ‘병거와 마병’으로 인식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무지막지한 존재의 가난함에서 벗어나서 약간의 부요함을 맛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요함을 약간이라도 맛보는 일, 이것이 구원이겠죠.

 

마침, 미국에 온 지 만 20년 되는 날(2023년 8월 11일)을 맞았습니다.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드는 날, 마침 최정례 시집을 읽으며 떠오른 문장과 성경을 읽으며 맞닥뜨린 엘리사의 죽음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나그네로서의 지난 20년 간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래도 늘 존재의 가난함 만을 맛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족도 일구었고, 바울처럼 교회도 개척해 보았고, 교회 건축도 해 보았고, 새로운 곳에 와서 또다른 교회를 섬겨보았고, 어려운 교회였지만 헌신하면서 신앙의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나를 그리워하는 친구들, 고향 교회도 있습니다. 엘리사의 죽음 이야기를 보며 존재의 가난을 느꼈는데, 다시 돌아보니, 그렇게 가난하게만 산 인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엘리사의 죽음 이야기를 보면서, 소망이 생겼습니다. 지난 20년의 나그네 삶을 돌아보며, 앞으로 20년의 나그네 삶을 생각해 봅니다. 기독교 (교회)가 어려운 시절이지만, 그것에 굴하지 않고,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교훈을 나의 교훈으로 삼아 봅니다.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누군가에게, 특별히 교회에 엘리사처럼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구나, 하는 다짐을 해봅니다.

 

이것은 나만의 고백, 다짐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앙을 지키는 것이 어려운 이 때에, 모든 그리스도인들, 좁게는 우리교회의 모든 교우들의 고백과 다짐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가 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 교회, 서로가 서로에게 ‘병거와 마병’이 되어 주는 교회, 그래서 든든하게 세워져 가는 교회. 이런 교회를 꿈꾸고 소망합니다.

 

엘리사의 이야기는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가난한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묵상하다 보면, 결국 우리에게 힘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하나님께 맡기고, 엘리사처럼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로 성장해 가도록, 나의 존재를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지체에게 내어줄 때, 우리는 오늘보다 더 풍요롭고 행복한 교회를 세우고, 더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가 되겠습니다. 당신도 나에게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가 되어 주세요. 이렇게 병거들과 마병들이 모인 교회를 누가 대적하겠습니까? 이게 부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병거와 마병 같은’ 당신이 있어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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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