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9. 19. 01:57

2011년 9월 18일 주일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20장 1-16절
말씀: 지금은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때


오늘 말씀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의 앞뒤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비유의 말씀 앞에는 부자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비유의 말씀 뒤에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과 포도원 품꾼의 비유,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 이 세 가지 이야기가 도대체 어떤 연속되는 의미를 품고 있기에 성경에 나란히 기록이 되어있을까요.

그 이유를 풀어보기 위해 우리는 먼저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모든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던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부자청년은 모든 율법을 지켰기에 영생을 얻을 줄을 확신하였기에 예수님의 입에서 "당신은 영생을 얻을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꺼라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영생, 즉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부자청년은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켰다고 예수님께 당당하게 말을 하였지만 정작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순종치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19장 27절 말씀에서 주님 앞에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부자 청년은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지만 자신들은 모든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까 무엇인가 보상을 받지 않을까하는 것이 베드로의 질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을 심판하실 때 너희가 내 좌우편에서 그들을 심판하는 영광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에 대한 전제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이 새롭게 될 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예수님을 따른다는 조건이 붙어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질 때 제자들이 세상을 심판하는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앉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새롭게 되는 때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거친 후에야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때까지 나와 함께하여야한다는 두 번째 조건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함께 동참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에 입성만 하면 자신들에게 어마어마한 권력이 따를 것이고 그때에 자신들 중에서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포도나무 품꾼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천국은 포도원 주인과 같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의 품꾼들의 삶은 지금 인력시장에서 일하는 일꾼들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루를 일하지 못하면 하루 동안 주린 배를 채울 수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요즘과 마찬가지로 일할 사람은 넘쳐나고 일할 자리는 너무나 적었기에 많은 품꾼들이 일을 구하고자 노력을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행운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품꾼들에게 포도원 주인이 찾아간 것은 포도원 주인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렇기에 처음 구한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겠노라 말했을 때 그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포도원 주인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우리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하나는 왜 주인은 다섯 번에 걸쳐서 일꾼을 구했던 것인가? 이구요. 다른 하나는 왜 주인은 모든 일꾼들에게 동일한 한데나리온의 품삯을 지급하였는가? 입니다.

우선 첫 번째 의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포도원 일꾼을 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제 삼시에도 나가서 품꾼을 구하고 제6시, 제9시 그리고 일을 마치기 한 시간 전인 제11시에도 품꾼을 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력시장에 가서 일꾼을 구할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들의 체격과 건강상태입니다. 많은 고용자들이 일꾼들 중에 가장 체격이 건장하고 일을 잘할 것 같은 사람들을 뽑아내어 데려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약하고 일을 하기 힘들 것만 같은 사람들이 남겨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매일 반복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늦은 시각까지 일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다음날도 일을 구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주인은 11시까지 다섯 번에 걸쳐서 일꾼을 불렀던 것입니다. 주인이 불러주지 않는다면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인의 세심한 배려와 은혜가 있었기에 예수님은 천국을 포도원 주인으로 비유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인 왜 모든 일꾼에게 동일한 품삯을 지급하였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전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문화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의뢰인-후견인 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제도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돌봐주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 제도에서 의뢰인은 후견인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자는 부자를 택할 수 없었고 자신의 후견인이 되어 달라 요청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제도에 빗대어서 이 비유를 해석하자면 포도원 주인은 품꾼을 선택하여 품삯을 지급할 수 있지만 품꾼은 주인을 선택할 수도 품삯을 정할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인은 처음 부른 일꾼에게만 한데나리온의 품삯을 정하였고 나머지 일꾼들에게는 자신들이 한 일에 상당한 품삯을 지급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랬기에 주인이 얼마를 주던지 간에 그것은 주인의 뜻이고 후견인으로서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주인의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품삯을 받는 시간이 되자 11시에 온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이 은근히 더 많은 돈을 받을 것이란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신들에게 한데나리온의 품삯이 돌아오자 주인을 원망하였습니다.

주인은 의뢰인-후견인 제도에 의해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푼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일꾼들에게 일한만큼의 값을 쳐준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필요한 만큼의 값을 쳐주었습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일꾼들이 하루 벌어서 하루 먹을 수 있는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른 아침부터 수고한 일꾼들은 주인의 은혜를 왜곡하여 자신들의 품삯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주장한대로 그들은 종일 수고하였고 더위를 견디며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의 억울함만을 주장하는 그들을 보면서 주인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이 하나님의 구원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말도 맞습니다. 구원은 먼저 택함을 받은 자나 나중에 택함을 받은 자나 동일하게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이유는 제자들이 이른 아침부터 수고한 일꾼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침부터 수고하여 더위를 견디며 열심히 일한 일꾼들처럼 제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께 올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열심은 자신을 위한 열심이었고 그 마음은 이미 권력이라는 콩밭에 가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19장 27절 말씀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예수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은 이른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의 질문과 같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십니까!"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을 생각하시는데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무엇을 얻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얻을지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저 포도원의 일꾼들처럼 열심히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예수님을 따를 때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살아갔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에게 약속하였던 상당한 보응을 제자들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제자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셨던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른 장작 같고 질그릇 같은 우리를 부르셔서 포도원의 일꾼으로 삼으신 주님은 우리가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사역에 열심히 동참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역이 끝나는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한 만큼 값을 계산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 수 있을 만큼의 크나큰 은혜로 우리에게 보상을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보상을 바랄때가 아니라 열심히 일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두신 사역을 잘 감당하여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보답해야할 때라는 것입니다. '서로 누가 더 일을 많이 했느냐 적게 했느냐'로 다투며 시기하며 질투하는 때가 아니라 서로 도와서 주의 일을 감당해야할 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의 일을 잘 감당하며 살 때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지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9. 15. 02:20

금슬상화(琴瑟相和): 거문고와 비파가 서로 잘 화합한다 / 부부 사이가 매우 좋다


시경 소아
(
小雅) 상체편(常棣篇)은 집안의 화합을 노래한 시인데 거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처자(妻子)가 매우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妻子好合] 거문고와 비파를 연주하는 것과 같으며 [如鼓琴瑟] 형제가 모두 한 집에 모여 [兄弟歸翕] 화목하고 즐겁기만 하다  [和樂且湛]”. 그리고 부부 사이를 금슬이라고 하는 것은 시경 국풍(國風) 관저편(關雎篇)에 나오는 '얌전한 처녀를 아내로 맞아 [窈窕淑女] 거문고와 비파(금슬)를 타며 사이좋게 지낸다 [琴瑟友之]'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 시경 소아(小雅) 상체편(常棣篇) –

 

그리스도인에게 어떠한 관계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윤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입니다. 우리의 존재 근거는 하나님인데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또한 그것을 따르는 것이죠. 하나님의 삼위일체 존재 방식은 그야말로 금슬상화입니다.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는 가장 좋은 예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해야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존재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형상을 닮은 교회에 분쟁이나 분열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에서 벗어났는지를 말해줄 뿐, 교회의 존재 방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삼위일체 형상을 회복해 가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관계든 금슬상화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부부관계든, 부모자식관계든, 친구관계든, 교회공동체관계든, 어느 관계든 원리는 똑같습니다. 화목이란 일치된 마음에서 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되면 우리의 삶은 언제든지 화목합니다. 서로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십자가 아래 모여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화목을 이루어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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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9. 12. 04:11

2011 9 1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18:21-35

제목: 용서는 권세다

 

오늘 본문은 용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용서는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공헌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의 지표가 되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한 마디로 용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 받는 것도 서툴고, 용서 하는 것은 더더욱 서툽니다. 인생을 살면서 용서 받지 못하고 살았거나, 용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욱더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경험과 이성을 모두 뛰어넘습니다. 우리의 육체의 법을 뛰어 넘어 새로운 인생, 새로운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우리가 얼마나 받아들였느냐, 얼마나 깨달았느냐의 정도에 따라서 나의 삶을 붙들고 있는 분노와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언제나 교회의 대변인 역할을 합니다. 그의 질문은 그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질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용서는 세 번까지 하고 그 이상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 번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세 번까지 용서하라니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려고 노력해 보신 분은 잘 아실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랍비들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죠. 그래서 베드로는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랍비들과는 다를 것을 예상하고,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하고 물었던 겁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완전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시는 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의 질문에 칭찬을 받을 거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상상할 수 없었던 용서의 가르침을 주십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것을 숫자적으로 계산하면, 490번입니다. 그러나 이는 문자적으로 용서를 490번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일곱이 유대인들에게 완전수임을 고려할 때 이는 무제한적인 용서를 가리킵니다.

 

말은 멋있어 보입니다. 대인배 같아 보입니다. “무제한으로 용서하라!”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와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천국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용서를 빗대어서 하신 이 천국의 비유는 비교적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임금입니다. 다른 부류는 임금의 종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류는 종들의 동료입니다.

 

임금의 종들은 임금에게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그 규모가 일만 달란트라고 합니다. 우리가 탈랜트라고 하는 그 달란트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쓰는 화폐 단위와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와 닿지 않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단위인가를 알고 나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실 겁니다.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 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1달란트는 6,000명의 하루 품삯입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100불로 치면, 1달란트는 60만불입니다. 한국돈으로는 6억정도가 되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 종이 임금에게 빚진 것이, 1달란트가 아니라, 1만 달란트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계산이 안 되니까, 쉽게 다시 설명하면, 한 사람이 평생 60만불(6) 정도 모을 수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게 1달란트입니다. 이것을 1만 번 해야 갚을 수 있는 빚입니다. 우리가 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1만번을 다시 태어나 평생동안 모으고 또 모아야 갚을 수 있는 규모의 빚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한 마디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죄를 빚의 개념으로 바꾸어서 설명하시는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는 이처럼 우리 힘으로는 청산할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니다. 조금 유식한 말로, 실존이라고 합니다. 우리 존재의 본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갚을 능력이 없는 종에게 임금은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으라고 합니다. 임금은 사실 이 종이 그 돈을 갚으나 갚지 않으나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그거 없다고 임금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거 없어도 임금은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임금의 이 명령 앞에 어쩔 도리가 없는 종은 임금 앞에 바짝 엎드려 애원합니다.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로서 다 갚으리이다.” 이렇게 바짝 엎드린 종의 모습이 애처로웠던 임금은 그 종의 모습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임금이 종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 외에는 종이 빚을 갚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장면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에게 빚는 자기의 동료를 만납니다. 그리고 낯을 변하여 동료의 멱살을 잡고 자기에게 진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종의 동료가 그에게 진 빚은 백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했습니다. 백 데나리온의 빚은 노동자가 100일 동안 일해서 갚을 수 있는 정도의 빚입니다. 사실 이것도 그렇게 만만한 규모는 아닙니다. 그런데 종이 임금에게 진 빚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종은 잔인합니다. 동료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를 잡아다가 옥에 가둡니다. 이 일을 본 동료들이 이 일을 임금에게 가서 고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임금은 노하여 그 종을 잡아 들여 이렇게 훈계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임금은 그 종을 옥에 가둡니다.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종은 임금의 용서를 악용한 나쁜 사람입니다. 우리도 종종 이런 사람을 봅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악용의 대상이 아닙니다. 책임을 회피하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이 이것을 악용합니다. ‘성경에서 죄를 용서하라고 했는데, 당신은 기독교인이면서 어찌 성경말씀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이요!’ 그렇게 되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무슨 감옥이 필요하겠습니까? 죄짓는 족족,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의 죄를 사하노라!’하고 풀어주면 되죠?

 

죄의 값은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서에서도 보면 다윗 왕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통해서 죄를 범합니다.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자신의 충실한 장수, 우리야를 최전방으로 내몰아 전사시킵니다. 그리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잘 자랍니까? 아닙니다. 죄 값은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래 내 종 다윗아 내가 너를 용서하마하면서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죄 값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나은지 얼마 안 돼서 죽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값을 그렇게 혹독하게 치릅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안 좋은 일들이 죄값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너무 죄의 숙명론에 빠지는 것도 건전한 신앙은 아닙니다.

 

죄의 값은 치러야 합니다.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이건 죄 지은 쪽이 가져야 할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마음으로부터해야 합니다. 이것이 잘 되지 않으면, 결국 나만 다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이 만든 밀양이라는 영화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도연이 주연을 맡은 영화인데, 신정론과 용서의 문제를 절묘하게 그린 영화입니다.

 

서울에서 남편을 잃은 이신애(전도연 분)는 그와의 추억이 담긴 밀양에 내려와 아들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아들마저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 슬픔을 극복하려고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 신앙으로 잘 극복해서 살아가는 듯 합니다. 시간이 한 참 지나, 이제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교회 성도님들의 격려와 도움에 힘 입어 그에게 용서를 건네러 교도소에 갑니다. 너무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인 범인을 대면했습니다. 용기 있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아들을 죽인 범인이 오히려 감옥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신애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범인의 말인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사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평안하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이신애는 그 순간 실성합니다. 그의 마음에 드는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어!!” 이신애는 모든 신앙을 다 잃어버리고, 그때부터 교회를 헤집어 놓는 악녀로 변합니다.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그 사람(자신의 아들을 죽인 그 악마같은 죄인)을 먼저 용서한 하나님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우리의 온 존재를 통해서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 위에서 하는 신앙생활이란 용서가 우리 삶의 근거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 삶 가운데 있는 것 중에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이 아니라, “용서입니다.

 

이 세상은 이 있어야 권세 있는 자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돈이 곧 권세인 세상인 것이죠.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영혼까지도 팔아 먹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돈을 쓰면서 권세를 누리려고 합니다. 이건 이 세상이 주는 헛된 욕망에 불과합니다.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권세가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우리는 왜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사는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모든 믿는 이들에게 용서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용서는 권세가 아니라,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세상이 부끄러워하는 그것으로 우리 인류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이죠.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고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봤자, 그 돈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권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의 권세입니다. 용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의 권세를 받은 자만이 용서 할 수 있습니다. 그 권세를 왜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그것이 얼마나 큰 권세인지, 아직도 깨닫지 못하시는 분들은 아직 돈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지닌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권세, 헛된 권세를 부리지 마십시오. 하늘 나라의 권세, 영원한 권세인 용서의 권세를 부리십시오. 용서의 권세를 누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늘 나라의 시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백을 예배 때마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아멘.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9. 8. 00:09

조명시리(朝名市利): 명성은 조정에서, 이익은 시장에서 다투라는 뜻 / 무슨 일이든 격에 맞는 곳에서 하라는 말


전국시대인 기원전 317년에 진(
)나라 혜문왕(惠文王)에게 사마착(司馬錯)은 촉지방의 오랑캐를 정벌하면 영토도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산도 늘어 일거양득이라고 건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상 장의(張儀)는 의견이 달라 한나라를 치고 중원으로 진출하여 패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는 명예는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은 시장에서 다투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나라는 시장이고 주나라 왕실은 조정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을 다투지 않고 오랑캐 정벌을 나선다면 패자가 되는 길에서 멀어진다고 주장한 것이죠. 그러나 혜문왕은 사마착의 말을 따라 촉을 정벌하는 영토의 확장에 주력하고 맙니다. -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 –

 

닭을 잡는 데 장수의 칼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닭 잡는 데는 조그만 식칼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확대시키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원래 자기 모습 보다 더 크게 보이려는 욕구이지요. 그러다 보니 허풍이 늘고 목소리도 커지고 겉치레도 심해집니다. 참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묵상할 기회는 늘 놓쳐버리고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보이면서 살아갑니다. 놀아야 할 때는 놀아야 하고, 쉬어야 할 때는 쉬어야 합니다. 공부해야 할 때는 공부 해야 하고, 운동해야 할 때는 운동해야 합니다. 부드럽게 말해야 할 때는 부드럽게 말해야 하고,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는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시기에 알맞은 행동과 말을 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의 격이 있고, 어른은 어른의 격이 있습니다. 부모는 부모의 격이 있고 자식은 자식의 격이 있습니다. 남편은 남편의 격이 있고 부인은 부인의 격이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성도의 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격에 맞게 해야겠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성도의 격에 맞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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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어떤 아들이 "어머니를 사랑한다. 어린양처럼 천사 같은 어머니를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로 보내드려야 한다"고 생각해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아들은 평소 종교에 심취해서 사건 발생일 얼마 전부터 방에서 나오지 않고 방언을 하면서 괴성을 질러댔다고 합니다. 아마도 기도(방언)를 통해서 신접(하나님을 만남)했었나 봅니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겁을 먹고 있는 딸을 달래는 도중 이러한 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정신병력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조사 도중 횡설수설하는 등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존속살해(자기나 배우자의 직계가족을 죽이는 일)가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어머니를 죽인 아들의 진술을 보건 데, 아마도 어머니를 죽이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이 진술로 살인에 대한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구약성경 창세기에서도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려 했던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의 이야기라고 은혜로 읽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그 행위도 존속살해 행위나 다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양 한 마리를 준비해 주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는 데에서 그쳤지만, 그 사건은 아들을 죽이려 했던 끔찍한 일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은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시고 생명을 그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살인을 명하시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해서 지어진 소설이 있는데, 한국 근대문학의 거장 김동인의 소설 <명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전 주사라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노망이 난 어머니를 편히 보내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칭찬 받을 선행이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독살합니다. 이 일로 전 주사는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죽습니다. 죽어서 하늘 나라에 간 전 주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법정에 또 다시 서게 됩니다. 자신이 한 일을 통해 하나님께 칭찬 받을 거라고 확신했던 전 주사는 하나님 앞에서 의기양양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죽인 것은 살인죄라며 그의 지옥행을 결정하시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자칭 거룩한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아무데나 하나님의 뜻을 갖다 붙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고 생각해 놓고 하나님께 큰 상급을 받을 거라 착각하면서 사는 것이지요자신의 부족함과 자신의 생각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양, 하나님의 은혜인 양 에두르는 것을 보면 참으로 당황스럽고 곤혹스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분별의 은혜가 꼭 필요합니다
. 분별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데나 하나님 운운하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갖다 붙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분별의 은혜를 꼭 간구하십시오. 그래야 엉뚱한 신앙 생활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9. 3. 04:38

공화(共和): 함께 어울려 화목하다 / 두 명 이상이 화목하여 다스린다


무왕이 세운 주(
)나라는 오만하고 잔인하며 사치를 일삼는 여왕 때 매우 어지러웠습니다. 그가 즉위한 지 3년 만에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왕은 달아났습니다. 나라에 왕이 없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자 소공(召公)이 태자 정()을 자기 집에 숨겨둔 채 주공(周公)과 합의하여 14년 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이 기간을 '공화 시대'라고 합니다. 여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여 선왕(宣王) 이 되었습니다. - 사기 주본기 (史記 周本紀) –

 

인화단결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못 먹고 못 살던 시절, 사람들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잘 살아보자고 의기투합했던 때에 관공서마다 걸려 있던 문구 중 하나입니다. “인화단결을 그토록 외쳤던 이유는 그만큼 사람들끼리 화합하여 같은 마음으로 같은 뜻을 품고 협력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가장 깊은 곳까지도 타락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화합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자기 배를 불릴 것인가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이건 복음이 들어가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복음을 받고 내면의 싸움을 합니다. 죽을 때까지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7:18-19). 사도 바울이 세웠던 교회에서도 공화하지 못해서 문제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교회에서 같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오셔야 해결되는 문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함께 어울려 화목하게지내려고 노력할 뿐이지 그것을 완전하게 이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공화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인간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거라고 생각하며 포기하고 사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거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창조의 완성을 바라보면서 사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면서 당신이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하나가 될 것을 주문하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본인이 세운 교회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같은 마음, 같은 뜻, 같은 생각을 품고 하나가 되라고 주문했습니다. 교회의 목표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어 공화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건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서툴고, 때로는 뜻대로 잘 되지 않아 속상하지만, 그것이 주님 걸어가신 길이니 우리도 인내를 갖고 따라갑시다. 함께 어울려 화목하게 지낼 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공화를 이룹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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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자녀들과 함께 동반 자살하거나, 기르기 힘들다고 자녀들을 죽이는 일들이 요즘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것은 성숙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성숙하지 못하니까 성숙하지 못한 일들이 자행되는 것이겠죠.

 

이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의 문제라기보다 훨씬 더 큰 틀에서 봐야 합니다. 이 사회가 성숙하지 못함, 즉 미성숙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마음의 성숙을 일구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외모, 외양, 겉모습에만 관심을 두게 만듭니다. 얼짱, 몸짱이 되는 것이 미덕입니다. 얼굴이 예쁘게 생기고 몸매가 좋은 사람을 착하다고까지 표현합니다. 겉모양의 반듯함이 선함으로 연결됩니다. 마음이 착한 사람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 외모가 잘난 사람이 착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온통 스펙을 쌓는 데만 관심을 가집니다. 좋은 학교를 나와야 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하고, 능력 있는 배우자를 만나야 만족해 합니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사는 것도 자신을 높일 수 있는 최상의 가치입니다. , 외모, 외양, 겉모습에만 나의 모든 존재를 걸게 끔, 그것만이 나의 존재 이유가 되고, 그것만이 나를 가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환상과 믿음을 심어 줍니다.

 

외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고 투자하면서 살다 보니까 내적인 것(인격적인 성숙, 마음의 성숙)에는 관심을 둘 시간이 없고 투자할 여력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디 인생이 그렇습니까? 건물을 하나 세우려 해도, 땅을 잘 다져야 하고 기둥을 튼튼하게 세워야 외양을 잘 꾸밀 수 있습니다. 터만 튼튼하고 기둥만 튼튼하면 외양은 좀 낡고 볼품 없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외양이 아무리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도 터전이 흔들리고 기둥이 부실하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서정주 시인은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국화를 내 누님 같은 꽃이라고 했습니다. 된서리 맞으면서 피는 꽃이 국화입니다. 된서리 맞았지만 아름답게 활짝 피어나는 꽃이 국화입니다. 국화는 누님처럼 성숙한, 어떠한 어려움도 잘 견디어 내고 아름답게 피는 꽃입니다. 그래서 국화는 누님을 닮은 꽃입니다.

 

요즘 시대는 누님 같은 국화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성숙하지 못한 세상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을 길러내기 때문입니다. 너무 외모, 외양, 겉모습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사람은 내면이, 마음이 성숙해야 합니다. 그래야 국화처럼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습니다. 국화처럼 피어나십시오.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8. 30. 06:15

설상가상(雪上加霜): 눈 위에 서리가 덮인 격이라는 뜻 / 어려운 일이 연거푸 일어남


계속해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때 많이 쓰는 표현으로, 흔히 '엎친 데 덮친 격', '엎친 데 덮친다'등으로 풀어 씁니다. 속담 가운데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와도 의미가 통합니다. 같은 뜻의 한자 성어로는 '병을 앓는 동안에 또 다른 병이 겹쳐 생긴다'는 뜻의 병상첨병(
病上添病)이 있습니다. '비단 위에 꽃을 더한다'는 말로, 좋은 것 위에 더욱 좋은 것을 더함을 비유한 한자 성어 '금상첨화(錦上添花)'와는 정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오해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셨나 하고 말이죠. 그건 불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고 안 계시고는 어떠한 일에 의해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판가름 나는 겁니다. 좋은 일만 가득하면, 즉 금상첨화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거고, 설상가상이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 건가요? 이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불신앙입니다. 현재 인생이 설상가상이라고 생각되십니까? 기도의 끈을 더 굳게 붙잡으십시오. 현재의 인생이 금상첨화이십니까? 고개를 더 숙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십시오. 십자가에서 부활을 본 우리 그리스도인은 설상가상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다 주의 손에 있으니 주의 뜻대로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뜻은 언제나 생명이 넘치는 일이니, 결국 모든 것이 다 잘 될 겁니다. Alles Gute! (독일어인데 영어로는 ‘Everything will be fine!’이고 한국말로는 모든 일이 다 잘 될 겁니다.’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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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탤런트 김혜자씨가 낸 책의 제목입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월드비전을 통해 자원봉사 하면서 겪은 일들을 풀어놓은 에세이집 입니다.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그 무엇이든 폭력은 용서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힘 차이가 발생하는 곳, 대등하지 못한 관계 속에서 강한 쪽이 약한 쪽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려는 모든 행위를 폭력이라고 합니다. 폭력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외적 폭력과 내적 폭력입니다. 외적 폭력은 드러나 있는 폭력, 저항할 수 있는 폭력을 가리킵니다. 내적 폭력은 합법적인 폭력, 그래서 저항하기 힘든 폭력을 가리킵니다. 둘 중 어느 폭력이 더 나쁠까요? 물론, 합법적인 폭력이 더 나쁩니다. 이 폭력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또는 드러나더라도 모든 사람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기 때문에 폭력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어디다가 하소연 하기도 힘듭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폭력이지만 합법적이기 때문에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전쟁은 국가의 이름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어느 개인이 손 쓸 수 없습니다. 일단 전쟁이라는 폭력이 가해지면 모든 사람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됩니다. 대한민국 청소년들도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폭력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교육의 폭력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입니다. 적응해서 가해지는 폭력을 참고 이겨내든지,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던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청소년들을 우리는 함부로 나약한 이들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함부로 손가락질 했던 일이 부끄러워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폭력이었습니다. 굉장히 합법적인 폭력이었습니다. 로마 당국은 예수님을 국가반란죄라는 합법적인 죄목을 씌워 폭력을 가했고,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죄라는 합법적인 죄목을 씌워 폭력을 가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합법적인 상태로 폭력을 당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입니다. 합법적인 폭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이제 좀 손에 잡히십니까?

 

불법적이든, 합법적이든, 모든 종류의 폭력은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폭력에 희생되신 이유는 이 땅에 편만한 모든 종류의 폭력을 십자가에 처형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자가에서 정죄 받고 처형 받은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온갖 폭력()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만 제대로 알고 있어도, 우리는 함부로 폭력을 저지르지 못할 겁니다. 폭력이라는 말과 행동이 우리 삶에 발 들여놓을 틈이 없어질 겁니다. 폭력을 저지르는 순간 우리는 심판 받는 것이 되니까요.

 

폭언, 폭행 등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폭력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두 번 죽이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덕분에 모든 폭력()에서 구원 받은 자라면, 우리가 어떻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겠습니까? 꽃으로도 때리지 마십시오. 제발.


Posted by 장준식

미국의 부통령을 지낸 엘 고어가 쓴, 지구 온난화 문제를 다룬 <불편한 진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이 <an inconvenient truth>입니다. 여기에서 ‘truth’를 꾸미고 있는 형용사 ‘inconvenient’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말로는 ‘inconvenient’불편한이라고 옮기고 있지만 그 속뜻을 알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불편하다고 할 때도 불편한이라는 단어를 쓰고, 몸이 불편할 때도 불편한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영어에서는 마음이 불편하다고 할 때는 ‘uncomfortable’을 쓰고, 몸이 불편할 때는 ‘inconvenient’를 씁니다. 그러니까 엘 고어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마음의 불편이 아니라 몸의 불편이었다는 것이죠.

 

지구 온난화의 문제는 인간의 편리함 때문에 온 것입니다. 인간의 몸이 편하기 위해서 이산화탄소를 마구 대기 속으로 뿜어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자동차 매연이 가장 큰 주범입니다. 몸의 편리함을 위해서 고안해 낸 자동차는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대기 속으로 뿜어냅니다. 한 마디로 지구 온난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현재 인간이 대기 속으로 품어 내고 있는 이산화탄소의 양을 줄이는 것인데, 이산화탄소의 양을 줄이려면 인간의 몸이 불편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미국은 한 사람 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단연 자동차 때문입니다. 자동차 왕국인 미국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가장 많은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뿐 아니라, 엄청나게 먹어대는 육류의 생산과 요리 과정에서도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됩니다. 소가 뿜어내는 트림과 방귀도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증가율에 큰 기여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육류를 익혀 먹으려면 필요한 석탄 연료에서 뿜어 나오는 이산화탄소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거기다가 빨래하고 옷을 말리기 위해서 사용하는 빨래 건조기도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대기 중에 배출합니다.

 

인간의 편리함 때문에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이죠.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를 살리려면 인간의 몸이 좀 불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편한 진실>인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이미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지구 온난화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데 동참하기를 꺼려 합니다. 일례로, 미국은 세계기후협약인 도쿄의정서에 아직도 가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가입을 하면 한 사람 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야 하는데, 현재 미국인들의 생활 습관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구 온난화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솔선수범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구가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구를 망가뜨리는 행위는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지구 온난화 문제 해결을 위해 소소한 일부터 실천해 보는 것이 어떨런지요? 육식을 좀 줄여 본다든지, 빨래건조기를 사용하지 않고 좀 수고스럽지만 빨래줄에 빨래를 널어 말린다든지, 이런 것부터 말입니다. 아무튼, 지구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바로 때문입니다. 나의 편리함만을 생각하다가 이렇게 된 겁니다. 참으로 마음까지도 불편해지는 진실입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