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변혁이다]

 

앎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지의 폐기가 아니다. 앎이 늘어난다고 해서 미지의 영역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한 방식의 지적 탐구는 실존에 대한 불안을 통제하기 위한 자기중심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앎은 무한으로 뻗어 나간다. 앎이 늘어날 때마다 우리는 더 경이로워하고, 미지의 영역은 한층 더 넓어진다. 본문, 전통, 공동체, '나'는 기술을 좀 더 능숙하게 익히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본문도, 전통도, 공동체도, '나'도 베일에 가려진, 통찰과 계시를 필요로 하는 신비다. 이들에 대한 앎은 숙달된 기술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여를 통해 선물로 받게 된다.

ㅡ 월터 윙크, <성서는 변혁이다>, 130-131쪽.

 

이 책의 첫 문장은 충격적이다. "역사 비평은 파산했다."(Historical biblical criticism is bankrupt.)

이 책은 역사 비평이 왜 파산했는지, 그리고 파산한 역사 비평에 어떠한 새로운 경영 방침이 필요한지를 밝히고 있다.

 

역사 비평이 '파산'했다는 말은 역사 비평이 죽었다는 말이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파산했다는 것은 새로운 경영 방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즉, 역사 비평을 전혀 필요 없는 구시대 유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 비평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

 

이 책은 성서학자들에게 가하는 일침이다. 모더니티의 유산인 성서 비평을 통해서 성서학자들이 어떻게 권력을 쥐게 되고, 그것을 이용해서 학문과 공동체가 어떻게 분열시켰으며, 분열된 결과 어떠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학문과 공동체가 분열되어 있는 비극적 상황을 치유하기 위한 시도이다. 이 책은 성서 연구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주장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변증법적 해석학'(dialectical hermeneutic)이다. 이 책은 대부분은 이것에 대한 서술이다. 이 변증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해석자와 성서본문 사이에 있는 주체-대상 이분법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잘 보여준다. 변증법적 해석학을 설명해 나가면서 쓰이는 두 가지 도구는 1) 지식 사회학적 분석과 2) 정신 분석학적 비평이다.

 

이 책이 주장하는 성서해석의 중요성은 이 책이 인용하고 있는 리처드 팔머의 진술에서 드러난다.

"참된 해석은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것이며 존재가 새롭게 드러나는 것이다. 해석은 현재와 분명한 관계가 있는 활동이다. 해석자는 해석을 통해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을 한다"(115쪽).

우리는 왜 성서를 읽는가? 왜 우리는 성서를 해석하는가? 왜 우리는 성서와 교제를 나누는가? 답은 변혁(transformation)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악한 일의 대부분은 '자기 중심성/자기집중'이라는 교만의 죄 때문이다(판넨베르크). 이러한 죄는 성서본문 해석의 왜곡에도 관여한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를 왜곡한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성을 잃고, 세계는 파괴된다.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변증법적 해석학'은 그것을 치유할 힘을 제공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감명 받은 문장 중 하나이다.

 

"위대한 신화와 종교 문헌들 가운데 그 무언가는 우리와 만나며 특별히 나자렛 예수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를 만나고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보여준다. 이때 '나'는 나에 관한 앎을 얻기 전에 먼저 내가 알려짐을 안다. 무언가는 대상을 통해 '나'의 계산을 뛰어넘는 깊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깊이를 통해 나는 '나'를 중심으로 짠 전략에서 벗어나 모든 피조물과 다시 연합하기 시작한다. 변증법의 과정을 거쳐 주체-대상의 이분법이 주체-대상의 관계로 대체되면, 그리하여 지평들의 친교가 이루어지면, 본문과 만남을 통해 우리의 삶은 변혁될 수 있다"(116쪽).

 

이 문장은 모더니티가 망쳐 놓은 '주체-대상의 관계'를 치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더니티의 발명 중 최고는 '주체-대상의 이분법'이고, 모더니티의 발명 중 최악도 '주체-대상의 이분법'이다. 인간이 자연을 대상화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삶은 비극으로 치닫았고, 급기야 기후변화 문제를 야기하여 집단 자살 상태에 들어섰다. 모더니티가 낳은 그렌델 '주체-대상의 이분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따라, 인류의 운명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에는 그 해결책이 담겨 있다. '주체-대상의 관계'가 그것이다. 지평들의 친교. 결국 친교가 중요하다.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 대상이되 대상이지 않은 주체들의 친교.

 

월터 윙크의 책은 솔직하고 담백해서 좋다. 허세가 없다. 아는 것을 친절하게 말해주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한다. 이는 존 도미닉 크로산 책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책을 읽으면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이 책에서 인용되고 있는 T.S 엘리엇의 시를 옮겨 적는다. 이 책이 말하고 싶은 해석의 깊이를 잘 전하고 있다.

 

그대가 알지 못하는 곳에 이르려면

그대는 무지의 길로 가야 한다.

그대가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하려면

그대는 무소유의 길을 가야 한다.

그대가 그대 아닌 것에 이르려면

그대는 그대가 아닌 길을 거쳐 가야 한다.

그대가 모르는 것만이 그대가 아는 것이다.

(<사중주 네 편>에 실린 East Coker라는 시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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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