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당신앙과 성전신앙

 

구약 성경에는 각각 신명기사관(신명기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것)과 역대기사관(역대기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것)에 의해서 기록된 책들이 있습니다. 신명기사관에 의해서 기록된 책들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입니다. 역대기사관에 의해서 기록된 책들은 역대기 상·하, 에스라, 느헤미야입니다. 이 두 사관이 어떻게 다른지는 열왕기서와 역대기서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동일하게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한 기록을 하고 있으나 왕들에 대한 기술 방식이나 평가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일례로, 열왕기에 그리고 있는 므낫세 왕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가 어떻게 아버지 히스기야의 산당 폐쇄 정책을 뒤집어 산당을 통해 악을 꿰했는지를 보여주고 그를 악한 왕으로 평가하는 반면에, 역대기에 그리고 있는 므낫세 왕의 기록은 그가 악을 저지른 후에 앗수르를 잡혀 간 뒤 회개 기도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열왕기에서 므낫세 왕은 악한 왕이지만, 역대기에서 므낫세 왕은 악했지만 회개하여 구원 받은 착한 왕으로 묘사됩니다.

 

신명기사관은 ‘범죄-징계-회개-구원’의 도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 구조가 명백히 드러나는 곳은 사사기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하나님은 징계하고, 그 징계가 너무 고달파 하나님께 회개하면,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 그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인데, 그 이유는 사사기가 신명기사관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사관의 역사 관점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사관은 단순히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하시고, 그 역사가 예언자를 통해서 예언되고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신명기사관은 예언자적 전통에 서 있는 역사 관점입니다. 예언자 그룹이 쓴 성경이라는 뜻입니다.

 

역대기사관은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복귀한 후 이스라엘 공동체를 다시 재건하는 것에 큰 관심을 둡니다. 70여년 동안 바벨론 포로로 지내면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 정체성이 많이 모호해지고 약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으로 다시 복귀한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의 정체성을 다시 살려,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이어 그와 같은 영광스러운 나라를 재건하는 데 목적을 둡니다. 그렇다 보니, 역대기사관은 다윗 왕과 그 왕조를 이상적으로 그립니다. 그래서 역대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신명기사관에서 밝히 드러낸) 다윗이 밧세바를 불의하게 취한 사건도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역대기사관은 성전신앙을 아주 중요하게 다룹니다. 다윗 왕조와 성전신앙의 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자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역대기사관은 제사장적 전통에 서 있는 역사 관점입니다. 제사장 그룹이 쓴 성경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두 사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지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산당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를 고민할 때, 그 이유 중 하나가 ‘산당 제거 실패’입니다. 산당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것 때문에 한 나라가 망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산당이라는 것을 그냥 가볍게 보고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산당은 히브리어로 ‘바마’(단수), ‘바모트’(복수)라 불립니다. 이것은 어떤 장소의 높은 곳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산당은 영어로 ‘high place’로 불립니다. 높은 곳은 신과 가까운 자리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 높은 곳에 지어진 산당은 신과 소통하는 장소로 쓰였습니다. 산당은 신에게 제사 드리는 장소입니다. 가나안 땅에는 이미 토착세력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 입성 이후 그 토착세력의 전통을 이어받아 산당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산당신앙에 물든 것이죠. 그런데, 이게 왜 악한 것으로 평가받는 것일까요? 산당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게 무엇이 잘못일까요?

 

산당은 단순히 제사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산당은 기득세력의 본거지 역할을 했습니다. 가나안 도시국가들은 지방의 산당들과 연합하여 통치체제를 형성했습니다. 산당은 예루살렘 중심의 성전신앙에 대한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이것은 다윗 왕조에게 굉장히 큰 정치적 부담을 안겼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솔로몬 이후에 분열된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를 중심으로 남유다가 형성되고, 다윗 왕조에 반기를 든 지파를 중심으로 북이스라엘이 형성됩니다. 북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은 북쪽 지파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내려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막기 위해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워 그곳에 금송아지를 둡니다. 산당은 이렇게 정치적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문제는 산당이 추구하는 가치에 있습니다. 산당은 가나안 농민들의 신전으로 풍요를 기원하는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곳이었습니다. 사람들과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오직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가까운 가족에게만 쏟게 만들었습니다. 권력을 추앙하게 하고, 성공과 물질 축복 기원만 바라게 했습니다. 공공성, 정의, 윤리와 같은 보편적 인류애를 찾아볼 수 없는 게 산당신앙입니다. 이러한 산당신앙의 가치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여호와 하나님 신앙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평화, 정의를 추구하여 보편적 인류애를 완성하는 우주적 샬롬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그 일에 부름 받은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산당신앙은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를 가로 막는 방해물이었습니다.

 

신앙이 보편성을 잃어버리면, 언제든지 산당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면 내가 삼일만에 다시 짓겠다’하신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보편적 신앙의 가치를 제대로 실행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 그룹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은 로마 정권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대가로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수많은 수탈들에 대해서 눈감고 있었죠. 삭개오 같은 무리가 백성들에게 큰 세금을 징수하여 수탈해도 못 본채 했습니다. 자신들의 자리가 보존되고 자신들은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전신앙을 산당신앙으로 전락시키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고 다시 짓겠다고 선포하신 것이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산당신앙으로 전락하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거꾸로 돌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개인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전신앙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앙은 생명과 평화 정의를 통해 공공성을 추구하며 보편적 인류애를 구현하는 우주적 샬롬의 신앙을 갈망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신 것처럼, 기독교 신앙은 자기 집중의 신앙이 아니라 자기를 넘어서고 자기를 내어놓는 보편적 인류애의 공공신앙을 추구합니다.

 

시대가 혼란스럽고 어렵습니다. 이럴 때 고개를 드는 게 산당신앙입니다. 먹고 살기 힘들다 보니 이웃을 살필 겨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 남들 돌볼 겨를이 어딨냐고 반문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때 자기를 내어놓는 신앙입니다. 자기에게 매몰되지 않고, 더 큰 존재에 연결되어 더 큰 세상을 바라보고 꿈을 꿉니다. 오히려 어려울 때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성전에 나와 자기를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부지런히 주변을 돌보고 자기 자신을 내어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려운 시절을 보내면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고 지키는 방법입니다. 자기 자신 안으로 숨어버리는 산당신앙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 내어놓는 성전신앙을 지켜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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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