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와 신앙2011. 8. 22. 03:57

기호지세(騎虎之勢): 호랑이를 올라타고 달리는 기세 / 중도에서 그만둘 수 없는 형세


남북조 시대 말엽에 북조 최후의 왕조인 북주(
北周)의 선제(宣帝)가 죽자, 재상 양견(楊堅)은 즉시 입궐하여 국사를 총괄했습니다. 외척이지만 한족(漢族)이었던 그는 일찍이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왕조를 타도하고자 기회를 노리던 바, 이번에 모반을 꾀하고 있을 때 이미 양견의 뜻을 알고 있는 아내 독고(獨孤) 부인이 글을 보내왔습니다. '당신은 이미 호랑이를 올라타고 달리는 기세이므로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일입니다[騎虎之勢 不得下]. 만약 도중에서 내리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호랑이와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디 목적을 달성하시오소서.' 이에 용기를 얻은 양견은 나이 어린 정제(靜帝)를 폐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문제(文帝)라 일컫고 국호를 수()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589, 문제는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인 진(:557∼589)나라마저 멸하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 수서(隨書) 독고황후전(獨孤皇后傳) -

 

예전에 호랑이 등에 올라타지 말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구원파, 신천지 등 이단에 대한 주의보를 내린 설교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진리를 가장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진리일수록 유사진리의 파리가 많이 꼬이는 법입니다. 그만큼 진리를 구분해내는 것이 힘들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가 아닌 것에 빠져 패가망신 당할 수 있습니다. 호랑이 등에 한 번 올라타면 내려오기 쉽지 않습니다. 호랑이 등에서 내려오면 오히려 호랑이에게 잡혀 먹을 수 있습니다. 진리가 아닌, 가짜 진리는 날마다 우리를 유혹합니다. 가짜 진리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합니다. 누가 먹어도 맛없고, 누가 봐도 추한 것에 손 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단 거기에 물들고 나면 눈과 귀가 가려져 더 이상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걸 중독이라고 합니다. 이단 사이비에 중독된 사람들은 더 이상 본인들 힘으로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호랑이 등에 탄 사람처럼 무섭게 돌진합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합니다. 그래서 이단 사이비에 빠진 사람들이 더 신앙이 좋아 보이고 더 열정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이단, 사이비에 빠지지 마십시오. 끝장 날 때까지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잘 받아 초대교회를 잘 세워나갔던 성도들처럼, 목사의 가르침을 잘 받아 교회와 삶을 잘 세워나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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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주일 아침에 조깅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몸에서는 땀과 함께 독소가 빠져나가고 마음에 스며 있는 못된 생각조차 그 땀과 함께 제거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뜀뛰면서 하는 생각이 가장 맑은 것 같습니다. 생각이 맑아져서 그럴까요? 오늘따라 들려오는 매미 소리가 달라 보입니다. 여름 내 온 천지를 가득 메우던 일상적인 소리가 오늘은 다르게 들려옵니다. 다르게 들려온 매미 소리를 시()로 옮겨 봤습니다. 제목은 매미 소리입니다.

 

매미 소리를 시끄럽다 하지 말라 / 그대는 매미의 심정을 아는가? / 매미 소리는 매미의 정열이다 / 그대도 매미처럼 인생이 짧다고 생각해 보라 / 그대 안에 정열이 움틀 댈 것이다 / 그대의 목소리는 그 정열을 담아낼 것이다 / 그대의 목소리에는 온 우주가 담길 것이다

 

하루 종일 틈만 나면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듣고 우리는 별 신경 안 쓰든지 아니면 시끄러워서 못살겠다고 합니다. 이는 매미 소리가 하찮아서 그렇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하찮게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 살기 바빠서 매미 소리를 들을 여유조차 없다거나, 나 살기 바빠서 매미 소리 듣는 것조차도 부담스럽다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마음에 스며 있는 못된 생각의 독소가 우리의 마음을 마비시켰기 때문입니다.

 

눈이 없어서 여름의 푸르름을 못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귀가 없어서 새들의 재잘거림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삶이 바빠서 매미 소리가 귀에 안 들어오거나 시끄럽게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헛된 것에 정신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여름이 끝나갑니다. 어느 시인이 말한 것처럼, “초록은 나날이 제 돌계단을 내려갑니다.” 곧 있으면 낙엽이 허공을 나뒹굴 것입니다. 하늘은 더 높고 푸르러지겠죠. 그야말로 하늘이 높아지고 말()조차 살이 붙는 풍요의 계절이 올 것입니다. 여름은 나날이 제 돌계단을 내려가고, 가을은 나날이 제 돌계단을 올라옵니다. 내려가는 여름을 배웅 나가고 올라오는 가을을 마중 나가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헛된 것에 빼앗겨 있으면 배웅도 마중도 모두 못 나가겠지요. 오늘 저녁, 시간 내서 석양을 바라보며 뜀뛰기라도 한 번 해보시지요. 마음이 환해질지 누가 압니까? 마음이 맑아야 보는 것이 보이고 듣는 것이 들리는 법입니다. 문득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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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1. 8. 18. 23:29

우면산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고 있었을 때,

우면산 계곡을 타고 내려오던 물도 마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사람을 품으려 하지 않고 있었을 때
,

우면산도 더 이상 겨우내 내려 쌓인 눈을

3월까지 품으려 하지 않고 있었다.


우면산이 품고 있던 땅 안으로

아파트가 들어서고, 학교가 들어서고,

도심에서 살던 사람들이 들어서고 있었을 때,

그 땅에서 논과 밭을 일구어 삶을 꾸려나가던 토박이들은

그 땅을 떠나고 있었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 사람들이 우면산 정상을 향해 길을 놓고 있었을 때
,

우면산에서 살아오던 동물들은 살기 위해 산을 버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교통체증 해소와 시간 절약이라는 명분으로

우면산의 가슴을 파고 들고 있었을 때,

물과 눈과 땅과 토박이들과 동물들, 그리고 우면산이 만들어 낸 추억들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잊혀지고 있었다.

 

지난달,

우면산 터널 준공식은 일정대로 치러졌다.


* 얼마 전 폭우로 인해서 우면산이 무너졌다.
그 소식을 듣고 내 마음도 무너졌다.
위의 시는 2003년도, 내가 미국으로 떠나오던 해에 지은 시이다.
우면산은 생명을 살리는 산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우면산이 파헤쳐질 때,
우면산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제 우면산은 그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괴물로 변한 것이다.
나의 살던 고향, 나의 놀던 동산,
우면산이 이렇게 변했다니...
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충격이다.
주님, 구원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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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20여 년 전 선친께서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오신 적이 있습니다. 성지 순례 다녀오시면서 유럽 쪽도 몇 나라 거쳐 오셨는데, 그 때 매우 낯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럽에서는 물을 사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페트병에 물을 넣어 파는데 1불 정도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만해도 한국에서는 물을 사먹는다는 것이 매우 낯선 광경이었습니다. 천지에 깔린 게 물인데 물을 왜 사먹어야 하는지, 어린 나이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물을 사먹는 것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물을 사먹지 않으면 안 될 정도입니다. 먹을 만할 물, 식수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들로 산으로 강으로 다니면서 뛰놀던 시절에 물이라는 것은 그냥 그 자리에서 언제나 철철 넘치며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물 속에는 분명 물고기가 살았고, 가재도 살았고, 민물 새우도 살았습니다. 모래무지, 방게도 빼놓을 수 없죠. 소금쟁이도요. 그런데 지금은 시냇물이나 계곡물이나 모두 말라버려서 어릴 적 잡으면서 놀았던 생명체들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이 마르고 사라져가는 동시에 생명도 물과 함께 마르고 사라진 것입니다.

 

이처럼 물과 생명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이 넘치는 곳에는 생명도 넘치지만, 물이 없는 곳에는 생명도 없습니다. 지금은 지구 전체가 부족한 물 때문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생명이 위태로워졌다는 뜻입니다. 옛날에 ‘물쓰듯 돈을 쓴다’는 표현은 돈을 펑펑 낭비한다는 뜻을 가리켰지만, 이제 ‘물쓰듯 돈을 쓴다’는 말은 쫄쫄 아껴 쓴다는 뜻으로 바뀌어야 할 지경입니다. 생명과 물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일컬어 "생명의 물, 생수"라고 합니다(요한복음 4). 예수님을 물에 비유한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생명이라는 것을 가볍게 생각해서 그렇지, 생각하면 할수록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만큼 생명이란 깊은 묵상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나마 생명이라는 것을 손에 좀 잡히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인체 생명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물에 예수님을 비유한 것이지, 예수님은 물보다도 더 절대적으로 우리의 생명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물은 마셔도 다시 목마르지만, 예수님이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물이십니다. 내 안에 예수가 부족하면 내 생명은 위태로운 것이고, 내 안에 예수가 충만하면 내 생명은 온전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좀 깨달아지시는지요?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8. 17. 03:50

노익장(老益壯): 늙을수록 더욱 건장하다 / 늙을수록 더욱 굳은 의지를 갖는다

한나라 말기 부풍군(
扶風郡) 출신으로 힘이 천하장사에 명장인 마원(馬援)은 대기만성 형의 인물인데 고향에서 죄수들을 다른 곳으로 이송하는 책임을 맡은 관리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죄수들을 이송하다가 그들이 너무 괴로워서 애절하게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는 동정심을 못 이겨 모두 풀어준 뒤 북쪽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는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 대장군이 되어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평소에 이렇게 말하고는 했답니다. "사나이란 어려운 형편에 처할수록 더욱 굳세게 버티어야 하고 늙을수록 더욱 건장해야만 한다." -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 –

 

노익장”, 사도 바울의 이 말이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워로지도다”(고후 4:16). 여기에서 겉사람은 육체를 가리키고, 속사람은 영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 나면 우리는 육체와 영이 분리된 존재고, 육은 구원 받지 못하고 영만 구원 받는다는 헬라철학의 이원론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의 구원은 육과 영의 종합적인, 또는 전체적인 구원입니다. 영만 구원 받고 육은 썩어지고 없어지고 만다는 생각은 기독교의 생각이 아니라 헬라철학에 기초를 둔 이단 사설입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생겨난 이단 기독교 종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은 구원 받았으니 어차피 구원 받지 못할 육은 아무렇게나 굴려도 된다는 생각에 매우 부도덕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건 명백한 이단 사설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겉사람과 속사람은 좀 더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건 영과 육의 이원론적 구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성숙, 즉 성화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법칙에 의해 늙습니다. 이건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겁니다. 육체가 늙어가면 모든 감각, 우리의 욕심을 자극하던 그 모든 감각이 무디어져 이 세상에 점점 미련을 버리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의 내면은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이게 올바른 신앙인의 삶입니다. 거꾸로 이 세상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늙어갈수록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허무하고 불쌍한 인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노익장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늙어갈수록, 이제 곧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생각에 오히려 삶이 더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리스도인 노익장으로 늙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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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부부 사이에 주고 받는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이 암예방과 노화방지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이것을 검증하기 위해 ‘TSL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개발해서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는 ‘Thank you, Sorry, Love’의 약어입니다.

 

노인 남성 30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는데 ‘TSL’의 표현을 자주 하는 남성은 그렇지 않은 남성에 비해 혈액을 분석한 결과, 산화성 스트레스 지표는 감소하고 항산화 능력 지표는 늘었다고 합니다. 혈액내 산화성 스트레스 지표가 높게 나올수록 암, 고혈압, 당뇨 등 각종 성인병에 걸릴 확률이 높은데, 그 수치가 줄었다고 하니 발병확률이 낮아진 것입니다. 그만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혈액내 항산화 능력 지표는 노화와 관련이 있는데 항산화 능력 지표가 낮으면 빨리 늙고, 그 지표가 높으면 노화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TSL’의 표현 통해서 항산화 능력 지표가 높게 나왔다는 것은 늙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뜻입니다.

 

Well-Being(웰빙)이 최고의 가치가 된 요즘, 웰빙을 위해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음식도 가려 먹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스트레스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하고 음식도 가려 먹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위의 연구 결과가 보여주듯이, 우리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참된 건강은, 참된 웰빙은 관계의 회복에서 온다는 겁니다.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이에서도 관계가 멀어지면 땀 흘리는 운동도 가려 먹는 음식도 웰빙에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가족끼리도 관계가 멀어지면 건강을 위해서 몸에 좋다는 것 다해보고 다 먹어보아도 결국 웰빙은 먼나라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아무리 부와 건강을 이 땅에서 누린다 하여도 결국 웰빙은 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의 표현은 좋은 관계가 아니면, 회복된 관계가 아니면 쓰기 힘든 표현입니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이 말을 다시 표현하면, ‘고맙습니다는 은혜이고, ‘미안합니다는 회개이고, ‘사랑합니다는 용서입니다. 은혜와 회개와 용서 없이 웰빙은 없다는 뜻입니다.

 

가볍게는 우리의 언어 습관을, 무겁게는 우리의 내면을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 없이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하기 힘들고, ‘내 탓입니다라는 회개 없이 미안합니다라는 말은 입에서만 맴돌 뿐이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용서하라는 말씀에 대한 깨달음 없이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입술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정말 잘 살고(Well-Being) 싶으십니까? ‘TSL’을 마음 속 깊이 묵상하고 실천해 보십시오.


Posted by 장준식

몇 주 동안 사무실에 들어온 쥐 때문에 변치 않은 날들을 보냈습니다. 어릴 적 아침마다 했던 일들 중 하나가 광 속에 들어가서 쥐덫에 걸려든 쥐를 개울가에 가져가 익사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살던 동네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근 30년 동안 쥐와 대면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를 살면서, 그것도 미국에서 쥐를 대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쥐는 상당히 신출귀몰합니다. 문을 열고 사무실에 들어가면 금새 꼬리를 감추고 사라집니다. 바깥으로 나오게 하려고 두드려 보아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귀신처럼 어딘가에 숨어서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손으로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끈끈이 쥐덫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쥐덫 위에 빵 한 조각을 놓아 두었습니다. 다음 날 생쥐 한 마리가 끈끈이 쥐덫에서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며 찍찍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드디어 잡았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쥐를 쓰레기 통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습니다. 분명 어제 책상에 있던 쥐똥을 치우고 쥐도 잡았는데 쥐똥이 또 발견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끈끈이 쥐덫을 하나 더 설치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무실을 비워두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생쥐 한 마리가 또 잡혔습니다. 사무실을 휘젓고 다니던 쥐는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때론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탄이가 설치해 놓은 덫에 걸려 허덕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본인 힘으로는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덫에 걸리기 전 그것이 덫인 줄 알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덫으로 걸어 들어 갑니다. ‘나는 덫에 걸려도 내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내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있어!’ 하지만 이건 큰 착각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애초부터 없습니다. 그런 마음조차도 사탄이 주는 헛된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 전혀 없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의 바깥에서 와야만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바깥에 계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오직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바깥에 계신 분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하나님의 초월성이라고 합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하여 죄의 덫에 빠져 있는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깥에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붙들지 않으면 우리에겐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은총에 손 내미십시오.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 전에 빌려 쓰던 미국교회의 사무실이 위치한 건물이 100년이 넘은 건물이다보니, 게다가 창문도 없었고.. 애 좀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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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와 신앙2011. 8. 6. 05:28

화서지몽(華胥之夢): 화서의 꿈 / 좋은 꿈(을 꾸다)


고대 중국의 황제(
黃帝)는 올바른 정치를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몸과 마음이 피곤해지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석 달 동안 정치에서 손을 뗀 채 쉬던 어느 날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화서씨의 나라(華胥之國)에 놀러 갔습니다. 그곳은 왕도 없고 명령을 내리는 사람도 없는 가장이상적인 나라였습니다. 사람들은 욕심도 없고 사랑도 미움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초월한 자연 그대로였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황제는 "나는 꿈속에서 도를 깨달았다."고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깨달은 도에 따라서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당연히 천하가 태평해졌습니다. - 열자(列子) 황제편(黃帝篇) -

 

우리의 삶은 늘 구부러지기만 합니다. 우리의 삶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아서 가만히 있으면 강 아래로 떠내려갑니다. 굽은 것을 펴보려고, 흐르는 인생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이 쉽게 피곤해집니다. 일이 안 풀릴 때는 좀 쉬어야 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전도서 10:10).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잘 가꾸어 나가는데 필요한 연장들이 무디어졌는데도 그것을 잘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냥 무조건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열심이 있어야죠. 성실하게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건 기본입니다. 그러나 그 성실과 그 열심이 빛을 발하게 하려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디어진 인생의 철 연장을 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위에 등장하는 황제도 열심히 정사를 돌봤지만 몸과 마음만 피곤해졌을 뿐입니다. 그가 해답을 찾은 때는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던 때가 아니라 몸과 마음에 쉼을 주고 있을 때입니다. 즉 무디어진 연장을 갈고 있을 때입니다. 이 지혜를 꼭 몸에 익혀야 합니다. 먹고 살기 바쁜 시절에 배부른 소리 같지만, 쉬는 시간을 꼭 확보하십시오. 허영심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쉬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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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8. 2. 23:09

간장막야(干將莫耶): 중국 춘추시대 간장이 만든 두 자루의 명검


(
)나라 왕 합려(闔閭)가 대장장이 간장에게 명검을 두 자루 만들어서 바치라고 명령했습니다. 간장이 칼을 만들기 위해 청동을 녹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청동은 삼년이 지나도 녹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그의 아내인 막야가 남편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용광로에 넣은 뒤 300명의 소녀가 풀무로 바람을 넣으니까 그제야 청동이 녹았습니다. 드디어 간장이 명검 두 자루를 만들어, 양의 기운이 있는 검을 간장, 음의 기운이 있는 검을 막야라는 명칭을 붙였습니다. 순자는 천하의 명검들을 열거했습니다. 제환공의 총(), 주문왕의 녹(錄), 초장왕의 홀(), 오왕 합려의 간장과 막야, 그리고 거궐과 벽려 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무리 명검이라 해도 숫돌에 갈지 않으면 무딘 칼일 뿐, 아무것도 베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 오월춘추 합려내전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은 여행을 떠나면서 세 명의 종들에게 각각 다섯, , 그리고 한 달란트씩을 맡깁니다. 그런데 주인이 돌아왔을 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은 그것을 불려서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그것을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그것을 그대로 주인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화를 내면서 그 종을 일컬어 무익한 종이라고 하면서 그 달란트를 빼앗아버렸습니다. 이 달란트 비유는 천국에 대한 비유인데,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각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위에서 순자가 한 말과 엮어 생각해 보면 하늘 나라를 소유한 자는 무엇을 하든 복된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천국은 마음 속에 감추어 둘 수 없습니다. 명검을 가졌다고 그것을 장롱 속에 꼭꼭 감추어만 두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명검을 제대로 관리해 주지 않으면 위급한 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천국을 소유한 자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널리 펼쳐지도록 끊임 없이 천국을 이세상에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천국을 소유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밝히 드러나도록 갈고 닦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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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8. 1. 04:37

2011 7 3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창세기 32:22-31

제목: 하나님과 더불어씨름하라

 

섬집아기 노래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스로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 소리 맘이 설레어

다못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 옵니다



참 위태로운 광경입니다. 아버지는 죽었거나 고기 잡으러 먼 곳에 갔나 봅니다. 상황을 보니 엄마도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형편인 것 같습니다. 아이는 어립니다. 하지만 엄마는 어린 아이를 돌봐줄 여력이 없습니다. 엄마가 섬그늘에 나가 굴을 따서 내다팔지 않으면 아이를 굶길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위태롭지만, 아이를 집에 혼자 남겨두고 엄마는 눈물을 머금고 굴따러 바다에 나갑니다.

 

집에 홀로 남겨진 아이. 영문도 모른 채 혼자 집에 남겨져서 혼자 집을 지키며 혼자 놉니다. 이 생활이 익숙한 것 같습니다. 엄마가 나갔는데도 보채거나 울지 않고 혼자서 잘 노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혼자 노는 아이의 모습이 여간 위태로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놀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나,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혼자서 놀다가 지쳐서 잠이 듭니다. 늘 그랬듯이,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서 마루바닥에서 그냥 잠이 듭니다.

 

굴 따러 간 엄마는 집에 혼자 놓아두고 온 아이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굴을 따서 팔아야 먹고 사는 형편이지만, 그래서 몸은 바닷가 갯벌에 와 있지만 마음은 아이가 혼자 남겨진 집에 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요? 이윽고 마음은 몸을 부릅니다. 아직 바구니를 다 채우려면 더 일해야 하는데, 일 손이 잡히지 않습니다. 아이를 혼자 집에 놓아두고 온 것 때문에 엄마의 마음이 여간 위태로운 것이 아닙니다. 엄마는 곧장 집으로 달려갑니다. 아직 채우지 못한 바구니를 옆에 끼고 말이죠.

 

이 세상에서 가장 위태롭고 슬픈 동요입니다. 이 동요를 들을 때마다 저는 늘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이렇게 위태롭고 슬픈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해달라고요. 어서 빨리 당신의 나라가 임하여 우리 모두가 당신의 안전한 팔에 안기어 행복하고 기쁜 삶을 살게 해 달라고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의 삶은 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위태롭습니다. 위태롭지만 그냥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요즘엔 경제 위기다, 환경 위기다 해서 세상이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습니다. 평화를 누리고 있는 듯하지만 그건 겉보기에만 그렇고, 속을 들여다 보면 우리 인류는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경제의 위기가 닥치거나, 환경의 위기가 닥치면 거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그 위태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 속에서 위태로움 가운데 있는 한 사람을 봅니다. 그의 이름은 그 이름도 유명한 야곱입니다. 야곱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위태로웠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먼저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장자권을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장자권을 모태에서부터 탐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태어날 때 형 발 뒤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름도 야곱이라고 지어졌습니다.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 또는 움켜쥐는 자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성장하면서 남성답게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통상관념으로 남자는 사냥 등 바깥 일을 해야 하는데, 그는 도통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집에 남아서 엄마를 도와 늘 집안 일만 했습니다. 그런 야곱을 아버지 이삭은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삭은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장남 에서를 샌님 같은 작은 아들 야곱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엄마 리브가는 자신을 잘 도와주고 자신과 더 시간을 많이 보내는 야곱을 좋아했습니다.

 

야곱은 호시탐탐 장자권을 노렸습니다. 장자권을 차지할 기회를 엿봤습니다. 그러다 결국 형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 배고파 하는 틈을 타 밭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차지합니다. 야곱의 욕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장자권을 확실히 하고자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아냅니다. 이것도 형 에서가 사냥을 나간 틈을 타서 에서로 분장하여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를 속이고 받아낸 겁니다. 그의 삶은 이렇게 위태롭습니다.

 

그러다 정말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동생에게 속아서 장자권도 빼앗기고 축복도 빼앗긴 것을 안 형 에서가 노발대발 하면서 동생 야곱을 잡아 죽이겠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느낀 야곱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집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머나먼 곳에 있는 어머니의 동생, 즉 삼촌 집으로 무작정 발길을 옮깁니다. 이제는 돌아갈 집도 없습니다. 무작정 삶을 개척해야 합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속여서 빼앗은 장자권과 속여서 받은 축복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장자권과 축복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형상화 되어 야곱의 실제 삶에 이루어질지는 아직도 미지수입니다. 그의 삶은 이렇게 위태롭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야곱의 삶은 위태로웠습니다. 속이고만 살았던 야곱이 이제는 외삼촌 라반에게 오히려 속는 인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속임수 때문에 야곱은 20년 동안이나 외삼촌을 위해서 일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속이는 외삼촌에게 이기기 위하여 야곱은 지혜를 내어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가족도 대가족을 일구었습니다. 부인 넷에 아들이 11명이나 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차지한 장자권과 축복이 형상을 이루어 야곱의 눈에 보이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 남부러울 것 없는 부를 이루고 가정을 일구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재산을 챙겨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중, 고향에 거의 다 도착해서 야곱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접합니다. 형 에서가 거의 군대에 가까운 병력을 거느리고 자신을 치러 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위기입니다. 20년 동안 뼈빠지게 일해서 일군 재산과 가족을 모두 잃게 생겼습니다. 그래도 옛날에는 홀몸이었기 때문에 위태로운 가운데서도 마음이 담담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 외에는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다릅니다. 잃을까 봐 두려워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그 동안 이름처럼 살아왔습니다. 나면서부터 움켜쥐는 자이었던 것처럼, 지금까지의 모든 인생은 움켜쥐는 데만 모든 인생을 걸어왔습니다. 형 에서가 군대를 거느리고 자신을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서도 야곱은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움켜쥐고 있을 방법을 간구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얍복 강가에서 야곱은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합니다. 얼마나 치열하게 씨름을 했는지,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길 수 없으니까 순간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내리쳐서 허벅지 관절을 어긋나게 만듭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야곱은 그 사람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이제 그만하고 보내달라는 그 사람에게, 야곱은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면서 버팁니다.

 

바로 그 때, 그 사람은 야곱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 사람은 야곱에게 물어볼 수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먹고 이렇게 힘이 셉니까?” “당신은 어떻게 살아왔길래 이렇게 끈질깁니까?” “당신은 뭐 하는 사람입니까?” 등 야곱에게 물어볼 수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야곱에게 다른 것을 물어보지 않고 이름을 물어봤습니다. 이름에는 그 사람의 정체성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곧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이 가리키는 것처럼, 이 사람 야곱은 평생 움켜쥐는 자로 살아왔습니다.


이 순간
, 그 사람은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줍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 사람, 야곱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더 이상 움켜쥐는 자로 살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건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닙니다. 만약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지 않고 그냥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면, 결국 야곱은 움켜쥐고 있었던 모든 것을 그날 밤 잃었을 겁니다. 위태로운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그 위태로움 속에서 망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야곱, 움켜쥐는 자에서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로 바꿔주셨을 때, 야곱은 그 동안 움켜쥐었던 것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모든 사람을 부추겨 추악한 야곱이 되라고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움켜쥐라고 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싸워서 힘을 키우고 부를 쌓아서 미래를 튼튼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한 일을 하는데 하나님까지도 이용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가장 힘이 세어 보이고 자신들을 가장 잘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하나님께서 계신 교회로 모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움켜쥔 것을 더 강하고 부하게 만들어 달라는 데만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을 냅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그 사람으로부터 축복을 받아내려고 했던 것처럼 열심을 냅니다. 그러다 자신이 원하는 축복이 오지 않으면, 이제는 대놓고 하나님을 대항해서 싸웁니다.


오늘날
, 우리에게 참으로 위기는 경제나 환경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고통 받고 있는 상황이 위태로운 것이 아닙니다. 정말 위기는 교회 다니면서도 우리의 정체성(Identity)가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야곱으로 움켜쥐는 자로 남아 있으면서 하나님에 대항하여(against) 싸워 이기려 든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태로운 삶 가운데, 하나님에게 대항하여 이기려 들지 마십시오. 야곱의 정체성이, “움켜쥐는 자에서 이스라엘,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이기는 자로 바뀌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 자체가 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항하여 싸워 이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with) 싸워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겨먹을라고 싸우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이기는 자가 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로 거듭나라는 뜻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의 위태로운 삶은 마술처럼 평안이 넘치는 삶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하는 삶이 무엇인지, 몇 마디의 말로 설명 가능하거나, 그러한 삶을 들어서게 되지 않습니다. 야곱도 이러한 삶에 들어서기 위해서 수많은 세월과 역경을 보냈습니다. 적어도 20년이 걸렸습니다. 외삼촌 라반 집으로 도망가면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일이 없습니다. 20년이 지나 눈에 보이는 장자권과 축복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얍복 강가에서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삶을 완전히 변하게 하신 겁니다.


다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 ‘나는 아직도 야곱인가? 하나님에 대항하여 싸워 이기려 드는 사람인가? 그래서 내가 가진 것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하나님의 힘을 빌어 더 많이 움켜쥐려 드는 사람인가? 아니면, 나의 삶은 온전히 변해서 이제는 이 험한 세상, 위기의 세상, 위태로운 내 삶을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이겨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총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인가?’ 꼭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위에 위태롭게 달려 있을 때,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죽음을 이겨낸 우리 구주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이길 때 부활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만 붙들 때, 우리의 위태로운 삶은 하나님이 주신 평안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