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부활절 아침의 기억
부활절 아침이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교회에 도착했을 때
내가 본건
파헤쳐진 빈 무덤이 아니라
파헤쳐진 빈 에어컨이었다
부활의 기쁨은 온 데 간 데 없어졌고
근심이 나를 짓눌렀다
그러고 보니 그 마음이
예수를 찾아갔던 여인들의 마음이 아니었던가?
예수의 시신이 온전하게 보관되어 있을 거라는
기대,
혹시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는
불안,
그들의 마음은
꼭 내 마음과 같았으리라
부활절 아침,
도둑이 파헤친 건
에어컨이 아니라,
그들의 양심이요
이 세상의 추악함이요
나누지 못하고 사는 우리들의 모자란 마음이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빈 무덤 앞에 선 여인들에게 들렸던
천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미 내 마음 속에는 그보다 더 귀한
그분의 음성이 들려왔다
“용서하여라 그들에게 복을 빌어주어라!”
부활의 기쁨은
파헤쳐진 빈 에어컨에 서린
죄악보다 컸다
에어컨은 보험처리 하면 된다
* 이 사건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었는지 상상이 안 갈 것이다.
교회 리노베이션 공사 마지막 날, 즉 에어컨 설치를 완료하는 날이었다.
그날이 바로 4월 23일 토요일(부활절 하루 전 날이었음).
그런데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그날 밤 도둑이 들어
새로 설치한 지 하루도 안 된 에어컨을 떼어 간 것이다.
부활절 아침 (24일), 나는 가슴이 떨리고 손이 떨렸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아서가 아니라,
파헤쳐진 빈 에어컨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의 기쁨은 모든 것을 용서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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