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7. 28. 06:56

2011 7 27일 수요 예배 설교

본문: 에스겔 28:1-9

제목: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의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의, 즉 정의롭지 못한 일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의분이라는 것이 잘못 쓰이면 남을 정죄하는 데 쓰입니다. 나만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남이 불의한 만큼 자기 자신도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겸손한 겁니다.

 

우리는 살면서 의분을 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의분을 낼 때는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의분을 낸다고 하니까, 우리는 과격한 말과 행동을 떠올리지만, “의분은 꼭 과격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그것을 볼 수 있는데,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향해서 의분을 내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그 상황이 매우 폭력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의 폭력성이 드러난 것이지, 그것에 대처하는 하나님의 의분은 인간들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심과 자비하심으로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의분은 사실 아무나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에 따르고, 그분께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절대로 의분을 올바로 낼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팔복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의분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 아래서만 의분이 나오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이란 하나님의 의가 이 땅 위에 올바로 실현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의가 올바로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애통해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의롭지 못합니다. 불의가 판을 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또는 내 삶의 구석구석에서는 의롭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생명, 구원을 말합니다. 의롭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생명을 파괴하는 일, 구원의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과 고통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마 전 그 평화로운 나라 노르웨이에서 대량학살 테러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무려 76명의 생명이 이슬같이 사라졌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일본 소설가가 있습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소설이 상실의 시대라는 소설인데, 한국말로는 그렇게 번역되었지만, 원작의 제목은 노르웨이의 숲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노르웨이의 숲에서 이러한 대학살이 벌어졌습니다. 그 작가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또 비틀즈의 노래 중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비틀즈의 노래를 좋아했던 분들은 아실 겁니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속삭인 사랑 또는 이별 노래죠. 비틀즈가 이 소식을 듣는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또 있습니다. 노벨상은 원래 스웨덴 것이지만, 노벨 평화상 만큼은 노르웨이에서 선정하고 상을 줍니다. 그런 노벨 평화상이 베풀어지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이러한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노벨평화상 위원회는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한 마디로, 불의하고 이해되지 않는 세상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것입니다.

 

이 사건도 불의하지만, 이 사건을 일으킨 학살자 안데르스 브레이빅의 삶 자체도 불의합니다. 부모의 이혼과 복잡해진 가족 관계 속에서 외롭게 십대를 보낸 브레이빅의 삶은 그에게 고통을 안겨다 주었고 정상적인 삶을 할 수 없는 비뚤어진 마음을 심어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불의합니다. 불의한 삶에서 나온 불의한 일입니다.

 

어제는 서울에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곳곳이 침수되고, 특별히 우면산에서 토사가 흘러내려 그 주변의 주민들이 여러 명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은 개인적으로는 제가 살던 동네입니다. 지난 7년 동안 나의 살던 고향을 못 봤는데, 토사로 쓸려 내려가 전쟁터처럼 변해버린 동네를 인터넷 사진으로 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러한 자연재해를 통한 일들도 의롭지 못합니다. 생명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생명을 앗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정말 불의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큰 사건들이지만,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감지하지도 못하는 불의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한 불의한 일들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은 어떠해야 합니까? 바로, 애통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하면서 하나님께 따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하나님의 의로움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애통해야 한다는 겁니다. “주의 나라가 하루 빨리 임하옵소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불의를 불의로 인식할 수 있고, 불의를 보고 애통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불의한 일을 보고 애통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만해지는 두로 왕의 간악한 마음입니다. 이번 주 성경통독 범위를 읽어보신 분을 알겠지만,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 모두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계속 반복해서 등장하는 문구가 바로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통해서 열방에게 당신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선포하시길 원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열방을 비추는 빛이 되길 바라셨습니다. 열방을 일깨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인 것을 알기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일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쓰러지는 이스라엘을 보고 주변 나라들은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삼으시고 제사장 나라 삼으신 이스라엘이 망하는 일은 불의한 일입니다. 열방이 만약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워했다면, 이스라엘이 멸망해 가는 그 불의한 일을 보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애통하는 마음을 가졌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통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보면서 비웃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기는커녕, 하나님을 능멸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불의를 보고 애통하기는커녕, 불의를 보고 기뻐하며 마음이 교만해진 두로 왕을 심판하겠다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장엄한 말씀입니다. 각 나라마다 심판을 선포하시는 장면이 너무 장엄하고, 너무 심오하고, 너무 깊습니다. 하나님의 애통하는 마음이 읽어지는 듯 합니다. 그 중에서 두로 왕을 심판하시겠다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27장을 보면 두로에 대한 애가가 기록되어 있는데, 두로가 얼마나 부국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실로 잘 먹고 잘 살던 나라였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미국이나 일본쯤 되는 나라입니다. 여러 나라와의 무역을 통해서 부를 축적했습니다. 두로의 입장에서 보면 이웃 나라였던 이스라엘(북이스라엘, 남유다)는 망해가는데, 자신들은 계속 부를 누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마음이 교만해진 것입니다. 심지어, 두로 왕은 자기 자신을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28 4-5절 말씀이 전해줍니다.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해졌도다.”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입을 빌어 28 11절 이하에서 에덴동산의 아담으로 비유합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과…”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어떻게 하다가 쫓겨났습니까? 불의한 일을 불의하다고 하지 못하고, 애통하지 못하고, 그저 불의한 일을 쫓아 행하다가 그렇게 망하게 되었습니다.

 

두로를 비롯해서 이스라엘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불의한 일을 불의하게 보지 못하니까, 애통한 마음이 없고, 도리어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안일한 생각을 갖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백성이 왜 망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의가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의가 무엇인지 아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불의를 보고 그냥 있지 아니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아가페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 마음은 의로움으로 가득 찹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 마음은 생명으로 가득 차고, 구원으로 가득 찹니다. 생명과 구원이 가득한 의로운 마음은 절대적으로 불의를 미워하고 불의를 보면 의분이 생기고, 불의를 대하면 애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주 여호와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분을 아는 자는 의로움 가운데 살 것이요, 그분을 모르는 자는 불의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알아, 애통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그분께서 마음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7. 27. 23:10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음


(
)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나라였습니다. 당서(唐書) <구양순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서예의 달인으로는 당초사대가(唐初四大家)로 꼽혔던 우세남(虞世南), 저수량(楮遂良), 유공권(柳公權), 구양순(歐陽詢)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배워 각자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습니다. 구양순의 엄정함, 우세남의 온화함, 저수량의 곱고 아름다움. 모두 서도(書道)의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 독특하고 힘찬 솔경체(率更體)를 이룬 구양순이 유명한데, 그는 글씨를 쓸 때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수량은 붓이나 먹이 좋지 않으면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하루는 우세남에게 구양순 선생과 자신을 비교해달라고 하였더니, '구양순은 어떤 종이에 어떤 붓을 사용하여도 자기 마음대로 글씨를 쓴다고 한다. 자네는 아무래도 안될거야[吾聞詢不擇紙筆 皆得如志 君豈得此(오문순불택지필 개득여지 군기득차).'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어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초점을 우리 하나님께 맞추어 보려고 합니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듯이, 하나님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붓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로봇처럼 마음대로 부린다는 의미에서 붓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지으신 백성이라는 의미에서 붓입니다. 하나님은 붓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뜻을 위해서 사용하십니다. 글 잘 쓰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쓸 때 좋은 붓이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대한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좋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금그릇이나 은그릇만이 하나님께 요긴하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질그릇 같은 우리들도 하나님께 귀하게 쓰이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기 위해서는 훌륭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건 인간들의 조바심과 자기만족에 불과합니다. 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내가 쓰이고 싶다고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쓰시기 편한 붓으로 나오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헌신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붓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은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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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7. 25. 03:54

2011 7 24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13:31-33, 44-52

제목: 천국은 마치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계시와 은닉을 위해서 입니다. 계시는 드러내는 것을 말하고, 은닉은 감추는 것을 말합니다. 계시와 은닉을 위해서 비유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비유란 순우리말로 그림언어라고 합니다. 일단 그림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림을 보면 뭔가를 보여주는 것 같아도, 때로는 뭔가가 숨어 있는데 안 보이기도 합니다. 일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라는 그림을 보면, 모나리자의 미소는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것 같으면서도 그 뒤에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시는 이유는 바로 천국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보이시기 위함이고, 완악한 마음으로 천국을 배척하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기 위함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여는 자들에게는 천국이 보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닫는 자들에게는 천국이 감추어 진다는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천국에 대한 갈망을 많이 합니다만, 잘 보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 또는 천국이 어떤 곳이냐라는 질문에 사로 잡혀 허송세월 보내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한 삶을 살고 있느냐에 따라서 천국이 드러나기도 하고 감추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천국에 대한 다섯 가지의 비유를 보았습니다. 그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2)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

3)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4)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5)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 대상이 갈릴리 호수 주변에 사는 민중들이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비유들은 그들에게 매우 익숙한 것들이었습니다. 알아듣기 쉬우라고 하는 비유가 도통 모르는 것에 빗대어 이야기하면 실패하게 됩니다.

 

첫째로, 겨자씨 비유에서 겨자씨는 갈릴리 호수 주변에 2월이 되면 흐드러지게 피는 잡초입니다. 귀한 것이 아니라, 볼품없고 흔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취급 당하는 것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볼품없고 흔한 잡초인 겨자씨를 정원에 심어 새들이 깃드는 큰 나무로 자라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즘 세상 말로 하면, 시골 촌뜨기 아이를 잘 키워서 하버드 대학에 입학시키겠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갈릴리 사람들은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었고
,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주류사회에서 밀려나 이방의 갈릴리라고 멸시받으면서 잡초처럼 눌려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잡초 같은 갈릴리 사람들을 천국 시민으로 초청하고 계신 겁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들이 얼마나 은혜를 받았겠습니까?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대로 그러한 사람들을 천국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서 잡초처럼 버려진 인생들을 집중적으로 찾고 심방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잡초 같은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누구나 주류인생, 꽃처럼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공평하지 못하고 의롭지 못하여, 나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나의 인생이 잡초 인생으로 밀려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이라고 해서 낙심하거나 괴로워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으시고 천국으로 초청하는 인생은 바로 잡초 인생이라는 것을 안다면, 오히려 우리는 잡초 인생으로 사는 것이 더 복되고 즐거운 인생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인생이 잡초 같은 인생이라고 할지라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잡초 같은 인생을 산다 할지라도 그들을 경멸하거나 깔보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 잡초 같은 인생을 사는 바로 그 사람이 나보다 천국에 더 가까이 간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돈이 많이야 사람 구실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이 세상에서 돈이 없어 궁지로 내몰린 사람들이나 아예 집도 없고 가족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는 홈리스 같은 사람들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잡초 같은 그들의 인생이 돈 자랑 하면서 사는 인생들보다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더욱더 입어 천국에 더 가까이 간 인생일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둘째로, 가루 서 말 속에 넣은 누룩은 이들이 매일 먹는 주식인 빵에서 볼 수 있는 흔한 것입니다. 한 말이 13리터 정도 되니까, 서 말은 39리터 정도의 양이 됩니다. 이는 약 100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양의 밀가루입니다. 가루 서 말에 들어가는 누룩은 아주 보잘것없이 적은 양입니다. 그러나 아주 보잘것없는 조그만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발효시켜 그 모양이 완전히 다르게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고 다니셨지만, 세상을 바라보면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로마의 지배는 여전하고, 그들의 삶은 여전히 곤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천국이란 바로 누룩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보기에 미미해 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온 천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예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신 메시아라는 사실이 온 천하게 드러나는 날이 올 거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는 일이 때로는 헛된 일 같아 보이고,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낙심 될 때,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보기에 미미한 것 같습니다. 시시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내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힘들고 지칠 때가 많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상황이 나빠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되, 낙심하지 말고 곧 드러나게 될 영광스러운 날을 위해서 쉬지 말고 일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칭찬하시고 보상해 주실 겁니다.

 

셋째로, 보화와 진주는 천국이 얼마나 감진 것인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것 또한 말해 줍니다. 보화와 진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너무도 귀한 것인데 사람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본 사람들은 자신의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그것을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 소유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소유할 수도 없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요즘은 모든 것을 바쳐서 천국을 소유하라는 말을 이단들이 오염 시켜놓았습니다. 재산 다 교회에 바쳐라, 이런 뜻으로 둔갑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재산을 다 바치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며 산으로 들어가서 사는 이단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한 번 재산을 다 바쳐 보십시오. 아무리 여러분의 재산을 다 바친다고 해도, 그것으로 천국을 살 수는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리 많은 돈을 지불해도 그 돈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이건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 지 보여주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비유가 사실로 둔갑해서 천국을 얻기 위해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 모든 재산을 바치라는 말로 둔갑하면 정말 곤란합니다.

 

돈 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우리는 그것으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집니다. 보잘것없어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값을 매길 수 없어서 값없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을 소유한 백성이, 구원 받은 백성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시원치 않은 것이지요. 그만큼 값지고 소중한 것을 얻었으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그것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나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귀하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배설물로 여겨질 정도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너무 귀해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배설물처럼 보잘것없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보다 귀한 것이 우리의 삶에는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로는 고백하면서도 우리 눈에 우리 마음에 더 귀해 보이는 것을 따라 발길을 옮기고 에너지를 쓰고 애정을 쏟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해 보십시오. 미움 다툼 시기 질투부터, 세상이 부추기는 부와 명예까지도 모두 시시해 보일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물은 갈릴리 호수 주변에 살던 사람이면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물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어업이 주 산업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거기에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물의 비유가 얼마나 이들에게 익숙했겠습니까?

 

이 그물 비유는 좀 섬뜩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비유가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이미 앞에 나와 있습니다. 가라지 비유가 그것입니다. 가라지 비유나, 이 그물 비유나 똑같이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이, 그물에는 먹을 수 있는 좋은 물고기와 먹을 수 없는 나쁜 물고기가 함께 잡힙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세상 끝 날에 있을 최후의 심판을 봅니다. 천국에 초청된 자들은 많습니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천국으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좁혀서 교회를 통해서 이 비유를 설명하자면, 교회는 고기를 낚는 그물과 같습니다. 거기에는 좋은 신자도 있고 나쁜 신자도 있습니다. ‘그물에 가득하매는 하나님이 정하신 심판의 때가 왔음을 연상시킵니다. ‘앉아서는 어부들이 물고기를 선별하는 모습입니다.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 하실 인자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인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같이 잡히지만, 우리의 능력과 지혜와 영성으로는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누가 좋은 물고기이고 나쁜 물고기인지 판단할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서로를 섣부르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약간의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알곡이다 좋은 물고기다판단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약간의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가라지다 나쁜 물고기다판단합니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판단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판단은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내가 저 사람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내가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교만입니다. 불경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인류 최고의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판단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판단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그물이 가득한 때’ ‘앉아서심판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자비와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내가 심판을 받고 어두운 데로 쫓겨나 이를 갈게 될지, 저 사람이 심판을 받고 어두운 데로 쫓겨나 이를 갈게 될지, 누가 그렇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옆 사람을 제발 판단하지 마십시오. 정죄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에게 기대를 걸지도 마십시오. 우리가 함께 배를 타고 거친 삶의 바다를 건너가고 있는 믿음의 동지들은 나의 판단을 받고 나의 정죄를 받고 나의 기대를 받는 자들이 아니라, 나의 용서를 받고 나의 용납을 받고 나의 기도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판단하지 마십시오. 정죄하지 마십시오. 기대하지 마십시오. 대신 용서하십시오. 용납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은 마치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우리에게 보이신 천국이 이제 좀 보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천국 백성이 된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 천국이 보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자에게는 이 천국이 보일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는 자에게는 이 천국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시간, 천국이 손에 잡히고 보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7. 23. 09:03
 신명기 21하나님 앞에서 성결하라!


신명기
21장은 5개의 규례를 담고 있다. 1) 미결 살인 사건 대속 규례, 2) 포로를 아래로 삼을 때의 규례, 3) 장자 상속권 보장 규례, 4) 패역한 아들에 대한 징벌 규례, 5) 사형수의 시체 처리에 관한 규례가 그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실정법과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법을 문자적으로 우리 시대에 적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의 법대로 산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때 그 시대에 적용됐던 것들을 이 시대에 새롭게 해석하여 적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미결 살인 사건만 해도 그렇다. 요즘에는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미결되는 살인 사건은 없다. 죽인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하여 암송아지를 잡는 것 자체가 오히려 이상한 행동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석해 내야 할 것인가?

 

신명기 21장에 나오는 5개의 규례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성결해지기 위한 장치들이다. 살인 사건은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것이다. 부정한 것을 성결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 의식을 치러야 하는데, 범인을 알 수 없으니 범인을 대신하여 성결 의식을 치러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도록 한 것이다. 성결 의식을 대신 치러야 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눈 여겨 보아야 한다.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21:3a).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무책임 할 때가 너무 많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해도 도의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책임의식은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데 필수요소다.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아파트다. 그러나 때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 중 하나가 쓰레기에 관한 것이다. 주차장이나 아파트 입구에 종종 쓰레기가 널려 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그 쓰레기는 치워지지 않을 때가 허다하다. 누군가 대신 치워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결국 쓰레기를 치우는 건 아파트 관리인의 몫으로 남겨진다. 쓰레기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으려는 입주자들의 무책임 때문이다. 물론 아파트 관리인이 최종적인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가벼운 것들,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쓰레기는 오가는 가운데 치울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삶의 모습 하나만 보아도 요즘 시대가 얼마나 무책임한 시대인가 알 수 있다.

 

이 외의 장자 상속권이나 패역한 아들의 처리 문제는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규례들이다. 하나님 창조하신 세계에는 질서가 엄연히 존재한다. 물론 그 질서에 대한 성찰이 꼭 필요하지만, ‘질서자체는 어느 관계에서든지 존재하는 법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질서는 그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가정의 질서, 교회의 질서, 사회의 질서, 자연의 질서 등 질서가 허물어지면 그 공동체는 허물어진다. 본인이 곧 법이고 질서인 존재는 하나님 한 분 외에 어디 있는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게 산다는 것은 책임질서를 존중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 책임질서가 얼마나 잘 지켜지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의 안녕과 평화가 보장될 것이다. 나는 책임 있게 행동하는 사람인가? 나는 질서를 존중하는 사람인가? 내 마음대로 하면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 행복한 것이 아니라, 책임과 질서 가운데 사는 것이 잘 사는 것, 행복한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7. 22. 00:24

단기지교(斷機之敎): 짜던 배를 끊어버려서 가르치다 / 학업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훈계


한나라 유향
(
劉向)의 열녀전(列女傳) 맹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맹자가 집을 떠나서 공부를 하다가 공부를 마치지 않은 채 홀어머니를 뵙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베를 짜던 어머니는 가위로 베를 끊어버리고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네가 공부를 도중에 그만두고 집에 돌아온 것은 이처럼 짜던 베를 끊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이란 학문을 익히지 못하면 도둑이나 남의 하인이 될 뿐이다." 크게 깨달은 맹자가 다시 집을 떠난 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밑에서 학문의 길에 정진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 이전에 성경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한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성경을 대중화시킨 겁니다. 성직자뿐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지요. 그래서 개신교는 다른 기독교 교파보다 성경 공부에 더 많은 공을 들입니다. 성경공부 없는 교회가 없습니다. 성경공부 프로그램에 참여 안 해본 교인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성경공부가 그냥 유행처럼 돼버렸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 공부하는 이유는 성경 지식을 쌓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는 성경 말씀대로 살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성경공부는 난무하는데 성경 말씀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눈으로 읽은 것이 아니라 손으로 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성경을 익히지 못하면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인 되거나 사탄의 하인이 될 뿐입니다. 성경공부를 쉬지 마십시오. 성경 지식을 쌓기 위해 성경공부를 하지 말고 거기에 펼쳐진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통치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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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신앙2011. 7. 14. 00:51

무안(無顔): 부끄러워서 볼 낯이 없다는 것을 이르는 말

'무안색(無顔色)' 또는 '무색(無色)'이라고도 합니다. '얼굴이 없다'라는 뜻으로,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거나 상대편을 대할 면목이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당나라의 시인 백낙천이 지은 '장한가(長恨歌)'에는 당나라의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임금님을 모시게 된 그녀 / 눈을 돌려 한번 웃으면 / 백 가지 아름다움 피어오르니 / 아무리 곱게 화장한 궁녀들도 / 그 앞에서는 얼굴빛이 없다." 이 시의 한 구절에서 유래한 이 성어(成語)는 궁녀들의 고운 얼굴이 무색하게 된다는 뜻으로, 아름다운 양귀비 앞에서는 궁녀들도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양비귀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양귀비의 아름다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십자가에서 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아름다움은 양귀비의 그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십자가의 아름다움은 역설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십자가는 전혀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미련한 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18). 우리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좆는 자들이 아니고, 십자가에 나타난 역설의 아름다움을 좆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좇아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는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진리인 줄 알고 사람들을 좇아 다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잘 분간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감각은 타락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구원 받았다는 것은 올바른 감각, 즉 올바른 분별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뜻으로도 통합니다. 올바른 감각, 올바른 분별력을 지닌 자들은 십자가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진리임을 선포할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무엇을 더 아름답게 보고 있습니까? 양귀비입니까? 십자가입니까?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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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지용(無用之用): 쓸모 없는 것의 쓸모


아래의 세 가지 일화는 장자의 인간세편(
人間世篇)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공자가 초나라에 갔을 때 숨어사는 현자 광접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계피는 먹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나무를 벤다. 사람들은 쓸모 없는 것의 이용가치는 모른다."

혜자가 장자의 말이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하자 장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땅이 아무리 넓어도 사람이 서 있기 위해서는 발이 닿는 곳만 있으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발 닿는 곳만 남기고 나머지를 파버린다면 어찌 걸을 수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쓸모 없는 것도 다 쓸모가 있다."

잎만 무성한 나무를 나무꾼이 쓸모가 없다고 해서 자르지 않는 것을 보고 장자가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저 나무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자기 수명을 다한다."

 

이 세 가지 중 마지막 것이 참 좋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사도 야고보가 제일 먼저 순교를 당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가 제일 먼저 순교를 당한 이유는 비기독교인들이 보기에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쓸모 있는 재주꾼에 의해서 기독교가 발전되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 위협도 되지 않는 풀뿌리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기독교가 지금까지 연명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남은 자가 강한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이 너무 미약하다고 자책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존재가 너무 쓸모 없다고 비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미약하고 쓸모 없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쓸모 없는 것을 들어서 쓸모 있게 쓰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하나님의 선교에서 제외되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얼마나 은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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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신앙2011. 7. 4. 12:40

수성지난(守成之難): 나라를 유지하는 어려움


당나라를 세울 때 주역인 이세민은 당나라를 세우고 나서 나라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 그가 하루는 신하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나라를 새로 세우는 것과 나라를 유지하는 것(
守城) 중 어느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는가?” 신하들마다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그는 나라를 새로 세우는 것도 어렵고 나라를 유지하는 것도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나라를 새로 세웠으니, 이제부터는 나라를 유지하는 일에 전념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23년간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두고 우리 신앙인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을 갖는 것과, 신앙을 지키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이에 대한 대답도 분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신앙을 가질 수 없을뿐더러, 신앙을 지키기도 힘듭니다. 신앙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매우 능동적인 것 같으면서도, 매우 수동적입니다. 이는 신앙의 주도권이 우리들에게 있지 않고 성령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신앙을 갖는 것과 지키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성령님께 신앙을 맡기는 일을 매우 버거워합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우리에게는 신앙을 갖는 것도 지키는 것도 어렵게 느껴집니다. 신앙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님께 맡겨 보십시오. 그러면 쉬워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가 있습니다. 성령님께 맡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님께 맡기는 것입니까? 한 번 고민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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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6. 29. 21:39

연목구어(緣木求魚):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얻으려고 한다는 뜻


물고기를 얻으려면 시냇가로 가야 합니다
. 물고기를 얻으려고 나무 위에 오르는 일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말은 맹자가 전국시대의 제나라 선왕에게 한 말입니다. “왕께서는 천하를 통일하고 오랑캐를 복종시키려는 대망이 있으나 무력으로 대망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연목구어는 그 뒤에 재앙을 당하는 일이 없지만 패자가 되려고 하다가 실패하면 나라가 멸망하게 됩니다.” 맹자는 선왕에게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도록 하는 일에 먼저 힘쓰라고 간언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왜 십자가를 택하셨는가에 대해서 많은 의구심을 갖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랐던 대로 다윗의 자손으로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로마 군대를 몰아내고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상 나라를 굴복시키면 더 손쉽고 속 시원할 텐데, ‘왜 저토록 힘 없이 무력하게 초라하게 비참하게 십자가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매다는 방법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려 했는지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나 만약 유대인들이 대망했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셨다면 이는 곧 연목구어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다면 하나님이나 세상 권세 잡은 자들이나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힘만 센 하나님 밖에는 되지 못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신 것은 그분의 경륜이고 신비입니다. 우리는 때로 연목구어해서, 고기를 잡으러 나무에 올라가는 우를 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위해 올바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지혜 자체시기 때문에 지혜롭지 않은 일은 못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가 구원 받았음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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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6. 27. 04:39
 2011 6 2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2:1-14

제목: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어떤 아들이 "어머니를 사랑한다. 어린양처럼 천사 같은 어머니를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로 보내드려야 한다"고 생각해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평소 종교에 심취해서 사건 발생일 얼마 전부터 방에서 나오지 않고 방언을 하면서 괴성을 질러댔다고 합니다. 아마도 기도(방언)을 통해서 신접(하나님을 만남)했었나 봅니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겁을 먹고 있는 딸을 달래는 도중 이러한 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정신병력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조사 도중 횡설수설하는 등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존속살해(자기나 배우자의 직계가족을 죽이는 일)가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어머니를 죽인 아들의 진술을 보건 데, 아마도 어머니를 죽이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이 진술로 살인에 대한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한국 근대문학의 거장 김동인의 소설 <명문>이라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전 주사라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노망이 난 어머니를 편히 보내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칭찬 받을 선행이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독살합니다. 이 일로 전 주사는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죽습니다. 죽어서 하늘 나라에 간 전 주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법정에 또 다시 서게 됩니다. 자신이 한 일을 통해 하나님께 칭찬 받을 거라고 확신했던 전 주사는 하나님 앞에서 의기양양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죽인 것은 살인죄라며 그의 지옥행을 결정하시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이렇게 존속살해 하는 장면이 성경에도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산제물로 바치는 장면을 보고 아멘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니까 앞뒤 다 떼어놓고 그 이야기를 거룩하게만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게다가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니까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예배 드리면서 계시를 받았는데, 그것이 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자녀를 하나님께 산제물로 바치라는 계시였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요즘 시대에 이러한 계시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가는 당장 경찰에게 붙잡혀서 철장 신세를 지게 될 겁니다.

 

우리는 오늘 아브라함의 마음을 한 번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과 관련이 된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 이런 약속을 받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러한 약속을 받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낯선 땅에 이르러 거기에서 오랜 세월을 살았는데도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사라의 몸 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을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건 하나님의 약속의 자식이 아니라, 인간의 조바심과 욕심에서 비롯된 자식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는 이제 자식을 생산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거의 약속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이삭이라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어렵게, 아니 불가능한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얻은 약속의 자식인 이삭을 하나님께 당신께 산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두 가지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가나안 족속들과 그 주변 나라들 사이에 만연했던 어린 아이의 희생제사를 싫어하셨는데, 그 싫어하시고 폐지하려 하셨던 바로 그 제사를 드리려고 하니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의 자식을 주시고, 이삭을 다시 산제물로 바치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당신의 약속을 거두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커다란 의구심이 들었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모리아 산으로 향합니다. 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은 3일 걸렸습니다. 모리아 산으로 가는 3일 동안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어떤 생각을 하면서 모리아 산으로 향했겠습니까? 룰루랄라 하면서 갔겠습니까? 그러한 명령을 받아본 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생각을 하면서, 극단적인 고뇌에 빠져 3일 동안을 끙끙거리면서 갔을 겁니다.

 

모리아 산에 도착해서 아브라함은 종들을 산 아래 남겨 두고, 아들 이삭하고만 산에 오릅니다. 장작은 이삭이 지고, 불과 칼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산에 오르면서 이삭은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왜 제물로 드린 어린양은 없습니까?”

 

심장을 파고드는 질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심장에는 화살이 꽂히는 것과 같은 아픔을 느껴졌을 겁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아들에게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그냥 정직하게 말합니까? “네가 바로 제물이란다!” 이렇게 모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모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 순간, 아니 아예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하는 이 순간에 아브라함은 모든 것이 끝이라는 절망에 빠졌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약속은 이제 없어지는구나! 하나님께서 약속을 거두시는구나! 이제 나는 미래가 없는 허망한 인생을 살게 되겠구나!’

 

이 순간, 아브라함은 온 힘을 다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는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온 존재가 젖먹던 힘까지 짜내며 지르는 영혼의 탄성이었습니다.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리고 침묵 가운데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서의 제사는 진행이 됩니다. 제단을 쌓은 뒤 아들을 결박하여 제물 삼아 제단 위에 놓고 칼을 들어 아들을 잡으려고(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천사가 아브라함을 막아 섰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영혼의 탄성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아셨노라고 선포합니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리고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숫양 한 마리가 수풀에 뿔이 걸린 채 있었습니다. 그 숫양을 잡아다가 이삭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리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일컬어 여호와 이레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하신 시험(Test)입니다.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신뢰하느냐 아니냐를 본 무시무시한 시험입니다. 견딜만한 시험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력화되고 인간의 힘으로 견딜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시험입니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믿음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이보다 더 한 시험을 당하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갈 때 아바 아버지를 외치고 다 이루었다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때처럼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을 겁니다.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예수님을 처형한 무리들을 물리치시고 숨 넘어 가기 전에 있었던 예수님을 극적으로 구해내셨을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를 뛰어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그렇게 아무런 힘 없이 죽었습니다. 그냥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순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신뢰했습니다. 그랬더니, 믿지 못할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꼭 배워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신앙생활은 참 허무한 겁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무너집니다.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붙잡지 못하고, 눈을 자꾸 딴 곳을 돌립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 육체로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는 어떠한 영혼의 탄성이 흘러나옵니까? 어떠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신실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일이 잘 안 풀리고, 삶이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약속의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한, 그분께서 친히 준비해 주신다는 믿음이 이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이 시간,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희망을 전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 주십니다. 그러니, 갈등 되지만, 흔들리지만, 힘들고 어렵지만, 아브라함처럼 마음 속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탄성을 질러 보십시오! “아버지! 당신께서 친히 준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친히 준비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