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과 미래]

 

존 쉘비 스퐁. 미국 성공회의 감독입니다. 지난 팬데믹 기간(202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머리가 거부하는 것을 결코 가슴이 예배할 수 없다”는 신념 아래서 계몽주의 이래 엄청난 변화를 맞이한 세상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발견하여 대중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한 명의 기독교 사제(목회자)입니다. 이분이 쓴 책 중에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Why Christianity Must Change or Die)>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제목부터 내용까지 아주 도발적인 책입니다. 보수적인 전통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읽으면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를만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1998년도에 출간되었습니다. 벌써 25년 된 책입니다. 25년 전에 기독교의 미래를 예견하고, 그 미래를 걱정하고, 거기서 그친 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기독교 신앙이 여전히 의미 있는 것으로 작동하려면 기독교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제시한 책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기독교 신앙을 지속 가능한 종교로 거듭나게 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한 선각자들이 한 두 명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말은,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 어느 때부터인가 기독교의 위기를 감지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들이 감지한 기독교의 위기는 일반 대중들에게(일반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피부로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 그리고 정치적 격변과 바이러스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면서, 기독교의 위기는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수면 위에 떠올랐습니다. 이는 마치 ‘기후변화 문제’가 몇몇 과학자들에게만 기우가 된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기우가 된 경우랑 같습니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이제 세상은 기독교를 걱정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독교 내에서는 두 가지의 극명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이 극보수화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 신자(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교회를 안 나가는 사람들)가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극보수화 시키는 사람들은 결집을 위해서 배제와 차별과 혐오의 전략을 씁니다. 타종교에 대한 혐오, 소수자에 대한 혐오 등 이러한 전략을 통해 내부결집을 다집니다. 가나안 신자들은 기독교 내부 문제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방관자’로 남기 쉽습니다. 그냥 교회를 안 나갑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기독교 인구의 약 30퍼센트 정도가 교회 출석을 안 하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기독교인 10명 중 3명은 교회를 안 나가고 있다는 것이죠.

 

신앙의 극보수화든, 가나안 신자의 증가든, 모두 마음 아픈 일입니다. 두 방향은 모두 바람직지 않습니다. 신앙을 지키겠다고 신앙을 보수화시키는 문제나, 교회가 마음에 안 든다고 교회를 그냥 떠나버리는 것도 교회를 위한 일이 전혀 아닙니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를 지키며 기독교 신앙을 올바로 세워보겠다고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노력은 참 귀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모두가 허심탄회하게 지난 2천년 간의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치열하게, 많은 토론과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미래를 열어가야 하는 시대를 맞이한 듯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어디에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는지, 두 가지 정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입니다. 무엇이든지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신학을 정립한 교부로서 지대한 공헌을 했고, 종교개혁은 기독교를 좀 더 신실하게 구성하고자 노력을 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신학 가운데는 현재 21세기와 양립하기 어려운 신학, 다시 말해, 현재의 세상과 어울리기 힘들게 만든 결정적인 오류가 있다는 게, 요즘 신학자들의 비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의 박사, 사랑의 박사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 교부입니다. 은총, 사랑, 이것은 정말 중요한 기독교 신앙이죠.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총)이 주어졌으므로 생각할 필요 없고 그 말씀에 그저 순종만 하면 된다는 신학을 펼칩니다. 생각의 자리에 순종을 배치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기독교인들은 ‘사고(생각함)’보다는 ‘순종’을 더 높은 가치로 여기며 살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생각’ 보다 ‘순종’을 강조하게 된 것이죠.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고력’을 지닌 존재인데 그것을 작동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순종적인 인간 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만들었습니다. 계몽주의, 이성의 시대를 거치면서 기독교의 순종 논리는 기독교 신앙을 세상과 부대끼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사고력이 결여된 인간, 이것은 맹목적인 순종을 낳게 하는 독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또는 교회에서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비이성적인 행동을 보이는 기독교인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종교개혁은 기독교 신앙을 좀 더 신실하게 만들고자 한 노력이었지만, 결정적인 실수를 한 가지 합니다. 과학을 등진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 중세의 기독교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위에 세워졌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철학을 발전시키고 확립한 철학자입니다. 옛날에는 과학을 철학자들이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방법론을 따라 신학방법론을 발전시킨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자연신학이라 불립니다. 요즘 말로 하면, 과학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과학의 언어로 신학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은 기독교를 새롭게 한다는 명목으로 ‘르네상스 운동’에 동참합니다. 르네상스는 과거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새로움’이란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돌아간 과거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때, 종교개혁자들은 자연철학/자연신학을 버립니다. 이것은 크나큰 실수였다는 게, 요즘 신학자들의 비판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자연철학/자연신학, 즉 과학을 버리는 바람에 과학을 등지는 ‘반지성주의 신앙’이 기독교 내에 자리를 잡았다는 겁니다.

 

요즘,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답답해하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대표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사고력의 부재’와 ‘과학을 등진 반지성주의’를 답답해 합니다. 그렇다면, 21세기에 기독교가 여전히 의미 있는 신앙체계로 세상에 기여를 하려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적어도 두 가지는 자명합니다. 교회에서 순종의 가치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사고력의 가치도 동시에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순종은 생각의 끝에 가서 필요한 것이지, 사고력을 눌러버리는 권력이 아닙니다. ‘합리적 의심과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인간 사회는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사고력을 기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자명합니다. 역사 공부를 하는 겁니다. 성경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역사 공부를 통해서, 역사 안에서 기독교 신앙의 위치와 역할을 고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 교회에서는 과학 공부가 필요합니다. 과학의 언어와 사고를 익히고, 신앙을 과학의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지성이 필요합니다. 과학의 발견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과학의 언어와 신앙의 언어가 배타적이 아니고 진리를 위한 친구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바람이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성경공부와 더불어 역사공부와 과학공부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역사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으로 거듭나면 좋겠습니다. 또한 과학의 언어와 신앙의 언어가 어떻게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지, 탐구하고 나누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말이 통하는 인간’으로 거듭나면 좋겠습니다. 기독교의 미래는 이렇게,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