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편지]

 

218쪽. 나가며. "사랑해서 행복합니다."

책의 마지막을 읽어내려가며, '나가며', 눈물이 흘렀다.

떠나보낸 남편을 '프레드릭'에 비유하며, 남편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사랑을 고백하는 부분에서 눈물이 그냥 흘렀다.

 

이 책은 '기쁨의 편지'이다. 그런데, 그 기쁨을 전하는 사람은 이미 세상에 없는, 고인이 되었다. '로슈 이신근'. 누구라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일 것이다. 무명이다. 로슈라는 이름은 예수원에서 얻는 신명이다. '뿌리'라는 뜻이다. 로슈라는 신명도, 이신근이라는 이름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로슈라는 신명과 이신근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와 박힌다. 아주 평온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마샬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은 <미디어의 이해>라는 책에서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a is the message)"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경우에 따라서 매우 보수적인 말이다. 미디어, 즉 전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메시지의 경중이 갈린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유명하고 저명한 사람이 전하는 메시지는 사람들이 귀담아들을 만하고, 무명한 자가 전하면 사람들이 메시지를 귀담아듣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전하는 자, 즉 미디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명백히 정치적 수사다.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아젠다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정치적 수사다. 사실, 미디어보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다. 누가 전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메시지 자체보다 그 메시지를 전하는 '미디어(메신저)'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별거 아닌 메시지를 뭔가 있는 메시지로 둔갑시키기 위해서 '스펙터클'을 조성한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런 내용 없는 메시지에 영혼을 털털 털린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공허한 이유이기도 하다.

 

메시지가 중요하다. 로슈 이신근. 무명이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기독교 신앙의 무게를 맛보게 해준다. 그는 '비운동성 섬모 증후군'이라는 희귀병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약한 몸 때문에 생명은 그에게 늘 '문제'(matter)'였다. 그래서 그에게 '생명'은 '살라는 명령'이었다. 생명이 '살라는 명령'이 아니면, 그는 살아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삶과 죽음에 대한 '테마여행'처럼 꾸며져 있다. 들어가며 뭉클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가게 되고, 나올 때 그 뭉클한 마음에 눈물이 맺힌 채로 나오게 된다. '희년함께'에서 간사로 일하며 경험한 것들 뿐만 아니라, 공부하며 배우고 깨달은 신앙과 세계의 이야기가 담담한 일상의 언어로 잘 풀어져 있다. 신학자들의 언어처럼 현학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시장의 언어처럼 정제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삶 자체가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답게 그의 언어는 '종말론'을 품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오늘은 영원이고, 사랑은 구원이고, 신앙은 종말 그 자체다.

 

그가 감당했던 육체와 삶의 고통은 개인적으로 남지 않는다. 그의 고통은 자기를 넘어 타인에게로, 그리고 사회에로 확대된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따뜻하다. 그에게 신앙은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공동체적이다. 그에게 신앙은 혐오와 차별이 아니라 포용과 안아줌이다. 생명은 원래 그런 것이다. 살라는 명령이다. 살고자 하는 자를 살지 못하게 하는 폭력만큼 악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생명을 향한 따뜻한 '살림'이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희년의 정신을 체현한 신앙인 답게 그의 시선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통받는 인류에게 확장된다. 신앙이 이것을 말하지 않고 신앙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할 수 없다. 교회를 향한 그의 비판은 날카롭고 정직하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 안에서 자본주의의 영향력은 교회 밖과 다르거나 덜하지 않다. 대다수 교인이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을 살기보다 한국이 선택한 자본주의 세상을 산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122쪽). 그래서 그에게 '기쁨'은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간다'의 유체이탈이 아니다. 그에게 기쁨은 오늘 여기에서 '차별과 가난'이 없는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위해 싸우다 영원한 하늘 나라로 갔다.

 

그에게 결혼은 현실 바깥에 있는 상상이었다. 선천적으로 약한 몸 때문에 결혼을 꿈꾸지 못했다. 그런데 '희년함께' 운동을 하면서 뜻밖의 사랑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고, 두 아이까지 하나님께 선물로 받게 된다. 그 두 아이의 이름은 '희서'(기쁨의 편지)와 '예서'(사랑(예수님)의 편지)이다. 아직 어린 두 딸을 남겨두고 눈을 감는 게 고통스러웠겠지만, 그가 남긴 신앙의 유산은 두 딸을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편지로 키우기에 충분하다. 두 딸이 성장하여 아빠의 유작을 읽게 되면, 두 아이의 마음을 그 어느 누구보다 밝게 빛나게 될 것을 믿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고 믿는 이유는 '나가며'에서 고백한 이신근의 아내 이소영의 사랑 때문이다. 아내 이소영은 이렇게 고백한다. "프레드릭을 닮은 당신은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시인처럼 따뜻한 말로 나를 녹이는 사람이었어요. 손으로 핸드폰을 쥐는 것조차 힘들었던 당신이 힘겹게 꾹꾹 늘러 쓴 마지막 메시지를 기억해요. '당신을 만난 건... 꿈같은 선물이었어.' 당신의 메시지에 나도 간절한 마음으로 답장을 했어요. '당신도 나에게 꿈같은 선물이었어요'"(221쪽).

 

눈물 고인 눈으로, 책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가족 사진을 보았다. 저절로 기도가 나왔다. "희서와 예서가 아빠가 남겨준 신앙과 사랑의 유산 가운데서, 엄마의 사랑과 보호 속에서 잘 크게 해주세요. 그리고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깊은 슬픔을 안고 살아갈 아내 이소영을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그 무엇에도 꺾이질 않을 사랑으로 두 아이를 잘 키우며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세요."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면한다.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이것은 분명 '기쁨의 편지'이다.

 

*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어울릴 책은 단연 <슬픔의 노래>이다. 기쁨의 노래와 슬픔의 노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위로이다. 위로가 필요한 이 시대에, 우리 모두 위로 받고 힘을 내길, 진심으로 바란다.

 

* 로슈 이신근 형제, 평안히 잠드소서.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