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사색2011. 1. 13. 12:49

시편 3편 - 절망에서 희망으로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사람들과 적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적 질만한 사람과 적을 지게 되면 그나마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고 살면 되니까 그럭저럭 견딜 만하지만, 늘 얼굴 보고 살아야 하는 사람과 적을 지게 되면 곤란을 겪게 된다.

 

시편 3편은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 때 지은 시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이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이 갑자기 대적자, 원수가 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삶의 자리도 절망이고, 인간 관계도 절망이다. 이 절망의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다윗 왕처럼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탄원하는 것밖에는 없다.

 

우리는 흔히 문제가 발생되면 그 문제에 정신이 빼앗겨 주위를 보지 못한다. 그런데 시편 3편의 시인은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시인은 문제보다 그 문제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돌린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이것을 실제로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일단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일단 문제에 정신을 빼앗기고 문제에 집착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쁘고 분주하다. 나름대로 기도를 하지만 그 기도는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 즉 문제에 집착한 기도이지 문제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가 되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문제는 간단하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들은 풍월로 하나님을 안다. 서당 개가 3년 동안 서당을 서성이면서 배운 것이 , 이듯이 우리도 교회를 드나들면서 하나님에게는 관심을 별로 갖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눈에 안 들어오고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 자체에 집착하게 된다.

 

시편 3편의 시인을 보라. 하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3). 무엇보다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 빠져 풀이 죽어 고개 숙이고 있는 나를 일으키시는 분이다. 상상해 보라.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날 때의 비통함을. 모든 것을 잃고 도망가는 그 수치스러움을. 잃을 것이 없는 자도 원수에게 쫓기면 마음이 비통한 법인데, 왕이었던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바로 그 비통하고 수치스러운 상황에서 시인은 시온산을 바라보았다. 그 성산에 자신의 탄원의 기도에 응답하실 분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1:6).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산, 시온산은 갈보리 산에 선 십자가이다. 수치와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주관하신다. 살면서 부닥치는 문제들 가운데서 절망하고 있는가?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십자가 신앙, 그리스도 신앙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어찌 절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절망하지 말고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라. 부활의 주님께서 머리를 들게 하실 것이다. 이것만이 우리의 희망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8).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 11. 00:03

2011 1 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3:13-17, 10:34-43

제목: 세례, 증인으로 세움 받음

 

오늘은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이면서 주님의 수세 주일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 날을 수세 주일로 지키면서 주님께서 세례 받으신 일을 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바로 이 세례 받음을 통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세례에 대해서, 그리고 세례 받으시고 난 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 세례와 우리의 신앙 생활의 상관관계를 짚어볼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례의 중요성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찬식을 하는 날이나, 세례식을 하는 날이나, 시간이나 잡아먹는 지루한 예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맙니다. 정말로 세례가 그런 것에 불과하다면 기독교 역사가 세례를 교회의 중요한 의식으로 정하고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성례전으로 자리 잡았고, 지금도 여전히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으며, 앞으로 교회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은 세례를 지루한 예식 정도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알고 행해야 할 중요한 예식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통해서 받으신 세례는 단순한 물세례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즉위식이었습니다. 고대의 왕들은 왕으로 등극할 때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기름 부음을 통해서 공식적인 왕으로 등극을 하고 그때부터 공적인 업무를 수행해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있어 세례는 기름 부음의 의식이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세례가 곧 기름 부음은 아닙니다. 세례는 기름 부음을 받기 위한 정결의식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지 않으면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 의해서 요단강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내려왔습니다.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 순간입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정결의식과 기름 부음이 동시에 일어나는 영적인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통해서 기름 부음을 받으시고, 그때부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시며 공식적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임무를 수행하셨습니다. ,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왕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우리가 읽은 또 하나의 본문인 사도행전에서도 이 사실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본문은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거기에서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이 세례를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38절에서 베드로의 진술에 의하면, 세례는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이 부으신 사건입니다. 세례를 통해 기름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어떠한 일을 행하셨는지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에게 요약해서 잘 전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복음의 핵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마태복음의 말씀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고 나신 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좀 더 면밀히 살펴보겠습니다. 세례 받으시고 난 후, 세 가지의 기묘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하늘이 열렸고, 둘째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왔고, 셋째는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첫째로, 하늘이 열리는 현상은 매우 중요한 묵시(비밀)가 올 때의 징조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보면 사도 요한이 종말에 있을 일을 알게 될 때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굉장히 시각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도 이 말을 가끔 씁니다. 뭔가 잘 모르겠고 답답했던 일이 한 순간에 풀릴 때, 우리는 하늘이 열리는 것 같다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하늘에 무슨 문이 있어서 활짝 열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큰 비밀이 밝히 드러날 때 쓰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비밀이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큰 비밀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밝히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하늘이 열리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드러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합니다.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예수님 위에 임한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 기독교 전문 연구 조사 기관인 바나그룹이 2010년도 리서치를 통해서 발표한, “미국 기독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커다란 6가지 변화라는 자료를 보니, 요즘 현대 기독교인들의 문제 가운데 하나가 성령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성령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성령이 무엇인지 대개 하나님의 능력 정도로 생각하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성령에 대하여 귀신과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대한 오류는 성령을 우리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귀신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 분에 의해서 우리가 움직여 집니다. 성령님은 자유로운 영이십니다. 진리의 영이십니다. 새창조의 영이십니다.

 

오늘 이 짧은 시간에 성령이 무엇인지, 성령님께서 누구시고 어떠한 일을 하시는지 다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령님에 대한 상식은 많은 부분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무엇보다 새창조의 영이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새로운 역사, 새로운 창조, 새로운 삶이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성령이 임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여시는 사역을 감당하시게 될 거라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사역이 무엇이었습니까? 십자가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새로운 세상을 여셨습니다.

 

셋째로,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확정해 주는 말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고, 그리고 이 음성이 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라는 확정의 말씀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이 바로 하늘이 열린 정황입니다. 하나님의 큰 비밀이 드러났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이러한 정황 속에서 우리는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세례는 매우 드라마틱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아이덴티티가 드러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인데, 그것이 세상에 공적으로 공표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세상에 전하는 엄청난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합니다. 세례를 통해 예수님께서 드라마틱하게 새로운 삶의 국면에 들어서신 것처럼 우리도 드라마틱하게 새로운 삶의 국면으로 들어섭니다. 첫째,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의 행위를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교회에 일원이 됩니다. 셋째, 새로운 삶을 부여 받습니다. 이것이 세례가 가져다 주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들이 무엇인지 증인으로 세움을 받는 취임식입니다.

 

세례를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례는 우리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 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는 엄청난 순간입니다. 세례 받은 자는, 사도행전 말씀의 베드로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자로 서게 됩니다. 교회는 증언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서로 격려 하면서 세상을 향해 우리에게 주어진 증언의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고,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싸움이라고 에베소서 6 12절은 전하고 있는 겁니다.


성령으로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들
.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언 공동체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 죽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은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한 일들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수세 주일을 맞아, 우리는 증인의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인지 돌아보면서 우리의 사명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귀한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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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1. 3. 08:32

아들에게 입맞추라

 

이 시편은 다윗 왕조의 왕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다윗 왕조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조다. 그렇기 때문에 그 왕권은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것처럼 영원하다. 그 왕권은 누구도 넘볼 수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다윗 왕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민족(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다. 이 상황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고 여겨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지 못하다고 비난해야 할 것인가?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마저 잃은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희망이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포되고 있는 시편 2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 없음을 고발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어떠한 방식으로 성취될 것인지를 제시한다. 다윗 왕조를 무너뜨렸다고 해서 이방 나라들이 좋아할 이유가 전혀 없다. 다윗 왕조의 영원성은, 그리고 그의 힘과 권세는 다윗 왕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께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다윗 왕조가 무너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권세가 무너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아 다윗 왕조를 무너뜨린 이방 나라들을 비웃고 계시다(4).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당신의 아들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이는 문자적으로는 다윗 왕을 가리키지만, 신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것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11:1). 예수 그리스도는 그래서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가져온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새로운 다윗 왕조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이 나라는 다윗 왕조처럼 다윗의 자손이 왕이 되는 나라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 하나님께서 다윗을 일컬어 나는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삼하 7:14)고 선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신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7).

 

복음서에서도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전한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3:22). 이는 모든 권세가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었다는 선포이다. 그가 바로 만왕의 왕이시고 이방 나라를 심판하시는 심판주라는 선포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파루시아)는 것을 선포하셨다. 그 하나님 나라의 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그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선포되었다.

 

이 역사적 사실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시편 2편의 말씀은 그것을 가르쳐 준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12). 진노를 피하고 구원 얻는 길은 단 하나,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맞추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맞추는 자는 다 복(구원)을 받을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1. 2. 04:03

그리스도의 삶에 나를 던지다


(
, Blessing)”이란 무엇인가? 현대인들에게 에 대해서 설명해 보라고 하면 우선 복권같은 개념을 들어 설명할 것이다. 옛 풍습을 조금 아는 사람 같으면 새해 첫날에 세배 할 때 하는 인사(“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와 어른 들이 해주는 덕담(“복 많이 받거라!”)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어느 것이든 그 근본은 물질적 풍요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니까 현대인들에게 은 곧 과 같다.

 

복에 대해 이러한 개념을 가진 현대인들에게 시편 1편에서 말하고 있는 은 매우 낯선 것일 수밖에 없다. 첫 음절이 으로 시작하는 것에 반색하다가도 첫 번째 구절이 다 끝나가기도 전에 얼굴이 굳어질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에 대해서 자신들이 기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씀이 선포되기 때문이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등의 단어들은 마음을 매우 심란케 한다. 현대인들은 이 단어들을 듣기 싫어한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들과의 관계를 따지지 않고는 을 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동사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걷다(따르다)”, “서 있다”, 그리고 앉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로 대표되는 경건치 못한 자들과는 그 어떠한 관계도 갖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들과는 함께 길을 걷지도 말고, 그들과 함께 서서 대화도 나누지 말아야 할뿐더러, 그들과는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복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2절은 복 있는 사람이 함께 걷고, 서 있고, 앉아야 할 것을 제시해 준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걷고, 서고, 앉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다. 우리 일상 속에서 복 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면서 묵상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좁은 의미로 보면 토라(모세 5)을 의미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좀 더 구체적인 의미로 여호와의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이시기 때문이다( 5:17,18).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라는 뜻은 일상을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내 삶 안에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그리스도의 삶에 던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3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삶이다. 시냇가에 나무를 심는 것이지, 나무가 심겨진 곳으로 시냇물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는 만사형통을 꿈꾸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기 전까지 그 소망은 헛된 욕심에 불과하다.

 

복이란 무엇인가? 복 있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자신의 삶을 던진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이런 자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다. 이 손에 잡히는가?


Posted by 장준식

가난자들의 어머니였던 테레사 수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혈통과 태생상 나는 알바니아인이다. 국적으로 나는 인도인이다. 나는 가톨릭 수녀이다. 나의 소명으로 말하면 나는 전세계에 속한다. 그리고 나의 마음으로 말하면 나는 완전히 예수님에게 속한다.

유대인들은 혈통을 따졌습니다
.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니면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구원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무시했습니다. 자신들과 이방인들을 철저하게 구분했습니다. 기업을 함께 누릴 형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인들은 국적을 따졌습니다. 로마 시민이 아니면 열등한 시민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을 노예 삼았습니다. 로마 시민과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을 철저하게 구분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나라 사람들은 로마 시민권을 따기 위해서 돈 거래를 했습니다(22:27-29).

요즘 기독교인들은 교파 또는 교단을 따집니다
. 개신교 입장에서 자신들은 ‘좋은 놈’이고, 가톨릭은 ‘나쁜 놈’이고, 정교회는 ‘이상한 놈’입니다. 개신교 안에서도 교단의 입장에 따라 위치가 달라집니다. 극보수, 보수, 정통, 개혁, 진보, 그리고 이단 등을 나뉩니다. 자기 교단만이 진리를 간직한 것처럼 우겨댑니다.
세상은 온통 줄 세우고 담을 쌓는 일에 바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이와
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2:14).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주인이나 종이나 구분이 없게 하셨습니다(3:28).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막힌 담을 허물고 계시는데, 우리는 허물어진 담을 다시 쌓는 일에 몰두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혈통도, 국적도, 교파∙교단도 아닙니다. 소명과 소속이 중요합니다.
 
테레사 수녀는 자신의 소명은 전세계에 속하고, 마음은 완전히 예수님에게 속한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에게 속해서 세상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이민교회 성도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혈통과 태생상 나는 한국인이다. 국적으로 나는 미국인이다. 나는 개신교 신자다. 나의 소명으로 말하면 나는 전세계에 속한다. 그리고 나의 마음으로 말하면 나는 완전히 예수님에게 속한다.

누구에게 속하여 무엇을 품고 사십니까
? 예수님에게 속하여 세상을 품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외의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소속을 따져 가며 줄 세우고 담을 쌓은 일은 복음을 배반하는 일입니다. 소속이 어디입니까? 나는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입니다.이 말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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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0. 12. 28. 08:44

2010 12 2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10-18

제목: 인간의 굴레와 그리스도의 구원

 

어느덧 2010년도가 다 지나고 마지막 주일을 이렇게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선한 싸움을 함께 싸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인 줄로 믿습니다. 한 해를 이렇게 보낼 때마다 우리는 인생의 허무함을 많이 느낍니다. 특별히 우리 인생은 질병과 고통 가운데 있고, 그 끝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한 해가 속절없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두려움과 불안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뉴스를 보니까, 즐거워야 할 성탄절기가 각종 사고로 얼룩이 졌다고 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일어난 성탄절 사건 사고를 접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네 개의 촛불을 켰습니다. 희망, 평화, 기쁨, 사랑의 촛불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성탄절 전야 예배를 드리면서 그리스도의 촛불을 켰습니다. 그 촛불을 켜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것들, 희망, 평화, 기쁨, 사랑을 가져다 주셨다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은 그런 소식이 아니라, 각종 사건 사고 소식과 더불어 여전히 희망 없고, 평화 없고, 기쁨 없고, 사랑이 없는 아프고 고통스러운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크리스마스 자체가 그렇습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왠지 마음이 기쁜 것 같고, 분위기를 살려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추리도 하고 선물도 사고 맛있는 음식도 해서 가족들과 또는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나면 마음이 이전보다 더 허전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성탄절을 복음으로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받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그분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복음을 온 몸으로, 온 삶으로 받은 사람들은 그 기쁨이 날로 자라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격적으로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받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받은 사람에게는 그 기쁨이 금방 사라져 버립니다. 오히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은, 믿음은 심리학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크리스마스를 심리적으로 이용합니다. 우리는 거기에 쉽게 휘둘립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깨어 있던 선지자들도 성경에서 이 점을 계속해서 지적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언제든지 인간의 심리를 이용합니다. 아닌 것을 자꾸 심리적으로 그렇게 믿으라고 하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예레미야 선지자와 대립했던 하나냐 선지자는 철저하게 남유다 백성의 심리를 이용해서 거짓 예언을 했습니다. 대중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죠.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말씀을 전했는데 비해, 하나냐는 절대로 바벨론에게 항복하지 말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거라는 말씀을 전했는데 비해, 하나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손에서 저들을 구원해 줄거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의 심리적인 입장에서 보면 하나냐의 예언이 더 좋아 보입니다. 누가 항복하고 정복당하는 것을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와 달랐습니다. 외롭게 힘겨운 싸움을 했던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이토록 연약합니다.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잘 판단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영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도 쉽게 병들고, 결국에는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육체는 모두 그렇게 연약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심리적 장치에 이리 쏠리고 저리 쏠려서 기분에 따라 살아갑니다. 요즘 우리가 맞는 성탄절도 거기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성탄절을 보내고, 이제 2010년도의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여러분과 심리적인 복음이 아닌, 심리적인 신앙이 아닌,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참 복음, 참 신앙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복음의 핵심 개념인 성육신대속적 고난에 대해 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탄절기를 보내면서 우리는 이 질문을 꼭 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셔야만 했는가?”입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그야말로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그냥 한 말씀만 하시면 되지, 뭐 하러 번거롭게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사실을 전하면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간의 실존을 이야기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 인간의 실존은 혈과 육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많은 한계에 부딪히면서 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혈과 육에 속해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고통 가운데 신음합니다. 그리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영혼과 육체에 씌워진 굴레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굴레가 인간의 궁극적인 약점이고, 두려움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15절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 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존재라고 말입니다.

 

마귀는 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합니다. 그래서 마귀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가 됩니다. 죽음의 세력으로 인간을 넘어지게 합니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이러한 일들이 끊임 없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헤롯 대왕을 통해서 마귀는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죽음으로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요셉에게 피신하라고 알려주었고, 그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들여다 보면, 예수님의 삶은 죽음의 세력과의 싸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종 질병과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고쳐주시고 어루만져 주셔서 그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마귀는 끊임 없이 예수님과 대립했습니다. 제자들을 무력하게 만들었고, 제사장들과 빌라도와 헤롯까지 한 통속이 되도록 공작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무리를 돌아서게 하고, 유다를 꾀여 음모를 꾸미게 해서 예수님을 결국 죽음에 몰아 넣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마귀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죽음의 권세로 결국 예수도 죽게 만들었다는 승리의 미소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군중들도 모두 그렇게 그냥 끝나는 줄 알고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잃고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전해주고 있는 것처럼, 죽음의 세력으로 인간을 넘어지게 하는 마귀를 멸하시는 방법이, 바로 그 죽음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말로 통쾌한 역설이고, 기막힌 역전입니다. 죽음과 죽음의 폭군을 이긴 방법이 죽음이라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들보다 조금 못한 존재가 되어 성육신 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혈과 육에 속한 인간이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죽음을 자발적으로 받으셔서, 대속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는 겁니다. 대속의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셨다는 것이죠. 그리고 죽음에 매여 종노릇 하던 우리에게 자유를 선포하시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혈과 육을 취하시고 잠시 천사보다 못하게 되신 것은 혈과 육의 한계에 묶여 있는 인간을 도우시기 위한 것이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성육신과 대속적 고난을 체험하신 분이기 때문에 혈과 육의 한계로 시험을 당하고 있는 우리를 충분히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One of us, 되신 겁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를 기쁘게 하고 흥분되게 하고 소망 가운데 거하게 하는 것은 이 복음이지, 세상이 조작하는 심리적인 장치들이 아닙니다. 네온 사인이, 크리스마스 캐롤이, 예쁘게 포장된 선물들이, 분주하고 활기찬 쇼핑몰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혈과 육에 속한우리 인간들처럼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처럼 인간의 굴레를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뒤, 그 죽음의 권세, 사망의 권세, 사탄의 권세를 멸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이 복음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겁니다.

 

크리스마스가 끝났는데도,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질병과 고통과 죽음 가운데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기를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뉴스를 통해 각종 사건 사고를 접하면서 삽니다. 뉴스를 통하지 않더라도, 예수를 믿고 있는데도, 내가 교회 다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내 삶에 여전히 질병과 고통이 존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 복음을 받지 못한 사람들, 심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게 뭐야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잖아라면서 투덜거리지만, 복음을 인격적으로, 온 마음을 다해서 받아들인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내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질병과 맞서 싸웁니다. 이런 사람은 고통 가운데 기뻐합니다. 이런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합니다. 내 기분에 따라 신앙생활 하지 않고,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에 따라 신앙생활을 합니다. , 인간의 굴레 속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봅니다. 이게 보여야 합니다. 복음을 따라가면 이게 보입니다. 이게 보이시는 분은 복음을 잘 따라가고 계신 중이고, 이게 안 보이는 분은 좀 더 분발하셔야 합니다.

 

성탄절기를 보내면서, 한 해의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시는 여러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굴레에 매여 질병과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면서 살고 있지만, 이것이 끝이 아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구원의 은총이, 성육신과 대속적 고난의 복음이 우리들의 희망이요, 평화, 기쁨이요, 사랑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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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0. 12. 28. 08:42

2010 12 1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7:10-16, 마태복음 1:18-25

제목: 사랑하면 들린다

 

아하스 왕을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요? 유약하다고 해야 할까요? 무지하다고 해야 할까요? 믿음이 없다고 설명해야 할까요? 아무튼, 참으로 한심합니다. 이사야 선지자 같은 대 선지자의 말을 듣고도 불신앙에 빠지는 것을 보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하스 왕은 지금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아람 왕 르신하고 북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연합해서 자기를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당시 남유다 왕국은 세력이 매우 약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예를 들면, 북한하고 중국하고 손잡고 한국을 치러 오는 형국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아하스 왕은 마음이 마구 흔들립니다. 그의 마음을 7 2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오늘 말씀은 이렇게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나라가 망할까봐, 벌벌 떨고 있는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굉장히 흥미로운 말로 표현을 합니다. 너무 유명한 구절이죠?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할 때 쓰인 말씀입니다. 14절입니다.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기에서의 핵심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징표를 말하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것에서 아하스 왕은 위로를 받고 새힘을 얻었어야 합니다. 임마누엘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시는 말씀이, 이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나이가 되기도 이전에, 아하스 왕과 남유다 왕국을 괴롭히던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망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역사 속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람은 주전 732년에 앗수르에게 병합되었고, 북이스라엘은 주전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 망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하스 왕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졌는데, 아하스 왕은 그 말씀을 듣지도 않았고 신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이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한 일이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습니다. 안방에 적을 들여 놓은 일을 한 것이지요. 앗수르의 도움을 받아 지금 당장의 위기를 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앗수르는 결국 가장 큰 적이 될 나라지 아군이 아니라는 겁니다. 실제로 역대하 28장의 말씀을 보면, 앗수르는 도와주러 와서는 남유다를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남유다를 침략해서 약탈해 갑니다. 상황이 말이 아닙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또 다른 본문인 마태복음을 보면 요셉에게 같은 말씀이 내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한 사이입니다. 이스라엘의 결혼법은 약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약혼이 곧 결혼은 아니지만 약혼한 사이는 결혼한 사이와 별 다르지 않습니다. 이때부터는 서로에게 구속력을 가집니다. 만약 약혼 한 시기에 성적인 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율법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한 사이인데, 그만 마리아가 합방도 하기 전에 임신을 한 겁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상황입니다. 지금이야 혼전 임신 같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들 생각하지만, 이 당시에는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사랑했습니다. 마리아에게 아무런 해가 끼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조용히, 아무도 눈치 못 체게, 마리아와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19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요셉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이 때 의롭다는 의미는 율법을 잘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의로움과 명성에도 손상이 안 가고, 마리아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때,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서 요셉에게 말합니다. 20절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그리고 이사야를 통해서 아하스 왕에게 내려졌던 말씀이 요셉에게도 내려집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아하스 왕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오히려 마음이 강팍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냥 자기 마음대로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망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리고 왔다고 오늘 말씀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누구를 통해서 전해진 말씀이 더 확실한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하스 왕에게 전해진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말씀이고, 요셉과는 달리 살아 있는 사람을 통해서 직접 눈 앞에서 전해진 말씀입니다. 보이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전해진 말씀은 현실이 아니라 꿈 속에서, 그리고 천사를 통해서 전해진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두 말씀 중 어떤 말씀이 더 확실합니까? 여러분은 어떤 말씀을 더 신뢰하십니까?

 

물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말씀이나, 꿈을 통해서 전해진 말씀이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똑 같은 말씀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하스 왕에게 전해진 말씀이 더 확실한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말씀이니까요! 꿈 보다는 현실이 더 확실한 겁니다. 많은 분들이 꿈을 오히려 더 확실하게 생각하시는 경향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긴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꿈을 통해서 뭔가 봤다, 들었다 하는 것 자체를 무슨 신통력을 지니고, 신령한 사람인 것처럼 여기는데, 매우 잘못된 태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아하스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직접 듣고, 요셉은 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었습니다. 둘 중에서 더 확실한 방법으로 전해진 것은 아하스 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누가 더 잘 들어야 할 상황입니까? 아하스 왕입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고, 요셉은 그것이 꿈으로 전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차이 때문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마음만큼 듣게 되어 있습니다. 들음과 행동은 곧바로 연결 되는데, 상대방을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듣고 행동하게 됩니다.

 

손쉬운 예로, 자식과 남편이 하는 말 중에 누구의 말을 더 잘 듣게 됩니까? 자식이 엄마, 이리로 와 보세요! 엄마, 이거 해주세요.” 그러면 이상하게도 자식의 말에는 능력이 있는지, 그래.. 하면서 갑니다. 그런데 남편이 부르거나 뭐 해달라 그러면, “왜 자꾸 불러싸요! 왜 자꾸 사람 귀찮게 해요!”하면서 핀잔을 줍니다. 이미 남편에 대한 사랑이 식었고, 자식에 대한 사랑은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똑 같은 말씀이 주어졌는데, 아하스 왕은 결국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말씀을 듣고 분부대로 했다고 합니다. 결국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요셉은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아하스 왕이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했는지는 아하스 왕의 행적을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평소에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19절에서 그리고 있듯이,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의로운 사람이라는 평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평가의 다른 말입니다.

 

요즘에 한국에서 식사와 관련해서 이런 농담이 유행한답니다. 하루에 한 끼도 집에서 안 먹는 남편을 일컬어 영식이 양반이라고 부르고, 하루에 한 끼만 집에서 먹는 남편을 일컬어 일식이 분, 그리고 하루에 두 끼를 집에서 먹는 남편을 일컬어 두식이 놈, 그리고 하루에 세 끼를 집에서 챙겨 먹는 남편을 일컬어 삼식이 새끼라고 한답니다. 그러면 하루에 세 끼와 간식까지 꼬박 챙겨 먹는 남편을 뭐라고 부르는 지 아십니까? 삼식이 간나 새끼라고 한답니다.

 

사랑이 식으면, 밥 차려 달라는 말도 듣기 싫어집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서, 가족들 간의 사랑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편이 하는 말이, 또는 부인이 하는 말이, 또는 자식이 하는 말이 들리십니까? 그 말에 귀를 기울이십니까?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만큼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우들끼리도 때로는 말이 안 통한다, 하면서 서로를 헐 뜯고 미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일이 부족하니까 일어나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마시고, 상대방을 사랑하려고 하십시오. 사랑하지도 않는데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이해해 보려고 하니까 그게 잘 안 되고 힘들고 그런 겁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의 말이 귀에 들리고, 상대방의 행동이 이해가 됩니다. 저절로.

 

우리는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사랑하는 만큼 듣게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고 싶어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다는 겁니다.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 있는 형국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 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내 마음에 합한 것만,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어 있습니다. 온전한 순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임신한 여인을 데려오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치명적일 수 있는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했던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의 입장에서 이 일을 묘사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의 입장에서 이 일을 묘사합니다. 거기에서도 마리아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일생일대의 위기요 위험한 일을 받아들입니다. 돌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자는 잠시 위험에 처해질 수 있으나, 결국 위대한 신앙의 선조가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자는 잠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으나 결국 멸망 당한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면 들립니다. 사랑하는 만큼 들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저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는 징표요 말씀입니다. 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하스 왕에게 전해졌던 말씀과 천사를 통해서 꿈에서 요셉에게 전해졌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야 합니다. 십자가를 사모하십시오. 그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 말씀을 듣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아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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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인생은 생로병사입니다. 삶이란 늙고 병들어 죽는 겁니다. 삶은 늙음과 병듦과 죽음에 대한 묵상 없이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현대 문명은 이것을 부정합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모른 채 합니다. 그것들을 삶과 분리시켜 놓는데 혈안입니다. 웰빙(Well-Being)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지 웰다잉(Well-Dying)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옛날에는 늙은이와 병든이 그리고 죽은이가 한 구역 안에 또는 한 집안에 함께 살았습니다. 요즘처럼 요양시설과 의료시설이 없어서 그런 면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차원에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가까이에서 생로병사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오히려 옛날 사람들이 삶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잠언 31:16)이는 말이 있습니다. 장수가 복이었고 백발의 노인은 지혜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백발의 노인은 존경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늙음이란 부끄러운 일처럼 여겨집니다. 늙으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늙은이를 짐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늙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당당하게 늙어야 합니다. 그게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병든이는 병원으로 또는 요양시설로 옮겨집니다. 물론 분주한 사회구조 속에서 병든이를 돌본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병든이를 돌보는 일이 남의 일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병원은 치료의 기능을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현대의 병원은 병을 우리의 일상에서 분리시키는 역할도 합니다. 병듦과 분리된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은 그래서 병듦에 서툽니다. 병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서툴고 병을 다루는 방법에도 서툴고, 특별히 병든이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일에 서툽니다. 병든이를 위한 위로의 말이 겉돌 뿐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부모가 죽으면 자식이 염도하고 매장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죽음에 대해서 알고 삶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 죽음은 전문가가 대신 처리해 줍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눈물 몇 방울만 찔끔 흘리기만 해도 어느새 내 앞에서 죽음의 흔적이 깨끗이 사라져 버립니다. 죽음에 대해서 묵상해 볼 겨를도 없이 일상으로 다시 내던져집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생로병사에서 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나머지 세 가지, ‘로병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삶은 반쪽 짜리 삶도 못 되는 사분의 일 쪽 짜리(Quarter Life) 삶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현대인의 삶이 얼마나 빈곤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현대인의 빈곤한 삶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늙는 것, 병드는 것, 그리고 죽는 것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기쁨을 충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삶은 늙고 병들어서 죽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무한 인생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생로병사를 철저하게 온 몸으로 받아들이십시오.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 마십시오. 그 앞에서 비굴해지지 말고 당당 하십시오. 이 세상의 생로병사를 잠깐 지나 우리는 곧 영원한 생명, 부활의 삶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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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0. 12. 14. 14:27

2010 12 1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야고보서 5:7-10

제목: 기쁨은 인내의 열매다

 

“Are we there yet?” “아직 멀었어요?” 어린 아이들이 차 뒷자석에 앉아서 몸을 비비 꼬며 하는 말입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지루함을 달래 보려고 노래도 듣고, 책도 읽고, DVD 시청도 해봅니다. 그런데 아직도 달리는 차 안에서 점점 몸을 지쳐가고 더 이상 지루함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입에서는 “Are we there yet? 아직 멀었어요?”라는 투덜거림이 튀어나옵니다. 인내를 가지고 조금만 더 참으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루함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냥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길 바랄 뿐입니다. 너무 지루하다 보니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오히려 더 지루해 보인다는 생각뿐입니다. “.. 지루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내, 우리의 기다림은 이런 기다림일까요?

 

이 동요를 기억하시죠?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서울에 왜 갔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오빠는 서울을 가면서 비단구두를 사가지고 오겠노라고 하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서울 간 오빠는 언제 돌아올는지 기약도 없고 소식도 없습니다. 오빠를 기다리는 이 소녀의 심정은 어떨까요?

 

이와 비슷하면서도 애절한 마음을 그린 소설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춘향전입니다. 조선시대 신분의 벽을 넘어서 서로 정인이 된 두 사람, 성춘향과 이몽룡. 두 사람의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내는 에너지로 작용합니다. 이몽룡은 과거시험을 치르러 한양(서울)에 갑니다. 이도령을 떠나보낸 성춘향! 이도령이 과거급제 해서 다시 돌아와 자신과 혼인할 거라는 걸 믿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도령을 기다리는 성춘향은 마을에 새로 부임한 변 사또에 의해 괴롭힘을 당합니다. 성춘향은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면서까지 저항하고 투옥까지 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성춘향은 굳게 믿었습니다. 이도령이 돌아올 거라고. 그러나 성춘향의 마음 속에는 점점 한이 서려갔습니다. 언제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수모를 언제까지 참아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위의 동요에서 등장하는 오빠를 기다리는 여동생도, 성춘향도 누군가를 인내 가운데 기다리지만 그 기다림 속에는 한이 서려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내, 우리의 기다림은 이런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야고보서의 말씀에서 우리는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라는 메시지를 듣습니다. 대림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들려오는 메시지입니다. 인내하라, 기다리라 합니다. 표면 상으로는 “Are we there yet?”의 기다림과 뜸북새 그리고 성춘향의 기다림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릴 때 지루해서 온 몸을 빌빌 꼬면서, 그리고 이 마음에 한을 품고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성경에서 말하는 인내, 기다림은 어떤 기다림일까요?

 

오늘 말씀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모티브는 농사일입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농부가 열매를 바라고 그리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그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이 구절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가나안 땅에서의 농사 문화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가나안 땅은 굉장히 척박한 땅입니다. 땅이 척박하다는 것은 물 구경하기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아무리 비옥해 보이는 땅도 물이 없으면 쓸모 없습니다. 그래서 고대 사회는 대개 강물이 흐르는 곳을 중심으로 발달했습니다. 강에서 물을 끌어다가 농사를 짓기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요단강이 흐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나안 땅의 지형입니다. 요단강은 해발 -200미터 정도 지역을 흐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계곡을 흐르는 물입니다.

 

요즘에야 한일 자동펌프같은 것을 이용해서 물을 끌어다 쓰면 되지만, 고대 사회에는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저 200미터 밑에서 흐르는 물을 퍼다가 농사짓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서 농사 지을 때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물의 원천은 빗물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나안 땅에는 비가 잘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타이밍입니다. 비가 제때 와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 내리는 비, 그곳도 농사가 잘 되기 위해서 제때 와주어야 하는 비, 그 비가 바로 이른 비와 늦은 비입니다. 가나안 땅는 11-3월은 비가 오고, 5-9월은 비가 오지 않습니다. 10,11월에 내리는 비를 이른 비라고 하고, 3,4월에 내리는 비를 늦은 비를 합니다. 파종과 수확에 있어서 이 비는 생명과도 같은 비입니다.

 

비가 내리느냐 안 내리는냐에 따라서 농사의 결과가 달라졌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제때 잘 와줘야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비는 생명줄과도 같았고 비를 내려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었으니, “이른 비와 늦은 비신앙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농부는 땅에 씨앗을 뿌릴 때, 그 씨앗이 자라나 맺게 될 열매를 상상합니다. 이미 농부는 그 씨앗의 열매를 보면서 씨앗을 뿌립니다. 그리고 애타는 마음으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립니다. 얼마나 간절한 기다림입니까? 그 비가 안 오면, 굶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생명과 직결된 비입니다. 그러나 농부는 씨앗에서 이미 열매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지만 그 마음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실 거라는 확신입니다. 비를 내려 주셔서 씨를 뿌리면서 보았던 열매를 거두게 하실 거라는 믿음입니다.

 

야보고서 기자는 지금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을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기다림이 어떠한 기다림인지 분명하게 깨달았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쓰이고 있는 인내, 기다림에 대한 용어는 약간의 설명이 더 필요한 용어입니다. 야고보서 기자가 이 단어를 쓸 때 어떠한 뜻으로 썼는지 원어를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말로는 헬라어 원어를 인내, 기다림 정도로 번역하고 있지만, 영어에서 이 단어를 좀더 정확하게 표현해줄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Spirited”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에너지가 가득한 상태, 결의, 결심, 또는 용기가 가득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위에서 “Are we there yet?”이나 뜸북새, 춘향전에서 살펴보았던 인내, 기다림과는 성격이 다른 인내, 기다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의 인내, 기다림은 지루함이 가득한, 한이 서린 그러한 인내고 기다림이었지만, 야고보서 기자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인내, 기다리는 그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에너지가 넘치고, 결의, 용기가 가득한 인내, 기다림이라는 사실입니다. 영어 단어에서는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는 낱말로 “Generosity, Magnanimity”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말로는 관대함, 기꺼움정도로 번역하죠.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에 대한 인내, 기다림은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서 기자는 이 진리를 전하고 있는 겁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면서 그 씨앗 속에 있는 열매는 보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미 이 세상의 마지막 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을 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과거나, 현재의 관점에서 미래를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래의 관점에서 과거나 현재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곳에 임했습니다.

 

이게 보이십니까? 이게 보여야 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면서 씨앗에서 열매를 보지 못한다면 그 수고가 헛되고 고단하게 됩니다. 지루하고, 불안하게 됩니다. 열매가 맺어질 지 알 수도 없는 씨앗을 무슨 이유로 뿌립니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뿌리는 정도 밖에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농부의 씨앗입니다. 열매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종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입니다. 부활을 체험했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농부가 씨앗을 뿌리면서 열매를 이미 보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인내, 기다림이 어찌 에너지가 넘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어찌, 기꺼운 마음으로, 관대한 마음으로 용기 백배한 마음으로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대림절 기쁨의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쁘십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이생의 복들을 누리고 계셔서 기쁘십니까? 물론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 주시는 소중한 기쁨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기쁨의 근거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입니다. 우리의 기쁨의 근거는 인내, 기다림에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인내이고 기다림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에 대한 인내, 기다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기쁨의 원천이십니다. 기쁨은 인내의 열매입니다. 기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오는 필연입니다. 이 기쁨을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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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0. 12. 9. 23:52

나는 여기서 2천 년을 살았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세워지지 않았다, 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없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는 말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없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망하지 않았다, 는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없다.

사람들은 지나가면서

쓰레기통을 뒤지는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본다.

그들이 신기해 하는 것은

내가 단순히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 때문이 아니라,

쓰레기통을 뒤져 찾아낸

썩은 음식을 먹기 때문이라는 것도 나는 안다.

썩은 음식을 먹는 나를 보면서

썩은 음식을 먹어도 괜찮나, 생각 할 것이다.

사람들은 모른다. 내가 왜 썩은 음식을 먹는지.

기껏 생각해봤자, 돈이 없어서, 그야말로 거지여서

쓰레기통을 뒤져 썩은 음식을 먹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천 년을 로마에서 살아온 나는

돈이 없어서, 그야말로 거지여서 쓰레기통을 뒤져

썩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다.

2천 년을 로마에서 살아온 나에게

가장 정다운 냄새는 바로 썩은내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도

쓰레기통을 뒤져 찾아낸 썩은 음식을 먹는 나를 보면서

신기한 듯 그냥 지나쳐버리고 있지 않는가?

당신 손에 들려 있는 빵조각을 더 힘차게 움켜쥐면서.


* 떼르미니 역은 이탈리아 로마의 중앙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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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