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제적 문제: 기독교만 문제가 아니다]

 

의료사회학자 아서 프랭크(Arthur W. Frank)는 이러한 의학의 효율적인 통제를 "모더니즘적 의료"가 지닌 하나의 특질로 설명한다. 모더니즘적인 의료는 환자의 몸을 통제하는 대신 환자에게 완치 가능성을 약속했다. 환자는 '낫기' 위해서 의료에 몸을 맡긴 채 "환자 역할 sick role"을 할 뿐, 그 외의 몸짓이나 목소리는 축소되거나 소거되었다...... 완치의 개념이 질병이 '끝나는 것' 아니라 '조절 가능한 질병과 함께 무난히 살아가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문제는 '완치 불가'라는 한계가 드러났음에도 현대 의학이 효율적인 통제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기병, <연결된 고통>, 42-23쪽)

 

한국이 서구의 모더니티 사회 속으로 편입되면서 여러가지 진통을 겪어왔다. 한국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깊숙이 빨려들어가면서 모더니티가 안고 있는 모순과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 문제점을 교회를 통해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그러면서 기독교 신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문제들을 한탄하며 괴로워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여러가지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기독교를 갱신할 수 있을까?

 

기독교 내부에 있는 기득권자들도 문제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본인들의 권력과 밥그릇이 달린 문제라 사실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교회의 문제를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이 문제를 일으키는 바로 그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람쥐 쳇 바퀴 도는 꼴이다. 그렇다 보니,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우스운 꼴이 된다.

가령, 교단의 지도자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내세우는 단골 메뉴는 '영적 대각성'이라는 워딩 아래 벌이는 '스펙터클'이다. 복음주의권에서는 '로잔대회'를 준비하고 있고, 감리교에서는 '하디 영적대각성운동' 같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얼마 전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빌리 그래함 방한 50주년 행사를 거하게 치르기도 했다. 이들은 정말 이런 운동을 통해서 교회의 갱신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 열심을 낸다.

 

그러나, 열심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방향이 틀렸는데, 열심을 낸다면 틀린 방향으로 더 깊이, 더 멀리 가, 돌이킬 수 없을 뿐이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열심보다 방향이다. 방향을 바꾸느라 좀 느리고 더디더라도, 열심을 내려놓고, 방향을 제대로 잡는 작업이 중요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소위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그러한 안목이 전혀 없는 듯하다. 관심도 없는 것 같다.

 

기독교가 경험하는 위기는 사실 기독교만 경험하고 있는 게 아니다. 위의 인용문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의학계에서도 동일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의사를 성직자로, 환자를 교인으로 바꾸어서 진술하면, 이것은 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문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모더니티가 안고 있는 문제, 신자유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가 기독교라는 구체적 사회를 통해서, 의료라는 구체적 사회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더니티'라는 '바다'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이다보니 동일한 질병을 앓게 된다.

 

지금은 모더니티 식으로 스펙터클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면 안 되는 때이다. 프랑스 68혁명의 기수 중 한 명이었던 기 드보르(Guy Debord)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드러내주고 있듯이, 스텍터클은 현대 사회의 통치 기술이다. 스텍터클을 일으키는 것은 통지 욕망에 대한 표출일 뿐, 인간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여전히 스펙터클을 일으켜 '영적대각성'을 도모하겠다는 것은, 그저 그들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며, 모더니티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통치하겠다는 권력의지만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문제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스펙터클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물론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이것부터).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냥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진심을 다해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일상을, 그 지루한 일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자기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 것이다. 누구도 통제하고 통치하려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것이다. "질환 서사 속에는 가난, 고통, 성차별, 구조적 폭력이나 사회적 고통 등의 문제가 거의 언제나 상존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 삶에 담긴, 가난, 고통, 성차별, 구조적 폭력이나 사회적 고통 등에 귀를 기울이고, 그러한 문제를 통해 고통 받으며 사는 내 삶의 이웃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것이다. 그냥, 손잡아 주는 것이다. 폭력에 가담하지 않고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매체 중 스펙터클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우리의 삶을 보듬어주고 바꾸어 주는 것은 단연 '책'이다. 책 이외의 다른 매체들은 끊거나 줄이는 게 좋다. 그리고 시간을 할애하여 '책 읽기'에 전념하는 게 좋다.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스펙터클을 일으킬 시간과 에너지를 책 읽는데 진지하게 쓴다면, 한국교회는 갱신을 이룰 토양을 일굴 수 있을 것이다. 이성을 도구로 사용하면 망하듯이, 책읽기를 도구로 사용하면 망한다.

 

사실, 이런 글도 쓰지 말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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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