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신학]

 

인류세. 영어로는 Anthropocene(안트로포씬). 2000년,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과 생물학자 유진 스토머가 기후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새로 고안한 개념입니다. 지난 7월 27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비장한 목소리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지구 온난화가 끝나고, 끓는 지구의 시대가 왔습니다!” 대개 우리는 더 좋은 시대가 도래했다는 ‘선언’을 듣고 싶어하지만, 그와는 달리, 유엔 사무총장의 선언은 비극적입니다. 지난 1만년 동안 기후는 인간에게 따뜻했습니다. 기후는 인간이 살아가기에 매우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1만년 동안 인류는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를 거치면서 찬란한 문명을 이루어 왔습니다. 지난 1만년 동안의 지질시대를 일컬어 ‘홀로세’(Holocene)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기후가 안정적이었던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epoch), 인류세가 도래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류세’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또다른 세금(tax)이 생겨난 줄 알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평온한 삶을 살아왔다는 뜻입니다. 기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인류세’가 기후에 대한 용어라는 것을 전혀 상상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인류세’는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용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이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가장 눈에 띄는 용어는 ‘인류세’와 더불어 ‘전례없는’(unprecedented)이라는 용어입니다. 인류세를 맞아 인류는 전례없는 경험을 합니다. 모두 기후 변화 때문에 겪게 되는 경험입니다.

 

왜 ‘인류세’라는 용어가 중요하고, 왜 인류는 ‘인류세’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그동안 지질시대를 구분하는 용어들은 모두 인간의 활동과 관계없는, 자연적인 활동에 근거한 용어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빙하기’(Ice Age)’가 끝나고 홀로세로 들어서게 된 것은 그냥 자연의 원리였지, 거기에 인류가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활동이 지질시대가 바뀌는 데 1도 관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인류세는 완전히 다릅니다. 인간의 활동이 지질시대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인류보다 몇 배나 더 강력한 생명체였던 공룡조차도 그들의 활동을 통해 지질시대를 바꾸어 놓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구생명체 중 유일하게 인류(인간)만 지질시대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는 정말 대단해!’라고 칭찬할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지금 자신들의 활동 때문에 스스로 죽을 위기에 처해졌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인류는 어떻게 활동을 했길래, 생명을 풍성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멸종을 가져왔는가?’ 이렇게 우리는 아주 깊은 반성의 시간이 필요한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제가 마음에 늘 품고 있는 문장 하나가 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말입니다. “If you want to change your way of life, acquiring the right image is far more important than diligently exercising willpower.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이 말 때문에 저는 어느 순간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인간은 머리속에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머리속에서 올바른 개념이 확립되지 않으면 인간은 의지력으로 자신의 삶을 바꾸거나, 자신의 행동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인간은 생각에 따라 행동합니다. 생각(사고)이 중요합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행동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먹고 하는 행동이나 또는 무심코 하는 행동 모두는 우리의 생각에 대한 반영입니다. 이것을 기후 변화 문제에 적용해 보면, 우리의 행동이 기후 변화의 원인이 되었다는 뜻은, 우리가 기후 변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다시피, 생각을 바꾸는 일은 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일만큼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이 바뀌면 ‘다시 태어났다’라는 말로 묘사할 정도로, 어떤 이의 생각이 바뀐 것을 보면서, ‘저 사람 다시 태어난 것 같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다시 태어난다’라는 말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중생, 거듭남’을 뜻하는 신학적 용어로 인식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을 일컬어서 ‘거듭났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인류세를 맞아 이 ‘거듭남’이라는 용어를 조금 다르게 사용할 필요가 생긴 듯합니다. 예수 믿고 거듭났는데, 그 거듭난 신앙인의 행동이 기후 변화를 불러왔다면, 그것은 진정 거듭난 것일까요? 거듭났다는 것은 생명이 풍성해졌다, 생명이 온전해졌다는 뜻인데, 실상, 인류세를 맞은 인류는 생명이 쪼그라들어, 생명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아주 큰 모순이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해야 할까요?

 

1990년을 전후로 서구권 나라에서는 ‘지구’에 대한 인문학적 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일컬어 ‘지구인문학’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인문학의 주제는 인간이나 국가(정치)였는데, 인문학 주제에 ‘지구’가 대두된 것이죠. 그동안 인문학의 주어는 인간 또는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지구인문학에 대한 논의가 일면서, 인문학의 주어가 인간 또는 국가에서 지구로 바뀐 것입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만의” 인문학에서, 이제는 지구가 주어로 등장하여, 모든 논의에서 지구를 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규정하는 ‘신학’도 마찬가지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기독교 신학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만의” 신학이었습니다. 신학의 주어는 하나님과 인간이었습니다.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더 나은 인간의 삶의 조건을 ‘신적인 삶(신에게 잇대어 있는 삶)’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지구를 주어에서 뺀 신학이 결국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만들었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죠. 우리는 이러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우리는 인류세를 맞아, 아주 깊은 신학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저는 ‘인류세 신학’이라고 명명합니다. 인류세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만 주어로 삼아 생각을 전개시키는 게 아니라 ‘지구’도 주어를 삼아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그러면 지난 2천년 동안 전개된 기독교 신학은 매우 다르게 재구성될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