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종말]

 

사도 바울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15장 24절)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고 나서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드릴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권세, 권력, 권능은 '천사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즉, 최후의 심판 이후에는 인간적이든 천사적이든 모든 권력이 종말을 고하고 우리는 직접적으로 신 아래 있게 된다. 결국 메시아의 도래와 더불어 신이 직접 군림하기 때문에 더 이상 천사들의 매개에 의한 통치와 행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천사들을 파멸시킨다. 다시 말해서 신은 모든 권력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무위'로 돌리고, '비활성화'시키며, '실업의 상태'로 남겨둔다.

(양창렬 , "조르조 아감벤",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 244-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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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은 메시아의 도래를 통해서 온다. 우리는 '아직' 메시아의 도래를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메시아의 도래를 경험했다. 우리는 이 역설 속에서 산다.  최후의 심판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우리는 '천사들'의 통치 아래 산다. 여기서 천사들이란 권세, 권력, 권능을 말한다. 현실 정치 용어로 말하면, 대통령, 총리, 장관, 국회의원, 시장, 구청장 등이다.

 

모든 권력은 종말을 고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통치하는 '천사들'의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겸손이고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어차피, 메시아의 도래를 통해 사라질 권력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권력을 사라지게 할 능력을 가진 메시아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미 그들은 자신을 메시아 반열에 올려놓은 메시아 병에 걸린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 우리는 매개된 통치와 행정의 세상에 살고 있다. 그렇다 보니, 어렵고 혼란스럽다. '천사들'이 잘 해주면 좋은데, 보통 천사들은 잘 하지 못한다. 여기서 교회의 기능은 확연해진다. 천사들이 잘 하도록 채찍질하거나, 천사들이 매개되지 않은 통치와 행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자신의 기능을 상실하면, 천사들과 한통속이 되어, 세상의 고통을 더 가중시킨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다음과 같은 우화를 전한다.

 

하시딤(경건한 유대인들)은 도래할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는 모든 것이 이곳과 꼭 같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방은 도래할 세계에서도 지금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아이는 다음 세상에서도 지금 자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자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생에서 걸치고 있는 옷들을 저 생애에서도 입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지금과 같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약간 다르게.

 

위 우화를 전하며 에른스트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약간을 실현하는 것은 너무 어려우며, 이 세상에서 인간이 그 방도를 찾기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메시아의 도래가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의 세상에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직 이 세상은 '천사들'의 매개를 통해서 통치가 이뤄지고 있다. '약간 다르게'만 해도 살만할 텐데, 인간에게는 그 약간 다르게 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고통 가운데 신음한다. 그 신음은 출애굽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것과 닮았다.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다. 그러나, 그 도래를 막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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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