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사색2011. 3. 2. 00:13

시편 8

위기의 그리스도인

 

요즘엔 하늘에 별이 별로 없다. 없어서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공해 때문에 안 보일 뿐이다. 공해에 찌든 하늘에 듬성듬성 뜬 별을 보면서 사는 현대인들이 이 시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현대인들은 소박한 별에 관심이 없고, 휘황찬란한 네온싸인에 열광한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조작한 아름다움에 푹 빠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하늘을 온통 덮고 있는 주의 영광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해보면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우선 문명과 거리가 먼 시골로 간다. 가로등조차 없는 깊은 산골 일수록 더 좋다. 달 밝은 밤도 피하는 것이 좋다. 칠흑 같은 밤이 좋다. 오직 하늘을 수놓고 있는 수많은 별들만 보이는 밤이 가장 좋다. 현대인들은 그런 곳을 애써 찾아 가야 하지만, 시편 8편을 쓴 시인이 살던 시대는 매일 밤 하늘을 수놓고 있는 별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이것이 그들의 고백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1). 

 

시인은 밤하늘에서 주의 영광을 본다. 자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다. 눈에 보기 좋아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온 땅에 하나님의 이름이, 그의 위엄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의 위엄과 아름다움은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을 통해서도 발견된다.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그들보다 힘 센 존재가 아니다. 연약하고 겸손한 존재의 상징인 어린아이와 젖먹이. 통쾌한 역전이다. 그야말로 예술이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아름답기까지 하다.

 

시인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인간을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묵상은 인간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고,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인간 없이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고, 하나님 없이 인간을 말 할 수 없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시인이 통찰한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이다(5). 이는 창세기의 창조질서가 반영된 진술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뒤 그 지배권을 인간에게 넘겨 주셨다. 게다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 떠 지어졌다고 창세기는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과 지배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확실히 그어야 할 선이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고, 인간은 피조물이다. 신이 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은 자꾸 이 경계를 무너뜨린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다스리다 보니, 만물을 발 아래 두다 보니 어느새 청지기의 사명은 없어지고 마음이 교만한 하나님의 대적자가 된다. 스스로 신이 된다. 시인이 시의 처음과 끝을 무엇으로 시작하고 끝맺는지 보라.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으로 끝맺는다. 시인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이기 전에 예배자이다. 예배자는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이다. 주의 영광을 가리는 자는 예배자가 아니라 어린아이와 젖먹이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원수와 보복자이다.

 

그리스도인은 늘 이 긴장 관계에 산다. 예배자로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인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고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허락 받은 자로서 영화와 존귀의 관을 쓰고 있는 존재이다(5).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늘 위태롭다. 날마다 예배자로 서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만이 이 위기에서 자유로울 것이다.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2. 28. 23:41

2011 2 27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49:8-16a; 마태복음 6:24-34

제목: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인생

 

여러분, 앞으로 몇 년 더 사실 것 같습니까? 유엔이 2008년도에 발표한 세계인구현황 보고서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평균수명은 남자 75.9, 여자 82.5세입니다. 미국의 평균수명은 남자 76.9, 여자 81.4세 입니다. 우리는 미국에 사는 사람들이니까 미국의 평균수명에 맞추어서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게 될까를 계산하면 됩니다. 이건 평균입니다. 여기서 더 사시는 분도 계시고 덜 사시는 분도 계시겠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미국의 평균수명이 OECD 나라 중에 하위 그룹에 속한다는 겁니다. 의학이 가장 발달된 나라가 미국인데, 그것에 비해 수명은 별로 길지 못하다는 거죠. 그 이유에 대해서 두 가지의 원인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담배와 비만입니다. 세계에서 담배를 가장 많이 피우는 나라가 미국이고, 비만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가 미국이랍니다. 담배와 비만 앞에서는 뛰어난 의학기술도 다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미국은 담배 소비량을 줄이는 일에, 그리고 비만 인구를 줄이는 일에 투자를 많이 하게 될 거라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원래부터 담배랑 술이랑은 안 친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 걱정이 없습니다. 제가 신령해서 담배랑 술이랑 안 친한 건 아니구요, 집안 내력이 그렇습니다. 몸에서 별로 받지를 않습니다. 게다가 목회자 가정이라는 영향도 분명 있구요. 그런데 배가 많이 나와서 걱정입니다. 사실 제가 이렇게 몸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았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10kg이 넘게 살 쪘습니다. 기본적으로 걸어 다니지를 않으니까, 살이 찌더라구요. 한국 같은 경우는 일부러 운동을 하지 않아도 걸어 다니는 일이 많아서 살 찔 겨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따로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지 않으면 걸어 다닐 일이 별로 없어서 운동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살이 찝니다. 게다가 기름진 음식이 넘쳐나는 나라이다 보니, 살이 안 찔래야 안 찔 수가 없습니다. 정말 조심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 옛말에 인명은 제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인데 성경말씀과 통합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거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은 하나님께서 거두실 때까지 잘 보존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내 몸을, 내 목숨을 내가 스스로 단축시키는 일은 삼가야 합니다. 내 스스로 내 몸을 상하게 하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생명을 맡긴 인생인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을 스스로 해하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도 보면, ‘그 연수를 다하다 죽는 것이 복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연수를 다 누리기 위해서 건강 관리에 신경을 좀 써야 합니다.

 

주의 일을 한다는 건, 거창한 일만을 주의 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건강을 보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주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건강을 해쳐가면서 까지 무슨 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담배나 술 같은 거, 건강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들은 삼가시고, 비만을 피하기 위해서 운동도 좀 열심히 하십시오. 건강한 사람이 자기 일도 잘 하는 거고, 건강한 사람이 가정도 잘 돌볼 수 있고, 건강한 사람이 직장생활도 할 수 있는 거고, 건강한 사람이 주의 일도 잘 감당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리스도인에게 건강은 웰빙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로까지 나가는 겁니다. 본인의 건강을 위해서 하나님께 늘 기도 드리시고, 건강을 위해서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오늘 말씀이 건강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수명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말이 나온 김에 건강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기대수명이라는 것을 갖고 삽니다. 뭐 사실 인생이라는 것이 내일 일은 난 몰라요이지만, 우리는 전체적으로 현재 안정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기대수명을 갖고 거기에 맞추어 인생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남자 같은 경우는 76세 정도가 평균수명이니까, 저 같은 경우 기대수명이 38년 정도 되네요. 제가 현재 서른 여덟 살이니까, 살아온 날 만큼 딱 그만큼만 더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겠구나 예상하고 인생을 설계하면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계산해 보십시오. 여자는 81세 정도가 평균수명이니까 거기에 맞추어 기대수명이 얼마나 되시는지 계산해 보시면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는가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갑자기 서글퍼지시나요? 사실 우리는 앞으로 살 날이 별로 안 남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면서 삽니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계산 속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면 얼마나 인생이 허무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것. 죽을 걸 생각하지 않고, 살 것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 얼마나 은혜입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사야서 본문에서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 것을 생각하면서 살지 못하고, 언제 죽을지 몰라 불안에 떨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처한 현실이 지금 우리의 현실처럼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바벨론에 나라가 망해 남의 나라 땅에 포로로 잡혀와 불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삶의 토대가 아무 것도 없어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렇게까지 생각했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만큼 불안하고 힘든 일도 없습니다.

 

포로생활 가운데 이렇게 삶이 흔들리고, 존재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오늘 위로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은혜가 필요한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것이고, 구원이 필요한 날에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포로생활 가운데 삶이 흔들리고 존재가 흔들려서 슬픔과 절망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이 때가 은혜의 때이고 구원의 날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백성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된 백성이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죽여도 하나님께서 죽이시는 것이고, 살려도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해야 하는 일,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딱 한 가지 밖에 없다는 것이죠. 바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것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14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불신앙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여인도 자식을 잊지 않고 긍휼이 여기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버릴 수 있고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여인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과 비교도 안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이것을 아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인생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인생.

 

이것을 절대적으로 믿으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인생인 것을 온 삶을 통해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의 승리가 바로 부활입니다. 죽음도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백성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또 하나의 본문인 마태복음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의 삶이 구분되어 나옵니다. 이방인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만 섬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합니다. 재물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음식이나 의복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생이 어디에 놓여져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방인은 인생이 재물과 염려에 놓여 있습니다. 재물이 하나님이고, 염려하느라 몸을 상합니다. 염려는 지나치게 거기에 집착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딴 데 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만 집중합니다. 삶이 굉장히 심플합니다. 깔끔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분주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것과 같은 포로생활을 많이 겪습니다. 즉 삶의 토대를 잃어버리는 일을 자주 경험합니다. 직장을 잃게 되거나, 사업이 잘 안되거나, 자식이 속을 썩이거나, 부부 사이에 금이 가거나, 친구와 틀어지거나, 가족과 불화가 있거나, 또는 건강을 잃게 되는 등 삶의 토대를 잃어버리는 경험을 자주 합니다. 이건 낭만적인 일이 아니고, 모두 우리의 삶을 흔드는 현실이고, 우리의 마음을 후벼 파는 아픈 일들입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이해 못하는 가슴 아픈 일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가 은혜의 때이고 구원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과 /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과는 상관 없는 이방인이 이 때 갈라집니다.

포로생활과 같은 일을 겪을 때, 그 때가 바로 은혜의 때이고 구원의 날이기 때문에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은 구별되게 하나님을 붙듭니다. 꼭 그래야 합니다. 구별의 원리를 붙들어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받는 겁니다. 성경을 찬찬히 잘 보십시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 어떠한 것을 받으시는지요? 구별된 것만 받으십니다. 거룩한 것만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지난 주에 제가 설교를 통해서 거룩이란 무엇인가를 말씀 드렸습니다. 구별된 것이 거룩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일상의 신앙생활 속에서 그것을 놓치고 삽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놓치고 삽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구원 사건이 됩니까?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에 당하신 그 날도 예수님 오른편과 왼편에는 강도들이 함께 처형당했습니다. 그런데 왜 오른편, 왼편의 십자가 처형은 개죽음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구원 사건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하나님께서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같은 행위도 구별된 것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인도 드리고 아벨도 드렸습니다. 드린 행위는 같았지만, 구별된 것을 드렸느냐에서 차이가 났습니다.

 

여러분, 장 목사가 여러분에게 왜 중요합니까? 세상에 다른 목사도 많은데, 왜 여러분은 장 목사의 설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장 목사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까? 제가 잘생겨서요? 제가 힘이 세서요? 제가 공부 많이 해서요? 제가 목회자가 25명이나 되는 집안 출신 목사라서요? 제가 3대째 목사라서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장 목사를 구별하셔서 여러분께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 외에 여러분께서 저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저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여러분에게 보내신 담임목사에게서 말씀의 은혜를 받으려고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담임목사 말씀에는 은혜 못 받으시면서, 본인에게 구별되어 보냄 받은 목회자가 전혀 아닌 분들, 설교 씨디나 기독교 방송 같은 것을 통해서 은혜를 받으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건 은혜가 아니라 영적인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합니다. 그걸 은혜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어야 건강해지는 겁니다. 외식하면 내가 맛있는 거 골라먹을 수 있으니까 그때는 맛있을지 몰라도 결국 외식은 몸을 상하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여러분에게 보내신 담임목사의 말씀에 은혜 받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들의 영혼이 강건해지고 여러분들에게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반대로, 제가 왜 여러분을 위해서 밤낮으로 기도하고, 말씀과 양육을 위해서 불철주야로 수고해야 합니까? 그래야 먹고 사니까요? 저는 여러분이 내는 헌금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예화). 제가 여러분을 위해 수고하는 이유는 여러분은 바로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저에게 붙여주신 거룩한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가 왜 이 교회에서 헌신하고 봉사합니까?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세우신 거룩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내 발로 걸어 들어온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이 교회로 보내셨기 때문에 거룩하게 헌신하고 봉사하는 겁니다. 자기 발로 걸어 들어오신 분들은 자기 발로 걸어 나가시겠지만,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이 교회로 보냄 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분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헌신하고 봉사할 것입니다.

 

구별의 은혜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가슴 속 깊이 깨달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별해서 드리십시오. 헌금도 돈 있으면 드리고 돈 없으면 안 드리고 그러지 마시고, 구별해서 드리십시오. 제가 지금 헌금 얘기 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지금 구별의 은혜를 말씀 드리는 겁니다. 목사가 헌금 얘기 하더라고 시험에 들거나 험담하지 마십시오. 괜히 엉뚱하게 걸려 넘어지지 마십시오. 헌금은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구별이 중요합니다. 1불을 드리더라도 두 렙돈을 구별해 드려서 예수님께 칭찬 받았던 과부처럼 그렇게 구별해서 드리십시오. 드릴 헌금이 없을지라도, 구별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십시오.

 

특별히 제가 예배와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은데요, 시간 있으면 기도하고 시간 없으면 기도 하지 않고 그러지 마시고, 시간을 구별해서 기도하십시오. 많은 분들이 교회의 공적인 예배 시간과 기도 시간을 쉽게 생각하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의 공적인 예배 시간과 기도회 시간은 교회의 형편과 각자 개인의 형편에 맞추어 우리 인간들이 정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구별해서 거룩하게 세우신 이 교회에 하나님께서 구별해서 정해주신 예배 시간이고 기도회 시간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해 주신 그 시간에 나와서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그 시간을 사모하고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정말 불가피하게 그 시간을 지키지 못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됩니까? 모두 마음의 문제이지요. 정말 불가피하게 그 시간을 못 지키시는 분들은 자신의 형편에 맞게 기도하되, 꼭 시간을 따로 떼어 구별해서 기도 시간을 정해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이방인은 구별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구별되게 행동합니다. 무엇이든지 구별되게 하나님께 드립니다. 시간 있으면, 마음 내키는 대로, 그렇게 드리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무엇을 하든지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구별된 것을 받으시고 그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인생! 예수 그리스도의 핏물로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인생은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더 구별되게 행동합니다. 힘들고 어려운데 잠이 옵니까? 보따리 싸서 구별된 장소인 성전에 와서 밤새 기도해야죠! 힘들고 어려운데 왜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보내신 담임목사에게 기도 부탁을 안 합니까? 힘들고 어려운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은혜와 구원을 베푸시려는 예배 시간과 기도 시간을 외면할 수 있습니까? 열 일 제쳐 놓고 머리 디밀어야죠!

 

왜 그래야 하는 줄 이제 깨달으셨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이 교회 나와라, 목사한테 잘 해라, 헌금 해라, 예배 잘 드려라, 아침 기도회 왜 안 나오냐? 등 시시콜콜한 잔소리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런 말씀 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말씀, 어렵고 힘든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받는 영적 원리를 말씀 드린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때, 하나님의 구원의 날에 받는 은혜와 구원은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만이 누리를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처럼 아무렇게나 드리지 마시시오. 제발.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드려야 할, 구별된 것을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그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회복해 주시고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인생입니다. 아멘.


* 사실, 이번 주 설교는 제 스타일의 설교는 아닙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많은 은혜를 받으시더군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 주일설교였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기분을 묘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교인들과 이제 성령 안에서 교감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제 교인들이 알아듣더군요. 이 설교를 들으면서 교인들이 많이 울더라구요. 무슨 감동적인 스토리가 들어 있는 설교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이 설교를 통해 '구별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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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2. 22. 23:37

시편 7

악인의 절망, 의인의 희망

 

말이 칼보다 무섭다.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기도 하고, 말 한 마디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시인은 지금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 거짓 고소자들의 무고 때문에 고통 당하고 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 상황을 전쟁에서 쫓기는 것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1). 이제 자신의 결백을 풀어줄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안 계시다. 하나님이 시인의 마지막 희망이다.

 

시인은 하나님께 기댄다. 그러나 그 기댐은 즉흥적이고 일회적인 기댐이 아니다.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신앙이 아니라는 말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좋을 때나 형편이 어려운 때나 언제든지 시인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갖는 시인의 마음은 희망적이다. 시인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기대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은 의로움이다. 하나님은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가르시고, 불의를 못 참으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11). 성질 부리는 것이 아니다. 의분을 내시는 것이다.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의분이 없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불의 가운데 날 뛰게 될지를 상상해 보라. 시인이 거짓 고소자들의 무고를 통해 고통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 의로움 때문이다.

 

여기서 시인은 단순히 하나님의 의로움에만 희망을 걸고 있지 않다. 물론 하나님의 의로움은 절대적이다. 이것이 없으면 희망을 걸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의로움에 기댈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로 자신의 마음의 정직을 제시하고 있다. 시인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호소한다. 의는 의와 통한다. 시인은 만약자신에게 고소자들의 무고한 그 죄들이 발견된다면 징벌을 받아도 괜찮다고 맹세하고 있다(3-5).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의 정직함을 호소한다(10).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실 것을 확신한다. 시인은 잉태임신의 은유를 사용하여 악인을 묘사한다. 그들이 행하는 악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다.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듯, 악인은 죄악을 잉태한다. 즉 죄의 씨앗이 뿌려지고 임신해서 배양되고 장성해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죄의 뿌리는 깊다. 우리가 짓는 죄는 지금 당장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내 안에서 길러진다는 말이다. 죄악의 실체가 안 보인다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는 죄의 씨앗이 잉태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원죄이다.

 

죄의 씨앗을 제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씨가 자라나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죄의 씨앗을 제거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그 죄의 씨앗을 제거하셨다. 이미 뿌려진 죄의 씨앗이 현재까지도 그 실체를 드러내며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이제 더 이상 죄의 씨앗은 뿌려질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심판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인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고 절망이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의인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고 희망이다. 바로 여기에 시인의 감사 찬송이 우리의 감사 찬송이 되는 이유가 있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17).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2. 21. 00:11

2011 2 20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레위기 19:1-2, 9-18, 마태복음 5:38-48

제목: 거룩이란 무엇인가?

 

오늘 말씀의 중심 구절은 레위기 19:2절 말씀의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와 마태복음 5 48절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입니다. 거룩은 영어로 “Holiness”라고 하고, 온전은 영어로 “Perfection”이라고 합니다. 이는 서로 다른 말 같지만,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지, 우리 인간에게는 별로 어울리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당신에게나 어울리는 말을 우리에게도 요구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먼저 레위기의 말씀은 그 배경을 먼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과 매우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고 나서, 광야에 있을 때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이들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이들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율법은 광야에서의 삶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미래의 삶을 꿈꾸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겁니다. 현재를 본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본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거룩은 구별된 삶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구별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별은 선택되었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해져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특권의식 개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별되었으니까 특권의식을 갖고 자기 의에 따라 마음대로 하고 살아도 된다는 뜻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구별되었다는 것은, 그들을 구별하신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구별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성경은 성도라고 칭합니다.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세상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완벽하기 때문에 거룩한 무리,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공자님의 제자들이 더 잘합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이나 윤리와는 상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목적이 아니라,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도덕과 윤리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매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은 거룩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그렇게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겁니다. 구약의 안식일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일로 바뀌었는데,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별하셔서 부활시키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날인 주일은 거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세상 사람들처럼 일요일(주일)은 그냥 쉬는 날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배 드리러 오는 시간이 쉬는 날에 나를 귀찮게 하는 시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배가 쉬는 날 쉬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이건 거룩한 주일을 전혀 모르고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에,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날이기 때문에 주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처럼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일요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구별하신 하나님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실 수 있을 겁니다. 성전은 왜 거룩한 장소입니까?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장소이기 때문에 거룩한 겁니다. 거룩한 시간에, 거룩한 장소에서 예배 하는 거룩한 백성! 모두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것들입니다. 시간이 중요하고, 장소가 중요하고, 사람이 중요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것들이기 때문에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해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거룩한 주일에, 거룩한 성전에서,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은혜입니까?

 

십자가가 왜 거룩합니까? 십자가는 원래 전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범죄자 중에 가장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범죄가 가장 추악합니까? 최근에 뉴스를 보니까, 별 일이 다 있습니다. 아버지가 세 살 먹은 아들은 때려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의심 때문에 평소에 세 살 먹은 아들을 매일 때렸답니다. 상상이 안 갑니다. 그러다가 결국 세 살 먹은 아들을 때려 죽였습니다. 추악하죠? 또 반대로 이런 일도 있습니다. 중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집안 어른한테 받은 세뱃돈을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지 않는다고 아들이 아버지를 때려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추악하죠?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추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처형시키던 형틀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자리가 바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이상 십자가를 추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거룩한 것이 십자가라고 증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구별하셔서, 십자가를 택하셔서 하나님께서 바로 그 추악한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인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별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좀 이 마음 속에 들어오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백성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면서 구별된 자로서, 구별된 땅에서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만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레위기 말씀의 내용을 보면, 한 마디로 올바른 이웃관계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웃과 이런 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모두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9 17절 말씀에 형제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18절 말씀에 네 자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은혜를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본문이 마태복음 5 45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요 자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레위기 말씀을 가족이라는 범주, 그리고 나 자신이라는 범주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한 말씀입니다. 가족이 굶고 있는데, 내가 굶고 있는데 밭에 있는 이삭을 모두 거두어 갈 수 없습니다. 가족 것인데, 내 것인데 도적질 할 수 없습니다. 가족인데 나 자신인데, 억압하고 착취할 수 없습니다. 가족인데, 나 자신인데 저주하거나 그 앞에 장애물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가족인데 나 자신인데 미워할 수 없습니다. 가족인데 나 자신인데, 원수를 갚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가족과 나 자신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에게나 저지를 수 있는 것들이지, 가족이나 나 자신의 범주 안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진다는 뜻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고 그들과 관계 맺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햇볕을 악인이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비추어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농사, 즉 먹고 사는 일에 꼭 필요한 비를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똑같이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악인에게나 의인에게나 똑같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고 우리가 왜 그렇게 하시냐고, 하나님은 불의하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건 그야말로 불신앙이요, 하나님에 대한 거역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면서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5 4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사는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을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법칙을 거스르고 하늘 나라의 법칙을 이 땅에 펼치면서 살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십자가 공동체입니다. 위에서 말씀 드렸듯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십자가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룩한 구원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은혜를, 그 십자가의 능력을 사모하기만 하면 됩니다. 거룩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사모하면, 그 은혜와 능력이 우리에게 덧입혀져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해지는 겁니다. 거룩한 삶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가장 크게 나타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사모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도덕과 윤리가 내 안에 자리잡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구별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 붙들고 거룩한 백성이 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2. 15. 04:30

시편 6편
나를 떠나라는 외침

 

시인은 아프다. 질병 때문에 아프고, 원수 때문에 아프다. 그냥 아픈 것이 아니라 처절하게 아프다. 그것을 시인은 벼가 떨린다라고 표현한다(2).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뼈는 육체적 힘과 건강이 자라는 처소이며, 심지어는 감정의 처소이기도 하다. ‘뼈가 떨린다는 시인의 고백을 통해 그의 건강과 정신이 얼마나 쇠약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극한 상황이고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시인은 죄의 고백을 하나님께 드린다. 우리는 흔히 죄의 고백하면 잘못한 일을 하나님께 고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틀리는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우선 고대 히브리인들의 생각에 질병은 죄의 결과였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자신이 이렇게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은 죄의 결과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무조건 불합리한 생각이라고 치부하면 안 된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이런 생각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질병이 죄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은 신학적 진술이지, 자연과학적 진술이 아니다. 우리는 이 점을 꼭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은 도덕적 뉘우침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학적 신앙 고백이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쪽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러나 우리가 최선을 다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외부의 어떠한 조건에 의해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이러한 처절한 참회의 기도는 헛된 일인가? 그렇지 않다. 시인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께 간절하게 호소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매우 법적인 사랑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헤세드(언약적 사랑)이다. 하나님은 이 언약에 신실하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함, 즉 당신의 의를 위하여 시인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를 구원해 주신다.

 

시인의 탄원은 이제 구원의 확신으로 바뀐다(8). 현재 상황이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시인은 더 이상 낙담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헤세드) 안에서 잃어버린 희망을 다시 찾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원수들에게 나를 떠나라고 외친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게서 시인을 떨어뜨릴 수 없다. 이 당당한 신앙의 고백이 원수들을 부끄럽게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외침과 너무도 닮아 있다. 예수는 자신을 시험하는 마귀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쳤고( 4:10), 자신이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방해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외쳤다( 16:23). 이렇게 시험을 이기고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언약이다. 신약성경은 그것을 아가페(사랑)라고 증거한다. 구약의 헤세드(언약적 사랑)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본질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원수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게 한다. “나를 떠나라!”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떼어 낼 수 없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2. 14. 13:38

2011 2 1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고전 3:1-9

제목: 하나님의 동역자, ,

 

1장과 2장에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강조해서 전한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하는 것이 참된 지혜라고 말합니다. 이 복음 앞에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 끊임 없이 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나는 발견했는가!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뭐 그까짓 것 하기 쉽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말하기를, 십자가의 도는 멸망 당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여러분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한 것 같으나, 실상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보면 그렇지 않은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발견하고 싶다고 해서 발견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힘이 아니고는 절대로 발견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십자가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영적인 삶을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 1절에서 바울 사도가 가리키는 신령한 자들이란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영적인 삶을 사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실, 영적인 삶이라는 것이 손에 잘 안 잡힙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영적인 삶이란 교회 열심히 잘 다니는 것을 영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틀리는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말도 아닙니다. 교회를 잘 다녀도 전혀 영적인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고린도 교회가 그랬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이 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바울 사도는 그것을 지적합니다.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이게, 고린도 교회 교인들 입장에서 보면 좀 창피한 말입니다. 바울 사도의 눈에 고린도 교회는 전혀 영적인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이 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착각은 자유, 라는 말이 있습니다. 착각하는 것까지 어떻게 말리겠습니까마는 그 착각이 신앙의 성숙을 가로 막는다는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보고 아직도 너희들은 멀었다고 잘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3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 증거를 댑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린도 교회가 아직도 영적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증거가 바로 그들 가운데 있는 시기와 분쟁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 사도가 세운 교회 중에서 가장 사고뭉치였습니다. 요즘도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교회의 분쟁들, 다툼들, 싸움들의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교회가 생겨난 지 2천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교회에 그러한 문제들이 있는 것을 보면 좀 신기합니다. 그만큼 사람이 변하는 것은 힘든 것이겠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바라면서 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비로서 끝나는 문제들을 우리는 안고 삽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시기와 분쟁이 있었습니다. 한 쪽은 교회의 창립자인 바울을 중심으로 파당을 조성했고, 다른 한 쪽은 바울에 이어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했던 아볼로를 중심으로 파당을 조성했습니다. 그렇게 고린도 교회는 갈라져서 싸웠습니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할 교회가 선을 이루어 볼 겨를도 없이, 서로 싸우느라 바빴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 사도가 단호하게 복음의 원리로 훈계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고린도 교회가 아직도 영적으로 어리다, 미성숙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복음을 받아 들였기는 했지만, 그래서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긴 했지만, 아직도 이들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는 성령이 아니라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지칭하는 말이 바로 육신에 속한 자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바울 사도가 쓰고 있는 단어가 사르크스라는 말인데, 이것의 뜻은 육신또는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이렇게 분쟁 가운데 있는 이유는 성령의 뜻 안에 있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인 죄 된 본성 가운데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있는 삶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영적인 삶이란 무엇인가를 자꾸 보고, 병 고치는 등의 큰 능력을 행하고, 속세를 떠나는 수도자처럼 사는 삶이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런 삶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하는 겁니다. 대표적인 예가 무당들인데, 그들은 우리가 못 보는 것을 보고, 병도 고치고, 속세를 떠나서 삽니다. 그런 삶을 보고 영적인 삶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주술적인 삶입니다. 기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삶입니다. 그렇다고 환상을 보고, 병을 고치고, 금욕적인 삶이 기독교에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토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적인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그 능력에 우리의 삶을 맡기는 삶을 말합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 자체가 우리 인간의 능력에 있지 않고 성령의 능력에 있기 때문에, 즉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의 능력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적인 삶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힐 때 그리스도인은 점점 성숙해져 갑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서 성령의 능력에 사로 잡히지 않고 육신에 여전히 속한 사람, 즉 자기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신앙 성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가리켜, 젖먹이 또는 어린아이 신앙인이라고 합니다.


젖먹이
, 어린아이의 특징은 본능적인 욕구를 따르는 겁니다. 그것을 위해서 투쟁합니다. 양보라든지 희생이라든지 헌신을 모릅니다. 인내하지도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투정부리고 소리지르고 울어버립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가리켜 딱 이 수준이라고 질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매우 큰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가 무슨 일을 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구인지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농부의 이미지를 들어서 사용합니다. 곡식을 재배하기 위해서 할 일은 먼저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뿌린 씨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물을 잘 주어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적만해도 농사가 나라의 기본 산업이었습니다. 가까이에서 농사 짓는 것을 볼 수 있었죠. 농번기에 농부는 논이나 밭에 씨를 뿌리느라 바쁩니다. 씨를 뿌리기 위해서 먼저 논이나 밭을 갈아 엎어야 합니다. 소에 쟁기를 매달아 땅을 갈았습니다. 과학기술이 발전되고 난 뒤에는 경운기(일명 딸딸이)가 그 일을 대신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이 논이 밭에 물을 대는 일입니다. 비가 오면 논이나 밭에 물을 잘 대기 위해서 수로를 잘 파놓아야 합니다. 가뭄을 대비해서 저수지 등을 만들어 놓기도 합니다. 한 여름, 비가 잘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을이 되어 풍성한 결실을 맺으면 처음 열매를 가지고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추석입니다.

 

이렇듯, 바울 사도는 농부의 이미지를 들어서 교회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어떻게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건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동역자, , 그리고 집입니다.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중심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게 정말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과 아볼로를 가리켜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5절 말씀에 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한 사역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농사 짓는 일이었습니다. 영적인 농사입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밭이 필요합니다. 그 밭이 바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었다는 것이죠. 그 밭에 씨를 뿌리고, 물을 대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씨를 뿌리고 물을 댄다고 해도 씨앗이 자라나서 열매를 맺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그렇게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씨를 뿌리고 물을 줘도 씨앗이 자라나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씨앗을 뿌린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자라게 하는 것도 아니고, 물을 준 아볼로도 고린도 교회를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고린도 교회를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아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것을 알아야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고 선을 이루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더 큰 일을 했고, 누가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누가 더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한 인물이고, 이런 것이 없다는 겁니다. 교회가 분열되고,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한 이러이러한 일 때문에 교회가 자라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헌금 많이 해서 교회가 이렇게 자라난 거야, 내가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한 덕분에 교회가 이렇게 자라난 거야, 내가 교회를 위해 열심히 기도한 덕분에 이렇게 교회가 자라난 거야, 등등 자신이 교회에 기여한 그것 때문에 교회가 자라났다고 자기 의를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누가 더 큰 일을 했는지 겨루고 싸웁니다.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뜨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사역자, 즉 일꾼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를 깎아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8절 말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한 일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서 한 일은 굉장히 값진 일이고 하나님께 칭찬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만족해야지 더 나가서 자신이 하나님이 된 양, 자기의 일이 교회를 자라게 했다고 주장하고 나서면 곤란해 진다는 겁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면,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하는 일이나, 저 사람이 하는 일이나, 내 눈에 보기에는 달라 보이고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더 열심히 하는 것 같고, 나는 열심히 하는데 저 사람은 빈둥빈둥 노는 것 같아 보여도 부르심에 따라, 그리고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 일을 맡기시고 그것을 통해 당신의 교회를 세워 나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워 나가는데 우리에게 원하시는 영적인 삶,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도 고린도 교회 못지 않게, 바로 이것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우리 교회에 고린도 교회 같은 분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 감사한 일이죠. 그러나 눈에 보이는 분쟁이 없다고, 우리가 영적인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는 격려입니다. 그리고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합니다.

 

특별히 교회 성전 봉헌을 앞두고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이때, 절대로 영적인 긴장감을 늦추지 마십시오. 사탄이는 우는 사자처럼 어슬렁거리며 호시탐탐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게 만들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성전 봉헌이 되면 교회가 더 강해지고 더 열심을 내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자신의 영역이 줄어들 텐데 사탄이가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 무한히 기뻐하시며 우리에게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과 은총을 무한히 내려주고 계는 것이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씨를 뿌리고, 열심히 물 주면 됩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느라 분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임해서 이게 무슨 말인지 깨달음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에 속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사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에서 믿음의 분량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헌신하면 됩니다. 이것을 알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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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2. 8. 07:24

2011 2 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58:1-9

제목: 금식기도

 

제목만 보면, 금식해라, 금식기도 합시다, 무슨 이런 말씀 드릴 것 같아 겁나십니까? 바쁘고 힘들게 사시는데, 금식하자고 하면 신경질 나시죠? 걱정 마십시오. 그런 거 아닙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금식기도이지만, 말씀의 초점은 금식기도 하자에 있는 것이 아니니, 마음 편하게 말씀에 경청해 주십시오. (그런데 설교문 작성을 마치고 드는 생각인데, 오히려 금식기도 하자라는 말이 더 편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시대적 배경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긴 세월에 걸친 말씀입니다. 대개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제 3 이사야라고 불리는 56장에서 66장에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포로로 잡혀 가기 전부터 시작해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의 이스라엘의 삶까지 기록해 놓고 있는 방대한 책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시대적 배경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의 삶이 쉽지 않았습니다. 무너진 성전도 지어야 했고, 살아갈 집도 지어야 했고, 삶의 터전을 가꾸어야 했고, 무엇보다 무너진 신앙의 틀을 다시 잡아야 했습니다. 신앙의 틀을 다시 잡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신앙이란, 그 동안 무너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회복시키는 것이었으니까요.

 

집도 짓고, 성전도 짓고, 무너진 성벽도 재건축하고, 삶의 여러 가지를 다시 복구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그들이 집도 잃었고 성전도 잃었고, 예루살렘 성에서 쫓겨나 포로생활을 하다가 이렇게 극적으로 돌아오게 되었냐, 입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줄기차게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로생활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되돌아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번 다시 그러한 오류를 범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모든 것이 다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큰 일을 겪고 나면 무슨 일에든지 조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금식에 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을 통해 종교적인 경건을 회복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오늘 말씀 5절에 나오듯이, 그들은 금식한답시고, 종교적인 경건을 회복한답시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대가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한답시고,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폈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취함으로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경건해지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름대로 노력한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굉장히 충격적인 대답을 듣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상급을 내리실 줄 알았는데, 도리어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 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이것을 요즘 말로 바꾸면, 예배도 안 빠지고 나오고, 헌금도 잘 하고, 교회 봉사도 잘 하는데, 왜 자기를 알아 주지 않느냐는 겁니다.

 

문제가 뭐냐 하면,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요즘 우리들이나 경건한 삶에 대해서 매우 오해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경건의 삶을 따로 뚝 떼어서 생각한다는 것이죠. 큰 틀에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연관된 삶 따로 있고, 하나님께서 신경 안 쓰시는,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삶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경건에 대해서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 지를 일깨워 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금식, 경건은 살면서 어느 일정 기간 동안 뚝 떼서 경건을 강조하는 식의 경건이 아니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 관계의 새로운 변화를 말합니다. 한 순간 만이 아니라 한 부분 만이 아니라, 모든 삶의 방식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의 용어로 말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오늘 말씀에 근거해서, 한 가지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이런 질문을 한 번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왜 하나님을 찾으십니까? 오늘 주제어와 관련해서 다시 질문 드리면, 금식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입니다. 만나서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고,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을 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서 입니다. 이게 틀린 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완전하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경건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만 올바르다고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간과하는 문제가 바로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어느 누구도 이웃과의 관계, 서로 간의 관계를 올바르지 못하게 하면서 온전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과 관계를 잘 맺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2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이들이 했던 행위들,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들을 통해서 이들은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위에 말씀 드렸듯이, “예배 잘 드리고, 헌금 잘 하고, 교회 봉사도 잘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했던 이들에게 심각한 문제 있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엉망이었다는 겁니다. 6절과 7절 말씀에서 그것을 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모두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이웃과 관련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그들이 이렇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들은 금식한다고 하면서 오락을 구하고 온갖 일을 시켰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면서 논쟁하고 다투고 악한 주먹으로 이웃을 쳤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금식하면서도 이웃 사람들에게는 상처 주는 일만 했습니다. 배고픈 자, 집 없는 자, 헐벗은 자, 즉 가난한 자를 나 몰라라 했고, 자신들의 핏줄, 형제 골육들의 어려움을 나 몰라라 했습니다. 한 마디로 바꾸어서 이야기 하면, 자신의 문제에만 빠져서 주변을 전혀 돌아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변을 좀 돌아보십시오. 자꾸 자신의 문제에만 갇혀 있지 말고,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주변 사람들에게, 이웃들에게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불편한 마음, 불편한 관계를 다 푸시라는 말씀입니다. 그게 당장은 안 되더라도, 이미 마음 속에는 그러한 용서와 용납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마음이 열려야 한다는 겁니다.

 

금식과 연관 지어서 이웃과의 관계를 돌아보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금식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최고의 경건한 방법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금식에 초점을 두지 않으시고, 이웃과의 관계 맺음에 초점을 두고 참된 금식,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 당신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올바르면 된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그렇다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엉망이고 주변 사람들에게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도 버리십시오. 이 말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영역 따로, 이웃 영역 따로,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을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교회 생활만 잘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생활도, 직장 생활도, 내가 관계되어져 있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나는 하나님께 금식기도 하는 그러한 경건한 삶이 형성되어 있는지를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관계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게 맺어졌을 때 주어지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급할 때 하나님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빛처럼 빛나며, 우리의 삶의 어려움과 고통이 급속하게 치유되는 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들어설 때임을 기억하십시오. 문제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만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려야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만, 이건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태도)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금식기도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태도)의 문제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여기 있다라고 응답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의 삶의 지극히 작은 한 영역만 하나님께 드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삶은 없습니다. 내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께 드리고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히 따릅니다.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네가 부르짖을 때에 내가 여기 있다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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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2. 2. 02:05

시편 5

사귐의 기도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했다. 기도에 대해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기도하기 위해 하던 모든 일을 멈추었다. 기도의 생활화를 충실히 준행했다. 그들은 왜 그렇게 기도에 집착했을까? 기도를 통해서 그들은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유대인들에게 기도는 경건한 행위였다.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의인의 필수요소였다. 의인은 기도했고, 기도하는 자는 의인이었다. 자신이 율법을 잘 지키는 의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세상에 보일 수 있는 방법이 기도였던 셈이다. 여기에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경건의 모양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러나 기도의 생활화는 결국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어 경건의 능력을 만들어 내는데 무력해진다. ? 기도가 생활을 방해하기 때문에 기도는 생활 속에서 빨리 해치워야 할 의식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

 

시편 5편은 아침 기도이다. 자고 일어나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둔 셈이다. 세상 모든 종교의 영성은 아침에서 비롯된다. 한국 교회는 여기에 더 집착한다. 새벽기도가 신앙의 척도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새벽 기도 문화는 성경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 농경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전이 새벽기도에서 왔다고 미화되기도 한다. 한국 교회에서 새벽기도는 만능열쇠이다. 모든 묶인 것을 푸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기도를 능력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맞는 말이지만 기도를 사귐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이는 틀린 말이다. 그러나 기도 신학에서 기도는 사귐의 차원이지 능력의 차원이 아닌 것을 밝히고 있다.

 

시편 5편의 시인은 아침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린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능력의 차원에 있지 않고 사귐의 차원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도를 능력의 차원으로 접근하게 되면 기도는 자신의 원하는 것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기도가 사귐의 차원에 있으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어 그분의 뜻을 따라 가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시인은 악인의 심판과 의인의 보호에 대한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심판과 보호는 목적이 아니고 결과일 뿐이다. 시인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고백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3)이고, 악을 미워하시는 분이고(4-6),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복과 은혜를 베푸시는 분(11-12)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시인으로 하여금 악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에 대한 보호를 기대하게 한다.

 

기도를 능력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기도의 능력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기도를 사귐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다. 시인을 보라. 그의 눈에는 원수들의 배역함이 보이지만, 결국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원수들의 배역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헤세드(인자, 사랑)이다. 하나님의 헤세드 앞에서 원수들의 배역함은 아무 것도 아니다. 원수들 때문에 원통해 하거나 절망에 빠질 필요 없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곧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8). 우리는 능력의 기도에 머물지 말고, 사귐의 기도에 빠져 들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 31. 23:44

2011 1 30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고린도전서 1:18-31

제목: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

 

우리의 삶은 온통 구원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구원을 갈망합니다. 의학이 발달한 이유는 건강의 구원을 위해서고, 경제가 발전하는 이유는 궁핍함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해서이고, 기술이 발전한 이유는 생활에서의 구원 때문입니다. 종교의 발전은 삶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소소한 것에서부터 거창한 것까지 우리가 겪는 삶의 문제는 모두 구원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경도 구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도 구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활 속에서 바라는 구원과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에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데, 사실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삶의 소소한 구원의 차원으로 성경의 구원을 이끌어 내립니다. 우리는 그저 구원을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잘 먹고 살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잘 먹고 잘 사는 것과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한참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우리의 삶 속에 실증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뉴스를 보니까, 한국에서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경찰 간부가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경찰 간부의 이력이 대단합니다. 경찰대학 출신의 엘리트고, 그 중에서도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어서 선배들까지 제치고 초고속 승진을 했습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경정의 위치까지 올라갔습니다. 대단합니다. 그런 그가 어머니를 살해했습니다. 어머니가 죽는 바람에 정확한 살해 원인은 미궁에 있지만, 지금까지 자백한 내용을 토대로 살해 원인을 분석한 결과, 어머니가 떠 안고 있는 사채를 해결하고자 어머니와 짜고 상해보험금을 타려고 그러한 일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이 잘못된 것이죠. 몸에 상해를 입히기 위해 아들은 강도로 변장하고 밤에 어머니 집에 들어가 자고 있는 어머니 가슴에 볼링공을 수차례 떨어뜨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어머니는 갈비뼈가 6대 부러졌는데, 그것 때문에 몸 속에서 출혈이 너무 많아 그날 밤 갑자기 죽었습니다.

 

지금 제가 이런 패륜적인, 생각하기도 싫은 사건을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결국에는 구원을 위해서 한 일이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어서 입니다. 이들은 사채에서 구원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지혜가 바로 보험사기였습니다. 그런데 일이 잘못되는 바람에 보험금은커녕 어머니는 죽고 경찰 간부 아들은 쇠고랑을 차게 됐습니다. 구원 받으려다가 더 나락으로 떨어진 형국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리 인간의 지혜는 늘 이렇습니다. 지혜 있는 것 같으나 우리 인간의 지혜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삶을 더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우리 인간의 지혜와는 차원이 다른 지혜가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지혜가 뭡니까? 영어로는 Wisdom, 히브리어로는 호크마라고 하는데, 이는 일을 풀어나가는 능력을 말합니다. 일을 더 꼬이게 만드는 것을 미련하다고 합니다. 지혜의 반대말이죠. 한 마디로, 오늘 말씀은 인간은 미련하고 하나님은 지혜롭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을 두고, 인간 편에서는 미련한 일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지혜로운 일이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십자가 사건은 미련한 일입니까? 지혜로운 일입니까? 별 생각 없으십니까? 아무런 느낌이 없으십니까? 십자가의 도를 깨닫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저 십자가를 하나님의 참된 지혜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감탄이 깊은 사람일수록 신앙이 깊은 것이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일수록 신앙이 없는 겁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22절 말씀을 풀이하다 보면 왜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지혜인 줄 알게 될 겁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그렇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도 끊임 없이 표적을 구했습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는 표적이 무엇이요?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유대인은 예수님이 일반 사람이 흉내 낼 수 조차 없는 대단한 기적을 베풀기 원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은 그들이 원하던 표적과 기적을 예수님이 그들에게 보여주는 듯싶었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다니셨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표적과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적을 베푸신 것이지,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주고 그들의 그릇된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서 기적을 베푸신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도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호기심에서 또는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적을 베푸실 거라는 기대는 품지 마십시오. 물론 우리의 삶 속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표적으로 일어날 뿐이지, 우리의 호기심과 욕심을 채우는 방식으로는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적 같은 일이 삶 속에 일어나기를 바라는 분은 철저하게 호기심과 욕심을 내려놓고, 온전히, 정말 온전히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그 분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만 온전히 바라는 신앙인은 기적 같은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바랐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다 보니까 기적 같은 일이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행동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때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등 그들이 생각하는 표적을 보이시는 것 같고, 그들이 원하는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 같으니까 떼를 지어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력하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실 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시는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를 못박으라고 성난 군중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십자가를 진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이 생각하는 구원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한 구원자는 기적을 베풀었던 것처럼 엄청난 힘으로 로마의 압제에서 그들을 구원하고 다윗 시대의 영광을 되찾아 주는, 그런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신 예수는 그들의 눈에 패배자, 신성모독자, 미친 사람처럼으로 밖에는 안 보였습니다. 결국, 예수는 그들에게 꺼리는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헬라인을 보겠습니다. 헬라인은 이방인을 대표하는 민족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 세상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두 종류의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이방인인 헬라인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지혜의 범주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벗어나면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눈에 보기에 십자가는 전혀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일단 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에게서 그들이 섬기는 신과 같은 어떠한 능력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십자가 형에 처해지는 사람은 극악무도한 죄수뿐이었지 명망 있고 덕망 있는 사람은 절대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어떠한 신도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리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일련에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건은 그들이 보기에 미련한 것이지 절대로 지혜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유대인이 구했던 표적도 아니고, 헬라인이 찾았던 지혜도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에 동의하고 그것을 믿는 자를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고 그것을 믿으십니까?

 

위에서 제가 지혜를 뭐라고 그랬죠? 일을 풀어나가는 능력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을 적용해서 다시 말씀 드리면, 그리스도가 일을 풀어나가는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렇게 느끼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일을 풀어주는 능력이 됩니까?

 

세상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일을 풀어나가는 능력을 가장 크게 발휘하는 것을 뭐라고 가르칩니까? 돈입니다. 직설적으로 질문해서, 돈이 일을 풀어나가는 능력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일을 풀어나가는 능력입니까? 세상에서는 돈이 능력이고 지혜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푸는 열쇠라고 세상은 가르칩니다. 그래서 세상의 지혜에 매어 있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는 그저 세상살이에서 진짜 능력이고 지혜인 돈을 잘 벌게 해주는 헬퍼(도와주는 사람) 역할을 해주는 정도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돈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게 기복신앙이고, 우상숭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상으로 만들어버리는 행위입니다. 이게 우리 신앙생활의 깊숙한 곳에 침투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표적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풀어주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구원을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헤프닝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큰 틀에서 보지 못하고, 내 삶의 소소하고 일상적인 하찮은 수준으로 떨어뜨려 봅니다. 눈 앞에 것만 보고 생각하지, 그 뒤의 것을 그리고 더 멀리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그 사실만 보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그 뒤에 있는 부활을 전혀 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당장 눈 앞에 있는 것만 생각했지,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위의 기사에서 보았듯이, 인간은 문제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는 인간을 폄하하는 말이 아니라, 실존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인간의 실제 모습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만해서 우리 스스로를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져서 그렇지, 우리는 우리의 지혜로 일을 풀어나갈 수 없습니다. 위의 기사에서도 보았듯이, 경찰대 출신의 엘리트도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지혜로 풀어가는 듯 했으나, 결국 패가망신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지혜, 세상의 지혜에 의지할 때 발생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지혜, 세상의 지혜는 당장은 어떤 유익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결국에는 문제를 풀어주지 않고 일을 더 꼬이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정반대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보듯이, 인간들의 눈에는 문제가 꼬여가는 것 같으나, 결국 문제를 풀어낸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으나, 결국에는 참된 구원을 가져다 준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그것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어디에서 문제 해결의 열쇠를 받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저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저 십자가는 수단이 아니고 목적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의 은총에 푹 잠겨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문제가 풀어져나가는 기적과도 같은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은총을 날마다 체험하시는, 날마다 구원 가운데 거하시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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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 26. 01:20

2011 1 2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4:12-25

제목: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오늘 말씀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사역 시작, 2. 제자들을 부르심, 3. 예수님의 사역(Teaching, Preaching, Healing)

 

우선 예수님의 사역은 이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이 고향입니다. 나사렛에서 자라셨습니다. 그런데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갈릴리 호수가에 있던 가버나움이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이사를 하셨을까요? 오늘 말씀에 의하면,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중 15, 16절은 이사야 9 1-2절 말씀에서 인용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사하신 갈릴리 지역이 어떤 지역이었는지를 알아야 이 말씀이 이해 됩니다. 출애굽해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민수기 33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산당을 훼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거기 거하라”( 33:51b-53a).

 

열 두 지파 중, 갈릴리 주변에 자리 잡은 5개의 지파가 있습니다. 아셀,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므낫세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아셀과 납달리, 그리고 스불론은 그만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데 실패하고 맙니다. 이들은 그 땅의 거민을 몰아내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들과 함께 거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실패한 것이죠. 그러니까 갈릴리 지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방민족들에 의해서 타락한 문화가 형성된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중 가장 무시를 당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 46절에서 나다나엘이 나사렛 예수의 소문을 듣고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납달리, 스불론 지역은 역사적으로 매우 불행한 지역이었습니다. 북쪽의 국경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은 늘 이방민족과의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전쟁터로 쓰이던 지역이다보니 경제적인 피해가 말도 못했고 이방민족에게 늘 짓밟혔습니다. 실제적으로도, 북이스라엘이 망하기 10년 전에 이미 납달리와 스불론 지역은 이방인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가장 심한 지역임과 동시에 가장 수난도 많이 당한 지역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지역에서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고, 그곳이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였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닙니다. 불순종이 가장 충만한 곳에서, 순종이 가장 충만하신 분이 활동하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고 싶으셨는지, 금방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순종이 가장 심한 곳에서 순종의 삶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주신 것이죠. 바로 불순종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겁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 자체가 순종의 삶을 가르치시는 행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에는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안드레와 베드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어부였던 이들을 부르셔서,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를 만들어 주시겠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에 아멘하지만, 성경에 문외한인 사람이 들으면 무슨 인신 매매단인가 하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란 순종의 삶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삶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부르심을 받는 제자들의 순종이 중요합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불순종의 사람을 순종하는 삶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자신은 불순종 하면서 다른 사람보고 순종하라면 누가 그 말을 듣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나를 따르라 Follow me”라고 했을 때 이들은 즉시 그 말씀에 순종하고, 그물과 가족들을 그 자리에 내려 놓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부르심의 사건 자체가 순종이었다는 것이죠.

 

우리는 이유가 많아서 순종을 잘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이 즉시 응답한 것을 통해서 순종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셨다고 합니다. 영어로는 Teaching, Preaching, Healing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르침(Teaching)은 윤리적인 삶에 대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이어서 나올 산상수훈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부름 받은 성도로서의 삶, 즉 말씀대로 사는 삶에 대한 것이 가르침입니다. 가르침이 먼저 등장하는 이유는 마태복음이 지니고 있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사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마태복음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Preaching을 듣지 못해서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해서 욕을 먹습니다.

 

Preaching은 선포라고 하는데, 이는 회개를 불러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은 회개를 불러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여기에 왔다는데,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데 불의한 우리들이 거기에 응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부터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회개인데, 이게 철저하게 행해지지 않으니까 그 이후의 어떠한 가르침도 그들의 삶에 깊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겁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중 병고침의 사역도 굉장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병고침을 베푸신 이유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신 곳마다 그런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별 다른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병고침 사역을 하셨는가? 병고침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드러내주는 표적이었고, 예수님께서 전하고 다니신 하나님 나라가 바로 지금 여기에 와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병고침은 표적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들을 이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 나라가 바로 지금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병이 고쳐지는 것처럼 온전함의 나라입니다. 병든 사람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배척당한 다른 뜻이 아니라, 병이 고쳐지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병고침의 역사를 바라면서 삽니다. 물론 현대 의학이 그 일을 감당하고 있지만, 병이 고쳐진다는 그 사실 자체가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역에서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시고,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의 행위였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순종의 삶을 몸소 보이셨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정현종 시인의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시를 읽어 보겠습니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세월이 얼마나 화살같이 가는지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아주머니 파 보따리 속에서 파가 쑥쑥 자라고 있고, 아주머니 밤 보따리 속에서 밤꽃이 막무가내로 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종(사랑)해 볼 시간도 없이 인생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방황, 고민, 불순종, 이런 것도 건강하니까 하는 겁니다. 납달리와 스불론 땅에 거하든 사람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해 볼 겨를도 없이 , 하다가 나라가 망해 이방민족들과 섞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한 평생 한 많은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그곳에, 흑암에 앉은 백성에서 큰 빛이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지 않았다면 이들은 그냥 그대로 불순종의 아들로 멸망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은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가장 불순종이 심했던 곳에 가장 순종의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들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는 내 삶에 찾아오셔서 우리의 불순종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순종의 삶을 살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이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나를 따라 오너라!” 그 분의 부르심이 들리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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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