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3. 14. 14:03

2011 3 1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15-17; 3:1-7

제목: 예스, , 예스

 

지난 수요일, 참회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우리는 사순절에 들어섰습니다. 사순절은 40일을 의미합니다. 참회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 중간중간에 끼어 있는 주일은 빼고 40일 동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영적 훈련의 기간입니다.

 

부활절은 어떻게 정해지는지 아십니까? 춘분이 지나 오는 보름달 후 첫 번째 주일이 부활절 입니다. 춘분은 대개 3 21일쯤 됩니다. 그 후 보름달이 얼마나 빨리 뜨느냐에 따라서 부활절이 빨리 오느냐 좀 늦게 오느냐 결정되는 것이죠. 올해 같은 경우는 춘분인 3 21일을 지나, 보름달이 뜨는 날이 4 17일이기 때문에, 보름달이 뜬 그 날 이후 첫 번째로 맞는 주일이 4 24일이기 때문에 부활절이 4 24일로 정해진 것이죠. 이 법칙만 알면 매년 부활절이 언제인지 스스로 계산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참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해서 광야에서 보낸 시간이 40년이고,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셔서 금식하시며 하나님을 만난 기간이 40일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마귀의 유혹이 왔습니다. 교회가 40일을 정해 사순절로 지키는 이유는 예수님의 40일 간의 영적 훈련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는 인류 최초의 유혹이 들어있는 창세기의 말씀을 보고,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 당하시는 부분을 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창세기의 말씀만 읽었고, 복음서의 말씀은 대부분의 분들이 너무 잘 아시는 이야기라 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창세기의 말씀과 복음서의 말씀이 엮여 선포될 것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복 주신 후 어떻게 우리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죄는 미스터리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떻게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지, 하나님께서 왜 죄가 당신의 창조세계에 들어오게 놓아두셨는지, 등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창세기가 이런 것들에게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약간의 이해를 가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창세기는 우리에게 죄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들어온 것은 미스터리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미스터리는 신비인데, 이는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체가 아직 파악되지 않았고, 파악되어 가는 중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비는 종말론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종말에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생명의 신비도 드러날 것이고, 죄의 신비도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현재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무시하거나 등한히 할 것이 아니라, 인내를 가지고 그것에 대한 실체를 알아가도록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창세기의 이야기와 복음서의 이야기는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결론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정황은 이렇습니다. 우선 창세기에서 보면 사탄이가 아담과 하와를 꼬드겨서 하나님을 거역하게 합니다. 뭔가 솔깃한 것을 인간에게 던져주어서 그것을 덥석 물게끔 합니다. 그런데 사탄이가 제시하는 솔깃한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정면으로 대항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매력적인 것이죠.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는 일이었습니다. 뱀의 형상을 한 사탄이가 아담과 하와에게 이렇게 말하며 꼬드깁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유혹은 바로 하나님처럼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악은 바로 이 마음 때문에 생겨나는 겁니다. 피조물로 살기보다 인간은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삽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생각조차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잘못 설정하는 겁니다.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는 분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건 우리 인간의 타락한 마음이 만들어내는 잘못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닮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는 복된 인간입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통해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보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벗어난, 이탈한 그야말로 추악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복 가운데서 사는 복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피조물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도 차버리고, 하나님의 영역 밖으로 빠져 나가서 살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인생이 고달프고 죄 가운데 어그러지는 것이죠.

 

오늘 설교 제목이 예스, , 예스인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긍정하는 것이 첫 번째 예스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복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무한한 복을 내리셔서 복되게 하신 존재입니다. 이게 바로 예스입니다. 이 복을 무한히 받으면서 사는 인간이 첫 번째 예스에 해당하는 인간입니다.

 

, 그런데 미스터리하게도 예스가운데 살아가던 인간에게 시험이 옵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 가운데서 만족하며 살아야 할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는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이런 상황입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어느 농부가 시장에 가서 거위 한 마리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다음날 거위가 낳은 알을 가져다가 요리 해 먹으려고 거위 집에 갔는데, 가서 보니 거위가 낳은 알이 그냥 알이 아니라 황금알이었습니다. 너무도 신이 농부는 아내를 불러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거위는 하루에 한 개씩 매일 아침 황금알을 낳았습니다. 그 덕분에 농부 부부는 점차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농부 부부는 서로 말하기를, 하루에 한 개씩만 황금알을 낳으니까 감질 난다는 겁니다. 한꺼번에 많은 황금을 손에 넣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죠. 그래서 이들은 생각하기를 거위의 배를 가르면 거기에는 수 많은 황금이 들어 있을 거고, 그것을 차지하면 감질나게 하루에 한 개씩 황금알을 가질 필요 없이 한 번에 엄청난 부자가 될 거라고 믿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농부 부부는 칼을 가져다가 거위의 배를 가릅니다. 물론 거위는 죽었죠. 그러나 거위의 배를 들여다 보니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거위도 잃고, 황금도 못 찾고, 아무런 이득도 없이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만 마음을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예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은혜가 족합니다. 한 눈 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한 눈 팔게 하는 유혹들이 엄청나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곳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이 타락의 순간이고 죄악에 빠지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입니다.

 

유혹이 만만치 않습니다. 너무 매력적인 것들입니다. 우리의 욕망을 모두 채워줄 수 있는 것 같은 것들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온 유혹도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된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께 제시된 사탄의 유혹도 매우 매력적입니다. 1.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2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 그러면 천사들이 네가 땅에 닿기도 전에 너를 받들어 줄 것이다. 3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 이게 다 뭡니까? 하나님처럼 되라고 하는 유혹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수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겁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우쭐해지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에 의존해서, 그것으로 만족해서 산다는 뜻이지, 하나님처럼 스스로 복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유혹 받습니다. 스스로 대단한 존재가 된 양 행동하고 싶어 합니다. 예수 믿으니까 그 어떤 물리적 법칙이나 자연 법칙이 자신을 비켜 간다고 생각하고 안일하게 대처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큰 코 다칩니다. 나한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예수 믿는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하면서 오히려 시험에 듭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인간이 되는 법, 그리고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광야에서 시험 당하시는 것과 똑 같은 시험이 왔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남은 구원하면서 자신은 왜 구원하지 못하느냐고 하는 비아냥거림이 들려왔습니다. 우리 상식에서도 십자가에서 핵폭발과 같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사건, 그리고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어가던 예수를 바라보면서 조롱하던 사람들이 알아듣고 볼 수 있도록 무슨 엄청난 일이 일어났으면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더 잘 믿었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십자가에서는 그 어떤 신적인 힘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한 인간의 무력한 죽음만이 십자가에 걸려 있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신 것입니까?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겁니다.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에 만족하는 법을 보여주신 겁니다. 이러한 모습은 분명 사탄이에게 가 됩니다. 사탄이에게 눈을 돌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 모습 자체가 하사탄이에게 가 되는 것이죠. 그래야, 처음 우리에게 내려졌던 복, 하나님께 향했던 예스가 우리의 삶 속에 지속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바로 이것을 훈련하는 기간입니다. 태초부터 우리에게 내려진 복은 끝까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피조물로 살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이어집니다.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복을 차버리게 끔 만드는 사탄의 유혹, 죄악이 끊임 없이 우리에게 몰려듭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더욱더 힘차게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그 유혹에 대해서 를 외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 예스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사순절기 동안 예수님처럼 우리도 광야에서 영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순절기의 영적인 훈련이 우리를 부활의 기쁨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사탄이에게 예스하면 하나님께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예스하면 사탄이게 하는 겁니다.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예스, , 예스의 인생을 사십시오. “예스, 예스, 의 인생은 버리십시오. 끝까지, 어떤 유혹의 상황, 시련의 상황에서도 하나님 붙들어서 예스, , 예스의 복된 인생을 사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10. 12:12

시편 16

짬자신앙에서 벗어나기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다 내 것이야!” 우리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짬뽕도 먹고 싶고 자장면도 먹고 싶은 인간의 욕심이 짬자면을 만들어 냈다.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은 욕심이 뷔페식당을 만들어 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죄는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지적하고 있고 어거스틴이 교만이라고 일컬은 원죄이다. 이것은 우주의 블랙홀과 같다.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아무리 빨아들여도 만족함이 없다.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든다.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파괴한다. 이 교만은 하나님까지도 상대화시켜 자기 만족을 위해 이용한다.

 

시인은 이렇게 자기 집중에 사로잡혀 있는 교만한 자와 거리를 둔다. 시인은 우상숭배자들처럼 하나님을 상대화시키지 않고, 절대적인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그래서 시인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주님이시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는 교만한 자들는 혼합주의에 사로잡힌다.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부요케 해줄 신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하여 당신은 나의 주님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동시에 이방신들(우상들)에게 피의 전제를 드리며 그들의 이름도 부른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 교만의 결과다. 교만이 만들어낸 짬자신앙이다.

 

시인이 이러한 짬자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신앙이 종말론적이기 때문이다. 삶의 끝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까지도 바라볼 줄 아는 영적인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내 삶을 지탱해주는 것들을 많이 만들어 내면서 산다. 성취할 일거리도 있고, 가족도 있고, 오락도 있고, 사회적 교제도 있는 가운데 하나님만이 나의 피난처라는 것을 실질적으로 오감적으로 느끼지 못하면서 산다. 오히려 이런 자에게는 신앙조차 취미생활로 다가온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인생의 마지막 날에 위에 열거한 것들, 지금 내 삶을 지탱해 주고 있다고 믿고 있는 그런 것들이 나의 피난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지금 기쁘고 행복하다. 두 다리 딛고 살고 있는 땅이 척박하기로 유명한 팔레스타인 땅인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기업()이 아름답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의 삶이 오직 하나님께만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고 사는 시인은 하나님께서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충만한 삶으로 회복되었다고 찬송하고 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시인의 고백에 아멘으로 화답해야 한다.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산업)과 피()를 마신다. 이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거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그 어느 것에 마음을 두거나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피난처를 삼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나의 살은 그리스도의 살이고 나의 피는 그리스도의 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만 바라보셨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만을 피난처 삼아 하나님만 바라보며 산다. “짬자신앙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충만한 기쁨, 영원한 즐거움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3. 6. 23:02

2011 3 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17:1-9

제목: 충만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세상에서 살라!

 

예수는 누구인가? 사람인가? 신인가? 예수라는 이름은 지난 2천 년 동안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수많은 질문거리를 주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단하게,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2천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나사렛에서 자랐으며, 갈릴리지역에서 주로 활동을 했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라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믿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끊임없이 예수는 누구인가?”를 질문해왔습니다. 기독교회가 내린 최고의 결론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는 참 사람이고, 참 하나님이다. Vere Homo, Vere Deus. 이 말은 50%는 인간이고, 50%는 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물들 중에는 그런 존재가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 말은 100% 인간, 100% 신이라는 뜻입니다. AD 45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확정된 교리입니다. 이후로,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모두 이단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각각 성탄절기와 주현절기를 통해서 선포해왔습니다. 우리는 별로 생각 없이 성탄절기와 주현절기를 보내지만, 사실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교회력은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즉 참 사람됨을 증거합니다. 어떻게 증명합니까? 예수는 여느 사람들처럼 여자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여기에 물론 신성을 증명하는 요소가 가미됩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긴 태어나는데,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동정녀탄생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인성이 성탄절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제 예수의 신성이 주현절기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주현절기는 동방박사의 이야기와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시작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세례식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리고 오늘, 주현절기가 끝나면서 우리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또 듣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렇게 해서 주현절기는 이 음성을 듣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 음성을 듣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신성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예수의 신성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지요.

 

우리는 오늘, 산상변모사건을 전해주고 있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의 하나님 됨을 깊이 묵상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저자의 진술에 의하면, 오늘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수난 예고를 하신 뒤 엿새 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이 장면은 분명히 구약의 두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르는 장면과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처럼 시내산에 오르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 즉 율법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도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얻고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예수께서 높은 산에 올라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눈치챌 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하여서 전해진 하나님의 의와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예언이 바로 예수에게서 성취될 거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곳에 갔던 세 제자는 자신들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희한한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형되는 장면입니다.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리고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봅니다. 이것을 제자들의 반응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신적인 영광을 체험하고 모두 두려워 떨었습니다. 모세도 그랬고, 에스겔도 그랬고, 다니엘도 그랬고, 신적인 영광을 체험하고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베드로는 횡설수설하면서 예수님께 제언을 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우리도 중요한 장면,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은 비디오나 사진으로 담아두려고 합니다. 옛날에는 그러한 장치들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림을 그릴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풍습에는 그것을 저장하는 장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절기입니다. 일례로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사건을 우리가 비디오나 사진에 담아두는 것처럼 담아둡니다.

 

이스라엘에는 장막절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들은 이 절기를 통해서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광야생활 한 것을 기념했습니다. 광야에서 텐트를 치며 생활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죠. 광야생활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위대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기간이었죠.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께 초막을 셋 지어서 여기에 있자고 하는 것은 바로 장막절에 지었던 그 텐트를 의미합니다. 유대인의 절기중, 이 장막절(초막절)이 가장 큰 절기였는데, 이것을 통해서 베드로는 변모사건을 기념하고 싶었던 것이겠죠.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주님, 기념 사진 하나 찍어 놓죠!” 정도가 될 겁니다.

 

이런 가운데 놀라운 일이 연속하여 벌어집니다. 갑자기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구름은 신적표상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는 구름이 몰려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임했다는 뜻입니다. 구름 속에서,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정신 못 차리고 있는데,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어루만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라고 하십니다.

 

이 장면이 굉장히, 가장 중요한 장면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말로만 듣던 모세와 엘리야를 여기에서 보다니! 우리도 말로만 듣거나 TV에서만 보던 인물을 직접 보았을 때 얼마나 신기하고 흥분됩니까? 게다가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절대적인 인물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고 있는 예수님을 일컬어 속된 말로 땡잡았다!”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누가 진짜 땡 잡은 겁니까?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고 있는 예수님이 땡 잡은 겁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가 땡 잡은 겁니까? 지금이야 우리는 모세와 엘리야가 땡 잡은 것이라는 걸 알지만, 이 사건이 일어날 때만해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땡 잡은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 아직까지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확실히 그리고 온전히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사라졌습니다. 엘리야도 사라졌습니다. 그들 눈 앞에 여전히 서 계신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고,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죠.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일으켜 세워 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산을 내려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신 것은 부활을 연상시킵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 부활 사건이 바로 구원 사건입니다. 그것이 일어나기 전까지, 아무에게도 변모사건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빛에서 보지 않으면, 변모 사건도 그 빛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있은 뒤, 베드로가 어떻게 이 변모사건을 증거하고 다녔는지, 그리고 이 변모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는 베드로후서 1 16절 이하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그들은 분명히 이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음성이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 드리며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들려야 합니다. 이 음성을 들은 여러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들려진 이 음성을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과 똑같이 들은 분은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가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예수를 메시야로, 예수를 구원자로, 예수를 주님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이 음성이 안 들리는 분들은 여전히 예수가 누구인지 몰라 불신앙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겁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사실, 예수님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내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백합니다. 성찬을 통해서 눈에 보이게끔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성찬식 때 단순히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습니다. 내 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요, 내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는 고백입니다. 내 살과 내 피가, 내 살이 아니고 내 피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살이고 그리스도의 피인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부활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변모사건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은 이제 내 몸과 내 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로 삽니다. 오늘 말씀 제목처럼 충만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겁니다. 그게 나에게 의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이제 이번 주 수요일에 있는 참회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절기가 시작됩니다
. 충만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시간을 사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시간을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 눈 앞에 다가온 사순절을 진지하게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그 절기, 그 시간을 진지하게 지키십시오. 그것이 바로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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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이의 있습니다!

 

기도하려고 두 손을 모으는 것은 세상 불의에 대한 항쟁의 시작이다.” 칼 바르트가 한 말입니다. 기도의 동작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습니다. 몸 동작 중 가장 보잘것없는 축에 속합니다. 두 손을 모으는 것만큼 간단한 동작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담고 있는 능력은 우주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늘 이렇게 발휘됩니다. 십자가 죽음도 세상 만물 중 가장 보잘것없고 추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일어난 일은 우주적 구원이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매일 겪는 일이 세상의 불의입니다. 의롭지 못한 세상 때문에 마음 상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습니다. 세상 불의는 골리앗처럼 너무나 힘 세보이고 커 보이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앞에서 그저 한숨과 한탄만 흘러나올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위해 세상 불의와 싸우고 계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 불의에 대한 심판이요 최후 승리입니다.

가수 송창식씨가 어느 방송에 나와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삶의 규칙들이 이상하게 맘에 안 든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과 다르게 살 뿐이다.” 참 기인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이의를 가지고 살아가는지요? 세상의 이치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속편 하다고 생각해서 세상이 요구하는 삶의 조건을 모두 갖추려고 밤낮으로 애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의 있습니다!”를 당당하게 외치면서 부당하고 불의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바로 잡으려고 불편과 고난을 감수하면서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불의한 세상을 등지고 온갖 불편과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세상을 향해 등지고 살아간다 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과 발맞추어 살아가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적어도 이 세상의 불의를 감지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최소한의 양심과 행동은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의 있는 삶, 부당한 삶, 불의한 세상을 향해 항쟁하는 첫 걸음은 두 손을 모으는 것입니다. 기도는 세상 불의에 대한 항쟁입니다. 기도는 세상 불의를 바로 잡아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세상 불의에 이의 있습니까? 두 손 모으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세상 불의를 바로잡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바로 잡아 주실 겁니다. 이 소망 안에서 우리는 두 손 모으는 일을 끊임 없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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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2. 00:45

시편 15

윤리를 넘어 칭의로

 

하나님과 관계되지 않은 일상은 없다. 자는 것, 먹는 것, 쉼 쉬는 것, 사랑하는 것, 그리고 죽는 것까지도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행하고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다. 하물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말할 것도 없다. 이 시편은 제의전승으로 분류되는 시인데,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누가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밝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개 제사법은 외적인 형식을 주로 취급하는데, 이 시는 제사와 관련해서 윤리적인 면을 취급한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첫째로 시인은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윤리적 조건으로 정직과 진실을 제시한다. 사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정직과 진실에서 멀다. 거짓말 하고 속이는 것이 오히려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최초의 인간 아담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그 안에 거짓과 속임수가 꿈틀댔다. 하나님 앞에서 결코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우리 일상에서도 자주 겪는 일이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거짓말 하고 속인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 안에 이미 거짓말의 싹이 자라고 있다는 증거다. 어려서부터 윤리적인 교육을 철저히 시킨다고 해도 잘 교정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순간에 인간은 늘 거짓말 하고 속인다. 시인은 이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답게 정직과 진실을 보이는 자만이 하나님께 제사 드릴 수 있다고 못박는다.

 

둘째로, 시인은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윤리적 조건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삶을 제시한다. 특별히 입으로 짓는 죄에 대한 경계를 하고 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마음에 들어 있는 생각이다. 생각이 비뚤면 입도 비뚤어진다. 이건 감출 수 없다. 잠깐의 립서비스는 할 수 있지만, 결국 속내는 입술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근본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삶은 교만에서 온다. 교만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가리킨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자를 교만한 자라고 한다. 교만만큼 다스리기 힘든 인간의 악한 본성도 없다. 우리가 싸워 이길 수 있는 악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둠은 빛이 들어와야 물러나듯이, 교만의 어둠은 그리스도의 겸손의 빛이 들어와야 물러간다. 그러므로 교만과 싸우지 말고, 그리스도의 빛을 사모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빛이 내 안에 비취는 한 교만의 어둠은 발 붙일 곳이 없다.

 

셋째로 시인이 제시하는 윤리는 돈 놀이에 관한 것이다. 돈은 단순히 재물이 아니라, 이 세상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힘이다. 이 사회는 돈 관계로 엮여 있다. 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돈은 개인적인 윤리가 아니라 사회윤리로 확대된다. 좋은 사회 시스템과 좋은 법은 바로 이 돈 놀음에 피해보는 사람이 없도록 돈 관계를 잘 정리해 주는 시스템과 법이다. 한 개인이 아무리 건전하게 살아가더라도 사회적 제도와 법이 정의롭지 못하면 돈 관계 때문에 고통 받게 되어 있다. 돈으로 상대방에게 상처 주지 않는 사람, 그런 사회가 바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윤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윤리를 지닌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지만 이건 너무 인간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발언이다. 인간을 일컬어 파스칼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고, 펄벅은 살아 있는 갈대라고 했으며, 성경은 상한 갈대라고 표현하고 있다. 앞의 수식어는 각기 다르지만 갈대라는 명사는 똑같다. , 갈대처럼 한 없이 흔들리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의로움은 그만큼 토대가 깊지 못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인간에게 덧입혀 지지 않으면 인간은 결국 갈대처럼 흔들리다 쓰러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생각할 때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윤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덧입혀지는 의로움(칭의), 바로 이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이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2. 00:44

시편 14, 53

어리석은 자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있다하는 자들을 어리석다 하고, ‘하나님이 있다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들을 어리석다 한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이 있다, 없다는 선택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다. 생각의 중심에 인간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생각에 따라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들이 어리석은 거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한다. 이들의 삶 속에는 어리석음이 연쇄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없다하니 그들의 마음이 부패하게 되고, 마음이 부패했으니 그들이 하는 행동은 모두 가증스럽고 악한 일들뿐이다. 당연한 결과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그들의 삶 속에 없으니, 생명 냄새 나는 일들을 행할 능력이 그들에게는 없다. ‘하나님이 없다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생명이 떠난 송장이 내뿜는 송장 썩는 냄새 나는 일들 밖에 없다.

 

하나님이 없다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떡 먹듯이먹어버린다. 하나님에게 기대어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나님 밖에는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복음서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한 자들이 바로 이들이다. 가난한 자들은 삶의 토대가 없는 이들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방어할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삶의 토대가 없는 이들은 기댈 곳이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이 없다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삶의 토대를 하나님께 두지 않고 스스로 삶의 토대를 쌓으려 하기 때문에 늘 분주하다. 그러나 그들이 쌓은 삶의 토대는 생명의 근원이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거리가 먼, 유한하고 썩어 없어질 것들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생명이 아닌 것에 기대어 사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생명이 없는 곳에는 평안도 없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는 평안도 없다. 생명의 창조자이시고 생명자체이신 하나님 만이 평안을 주신다.

 

시인은 하나님 만의 고유한 구원 방식을 깨닫는다. ‘하나님이 없다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께 기대어 사는 가난한 자들을 못살게 굴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피난처이시기 때문에 도리어 어리석은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은 그렇게 온다. 우리의 상식 수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한 방식으로 온다. 그러니 하나님께 기대어 사는 가난한 자들이 걱정하고 근심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하나님이 없다하는 어리석은 자인가, 아니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시는하나님을 인정할 것인가에 있을 뿐이다.

(시편 14편과 53편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2. 00:43

시편 13

나의 눈을 밝히소서

 

시인의 처지는 처절하다. 이 짧은 구절에서 어느 때까지를 네 번이나 외치고 있다. 한계상황에 다다랐다는 뜻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뜻이다. 벼랑 끝에 섰다는 뜻이다. 이건 외적인 환경에서도 끝까지 왔다는 뜻이고 영적인 면에서도 끝까지 왔다는 뜻이다. 이런 절박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아무리 외적인 환경이 끝까지 왔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절박한 심정으로 서지 않는다. 그 환경에 얽매이고 매달려 육체의 고통만 당하고 있을 뿐, 참 구원을 위해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이고 죄악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단 하나, 영적인 절박함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절박함은 그냥 오지 않는다. 이 절박함 안에 들어가야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데, 그것이 그냥 저절로 오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시인의 간구를 보라. 한계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시인의 처절한 몸부림을 보라. 우리는 보통 기도하기를 우리의 원수와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원수를 이기려는 의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싸워 이기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시인은 원수로 인한 인내의 한계상황에 다다랐을 때 그 문제 갇혀 좌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있다. 시인의 간구는 이것이다. “나의 눈을 밝히소서.” 왜 시인은 자신의 눈을 밝혀달라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창조설화에서도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밝아짐을 죄악을 향한 것, 세상을 향한 것이었다. 우리 시대도 이것을 부추긴다. 세상에 눈이 밝아져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에 자신의 삶을 발맞추려고 욕심을 극대화시킨다. 세상에 눈이 밝아지면 나 밖에는 눈에 안 들어온다. 그런 사람은 결국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바알신앙을 갖게 된다. 이런 사람은 기독교 신앙을 바알신앙으로 타락시킨다.

 

시인의 간구는 이와 다르다. 시인은 원수의 조롱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혜 밖에는 없다는 것을 신앙고백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눈에 빛을 주셔야, 즉 영적인 눈을 주셔야 원수를 이기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영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바로 이거다. 참된 문제 해결은 나를 짓누르는 외적인 환경이 나에게서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시인은 마지막 두 절에서 외적인 환경에 평안이 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송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한 원수의 조롱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지혜, 즉 눈이 밝아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있다. 원수의 조롱이 들리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보이는데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2. 00:42

시편 12

말은 존재의 집 인간의 말과 하나님의 말

 

(언어)은 존재의 집이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한 유명한 말이다. 내가 내뱉는 말에 나의 존재가 담겨 있다는 것을 한 번만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라. 우리가 얼마나 함부로 말을 내뱉는지.

 

시인은 함부로 말을 내뱉는 악인들의 말 때문에 마음이 힘들다. 악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온통 거짓아첨뿐이다(2). 그들의 마음은 둘로 나뉘어져 있어서 도통 진실을 분간할 수 없다. 진실과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따라 말을 바꾸고 말로 사람을 호린다.

 

시인은 자신의 혀를 믿고 거짓과 아첨뿐인 말로 세상을 뒤흔드는 그들의 악행을 본다. 그들은 교만해질 대로 교만해졌다. 이제 그들에게는 하나님조차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도 자신들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한다. 자기의 혀로 자기 마음대로 말하면서 살려 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발견한 인간의 말이다. 결국 교만함만 낳는 멸망의 말이다.

 

시인은 인간의 말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말(말씀)을 선포한다. 악한 자들의 말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 같으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다 듣고 계신다. 악한 자들의 거짓과 아첨뿐인 말도 듣고 계시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자들의 탄원의 말도 들으신다. 하나님은 고통 당하는 자들의 탄원을 들으시고 일어나신다. 그리고 그들을 안전한 지대로 옮기신다(4). “도우소서”(1)라는 탄식을 듣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시인은 거짓과 아첨뿐인 인간들의 말과 하나님의 말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처럼 순결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중하고 불순물이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래서 신실하고 믿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을 의지할 수 있다.

 

말은 인간의 존재를 규정한다. (말씀)은 하나님의 존재를 규정한다. 거짓과 아첨뿐인 인간의 말은 인간 존재를 보여준다. 순결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계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순결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혀를 주장할 때까지, 그래서 나뉘어진 마음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볼 때까지, 우리는 말을 아끼고 아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혀를 주관할 때 그때 비로소 입술을 열어 말해야 한다. 그때는 덕스럽고 복스러운 말만 나오리라.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2. 00:39

시편 11

정직한 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뵌다

 

시인은 여호와께 피했다고 말한다. 위기에 처했을 때 물리적으로 성전으로 피했다는 말도 되겠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신뢰를 말한다. 성전 자체가 무슨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머무신다는 말은 매우 성례전적인 신앙고백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은혜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지은 이유는 보이지 않게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보이게 끔 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살았다.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 성을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성전에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생각 때문이다. 악인이 화살을 겨눌 때마다 시인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피했다. 시인이 자신이 겪는 위기와 고통을 악인이 쏜 화살에 비유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살은 시인의 시대에 가장 무서운 무기였다. 먼 곳에서 공격할 수 있고, 재빠르게 적을 해치울 수 있는 무기였다. 화살의 공격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었다. 시인이 겪는 위기와 고통은 바로 이러한 무시무시한 무기로 공격하는 것과 같은 위험에 처해졌다는 뜻이다. 게다가 적들은 밝은 데서 그 화살을 쏘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데서쏜다. 뒤통수를 치고 술수를 쓰고 은밀하게 공격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무서운 무기로 이렇게 은밀하게 공격하는데 거기에 안 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위기와 고통은 이렇게 눈 뜨고 코를 베이는 격인 때가 대부분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악인의 공격을 막아낼 도리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인은 절망과 무력감에 빠져 이렇게 한탄한다. “의인이 무엇을 하랴?”(3)

 

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피하는 것 밖에는 없다. 그것이 최선이다. 악인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다. 의인이 악인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는 이유는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기때문이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신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더 큰 권능을 가지고 계시다. ,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돌보시고 당신의 큰 권능으로 우리를 곤경에서 구해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은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보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고통의 순간에 우리는 좌절하기 쉽고 무기력해지기 쉽다. 하나님의 얼굴이 가린 것 같고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악인의 공격이 지니고 있는 심리적 압박에 불과하다. 우리의 기분과는 상관 없이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와 늘 함께 계시고 우리를 환란에서 구원해 주신다.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악행을 절대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리고 악인의 악행으로 인해 곤경에 처한 의인들을 모른 채 하지 않으신다. 위기와 고통의 상황에서 여호와께 피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 이것을 믿는 자가 정직한 자이고, 그것을 믿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뵐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2. 00:35

시편 9, 10

하나님은 심판자이면서 피난처이시다

 

시편 9편과 10편은 함께 읽어야 한다. 이 시편들은 답관식(acrostic Psalms)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각 연이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를 배열해서 쓴 것을 말한다. 글 쓰는 사람은 내용만이 아니라 일정한 형식을 통해서도 자신이 말하고 싶어하는 주제를 알리기도 한다. 내용과 형식이 어울려 빚어내는 언어 예술이다.

 

시편 9편은 감사찬양시이고, 시편 10편은 탄원시이다. 찬양과 탄원이 어우러져 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 맨날 찬양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맨날 탄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찬양과 탄원은 변증법처럼, 또는 대위법처럼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시편의 내용이다. 시편 9편의 내용은 하나님이 무대 중앙에 서 계시고 악인들이 주변을 서성이는 형국이고, 시편 10편은 악인들이 무대 중앙에 서 있고 그들을 상대로 하나님께서 승리를 거두시는 형국이다.

 

눈이 더 가는 것은 시편 10편의 탄원이다. 희극보다 비극에 더 마음을 빼앗기는 인간의 심리가 반영된 탓이다. 시인은 애가 탄다. 악인들의 비아냥거림에 속이 뒤집힌다. 악인들이 하는 비아냥거림을 들어보라.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10:4). 악인들이 세상에 판을 치는 이유고, 그들이 대놓고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다. 그도 그럴 것이 악인들이 대놓고 악한 일을 저질러도 하늘에서 금방 벼락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도 우리의 일상에서 체험하는 현상이다. 내가 지금 악한 일을 행하고 있다고 해서 당장 나에게 천벌이 내리지는 않는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악인들은 마음이 대담해진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은 눈이 없나 보다. 하나님은 손발이 없나 보다. 하나님은 세상을 전혀 돌보지 않나 보다. 하나님은 없다.’ 악인들의 악행은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가 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하나님은 감찰하지 않으실까?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는 속담이 있다. 꾀를 내어 남을 속이려다 도리어 그 꾀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시인은 악인들의 악행을 이처럼 꼬집고 있다.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9:15). 악인들이 파 놓은 웅덩이와 숨긴 그물들은 참으로 악랄하다. 그것들은 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같고(10:9), 거기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다(10:7). 악인들의 횡포에 가난하고 가련한 자들은 넘어진다. 아프게 넘어진다.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감찰하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악인들을 그냥 놓아두시는 거다. 그들의 죄값은 그들이 파 놓은 웅덩이와 숨긴 그물들로 인해 그대로 자신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이렇게 탄식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인들에게는 재판관이지만, 의인들에게는 피난처시다. 그러니까 탄식은 악인들에 대한 심판이면서 동시에 의인들에 대한 구원인 것이다. 탄식함으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탄식함으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신다’(10:14). 시인이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이유다.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의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자이면서 피난처이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