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인생은 없다 (No life is late)

 

재물이 많은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유대인들의 영성이 담긴 질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선한 일을 많이 해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덕을 많이 쌓으면 그만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쉽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 재물이 많은 청년은 선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계명을 잘 지킨 것이 그에게는 선한 일입니다. 어디 흠잡을 데 없이 아주 도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한 가지를 더 행하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 21). 이 말씀을 들은 재물이 많은 청년은 근심하며 예수님 곁을 떠나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에서 아주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24).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부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일까요? 그렇다면, 부자가 된 사람이나, 부자 나라의 국민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일까요? 모두가 부자가 되기를 꿈꾸는 이 시대에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절대로 부자되기를 갈망하면 안 되고, 부자가 된 사람들을 오히려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 이 시대에 이 말씀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같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도 놀랐던 모양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여기에는 탄식이 묻어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이까?” 맞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인 사람과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 상황이 이럴진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이 말씀은 정말 맞는 말씀 같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꿈꾸는 것은 언감생심인 듯합니다. 말씀을 듣고 당황해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이 맥락에서 예수님은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비유로 알려주십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마 20:1).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아주 쉬운 비유입니다. 포도 수확철에 흔히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오전 6시) 인력시장에 나가 하루 일당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일꾼을 데려다 씁니다. 일꾼이 더 필요했는지, 포도원 주인은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도 나가서 일꾼을 구해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후 5시에도 인력시장에 나가봅니다. 오후 6시에 하루 일과가 끝나기 때문에 오후 5시에 인력시장에 나가서 일꾼을 구해오는 일은 매우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집 주인은 인력시장에 나가서 아직까지 일을 구하지 못해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는 노동자를 발견합니다. 집 주인은 ‘아무도 써 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우두커니 서 있다’는 일꾼을 데려다 포도원에서 일을 시킵니다.

 

이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할 시간입니다. 집 주인은 회계 담당자를 시켜 일당을 지불합니다. 일당 지불은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노동자들부터 지급됩니다. 그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그들보다 훨씬 일찍 와서 일한 노동자들은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노동자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자신들은 그들보다 더 많은 일당을 받게 될 것 같아 기대감에 부풉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집 주인은 그들에게도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노동자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일당으로 지급합니다. 한 데나리온을 받아든 일꾼들은 불평합니다. “아니 어떻게 1시간 일 한 사람하고 하루 종일 일 한 사람하고 일당이 같을 수 있어요? 이건 불공평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신을 가치 있게 여긴 노동자들과 자신을 별로 가치 없다고 여긴 노동자들을 봅니다. 일찍 와서 오랜 시간 동안 일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 일찍 선택되어 노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오후 5시에 겨우 선택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별로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고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가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에 걸맞은 대우를 요구했습니다. 자신들은 가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겨우 1시간 남겨 놓고 일에 투입된 사람들과는 차별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한 데나리온 받은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노동의 대가를 받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자신들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집 주인에게 이렇게 불평하고 있는 겁니다. “왜 우리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것입니까?” 이 사람들은 바로 위에서 본 부자 청년과 같습니다. 자신은 이미 선하고 도덕적인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 천국에 들어가기에 유리한 위치에 올라서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집 주인은 이들의 기대를 완전히 뒤집어 엎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 ‘네가 악하게 보느냐’는 문자적으로 ‘너의 눈이 악하다’는 뜻입니다. 집 주인은 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잣대로 자기를 평가합니다. 집 주인의 평가를 불신합니다. 자기의 잣대로, 자신들을 선하게 평가하고, 자신들을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그래서 자신들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집 주인은 이들을 일컬어 악하다고 꾸짖습니다.

 

이 이야기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정말 통쾌한 비유이고, 정말 안심되는 비유이고, 정말 멋진 비유입니다. 천국은 정말 유쾌한 곳입니다. 집 주인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이들은 자기보다 가치 없는 인간이 자기와 동일하게 대우 받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보통 우리가 하는 행동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이룬 만큼, 거기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집 주인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데 중점을 둡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자신이 가치 없다고 자책하는 사람이나, 똑같이, 가족을 부양하고 삶을 이어가는데 한 데나리온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한 겁니다. 남보다 더 가치 있고 남보다 더 우위에 있는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게 아닙니다. 천국은 생명의 깊이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아니, 이런 사람은 이미 천국을 사는 것이겠죠. 그래서 이런 이들은 부자되는 것과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들은 인생의 깊이에 관심을 둡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조금 부족한 것 같아도 너무 힘들어 하거나 낙심하지 마세요. 그리고 자신이 조금 일찍 온 자 같거든, 겸손하세요. 늦은 인생은 없습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자기의 가치를 평가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선하심에 삶을 맡겨드리세요. 하나님이 구원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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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