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질서와 사건]

 

수학, 시, 정치, 사랑.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혁명적인 것'이다.

이것은 모두 '지배질서'를 거부하고, 뛰어넘는다.

 

한병철이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밝히고 있듯이,

권력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권력은 사람들에게 저항을 받지 않고 작동한다. 권력이 사람들에게 저항을 받게 되면, 그때 권력은 더 이상 권력이 아니게 된다.

 

지배질서는 법을 통해 체제를 만들어 놓고, 그 바깥에 나가는 것을 '범죄'로 규정하여 죄의식과 죄책감을 심으며 작동한다. 법 바깥의 일들은 모두 '불가', '불허'로 규정한다. 불가능 한 것, 불허된 것은 금지되고 배제된다.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드는 것이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이다. 사건은 불가능한 것, 불허된 것을 파고든다. 지배질서 바깥에서 발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건'이다.

 

바르트는 말씀을 '사건'으로 보았다. 바디우의 사유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말씀은 인공세계(지배질서)의 바깥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불가능 한 것, 불허된 것, 그래서 금지되고 배제된 것 바깥에서 발생하는 것이 '말씀이다. 말씀은 사건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이유는 젊은이들을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지배질서는 소크라테스를 규정하기를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자'라고 했지만, 이것은 지배질서의 언어에 불과하다. 지배질서에 의문을 품게 하고 도전하게 하고 전복시킬 수 있는 '혼'을 불어넣는 것, 지배질서의 입장에서는 '타락'이지만, 이러한 '타락' 없이 어떻게 세상이 바뀌겠는가.

 

지배질서에 봉사하는 것은 경건하고 온건한 것이고, 지배질서에 맞서는 것은 타락하고 불온한 것이라는 '이념'이 이미 우리 안에는 권력처럼 자리잡고 있다. 지배질서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그 질서를 벗어나면 큰 일 날 것 같은 불안감과 죄책감을 심어주면서.

바디우는 철학자이므로, 혁명적인 것의 범주를 수학, 시, 정치, 그리고 사랑으로 제한했다. 신학자는 여기에 혁명적인 것을 하나 덧불일 수 있다. 신앙. 혁명적인 것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수학, 시, 정치, 사랑, 그리고 신앙.

 

좋은 신앙과 그렇지 못한 신앙의 차이는 혁명적이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있다. 다른 말로, 지배질서에 저항하느냐, 아니면 지배질서에 봉사하느냐에 있다. 신앙이 수학보다, 시보다, 정치보다, 사랑보다 못하면 부끄러운 것이다.

 

도덕과 윤리는 지배질서에 봉사하지만, 신앙은 도덕과 윤리를 넘어서면서 지배질서에 도전한다. 그래서 신앙은 그 시대의 바로미터이다. 좋은 신앙은 지배질서에 봉사하지 않는다. 좋은 신앙은 지배질서에 저항한다. 지배질서가 신앙을 우숩게 아는 사회는 질서를 가장한 악이 판을 치고, 지배질서가 신앙을 무섭게 생각하는 사회는 악이 고개를 들지 못한다. 들더라도 눈치를 본다.

 

신앙인이여. 지배질서를 견뎌내는 데만 신앙을 쓰지 말고, 지배질서에 '사건'을 일으키는데 신앙을 쓰십시오. 사건이 없으면 지배질서는 태평성대를 누리며 생명을 마구마구 착취할 것입니다. 사건이 많으면 지배질서는 그것에 대응하느라 바빠서 정신을 못차릴 것입니다. 사건을 일으키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그 사건이 바로 메시아가 우리 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지배질서의 전복은 그렇게 발생합니다. 그러니, 힘을 내십시오. 신앙을 버리지 말고, 신앙을 더 굳건히 가지십시오. 신앙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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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