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처럼 사랑하기

 

이삭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식은 부모를 본받기도 하지만, 부모를 반면교사 삼기도 합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반면교사 삼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이삭의 독특한 경험이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이삭이 살면서 자신 만이 경험한 사건, 즉 이삭이 다른 족장들(아브라함, 야곱, 요셉)과 다른 삶을 살게 한 그만의 독특한 인생 경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스마엘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모리아산 제물 사건입니다. 두 사건 모두, 이삭에게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각인된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과 하갈을 광야로 쫓아낸 이유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도, 모두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이삭은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언약이 뭐길래?!” 그런데, 이삭이 쌍둥이 아들을 낳고 보니, 이들 가운데도 ‘언약’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되리라.” 그러면 이삭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아버지처럼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에서를 광야로 내쳐야 했을까요? 이삭은 자신의 끔찍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렇게 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결코 언약 때문에 자식을 사지로 내모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끝까지 큰 아들 에서를 지킬 거야. 사랑할 거야.” 이삭은 사랑하기로 결단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저명한 유대인 랍비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가 쓴 책에서 이삭에 대한 삶을 해석하는 부분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이삭이 에서를 사랑한 것은 에서가 그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아버지들의 모습이다”(매주 오경 읽기, 64쪽). 그러면서 이삭이 그러한 결정을 한 것은 이삭이 경험한 아버지와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을 내놓습니다. 즉, 이삭이 에서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한 것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 자신을 죽이려 한 사건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눈시울을 뜨겁게 만듭니다. 족장들 중에서 가장 평탄한 삶을 산 것 같고, 가장 믿음이 없는 것 같고, 무난한 삶을 산 것 같은 이삭이 사실은 가장 힘든 삶을 살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도, 야곱도, 요셉도 아버지(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형 이스마엘, 즉 아브라함의 큰 아들을 죽음에 내몰았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고 하는 트라우마 속에서 평생 살았을 것입니다. 그 사건을 보면서 이삭도 마음 속에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도 버리면 어떡하지?’ 그런데 실제로 그와 비슷한 일이, 아니 더 큰 충격적인 일이 발생합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 든 것이죠.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제사 드리러 갔던 모리아 산에서 이삭은 정말 죽다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향한 이삭(아들)의 마음을 차갑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삭의 경험은 아주 원초적입니다. 이삭의 경험은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경험입니다. 마땅히 사랑받아야 할 존재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일입니다. 이삭은 아버지(부모)와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그 단절의 경험이 이삭을 평생 괴롭혔습니다. 이삭은 야곱과 요셉처럼 물리적 단절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단절의 경험, 아버지(부모)와의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 누구보다도 더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이유불문하고 에서를 덮어놓고 사랑한 것은 “이삭 자신이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 결박당했던 사건이 초래했던 부자간의 관계 단절을 치유하는 일이었다”(조너선 색스)는 진술은 눈시울을 적시게 만듭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던 이삭이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이삭의 상처를 치유했을 뿐만 아니라, 에서의 상처도 치유합니다. 이삭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에서는 동생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합니다. 이삭은 평화롭게 죽었고, 에서는 나중에 동생 야곱이 하란 땅에서 돌아올 때 얍복강에서 ‘죽이고 싶었던 동생’ 야곱과 화해합니다. 에서가 동생 야곱에 대하여 마음을 푼 것은 아버지 이삭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상처를 치유합니다. 사랑은 구원입니다. 이삭처럼 사랑하면, 우리들의 상처도 치유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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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