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2011. 4. 7. 13:37

뜨레비 분수

 

고불고불 로마의 골목길을 가로질러 찾아간 뜨레비 분수.

오드리 헵번처럼 로마에서 한가로움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댄다.

저녁 어스름,

조각상을 좀 더 환상적으로 만들어 줄 조명이 켜지기를,

조명이 켜지면 자신의 삶도 환상적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오감을 다 열어 놓고 기다린다.

아직 해가 다 지지 않아 어둠이 짙지도 않은데

기다리는 사람을 의식한건지 배려한건지

어둠과 환함의 어정쩡한 공기를 타고

조명이 찬란하게 켜진다.

설익은 조명인데도 사람들은 좋아한다.

그들의 한가로움은 설익은 한가로움이라서 그럴까.

그들의 삶은 설익은 삶이라서 그럴까.

설익은 것들이 어우러져 찬란함을 겨우 일궈내고 있을 때

사람들은 일제히 분수를 등지고

분수 속으로 동전을 던져넣기 시작한다.

던지기 전 그들은 잠시 눈을 감고 소원을 빈다.

그 소원은 분명 오감이 행복해할 수식어들이 가득찬

환상적인 소원일 것이다.

 

그 때,

배를 낮게 깔고 힘겨운 움직임으로

뜨레비 분수 앞을 지나는 거지가 눈에 들어온다.

환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시간과 절망을 딛고 사는 거지의 시간이 교차되는 순간,

소원을 빌기 위해 분수 속으로 던져지는 동전은 있어도

마땅히 빌 소원도 없는 거지의 깡통 속으로 던져지는 동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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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1. 4. 5. 12:21

비와 벌

 

처마 밑을 맴돌던 벌 한 마리가

주저 앉다 말고 갑자기

빗속으로 뛰어 들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곤충심리학자가 아니라서 잘 모른다

 

다만 빗속에서 비 맞고 돌아다녔다고

나처럼 그 벌도 엄마한테 혼날까봐

그것이 걱정된다

 

빗속으로 뛰어드는 벌을 보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난다

나도 앞뒤 가리지 않고 빗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비를 흠-뻑 맞고 집에 돌아와

엄마한테 혼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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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1. 4. 5. 11:58

2011 4 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9:1-12, 5:8-14

제목: 보이면 안 그런다!

 

레슬링 선수와 소방수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아십니까? 소방수가 이깁니다. 왜요? 소방수는 물불 안 가리니까요! 그러면 소방수와 눈 먼 사람(장님)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아십니까? 눈 먼 사람(장님)이 이깁니다. 왜요? 보이는 게 없으니까요!

 

제가 설교 시간에 이러한 농담은 잘 안 하는데요. 단순히 웃겨드리려고 이 말씀 드린 건 아니고요. 우스갯소리 할 때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웃고 즐기지만 남의 신체적 장애를 빗대어서 하는 말은 늘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픈 부분을 가지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경각심을 좀 드리고자 일부러 이러한 농담을 택해 보았습니다. 농담할 때도 정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보지 못하는 자들보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고, 보는 자들은 빛으로 나아온 겁니다.

 

요한복음에는 두 부류의 대조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명은 나면서부터 눈 먼 자이고, 다른 사람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눈 먼 자는 나면서부터 어둠 가운데 살았습니다. 눈 먼 것까지 힘겨운데,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살아야 했습니다. 눈멂은 이 사람에게 인생 전체에 새겨진 주홍글씨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이나 신체장애는 죄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신체장애를 안고 태어나는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죄인이 되는 것이죠. 

 

종교는 이처럼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세상 곳곳에서 폭력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종교적 폭력이 가해지면 사람들은 저항하지 못합니다. 이 사람도 저항하지 못하고, 평생 자기 자신을 죄인 취급하면서 낮고 낮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길 가시던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이 사람을 돌아보셨습니다. 함께 가던 제자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자신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종교적 관습에 젖어 있었습니다. 맹인으로 난 것은 본인이든 부모이든, 누구든지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이 저렇게 맹인으로 난 것은 그 누구의 죄도 아니다! 저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위대한 일을 보아라!” 예수님은 질병이 죄의 결과라는 그 당시의 통념을 뒤집으셨습니다. 물론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경우도 있지만, 모든 것을 그렇게 몰아 넣는 것은 불합리한 종교적 폭력에 불과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혹시 질병에 걸렸거나 자기 신변에 우환이 생기면 우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싸인인가?’ 그런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죄책감에 싸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좀 잘못된 것이 있다 싶으면, 하나님께 나아와 자비와 긍휼을 구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죄의 깊이보다, 우리의 죽음의 깊이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는 말할 수 없이 깊습니다. 못 고칠 질병이 아주 없고,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아주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맹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일컬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이 전해주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빛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건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갑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의 눈 뜸을 의심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부모까지 불러다가 확인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바리새인은 그 사람의 눈 뜸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눈 뜸에 대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뒤에는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던 겁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습니다. 보십시오. 맹인은 계속해서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바리새인들에게 진술합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래도 계속해서 바리새인들은 질문합니다. “그 사람(예수)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답답한 맹인은 이렇게 합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이 말에 격분해서 바리새인들은 눈 뜬 그 사람에게 욕을 하면서 말합니다.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랬더니, 눈 뜬 사람이 한탄하면서 말합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러면서 눈 뜬 사람은 그 사람,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으면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다가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납니다.

 

이 일을 듣고 예수님은 그 눈 뜬 사람을 만나 위로해주십니다. 그를 당신의 제자 삼으시고,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예수를 알아보았고, 눈을 뜨고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보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까? 이렇게 다시 질문해 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까? , 우리가 말로는 예수님이 보인다 안 보인다 어느 쪽이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이 장성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사람은 맹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몸에 익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8절 말씀에 보면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게 몸에 익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이 눈을 뜨면, 마냥 좋기만 할까요? 제가 지금 눈 뜨지 말고 그냥 맹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떠야죠, 병이 나아야죠. 그건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눈을 뜨고 병이 낳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가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보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이제 우리도 빛 가운데서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의 말씀입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눈을 떴는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빛의 자녀로 살지 못할 거면 오히려 눈을 그냥 감고 사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필연적으로 빛의 자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이는데, 어떻게 안 그럽니까?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맹인이 눈을 뜬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찾아와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하고 병든 것들을 고쳐주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지긋지긋한 질병도 좀 나았으면 좋겠고, 지긋지긋한 경제적 어려움에서도 좀 벗어났으면 좋겠고, 예수님의 은혜로 남편, 부인, 자녀 등 가족이 모두 잘 되었으면 좋겠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보기 원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해서 내 욕심을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맹인처럼 행동합니다. 어둠에 휩싸여서 어두운 일을 합니다.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일들을 서슴없이 합니다. 왜요? 맹인이니까, 예수님이 안 보이니까 그렇게 삽니다. 마음이 어둡고 행동이 어둡습니다. 남을 헤칠 생각만 하고, 남을 헐뜯을 생각만 하고, 남을 미워할 생각만 하고, 자기 자신의 욕심을 채울 생각만 합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낼 생각만 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킬 생각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이면, 안 그럽니다. 예수님이 보이는데 어떻게 그럽니까? 내 눈 앞에 보이는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는데, 어두운 마음이 들고 어두운 행동을 할 겨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보이면 안 그럽니다. 예수님이 보이면, 에베소서 5 9절 말씀처럼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습니다. 형제와 자매를 어떻게 도와줄까 만 생각하고, 형제 자매의 허물을 어떻게 덮어줄까 만 생각하고, 형제 자매를 어떻게 용서할까를 생각하고, ‘나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하면서 자기 자신을 감출 줄 알고, 공동체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할 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내가 지금 예수님을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세상을 보고 있는 건지. 자신의 행실을 돌아보면 답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보이며 안 그럽니다. 어둠의 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보고 있는데, 예수님이 보이면 빛 가운데 거해서, 빛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진리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그러면 빛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빛의 열매를 맺으려 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자연스럽게 빛의 열매가 삶 속에서 맺히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비추이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 설교를 음성으로 듣고 싶으시면 교회 홈페이지를 방문해 주십시오.
columbus.onmam.com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4. 2. 03:42

2011 3 31일 목요찬양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53: 1-12

제목: 구원은 왜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오는가?

 

신앙생활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살면서 이 질문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구원은 왜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오는가?” 무조건 믿는 신앙을 맹신이라고 하는데,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맹신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수많은 질문들을 불러일으킵니다. 모든 질문에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믿음의 조건에는 질문들이 넘쳐나야 합니다.

 

오늘 질문에는 세 개의 키워드가 있습니다. “구원, 그리스도, 그리고 고난입니다. 각각의 키워드가 너무도 큰 주제라서 우리의 일생을 다 바쳐도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교만한 마음으로 신앙생활 합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질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일어나는데, 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일생을 바쳐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아니라서 질문에 답을 찾아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찾아내기에는 우리의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만큼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숨쉬고 사는 것이 기적이고 은혜입니다. 이 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는데도, 그것을 온전히 파악할 능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깎아 내려서 인간 존재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가 어떤지를 온전히 파악해야만 정확하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간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온전한 삶을 일구어 나갈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아는 사람은 그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자기를 못 본다는 것이죠. 그래서 김연아 같은 피겨스케이팅의 1인자도 자기 자신을 살펴줄 코치가 필요한 겁니다. 코치의 말을 잘 따라서 자신의 문제점을 보안해 나갈 때 더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것이죠. 여기서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이 갈립니다. 교만은 마음이 완악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눈과 귀를 닫는 것이고, 겸손은 마음이 부드러워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서 눈과 귀를 열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못 견뎌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분노가 표출되고 증오가 표출됩니다. 결국 그 마음이 실제적인 죄를 낳게 만드는 것이죠.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고 삽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는 것을 내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변화와 새로움 속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킵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 그리스도, 고난의 신비를 다 알고 있는 듯이 신앙생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구원, 그리스도, 고난은 하나님과 관련된 신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종말에 스스로 드러내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인식능력으로는 절대로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알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13 12절에서 이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오늘은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 근거해서, “고난이라는 주제에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는 이들도 당연하게 고난 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은 꼭 고난을 당해야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인데, 고난 없이 우리이게 구원을 베푸실 수는 없는 건가요?

 

사디스트’, 그리고 메조키스트라는 말을 알고 계시는지요? 정신병적 증상을 일컫는 전문 용어입니다. ‘사디스트는 상대방에게 가학적인 행동을 할 때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메조키스트는 사디스트와는 반대로 가학적인 행동을 당할 때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용어를 빌어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평가해 보면, 메조키스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학적인 행동, 즉 고난을 당할 때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그것을 견디어 낼 때 오히려 믿음이 큰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하게 기억하십시오. ‘고난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정신병적인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고난은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 당해야만 무슨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만약 고난이 정당한 것이고 필수적인 것이라면,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겠습니까? 그런 것 묻지 않고, 그냥 고난의 길로 곧바로 가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겁니까? 이건 죄와 연결이 됩니다. 오늘 말씀 중 5절 말씀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이것도 조심해서 알아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을 말하는 것은 우리를 죄인 만들어서 우리를 죄책감에로 밀어 넣기 위함이 아닙니다. 죄책감을 지게 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도 기독교 신앙을 심리학적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나쁜 짓입니다. ‘허물과 죄는 인간의 실존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실상을 드러내는 신학적인 용어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허물과 죄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 상태를 일컬어 4절 말씀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질고는 질병을 의미합니다. 슬픔은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오는 아픔을 말합니다. 질병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현대 의학이 아무리 발전했다고 하지만, 사실 감기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 의학은 허술합니다. 그냥 조금 생명을 연장시키거나 약간 완화시켜 줄 뿐이지 우리 인간에게 문득 찾아오는 질병의 늪을 완전히 제거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 상황입니다. 슬픔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 많은 슬픔을 당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복구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자식을 잃었을 때, 또는 부모님을 잃었을 때 우리는 슬픔에 잠깁니다. ? 우리의 힘으로 자식을, 부모님을 되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슬픔에 잠기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 상황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러한 우리의 한계 상황인, 질고(질병)와 슬픔을 대신 지신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 상황을 대신 지시고 그 한계 상황을 넘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이 죄 된 세상은 서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승하던지, 이 죄 된 세상이 승하던지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고난 당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성육신 신학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죄 많은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런 불가능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불가능 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말씀은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십시오. 2절 말씀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이 땅의 기준에 맞지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당장 한국에서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기준과 미국에서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사는 우리들의 타락한 마음이 어떻게 우리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하나님 나라에서 온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스도는 3절 말씀처럼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귀하게 여김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이 죄 된 세상이 그리스도를 고난으로 몰아넣었다는 뜻입니다. 고난이 필수여서 그리스도가 고난 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이 우리의 죄악이 그리스도를 고난 당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이 나빠서,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면이 있다는 것이죠. 인간의 한계 상황에서 발생한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긍휼히 여기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허물과 죄악을 담당시키셔서 그것을 지고 십자가에 오르게 하시고, 거기에서 허물과 죄악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생명, 부활을 주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약간 고난의 신비가 손에 잡히시는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메조키스트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심리학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도 마시고, 죄책감에 휩싸이지도 마십시오. 고난에 저항하시고, 죄책감에 저항하십시오.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지, 고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부활의 몸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몸을 입은 거룩한 백성이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죄인처럼 비굴하게 살지 말고, 의인으로 당당하게 사십시오.

 

심리적인 수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가장 큰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구원이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보다도 더 비참하게 죽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고난의 신비를 심리적인 차원으로 떨어뜨리지 마십시오. 고난의 신비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을 넘어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말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말 할 수 없는 그 은혜에 잠겨 기뻐하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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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30. 22:25

시편 19

계시: 해와 율법과 그리스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한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능력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가? 그건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배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계시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실까? “계시(Revelation)”는 자신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실까?

 

시인은 두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하나는 자연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토라)이다. 자연이 하나님을 드러낸다고 하는 인식은 창세기의 천지창조 기사와 맞닿아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지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낸다. 물론 자연에게는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다”(3). 말을 해야 존재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고 서로의 존재를 가슴 속 깊이 느끼듯이, 피조물은 조물주의 사랑을 말 없이 드러낸다.

 

특별히 시인이 주목하는 피조물은 해이다. 해를 통해서 시인은 자연의 질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시인은 아침이 되어 해 뜨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해를 위해 하늘에 장막(텐트, )을 지어 주셔서 밤새껏 해가 쉴 수 있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보금자리에서 밤새껏 쉬다가 아침이 되어 떠오르는 해는 얼마나 큰 기쁨을 전해주는가! 아침에 떠오른 해는 저녁이 되어 질 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나누어 준다. 그 열기, 그 사랑에서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6)

 

시인은 다음으로 율법에 주목한다. 시인에게 율법은 단순히 지켜야 할 어떤 규율, 법이 아니다. 율법은 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한다. 율법 자체에 그러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계시되고 있는, 율법에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을 베풀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이 세상 그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키고, 참된 지혜를 주며, 참 기쁨과 의로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그래서 시인은 율법을 사모한다. 그것은 순금보다 더 귀하고, 꿀보다 더 달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자연과 율법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시인이 십자가 사건을 보았다면 무슨 고백을 했을까? 이런 고백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드러남은 모두 여기에 모아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하나님의 계시, 드러남이 아니라, 궁극적인 계시, 즉 하나님 스스로를 세상에 보이신 절대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이상, 자연도 율법도 그 빛을 잃고 우리의 모든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계시, 드러남 그 자체이시다. 이것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3. 28. 14:02

2011 3 27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7:1-7, 4:5-7; 10-15

제목: 마시자! 생명의 물!

 

설교 제목을 보면 연상되는 게 있으시죠? 마시자! 코카콜라! 제가 보기에는 코카콜라 회사에서 성경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그 문구를 생각해 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말씀은 모두 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의 말씀은 므리바 물사건이라고 불리는 것이고, 요한복음은 우물가의 여인이라는 소제목들이 붙어 있는 말씀입니다.

 

물 때문에 고생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마도 한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들은 물 때문에 고생한 기억이 거의 없을 겁니다. 한국은 물과 산 좋기로 유명한 곳이고, 미국은 모든 자원이 넘쳐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전 세계가 물 부족 현상 때문에 깨끗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서 비상이 걸린 상태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물을 깨끗한 물을 확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에 비해서 1인당 12배 정도의 물을 더 쓴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1인당 하루에 5갤런 정도의 물을 쓴다고 하는데, 미국 사람들은 1인당 하루에 60갤런 이상을 쓴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샤워하는데만 5갤런 이상을 쓴다고 합니다. 유럽에 가면 식당에서 물을 주지 않습니다. 저도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좀 황당했습니다. 스위스에서 밥 먹으러 들어갔는데 물을 주지 않더군요. 그래서 물을 좀 달라고 했더니, 돈을 내야 하고 물보다 오히려 탄산 음료가 더 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조그만 사이다 하나 시켜서 집사람하고 홀짝홀짝 나눠 먹은 적이 있습니다. 화장실도 돈 내고 들어가야 합니다. 물이 귀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들입니다.

 

한국이나 미국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물이 풍부한 곳에서 사는 우리들은 오늘 광야에서 일어난 므리바 물 사건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물이 없어 불평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믿음 없는 사람들”, 이라며 정죄하기 십상입니다.

 

물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40일 금식기도 같은 거 할 때도 물은 꼭 먹어야 합니다. 물을 먹지 못하면 며칠 못 버팁니다. 탈진해서 죽습니다. 그러니까 신 광야,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늘어놓은 불평은 믿음의 문제라기 보다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살기 위한 부르짖음입니다. 살만하면 부르짖지 않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명의 위협 앞에서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므리바 물 사건이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믿음을 너무 관념적으로, 우리의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따로, 삶 따로?

 

믿음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닙니다. 믿음은 여가생활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존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린 문제입니다. 믿음이 힘을 발휘할 때는 먹고 살만한 때가 아니라, 이렇게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입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불평한 것은 믿음의 행위는 아니었습니다만,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초능력 같은 믿음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위협을 별로 받고 살지 않습니다. 생명이 실로 위험한데도 그것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명에 대한 낙관주의에 빠져 있다고 말해야 할까요?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연약하고 위태로운지를 가슴 속 깊이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을 찾는 행위가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연약하고 위태로운지, 가슴 속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니 이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믿음의 행위가 일어나지 못합니다.

 

제가 몇 번 우스갯소리로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교회 오면서 아무 일 없이 온 분이 감사헌금을 더 많이 해야 할까요? 아니면 오다가 차 사고 나서 죽을 뻔 했는데 아무 일 없이, 떨리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오신 분이 감사 헌금을 더 많이 해야 할까요? 우리는 흔히 죽을 뻔한 경험을 한 경우 감사합니다는 고백과 함께 감사헌금을 더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죽을 뻔한 경험을 한 것이 더 감사한 겁니까? 아닙니다. 교회 오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교회 온 것이 더 감사한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생명의 위협을 못 느끼니까, 감사가 나오지 않을 뿐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생명에 무딥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은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담소를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도 대화의 매개가 물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 대해서 대단한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주석이 잘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성경연구가 좀 덜 된 목사님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 있는 남편도 자기의 남편이 아니라는 구절 때문에, 이 여인은 간음한 여인, 부도덕한 여인으로 낙인 찍혔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정한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 만나고 구원 받았다고 하는 메시지로 이 이야기가 전해져 왔습니다.

 

그건 이스라엘의 풍습을 몰라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이스라엘에는 계대결혼풍습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결혼했는데 남편이 죽으면 그 여인은 죽은 남편의 동생의 아내가 되는 법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서 했던 질문이 바로 이겁니다. ‘한 여인이 계대결혼풍습 때문에 7곱 형제 모두의 아내로 이 땅에서 살다가 죽었는데, 그러면 하늘에서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로 살게 됩니까?’ 이런 질문을 해서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려고 했었죠. 이 여인도 그런 풍습에 의해서 6명의 남편을 두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요즘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우리는 남을 정죄하고 뒷얘기 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좋아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도 그런 식으로 읽을 때가 많습니다. 조심해야 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살인하는 이야기, 간음하는 이야기 등, 성경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 것을 읽을 때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에 대한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 읽으면, 성경은 온갖 부도적하고 폭력적인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이상한 책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거에 걸려 넘어지는 분들도 많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러실 수 있느냐는 둥, 성경이 왜 이렇게 부도덕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느냐는 둥 말이죠.

 

우물가의 여인에 대한 선입견을 혹시 가지셨다면 오늘 이 시간 정정하십시오. 우물가의 여인은 부도덕한 여인이 아니라, 그냥 목말라서 물을 길러 온 여인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물가에서 물을 소재로 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은 목마름을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과 기가막히게 연결시킵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육적인 목마름 때문에 물을 길러 온 것이지만, 그 여인의 마음 속에는 메시아,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목마름을 채워주는 우물의 물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죠. 그가 바로 생명의 물이라는 겁니다.

 

물이 없어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물을 먹으면 갈증이 풀려 살아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또 목마릅니다. 그러면 또 불평하게 되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그것을 되풀이 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거나, 물이 없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어김 없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불만을 쏟아 놓고,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말씀은 이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물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한 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를 일이 없기 때문에 불평 불만이 생겨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순절기를 보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목마를 때 물을 간절하게 찾는 그 간절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배고픈 나의 배와 목마른 나의 목을 축이는데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당연합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를 채우고, 목을 축여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시 배가 고프고 다시 목이 마릅니다. 육신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만족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불평과 불만에 휩싸이게 됩니다. 더 좋은 것을 먹고 마시기 원하게 됩니다. 그것이 충족되면 기분이 좋았다가도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안색이 변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생겨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목마름이 다시 오지 않는 생명의 물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물이라고 하는 것을 매개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생수를 네게 주겠다고 했을 때, 그 여인은 물어봅니다.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니까?” 이렇게 해서 길어지는 것이 생명의 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로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물인 것이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므리바 물 사건에서도, 광야에서의 목마름을 채워준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육신을 지닌 우리들이 어떻게 영과 진리로 예배합니까? 이 말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우리는 예배 조차도 드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마르십니까? 배고프십니까? 무엇에 대해서 목마르시고 배가 고프십니까? 육신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좀 채워달라고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십니까? , 간절히 바라면 하나님께서 육신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 주실 겁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육신의 목마름과 배고픔은 채워지는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또 제자리로 갑니다. 끊임없는 불평 불만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매개로 해서, 진짜로 우리에게 주고 싶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기 원하신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우리를 다시는 목마르거나 배고프게 하지 않는 생명의 물,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생명의 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시고 나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차원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불평 불만 속에서 육신의 목마름을 위해서 살던 우리가, 만족함 가운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믿음의 자녀로 바뀐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목마름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잘 못합니다. 육신의 목마름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하는데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육신의 목마름을 채우려 합니다. 이건 열심이 아니라, 불신입니다.

 

생명의 빵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나면, 다시는 배고프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차원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불평 불만 속에서 육신의 배고픔을 위해서 살던 우리가, 만족함 가운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믿음의 자녀로 바뀐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배고픔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잘 못합니다. 육신의 배고픔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하는데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육신의 배고픔을 채우려 합니다. 이건 열심이 아니라, 불신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이런 질문이 생기실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물과 빵을 먹고 마실 수 있는가?” 그러면 제가 이렇게 질문해 보겠습니까? “여러분은 언제 물을 마시고 빵()을 드십니까?” , 목마르고 배고플 때 마시고 먹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목마르고 배고프면 생명의 물이고 빵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시고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언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목마르고 배고픈 적이 있었습니까? 육신의 목마름 때문에, 육신의 배고픔 때문에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하나님께 매달려 본 적은 많은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목마르고 배고픈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요? 간구하십시오. 이 사순절기 동안,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목마르고 배고프게 해달라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오.

 

생명의 물이고 빵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 보십시오. 그분을 만나면 여자가 물동이를 놓아두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던 것처럼, 삶 속에 참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만족함이 넘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힘으로 살아갑니다. 생명의 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심으로, 그리고 생명의 빵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인해 솟아난 기쁨과 힘으로 살아가는 자는 복된 인생입니다. 만족하는 삶을 삽니다.

 

무슨 힘으로 살아가십니까?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살아가십니까? 그래서 삶이 고단하시고 피곤하십니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거기에 참된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새 힘과 새 소망이 넘쳐날 것입니다. 만족함이 넘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24. 09:49

시편 18

은혜와 공적

 

일방적으로 맺어지는 관계는 없다. 그건 노예 계약일 뿐이다. 짝사랑이 아름답긴 해도, 그건 사랑의 허상이다. 자기 자신의 욕망과 상상만이 투영되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사랑이다. 인격적인 관계는 쌍방향의 개념이다. 서로 마음을 나눌 때 참 사랑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찬양은 일방적이지 않다. 시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또한 일방적이지 않다. 시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인격적인 돌봄을 받는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고백하는 시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 있다. 사랑하는 자가 베푸는 은혜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보호의 역할을 한다. 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이렇게 표현된다. , 반석, 요새, 방패, 구원의 뿔, 그리고 산성.

 

시인은 왜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을까? 시인은 고백한다.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21-24). 한마디로 정리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시인은 의인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은 구약의 개념이다. 이런 신앙은 율법에 얽매이게 된다. 율법이 곧 하나님이 된다. 그렇다면 시인은 지금 자기 의덕분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여기에서 은혜와 공적을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관계는 일방적일 수 없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는 다르다. 구원은 배타적인 사건이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라는 뜻이다. 자기 의는 공적이다. 이것으로 구원이 우리에게 임한다고 생각하면 큰 실수를 범하는 거다. 자기 의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은혜(칭의)로 구원 받는 거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의롭게 살아야 하는가? 의로움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거라면 무엇 때문에 의로움을 추구하는가?

 

다시 한 번 관계와 구원의 문제를 돌아보자.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인 사건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사귐)는 일방적이고 배타적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지 노예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바로 의로움이다. 의로운 자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 사귐은 쌍방향이다. 이 사귐에 들어온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 주신다. 그것이 곧 구원이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고 있다. 겉으로는 자기의 의를 말하고 있지만, 그렇게 자기 의를 말하면서 구원을 확신하는 이유는 자기 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사귐은 의() 안에서 이루어진다. 자기 의는 공적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생겨난 의는 은혜이다. 우리는 그 은혜로 구원에 이른다. 시인은 그것을 찬양하고 있다. 얼마나 분명하고 감사한 찬양의 이유인가?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3. 21. 07:35

2011 3 20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3:1-4, 4:1-5

제목: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평생을 이야기해도 다 이야기하지 못할,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교만과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부터 먼저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불안합니다. 진리가 아니라서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신비라서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확실해서 불안합니다. 그리고 이 확실함이 오직 한 사람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걸려 넘어집니다.

 

성경에 보면, 오늘 제목에 나오는 거듭남이라는 말도 나오고, 의라는 말도 나오고, 구원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성경은 온통 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듭남, , 그리고 구원은 모두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단어로 구원의 여러 다른 낱말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거듭남이란 무엇인가구원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겁니다.

 

그런데 이 구원이라는 것도 그 실체를 우리가 잘 알지 못합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안다고 떠벌리는 자들은 구원이 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구원은 완성품이 아니라, 되어져 가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창조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실체를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 구원이라는 것도, 한 사람의 운명에 걸려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니까 좀 답답하신가요? 구원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정확하게 설명해 주어야 속 시원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 그 누구도 구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구원을 완전하게 담지하고 있는 분에게로 이끌 수 있을 뿐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이 무엇인지 아시고, 그 분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모든 삶을 거는 겁니다.

 

영국이나 일본에 가보신 적이 있는지요? 그 나라에 가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자동차가 달리는 방향입니다. 한국이나 미국 등 대부분의 나라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자동차들이 달립니다. 우리는 운전석이 왼쪽에 있지만, 그들은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왼쪽에 앉아 오른편 도로를 달리지만, 그들은 오른쪽에 앉아 왼편 도로를 달립니다. 헷갈리시죠? 우리처럼 왼쪽에 앉아서 오른쪽 도로를 달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 영국이나 일본에 가서 운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횡단보도 건너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 왼쪽을 먼저 바라보도록 훈련받습니다. 그런 상태로 영국이나 일본에 가서 횡단보도를 건너다가는 차에 치어 사고 당하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영국이나 일본에서는 왼쪽에서 차가 달려오지 않고, 오른쪽에서 달려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국이나 일본에서는 외국인 관광객 중에 그러한 사고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이나 일본에 가면 횡단보도 바닥에 어김없이 이런 글자가 써 있습니다. “Look right, 오른쪽을 보시오.”

 

바울이 쓴 로마서의 수신자들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로마의 제사법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율법에 물든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횡단보도 건너는 습관과 똑 같은 것이지요. 도로는 건널 때 왼쪽을 바라보도록 어려서부터 훈련 받은 사람들이 도로를 건너면서 오른쪽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을 들어 구원의 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여겨진 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하고 있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의로워져야 구원 받습니다. 의가 곧 구원입니다. 이게 곧 거듭남입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질문 드리겠습니까? 의로워지기 위해서, 거듭나기 위해서, 구원 받기 위해서 여러분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행하는 그 무엇이 우리 자신을 의롭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면 그것으로 의로워진다고 생각했고, 그들은 스스로 구원받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자기 의를 통해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구원이란 자기 몫이 됩니다.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임금이 되는 것이죠. 자기가 받을 몫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랑스러워 합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게 신앙생활 합니다. 제가 이렇게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주일 예배 나오면 구원 받나요? 십일조 생활 잘 하면 구원 받나요? 아침에 졸린 눈 비비면서 어려운 가운데 아침 기도회 꼬박꼬박 잘 나오면 그것으로 우리가 구원 받나요? 그것이 의로운 행동인가요? 이런 거 잘 하는 사람은 괜히 신앙이 좋아 보이고 의로워 보이고 위대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거 잘 못하는 사람들은 괜히 신앙이 없어 보이고 스스로 자격지심을 갖습니다. 이런 거 잘 하는 사람은 이런 거 잘 못하는 사람을 얕잡아 보고 정죄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런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백보나 오십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라는 거죠.

 

지금 제가, 예배 생활, 그리고 십일조 생활 잘 하시는 분들을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스스로를 구원 받은 백성이라고 스스로 의로운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유대인들처럼 율법에 얽매여 율법으로 의롭게 되어 자기 의로 구원 받으려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구원이 그런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너무 거기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이 말을 듣고, 예배를 소홀히 해도 되는구나, 십일조 생활 안 해도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아직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의로움은 우리의 거듭남은 그런데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이게 무엇인지 알아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은 니고데모라는 유명한 율법학자가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남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니고데모가 어떻게 하여야 거듭날 수 있습니까?”라고 물은 것은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과 똑 같은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물과 성령으로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바로 이 뜻입니다. 구원이란, 거듭남이란,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아브라함의 행위 때문에, 즉 아브라함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5절의 말씀처럼 일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임금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포도원에 일찍 와서 장시간 일 한 일꾼이나, 일이 끝나가기 한 시간 전에 와서 일한 일꾼이나 똑 같은 임금을 받았습니다. 이게 바로 임금(구원)은 일한 일꾼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구원)을 주는 주인(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은 인간이 어떻게 타락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반역하고 폭력과 죄 가운데 살게 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1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당신에게 반역하고 폭력과 죄 가운데 있는 당신의 피조물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자손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복을 내리시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복이란 출생능력, 생명, 성공, 행복, 그리고 명성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의 상태를 봐서는 이것이 사실 불가능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그들이 알지 못하는 곳 가나안이라는 곳에서 어떻게 땅을 얻습니까? 세상은 이방인에게 늘 차갑습니다. 우리 미국 이민자들도 미국에 와서 우리의 소유를 얻기 위해 얼마나 피땀 흘려 일 해야 했습니까? 옛날엔 더 했습니다.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는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생식능력을 상실한 나이에 도달했습니다. 생리적으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자손을 번창시킵니까? 불가능합니다. 이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는데, 이제 늙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복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복을 내려주셔 봐야 남겨줄 자손도 없는 마당에요.

 

하나님은 이런 상태에 있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부르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흑암과 같은 상태에 있었던 아브라함과 사라를 부르셨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와 같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복주셨듯이,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과 자손, 그리고 복을 내리셔서 그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온 세상에 미치도록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당신의 피조물을 향한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내려주시고, 의를 베풀어 주시고, 거듭남의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죄 많은 우리에게 나의 사랑을 받아 줄래라고 묻지 않으시고, 먼저 찾아오셔서 당신의 사랑을 폭포수처럼 부어 주십시오. 그 사랑이 바로 저 십자가에 걸려 있습니다. 저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저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와서 그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거듭남이란 바로 그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바로 그 사랑을 힘입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그 사랑에 온 존재를 다해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결과가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예배로, 우리의 헌신으로, 우리의 찬송으로, 우리의 기도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에게 복을 내리셨을 때, 아브라함 혼자 그 복을 누리라고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내리신 복은 아브라함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그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에게 흘러내려가는 복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받은 사랑은 그 사랑을 받은 자에게만 내려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그 사랑을 받은 자와 연관된 모든 피조물들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전도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믿음으로 응답할 때 옵니다.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고. 구원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오히려 거기에 걸려 넘어지게 될 겁니다. 그냥 십자가만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에서 쏟아지는 폭포수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믿음으로 받으십시오. 그 은혜로 신앙생활 하십시오. 그래야 십자가에서 받은 사랑을 우리의 이웃에게 아낌 없이 흘려 보낼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해서 임금으로 받은 구원은 아까워서 남에게 나눠주지 못합니다. 더 지키고 더 자랑하려고만 들죠. 그러나,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 주어진 은혜는 아낌 없이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조차도 욕심부리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온전히 깨달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사랑을 아낌 없이 나누어 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거듭남이, 우리의 의가, 우리의 구원이 저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분에게만 집중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폭포수처럼 여러분의 삶 가운데 쏟아질 줄로 믿습니다. 그 은혜로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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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엄마 마음
 

세상 물정 모르는 세 살배기 아들이 학교 다닌다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힘쓰는 것을 보면 엄마 마음이 안쓰럽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학교 가기 전에 집에서 푸푸(대변)를 보고 가면 마음이 편하다고 합니다. 학교 가서 푸푸를 보게 되면 선생님을 번거롭게 할까 봐 걱정이고, 학교에서 혼자 푸푸 보면서 괜한 고생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답니다. 이것이 엄마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세 살배기 아들은 몰라주겠지만 엄마는 늘 세심하게 걱정합니다.

 

이런 엄마 마음이 목사의 마음이라는 것을 아는 성도들이 얼마나 될까요? 히브리서 13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자신들에게 복 주는 말씀을 하면 아멘하다가도 이런 말씀 앞에서는 입을 삐죽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순종하라 복종하라라는 말이 거슬리기도 하고, ‘목사의 마음이 정말 저랄까하는 의심도 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사 중에도 삯꾼 목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곡식과 가라지는 함께 자라는 법입니다.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것이 영성이겠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 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삽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중 가장 안타까운 사람이 목사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도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목사에게 또는 교회의 지도자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못 믿겠다는 겁니다. 신뢰가 없으니까 말씀을 들어도 본인에게 익숙한 말씀, 본인이 들어 납득할 수 있는 말씀에만 아멘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 말씀이 본인의 생각하는 것과 좀 다르다 싶으면 목사를 대적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면밀히 관찰해 보면 목사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목사에게 또는 교회 지도자에게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권위 앞에 순종하고 복종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한 번도 권위 앞에 순종하고 복종해 보질 않아서 그렇습니다. 인간사회의 가장 기초 단위인 가정에서부터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참 권위가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고, 부모님의 권위에 순종하고 복종해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권위 앞에서 자기 방어 기제가 발동됩니다. 일종의 열등감이고 피해의식입니다. 권위 앞에 복종하고 순종하면 자신의 존재가 초라해진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것을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순간 자기 방어 기제가 발동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에게 이건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에 머물지 않고 결국 신앙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요, 결국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밖에는 없다는 것이죠. 교만이라는 것, 별거 아닙니다. 자기 집중, 자기 방어를 통해서 상대방(타자)을 밀어내는 것, 이것이 교만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성령조차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 그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길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추악한 썩은 냄새만 날뿐입니다. 이 냄새로 인해 주변 사람들만 괴로울 뿐입니다.

 

엄마 마음을 상상해 보고 그 마음을 목사의 마음과 오버랩 시켜 보십시오. 당신이 잠들어 있을 때, 당신이 삶의 무게로 버거워 할 때, 당신이 사는 것 때문에 바쁠 때, 목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당신을 위해서 경성하기를 자신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기도합니다. 본인도 본인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하지 못하는 일을 목사가 대신 하고 있는데 이왕이면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목사의 영성을 신뢰하십시오. 그것이 유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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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16. 13:24

시편 17

만족은 멈춤이다

 

인간은 만족을 모른다. 만족하기까지 멈출 줄 모른다. 하나님이 정하신 죽음이 강제로멈추게 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죽음은 인간의 멈추지 않는 욕망을 멈추게 해주고 겸손을 맛보게 해주는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최고의 은총이다.

 

시인의 탄원을 따라가다 보면 만족은 나쁜 것뿐만 아니라 좋은 것에서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하나님께 멈출 수 없는 감정으로 소리 높여 탄원한다.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해서 드리는 탄원기도는 원수의 입장에서 보면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게 의로운 자의 기도인가 싶을 정도로 감정이 너무 격해져 있다. 원수가 철저하게 파괴되고 짓밟히는 것을 보게 되기까지 만족이 없는 듯 하다. 원수를 비방할 때 쓰는 언어가 매우 과격하다. 하나님께서 원수에게 갚아주셨으면 하는 방법이 매우 잔인하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이 급격하게 가라앉는 지점이 있다. 바로 그가 의로운 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때이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의 마음에 만족을 줄 수 없다. 만족이 없기 때문에 쉼(안식)이 없다. 쉼이 없기 때문에 평화가 없다. 평화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늘 고달프다.

 

시인의 삶이 어떻게 이토록 만족 없는 삶에서 만족이 넘치는 삶으로 급격스럽게 변하는지 보라. 하나님을 만났을 때다. 하나님을 뵙고 나니 세상과 나는 간 데 없고오직 하나님만 보인다. 하나님을 뵈니 끝 간데 모르고 달려가던 마음이 만족함을 얻어 바로 그 자리에서 멈추게 된다. 하나님을 뵈니 원수도 안 보이고, 원수에게서 받았던 상처도 사라지고, 원수에게 가졌던 복수의 찬 분노도 사라진다. 하나님을 뵈니 이 마음이 하나님으로 차고 넘쳐 다른 것이 들어올 여지가 없어진다. 이제 시인은 만족한다. 이제 시인은 쉴 수 있다. 이제 시인은 평화 가운데 산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만족이 없는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숨 쉴 틈 없이 달려간다. 조금만 더 달리면 이 마음에 만족이 올 거라고 자위하면서 열심히 달려간다. 그러나 만족은 신기루와 같다. 잡으려고 달려갈수록 나에게서 멀어지고, 잡았고 생각한 순간 이 마음은 불만족에 또 쉼과 평화를 잃는다.

 

시인을 통해서 우리는 만족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배운다. 하나님을 뵈올 때 이 마음에 만족이 온다. 그러니까 헛된 욕망에서 벗어나 참된 만족을 얻는 길은 우리의 삶에 만족을 가져다 줄 거라고 생각한 그것을 붙잡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완전히 틀어서(메타노이아, 회개) 하나님을 의로움 가운데 뵙는 것이다. 하나님을 뵐 때 오는 만족은 모든 것을 멈추게 한다. 멈추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쉼을 얻게 한다. 멈추어 안식하면서 평화를 누리게 한다. 만족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을 만나라. 하나님을 만나 만족하게 되면 모든 것이 멈추게 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