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과 언어문제]

 

해방신학에서 기본 원칙은 가난한 자들이 우리의 선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기술이나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희망을 배운다. 가난한 자들은 역사의 피해자들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당파성'(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함께 그들을 위하여 계시고 어떤 경우에서든지 억눌리고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존재한다.

(도로테 죌레, <현대신학의 패러다임>, 34-35쪽)

 

독일의 저명한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위와 같이 해방신학이 가진 의미를 아주 명료하게 풀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the poor'에 대한 한국어 번역입니다. the poor를 '가난한 자들'이라고 번역을 하면, 이것은 한국인의 인식 속에서 경제적 가난에 처한 이들을 떠올리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방신학에서 말하고 있는 '가난한 자들(the poor)'는 단순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죄'로까지 여겨질 정도로 사람들은 '가난'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해방신학이 단순히 경제의 개념 안에서만 '가난한 자들'이 우리의 선생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주장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일반 시민들에게 별로 설득력을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해방신학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가난한 자들’과 동일시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념을 담고 있는 언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대상을 인식하고 사고를 하고 그것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입니다. 언어가 사물, 또는 대상 자체를 잘 표현해 내지 못하거나, 잘 드러내지 못하면, 인간은 사물 또는 대상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삶 속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해방신학이 말하는 기본 원칙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우리의 선생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편이다." "사건의 인식과 해석의 기준은 가난한 자들이어야 한다."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이러한 원칙들은 너무 중요한 것이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the poor'를 '가난한 자들'로 번역한 한국말에 있습니다. 이 용어는 명백하게 경제적 가난을 연상시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난하게 살면 삶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청빈은 경제적 부담이 큽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영성가 중 청빈한 삶을 산 사람들은 본인의 청빈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짐을 지웠는지 모릅니다. 이는 유기농 식단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가능한 것과 같습니다.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the poor'란 단순히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만 가리키는 용어가 아닙니다. 이것을 한국어로 '가난한 자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the poor'의 의미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the poor를 '가난한 자들' 이외의 다른 용어로 옮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땅한 용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딜레마입니다.

 

그래서 죌레가 위에서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풀어서 말한 다음 문장은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들'이 누구인지를 인식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역사의 피해자들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이다."

 

이것은 경제적 가난의 유무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경제적 가난에 처해진 사람들 대다수가 역사의 피해자들이고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 이외에도 역사의 피해자들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것은 한 개인일 수도 있고, 한 가정일 수도 있고, 어떤 집단이나 또는 한 나라 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피해자들이며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은 오늘날 우리의 삶의 현장/현실에서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늘 가난한 자들의 편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피해자,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자들의 편이십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은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는 부단히 가난한 자들 곁에 서서 그들과 함께 서 있는 하나님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삶의 파괴를 경험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우리는 너무도 자주 삶의 파괴를 경험하고, 삶의 파괴를 경험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시방 위험’합니다.

 

역사의 피해자가 되는 일,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삶을 떠안는 일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희망을 만들어 가는 일은 남을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 한국의 수해 피해자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은총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하여 곡물 수출이 안 돼 굶고 있는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 국민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 이 땅의 모든 역사의 피해자,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괴된 삶을 떠안고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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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