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0. 12. 9. 23:29

2010 12 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3:1-12

제목: 기본으로 돌아가라 하나님 나라가 정의다

 

영국에서 최근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려서 엄마에게 버려진 형제가 있었습니다. 한 명은 입양을 갔는데, 한 명을 그렇지 못해서 고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고아원으로 보내진 아이는 평생 엄마를 그리워하면서 살았습니다. 40년이 넘도록 이 사람은 엄마를 찾았습니다. 나이가 50세가 넘어서 비로소 그토록 꿈에 그리던 엄마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지독한 당뇨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40년 동안 그리면서 찾았던 엄마 앞에 자신이 갑자기 나타나면 엄마가 충격을 받을 지 모른다는 생각에 엄마 앞에 나타나는 것을 잠시 접어두고 엄마가 병원에 가서 병 치료를 먼저 받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병원에서 치료 받던 중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은 40년이 넘게 찾다 겨우 찾아낸 엄마를 끝내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만날 걸, 후회했습니다. 죽은 엄마 유품에서는 아들들을 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에 대한 유서들이 나왔습니다. 엄마도 힘든 인생을 살았고, 아들도 힘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둘은 만나지 못하고 영영 그리운 사람으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 미혼모가 두 아들을 키우다가, 아이들을 키우기 귀찮다며 이제 겨우 3살과 1살 먹은 아이들을 집에 놓아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집을 나갔습니다. 아이들 우는 소리가 들려 주변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했지만 집에 가서 문을 두들겨도 아무 소리가 없어 경찰은 그냥 되돌아 갔습니다. 열흘이 지난 후, 세 살, 그리고 한 살 먹은 아이들은 엄마를 그리워하면서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경찰에서 이 아이들의 엄마는 단순히 아이들을 키우기 귀찮아서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자식을 몇 명 살해한 싱글맘이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세 번째 아이가 죽었는데, 이상하게 먼저 죽은 두 아이의 상황과 똑같은 바람에 경찰에 의심을 사 붙잡혔습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아이들이 이상하게 똑같이 장염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아이들 앞으로 사망 보험이 들어져 있었습니다. 아이가 죽고 나서 엄마는 보험금을 탔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 명의 아이들을 죽였는데, 그 중에 두 명은 입양한 아이들이고 한 명은 자신이 직접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죽일 때 수법이 이랬습니다. 젖병 등 아이들의 입에 들어가는 기구를 소독하지 않았습니다. 소독하지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병균이 아이의 몸 속에 들어갔고 서서히 아이는 병균에 감염이 되고 결국 장염을 일으켜서 죽었습니다.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 죽인 이유가 어이 없습니다. 애들이 딸린 몸으로 어디 취직하기도 힘들고, 돈도 필요해서 죽였다는 겁니다.

 

가슴이 아프죠? 여기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평화가 보이십니까? 정의가 보이십니까? 이러한 이야기는 수도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이 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 셀 수 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끔찍한 일, 어이 없는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는 끊임 없이 우리 인생을 흔드는, 우리 마음에 평화를 깨는, 우리 삶에 평화를 깨는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옳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 순간, 평화는 깨집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무엇이 옳은 것인지 분간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합니다. 옳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지는, 아니면 생각과는 다르게 나쁜 결과를 가져올 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우리가 하는 일의 결국은 허망할 뿐입니다. 인간이 쌓아놓은 공적은 결국 다 허무하게 끝이 납니다. 아무리 큰 공적을 쌓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 죽음을 맞이하면서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맙니다. 이게 우리 인간의 실존입니다. 우리 삶 속엔 참 평화가 없습니다. 그저 상대적인 평화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 마저 쉽게 쉽게 깨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는 이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사실 세상을 향해 외칠 말이 참 많습니다. 소크라테스 같은 경우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외쳤고, 공자 같은 분은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말을 외쳤고, 수많은 선각자들이 세상을 향해 수 없이 많은 말들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왜 세례 요한은 하필이면 그 많은 말들 중에, “회개하라!”를 외쳤을까요? 이는 세례 요한만이 외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도 세상을 향해서 외친 첫 마디가 회개하라!”였습니다.

 

여러분! “회개하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표면적으로는 잘못한 것을 뉘우쳐라, 정도로 들립니다. 뭘 그렇게 잘못하고 산다고, 교회만 오면 회개, 회개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까? 오늘 교회 오시기 전에 무슨 잘못을 하셨습니까?

 

50, 60, 70대의 세 남자가 모여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50대 남자가 먼저 말했습니다. 형님들 나는 오늘 배가 고프길래 집사람한테 밥 좀 차려줘라고 물어봤다가 뒤지게 맞았어요. 그랬더니, 60대 남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동생은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오늘 집사람이 어디 가길래, “어디가?”라고 물어봤다가 뒤지게 맞았어!. 그랬더니, 70대 남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생들은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오늘 아침에 눈 떴다고 집사람한테 뒤지게 맞았어!

 

뭐가 그렇게 잘못입니까? 교회 올 때 스탑 싸인 좀 안 지키고 온 것이 그렇게 잘못입니까? 법규를 잘 지켜야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교회 와서 회개해야 할 정도로 큰 잘못입니까? 하나님은 그런 것까지도 철저하게 지키면서 살기를 바라십니까? (물론 지켜야 합니다만). 오늘 교회 오기 전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뭐가 그렇게 잘못을 했습니까? 무슨 죄를 그렇게 고백해야 하고, 무엇을 그렇게 회개해야 합니까?

 

이건, , 회개, 이런 것을 말하는 교회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담고 있는 뜻이 무엇인지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 우리에게 잘못이 있는 겁니다. 죄나 회개를 위에서 말한 것 정도로 하찮게 생각하니까, , 회개 등의 말이 귀에 거슬리는 것이죠.

 

회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하라!”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죄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신학적 개념의 죄입니다.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범죄와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더 근원적인 죄를 이야기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 신학적 개념의 죄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싶어도 그게 잘 안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을 일컬어 의인이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옳은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우리가 잠깐 살펴보았듯이, 우리에게는 옳은 일을 할 수 있을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이게 원죄입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혜가 없습니다. 이게 원죄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지혜가 없다는 겁니다. 이 상태가 바로 죄의 상태이고, 불의의 상태입니다.

 

오늘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칩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까 회개하라는 말처럼 들리지만, 두 말은 같은 의미를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회개하라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라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니 그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필연적으로 회개를 이끌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피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면서, 한 사람에 대해서 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이라는 통치의 개념이, 한 사람에게로 모아진다는 말씀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여기서 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절에서 요한의 모습을 기이하게 그리고 있는 것은 그가 종말론적 인물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시대의 종말이 가까이 왔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종말이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사람으로서의 요한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그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는 묘사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선포하고 있는데, 그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한 사람에게로 모아진다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이, 세상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거부하는 뜻으로 어떤 일을 했습니까? ,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다고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능력도 지혜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임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어리석은 일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7절에서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퍼붓고 있는 것처럼, 그 누구도 임박한 진노, 즉 하나님의 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10절 말씀처럼, 거부한 자는 도끼에 찍혀 불에 던지 웁니다. 이는 거부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을 정로도 하나님 나라의 임재는 강력하다는 뜻입니다. 11, 12절 모두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일상에서 옳지 못함을 끊임 없이 경험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평화가 없습니다. 평화는 먼나라 이웃나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우리의 삶 속에서 절망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임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본다면, 다른 용어로 표현해서, 그를 믿는다면 우리는 옳지 못함 속에서 옳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평화롭지 못한 세계 속에서 평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 나라의 임재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우리는 거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어코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아무리 불의해 보여도, 이 땅은 정의로 물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곧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곧 정의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의인되게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이 기본으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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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19세기 중엽, 청나라(중국)는 영국과 무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청나라는 발달한 옷감제조기술을 바탕으로 영국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내고 있었습니다. 영국 상인들은 이에 대해 아편 무역을 통해서 이윤을 창출해 보려고 했습니다.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청나라의 하층민들 사이에 아편은 매우 인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나라는 아편 무역을 허용하지 않았고 영국 상인들을 홍콩으로 내쫓았습니다. 이것을 빌미로 영국은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영국이 승리함에 따라 청나라는 영국의 여러 가지 요구들을 들어줘야만 했습니다. 일명 아편 전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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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사상가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유명한 말입니다. 아편은 마약입니다. 고통을 잊게 해주는 진정제 역할을 합니다.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청나라의 하층민들이 아편을 찾았던 이유는 육체적 노동에서 오는 고통을 잠시나마 잊어보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마약을 찾는 사람은 현재의 고통에서 탈출하려는 욕구 때문에, 그리고 쾌락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마약을 합니다. 고통에서 탈출한다는 측면에서 마약은 종교와 닮은 점이 있습니다. 종교가 타락하게 되면 마약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칼 마르크스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감사를 강요당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내 삶은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내 안에는 여전히 기쁨이 없는데 자꾸 감사하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을 믿고 미리 감사하라고 합니다. 감사를 강요합니다. 신앙이 폭력으로 다가옵니다. 신앙의 형태가 이쯤 되면 신앙이 아편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조작된 감사요, 거짓된 감사입니다. 뒤돌아 서면 금방 사라져버릴 감사입니다. 내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고, 내 삶은 여전히 공허하고 피곤하고 힘들고 지칩니다. 그러다가도 교회 와서 박수 치면서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눈물 흘리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고 마음이 시원해 지는 것 같습니다. 고통에서 해방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나면 내 마음은 또 먹먹해 집니다.

신앙생활을 이렇게 아편 맞듯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신앙생활인지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건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적 환각생활입니다. 감사는 은혜를 체험했을 때 나오는 것이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의 고단한 일상을 잠깐 잊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것에 대해서 억지로 감사를 만들어 내는 종교적 아편에 손대지 마십시오. 정말로 내 삶을 변화시켜 영원한 안식에 거하게 하는 복음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신앙은 아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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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루시아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합니다. 날이 세상의 , 종말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새창조의 시간입니다. 모든 눈물이 사라지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참된 안식의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파루시아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파루시아를 오늘로 앞당겨 사는 사람들입니다. 눈물을 훔쳐내고, 죽을 사람이 아니라 사람처럼,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을 십자가에 못박고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파루시아를
산다는 것은 삶의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으로 중심을 옮기는 것입니다. 한자로 구속(拘束) 구속(救贖) 매우 차이를 지닙니다. 구속(拘束) 행동이나 의사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을 의미하고, 구속(救贖) 신학적인 용어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구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의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옮기면 그리스도가 삶을 구속(拘束)하는 역할 밖에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중심을 옮기면 안에서 구속(救贖) 역사, 자유의 삶이 발생합니다. 신앙은 구속(拘束) 아니라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拘束)하기 위해서 못박히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못박히셨습니다.

사실을 알고 깨닫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의 속에서 하나의 율법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율법이 아니고 은혜입니다. 나를 구속(拘束)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속(救贖)하는 것입니다.

파루시아를 산다는 것은 바로 은혜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으로 들어가 안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구속(救贖) 은혜를 입은 자는 필연적으로 파루시아를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참담해도 희망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시는 것을 보고, 믿음으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루시아를 사십시오. 신앙인의 삶은 파루시아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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