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1. 7. 05:21

2011 11 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제목: 소망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입니다. 그때는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세우겠다고 사람들을 끌어 모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끼리 모여 자연스럽게 교회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교회는 굉장히 자생적으로 형성이 되었다는 것이죠. 다른 말로 하면 자발적이었다는 겁니다. 이 자발적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무엇인가 억지로 하면 일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 내키는 일을 하면 헌신하게 되는 것이죠. 교회는 억지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자생적으로, 자발적으로 형성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독교적인 용어로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의 역사에 맡기는 훈련이 꼭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시작하신 일이니 성령께서 마치도록 그분께 모든 것을 내어드려야 한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는 이것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교회의 일이 성령이 일이라는 것조차도 감지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들의 못난 욕심이 성령의 일을 자꾸 방해하고, 성령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영성 중, 우리가 가장 놓치고 사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죠. 그들은 철저하게 성령의 역사에 자신을 맡길 줄 알았습니다.내가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할거니까 내가 할 일이 없지 뭐하면서 뒤로 물러나 있지도 않았습니다. 주의 일에 최선을 다했지만, 그렇다고 성령의 역사를 거슬러 분에 넘치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 제 2차 전도여행 때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여 거기에서 전도를 할 수 있는 시간은 3주 정도 밖에 안 됐었습니다. 바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전도하는데 박해와 방해가 너무 심해서 어쩔 수 없이 그곳을 떠나 베뢰아로 피신해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3. 정말 짧은 시간입니다. ‘더 머물러 있으면서 복음을 더 전하면 좋을 텐데..’, 이러한 아쉬운 마음으로 바울 일행은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큰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바울 일행의 전도사역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짧은 3주 간에 뿌려진 복음 위에 자생적으로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은 고린도에 가서 전도사역을 펼치고 있을 때 그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씌어진 서신서가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생각지도 않았는데, 성령의 역사로 인해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이. 3주 동안 머물면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3주 동안 전하지 못하고 온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펜을 들어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로하고 그들에게 더 깊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우선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잘 이해하고 실천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의 복음을 잘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1 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요약하면, 이들이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서 잘 성장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복음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그 안에서 잘 성장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위로와 감사와 사랑을 전하며 그 복음 위에 더 굳건하게 서 가라고 격려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단숨에 써내려 간 편지가 아닙니다. 몇 개의 편지를 엮어서 편집한 서신서입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시간의 간격들이 보입니다. 그 중 하나가 3 6절입니다.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디모데가 데살로니가를 다시 방문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에 머물면서 바울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다시 파송했었겠죠. 그곳에 상황을 더 살펴보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바울의 명을 받아 데살로니가에 가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고 그들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쁜 교제를 나누고 그들의 소식을 가슴에 담아 고린도로 되돌아 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바울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가져온 소식을 보면 무엇인가가 달라졌습니다. 위에서 우리가 살펴본 1 3절의 말씀과 이제 살펴볼 3 6절의 말씀을 비교해 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3 6절 말씀의 일부분입니다. “너희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1 3절과 비교해 볼 때 여기에 빠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소망입니다. 이들은 아직까지 믿음과 사랑 안에서 성장해 가고 있긴 했으나, 소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망 없이, 믿음과 사랑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소망이 없으면 정말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미래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꾸 현세적인 축복만을 바라는 기복신앙으로 흐를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이 뭔가에 눌린다는 겁니다. 위로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소망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요? 바로 재림의 지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울 일행에게 복음을 들었을 때 이들이 갖게 된 소망 중 하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그리스도가 곧 다시 오실 거라는 것이죠.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이들은 로마 황제의 귀환식에 빗대어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16절 말씀이 그 표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이는 로마 황제의 귀환식을 형상화한 표현입니다. 그렇게 한 데는 특별한 연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도 기독교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당시 온 세계의 주님(퀴리오스)은 로마 황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부정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온 세계의 주님(퀴리오스)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당국으로부터 박해 받았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바울 일행의 데살로니가 전도사역을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 일행의 전도사역을 방해하고 박해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며 소란을 피웁니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로마 황제)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주님, 퀴리오스)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사도행전 17 7).

 

로마 황제가 전쟁에서 귀환할 때나 어딘가를 행차할 때 천지가 진동하는 광경을 연출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그렇게 천지가 진동하는 광경은 로마 황제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참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나 어울리는 광경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로마 황제의 그것에 투영해서 생각하고 묘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어떠한 모습으로 오실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초대교회가 로마 황제의 모습에 투영해서 묘사했던 그 모습 그대로 오실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모습으로 다시 오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재림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는 것이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소망을 잃어버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바울 일행에게 복음을 들었을 때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살아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거라는 확신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다림 속에서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한 두 명씩 죽어갔다는 겁니다. 그리고 재림의 소망 가운데 박해를 견디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박해를 견디어낼 힘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딜레마였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서 아직까지 믿음과 사랑 안에서 신앙생활을 이어나가긴 했으나 소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디모데에게서 그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은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소망을 다시 심어 주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이렇게 소망이라는 말을 힘주어 말하고 있는 이유를 이제 좀 아셨을 줄로 믿습니다. 여기서 자는 자들이란 바로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다가 먼저 죽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먼저 죽은 자들을 생각하며 슬퍼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미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복음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큰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면서 그들을 소망 가운데 다시 거하게 합니다. 우선 그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이들은 죽은 자들이 어떻게 될 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 만의 부활이 아니라,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을 담보하는 약속이라는 겁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그를 믿는 믿음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예수처럼 다시 살리실 거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바울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지금 살아 있는 자들의 부활보다 앞 설 거라는 복음을 전합니다. 부활의 순서를 굳이 정하자면, 예수가 가장 먼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한 것이고, 그리고 죽은 자들이 그 뒤를 따를 것이고, 현재 살아 있는 자들이 부활의 몸을 마지막으로 입게 될 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지금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이 예수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하는 걱정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부활이 무엇인지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기우(불필요한 걱정, 쓸데 없는 걱정)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바울의 편지를 받아 든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제 소망을 회복하지 않았겠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셔서 우리의 그리스도, 메시아가 되게 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리고 부활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깨달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동안 잃었던 소망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소망이 회복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18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그렇습니다. ‘위로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서로를 위로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위로할 여력이 없어서 못합니까? 나 먹고 살기 바빠서 못합니까? 마음이 강퍅해서 못합니까? 아직 믿음이 없어서 못합니까? 아닙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이 마음에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대한 소망입니까? 바로 부활에 대한 소망입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왜 없습니까? 내가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선한 일도 많이 하는 것 같아, 그래도 내 안에는 믿음도 있고 사랑도 있는 것 같은데, 왜 이 마음에 위로가 없고 왜 저 마음에 위로를 전해주지 못합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가 평생 품고 살아야 할 부활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는 있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부족하여, 우리 가운데 위로가 없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참된 위로는 결코 다른 데서 오지 않습니다. 각종 엔터테인먼트로 위로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서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목마르게 하는 우물물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디에 우리가 더 집중하고, 어디에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부활의 소망만이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줍니다. 그 위로를 받고, 그 위로를 나누어주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리스도인입니까?


Posted by 장준식

비극.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극이 아니면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리스의 희곡 중에서도 희극보다는 비극이 더 유명하고 재미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이디푸스 왕 같은 비극이 대표적이지요. 그렇다면 비극은 왜 연출될까요? 대부분의 경우가 욕심 때문입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이런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아르헨티나에게 4 1로 패배한 사건입니다. 축구 전문가들은 이 경기의 패배 원인을 감독의 전술 실패로 꼽지만, 인간의 심리 이면을 들여다 보아야 하는 목사인 제가 보기에는 이 경기의 패배 원인은 분명 욕심에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와 한국의 축구 실력은 차이가 납니다. 아르헨티나에는 세계적인 선수가 즐비합니다. 세계 최고의 공격수 메시를 비롯해 이과인, 테베스, 베론 등, 이름만 들어도 엄지 손가락을 추켜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선수들이 즐비합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한국은 아르헨티나를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한국 축구대표팀은 이런 점을 겸허하게 수용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변을 일으켜 보겠다고 하는 욕심이 이러한 점을 간과하게 만들었습니다.

 

더군다나 24년 전, 한국 팀의 허정무 감독과 아르헨티나 팀의 마라도나 감독의 악연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방해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24년 전 멕시코 월드컵 당시 허정무 선수는 월드컵에 처음 출전하여 아르헨티나 대표팀 선수로 나왔던, 세계 최고의 공격수였던 마라도나 선수를 전담 마크했었습니다.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마라도나 감독은 한국 선수가 태권도 축구를 했다고 비아냥댔고, 허정무 감독은 그건 태권도가 아니라 축구였다고 심리전을 펼쳤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허정무 감독에게 오기가 발동했던 것 같습니다. 남아공 월드컵 첫 번째 경기였던 그리스 전에서 상당히 좋은 경기를 펼쳐 그리스를 이긴 선수들도 한 번 해 볼만하다고 자신감이 붙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기가 과했고, 자신감이 과했던 것이죠. 박지성 선수도 아르헨티나에게 패배라는 충격을 안겨주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말이죠.

 

한국은 아르헨티나를 이겨보려는 욕심이 앞섰습니다. 욕심이 앞서면 상황 판단이 흐려지는 법입니다. 한국 팀의 욕심의 결과는 4 1, 대패였습니다. 비극입니다. 한국 팀은 아르헨티나 팀에게 한 수 배우겠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승패와 상관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어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경기에 임했다면 오히려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겠다는 지나친 욕심은 대패의 비극만 안겨주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욕심은 눈을 가리고 상황 파악에 혼선을 주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비극은 사람들의 비웃음 거리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비극만 낳는 욕심, 십자가에 못박읍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0. 31. 05:15

2011 10 30일 주일 예배 설교 (종교개혁주일)

본문: 여호수아 3:5-17

제목: 십자가는 면죄부가 아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개신교인이라면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종교개혁에 대해서 꼭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개신교는 태생부터가 개혁적입니다. 개혁이 개신교의 정체성이라면 개신교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개혁적이어야 합니다. ‘에클레시아 샘퍼 레포만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슬로건 중의 하나였습니다. ‘늘 개혁되는 교회’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통해서 종교개혁정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의 새로운 영도자가 된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스승에게서 리더십을 이어받은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강하고 담대하라는 위로의 말씀을 받고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입성합니다.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은 요단강을 건너는 일에서 시작이 되는데, 요단강을 건너는 일은 철저하게, 늘 그랬듯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져야만 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의 하나님의 지시는 이렇습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들러 멥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들러 멘 제사장들이 백성들보다 앞서 요단강에 들어섭니다. 이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요단강은 멈추어 섭니다. 요단강에 댐을 하나 건설한 것처럼 물길이 막힙니다. 그리고 드러난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을 건너갑니다.

 

흐르는 요단 강물이 멈추어 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낸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하찮은 신으로 전락시키는 불경스러운 일에 해당됩니다. 요단 강물이 멈추어 선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10절 말씀에 그것이 나와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다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사실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는 일은 룰루랄라그렇게 휘파람 불며 할 수 있는 한가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곳에 살고 있는 족속들(가나안, , 히위, 브리스, 기르가스, 아모리, 여부스: 가나안 일곱 족속이라 부름)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을 열고 어서 옵쇼하면서 반겨주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행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 방법이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은 희생이 불가피 합니다.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전쟁을 이끌어야 하는 여호수아도 사실은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위로하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는 위로의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여호수아가 이럴진대, 일반 백성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들도 두려워 떨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징표가 바로, 요단 강물이 멈추는 것이었고, 마른 땅으로 그곳을 건너는 일이었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사건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 지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게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통해서 그 두려움을 가려주시고, 그 마음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단강을 건너는 일은 세례를 받고(요단강 하면 세례가 떠오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죠. 세례 받는다고 ~’ 하면서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두 발 딛고 사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천국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를 받고 시작된 천국의 삶을 살면서, 예수 믿기로 결단한 나를 대적하는 원수를 몰아내고, 나의 일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일을 시작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늘 넘어지기 쉽습니다.

 

오히려 내 일상에 있는 하나님의 원수와 손잡는 일이 더 쉬워 보입니다. 그러면 그들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냥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이 시키는 대로 살면 적어도 전쟁은 피하면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고 이 세상을 보니 이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의롭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야 할 죽음의 일들뿐인데 어떻게 그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종교개혁자들의 마음도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침잠해 들어가다 보니 그 당시 교회가 얼마나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면죄부였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돈을 주고 ‘면죄부’만 사면, 자신의 죄는 물론이고, 죽은 조상, 곧 부모님, 조부모 그리고 그 윗대의 조상 누구의 죄도 면제되어 하나님의 징벌과 심판을 면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많은 평신도들은면죄부만 사면, 회개할 필요도, 선행할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요즘 시대로 하면 자판기에 돈을 넣으면 음식을 만드는 고생할 필요도 없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돈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1517 10 31일 마르틴 루터는 ‘95개조 논제1항에서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회개하라 …’( 4:17)고 선포하셨을 때, 그 말씀은 신자들의 전 생애가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참회, 회개가 되어야 한다고 게시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돈으로 값싸게 팔려 나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루터의 눈에는 면죄부가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죽음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과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즘 개신교회도 면죄부만 팔지 않을 뿐이지 중세의 교회가 저지는 만행을 똑같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회개의 선포가 없는 설교를 통하여 오로지번영’, ‘일등’, ‘제일’, ‘축복’, ‘평안’, ‘큰 꿈등의 수식어를 붙인 축복만을 선포함으로써 영생을 위한 십자가의 복음을 값싸고 천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에 합당한 회개 없이 그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일이 만사형통되는 듯이 예수의 이름을 면죄부로 팔아먹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할 거라는 값싼 복음에 속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모르핀을 맞듯이 우리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불의,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불의와 맞서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깊은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가 없이는 참된 영적 평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안하다pax’, ‘평안하다pax’고 외치면 우리의 삶에 평안이 찾아옵니까?

 

삭개오처럼 뼈를 깎는 회개의 삶 없이( 19:8), 심판 받아야 마땅한 자신의 모든 죄를 면죄부 하나로 값싸게 용서받고자 한다면 우리는 종교개혁 이전에 면죄부를 사서 값싸게 구원 받으려고 했던 그들과 다를 바 없는 파렴치한에 불과합니다.

 

십자가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믿음은 평안이 아니라 오히려 싸움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믿음으로 싸워 죄로 물들어 있던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몰아냈듯이, 우리가 십자가를 붙들고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과 내 안에 있는 죄(죽음의 세력)와 싸워 그러한 것들을 이 세상과 내 안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7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부르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의 구원을 자판기에서 뽑아내듯이 값싸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지, 돈을 주고 값싸게 살 수 있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십자가 목걸이 걸고 다닌다고, 십일조 생활하고 주일성수 한다고 그것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죄값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치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상의 신앙생활이 값싼 면죄부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우리 일상의 신앙생활이 이 세상과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죄(죽음의 세력)와 맞서 싸우는 믿음의 전투가 되게 하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깊은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용서 없이는 참된 영적 평안이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우리의 삶에서 개혁해야 하는지 깊은 감동이 오시는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죄로 물든 가나안의 일곱 족속이 어서 욥쇼~’라며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나아갈 때 죄로 물든 우리의 삶이 어서 옵쇼~’라며 우리를 반겨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입성한 순간 그들의 삶은 전쟁에 휩싸였듯이, 그리스도인은 예수 믿기로 결단한 순간 영적인 전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건 필연입니다. 구원은 자판기에서 돈을 넣고 물건 빼듯이 그렇게 값싸게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시장에 가서 잘 차려놓은 반찬을 사다가 먹는 것과 같이 쉽게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히려 농부가 되어 농사짓는 것과 같습니다. 농부가 열매를 맺기까지 얼마나 수고를 아끼지 않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농부의 수고가 열매를 보장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수고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기 바라는 농부가 수고하는 것처럼, 구원을 받기 바라는 신앙인이 그에 합당한 수고(회개)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꼭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면죄부처럼 여긴 것은 아닙니까? 수고 없이 열매만 바란 것은 아닙니까? 회개 없이 구원만 바란 것은 아닙니까?

 

구원 받기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른 땅을 밟고 요단강을 건넌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소망에 대한 징표였듯이, 십자가는 우리가 우리의 일상에서 영적인 전쟁을 치를 때 힘겹고 어렵지만 반드시 이기게 될 거라는 징표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맙시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0. 25. 23:27

2011 10 2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신명기 34:1-12

제목: 무엇이 죽어야 하는가?

 

죽음의 사진 3 , 아기의 죽음, 로마시대 사람들의 죽음, 가다피의 죽음

 

지금 보여드린 죽음의 사진 3장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도 모세의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10절이 전하고 있듯이,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절대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 이후에 등장한 그 어떤 선지자도 모세의 명성에는 필적하지 못했습니다. 이적을 많이 베풀었기로 유명한 엘리야 선지자도 모세와 같은 반열에 올라서지 못했습니다. 큰 학자요 선지자였던 이사야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세 이후에 모세와 필적할만한 명성을 가진 사람은 다윗 왕 정도입니다. 그것도 그가 왕으로서 그러한 명성을 가진 것이지 선지자로서 그런 명성을 지녔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모세처럼 다윗이 하나님을 대면한 것도 아닙니다.

 

모세만큼 인생을 파란만장하게 산 사람도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고비를 넘겼고 죽을 때까지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이스라엘의 둘 도 없는 영도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모세가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고생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계기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께 쓰임 받다 보면 고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받는 고생 때문에 우리가 영웅심리에 사로잡힐 수는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받은 고생이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모세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모세의 궁극적인 사명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면서 모세는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고,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세의 수고와 고생이 하나님 앞에서 가 되지 못했습니다. 만약 모세의 수고와 고생이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었다면, 모세는 그것을 빌미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요구했을 겁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수고했는데 그것을 봐서라도 나를 가나안 땅에 드리셔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받아 주지 않으셨을 겁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였던 모세가 사실 그렇게 공치사 할 생각도 안 했을 겁니다. 모세의 인생의 목적은 가나안 땅 입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목적인 사람은 하나님과 대면한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면하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과 대면한 사람들은 절대로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예수님의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을 따라 변화산에 올랐을 때 거기에서 내려오지 않으려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면서 그곳에 눌러 앉아 있기를 청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영적인 체험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느보 산에 있는 비스가 봉우리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나안 땅을 보여주십니다. 눈으로만 볼 수 있을 뿐, 그곳에 들이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었을 때(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소천이라고 합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은 것이죠. 하나님의 사람은 죽을 때도 그냥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습니다.) “나이가 백이십 세였으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고합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해서 모세가 건강했다는 뜻이고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충분했다는 뜻입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기력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자동차를 빗대어서 설명하면, 폐차시켜야 할 정도로 노쇠하고 망가져서 폐차시긴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쌩쌩한 차, 아직도 10년은 더 탈 수 있는 차를 그냥 폐차시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질문이 한 가지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는가?’입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모세보다 여호수아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동안 모진 훈련을 받은 여호수아를 배려해서도 아닙니다. 모세가 미워서도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모세가 므리바 물 사건 때 자기의 의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드러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입성하지 못했다고 알고 있지만, 실은 그것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정말 그 이유 때문이라면 오히려 하나님이 옹졸하게 보일 뿐입니다. 겨우 그 이유 때문에 그토록 사랑하는 당신의 종, 그리고 그렇게 수고한 종을 내치신다는 것이 아무리 하나님의 주권을 운운한다고 해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일은 온전히 새로운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에 담아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했던 겁니다. 일종의 패러다임 쉬프트입니다. 이전 것이 죽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전 것의 대명사가 바로 모세입니다. 그 모세가 죽지 않고서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없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를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전 것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온전히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전 것인 모세를 데려가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 모세를 온전히 보내게 하기 위해서 30일 동안 애곡하게 하십니다. 30일은 단순히 모세의 죽음을 슬퍼하는 기간이 아니라, 모세, 즉 이전 것을 떠나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다음 단계로 온전히 접어들기 위해서는 이전의 것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죽여야 합니다. 일례로, 20대가 되었는데 아직도 10대처럼 옷을 입고 다니고 행동하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어른이 되었다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 한 남자와 또는 한 여자와 가정을 꾸렸다면 이제 부모의 그늘에 벗어나야 합니다. 아직도 부모 밑에서 응석부리는 어린아이처럼 군다면, 온전한 가정을 꾸밀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런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겪게 되는 소소한 것들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존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시간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기로 정하셨습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님이시고 하나님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인하여 여러분은 구원 받았습니까?

 

예수 믿기로 정했다면, 우리의 삶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우리들에게는 이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삶의 방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이미 하늘 나라에 가 있는 것처럼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섰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 때 가졌던 것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아무리 유용하다고 할지라도 하늘 나라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버려야만 합니다. 필요 없는 것들이니까요.

 

제가 이 시간 그러한 것들이 무엇인지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거나, 알아 가는 중입니다.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며 솔직해집시다. 다만 알고 있으면서도 알아 가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거나, 아직까지 이전 것을 버리기 아까워서 그냥 내 삶 안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죽음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겠습니까? 모세를 죽이고 살리는 건 내 마음대로 하는 거야, 하는 당신의 주권을 가르쳐 주고 싶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는 철저하게 믿고 따라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납득되지 않게 비상식적으로 당신의 주권을 남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모세의 죽음이 헛되지 않는 것은 바로 그의 죽음을 통해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으로 보게끔 온 정성을 다해 가르시고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저 십자가에서 봅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도래한 새로운 시대를 보아야 합니다. 구원의 시대, 은혜의 시대, 새창조의 시대, 새로운 피조물의 시대, 종말의 시대를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그것을 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시대에 필요하지 않는 것들 을 나의 삶에서 지워버릴 것입니다. 그것들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삶 속에서 무엇이 죽어야, 다음 단계로 접어들 수 있을지 우리는 날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삶 속에서 무엇이 죽어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떠나 보내기 위해 애곡하십시오. 그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온전히 떠나 보내고 새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를 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십시오. 성령께서 도우실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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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1. 10. 20. 08:16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 사랑은 상식만큼 피어난다

 

어린 시절 비 올 적마다 엄마가 만들어 주신 도너츠.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다. 기름에 튀긴 거라 끔찍하고 그런 걸 정신 없이 먹었다는 것이 끔찍하다. 그런데 그 시절엔 그것이 상식이었다. 기름에 튀긴다는 사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했을 뿐이고 그런 사실에 풍요롭다고 느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나에게 맛있는 간식을 주신 것이 아니라 독을 주신 것이나 다름 없다. 지금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트랜스 지방이 엄청 들어간 기름에 튀긴 도너츠를 간식으로 주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엄마의 사랑에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엄마의 상식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고, 그것이 엄마가 자식들에게 베푼 최고의 사랑이었다. 사랑의 행위는 늘 바르고 정직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사랑은 상식에서 벗어나 있고 상식을 비껴간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아는 만큼, 자신의 상식 선에서만 사랑을 베풀 수 있다.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은 이미 인간의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상식만큼 피어난다. 상식만큼만 사랑을 이해하고 받으면 된다. 그래서 난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면 엄마의 그 끔찍한도너츠가 그립고 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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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우리 나라 대한민국이 세계 축구사에 명함을 내밀기 시작한 때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입니다. 그 이후 한국은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대기록을 세우며 지금 남아공에서 열리고 있는 월드컵에 출전했습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우리나라 선수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가 몇 없었습니다. 차범근 선수가 가장 유명했고, 지금 현재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는 허정무 선수 정도가 다였습니다. 이때만해도 우리 나라 축구 역사상 최강의 팀이라고 불리며 월드컵에 출선했었습니다.

 

그러나, 월드컵의 벽은 너무도 높았었죠. 예선에서 모두 패하며 예선탈락하고 맙니다. 차범근 선수 같은 특출한 세계적인 선수가 있었지만, 그 선수 한 명이 모든 것을 이루어 낼 수는 없었습니다. 축구는 협동경기이기 때문입니다. 누구 하나만 잘해서 되는 스포츠가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골고루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부터 한국 축구팀의 전체적인 실력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홈그라운드의 이점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수준이 올라간 덕분에 한국은 4강 신화를 일구어낼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2002 월드컵 때 한국 선주 중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특출한 선수는 없었지만 모든 선수가 골고루 기량을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성적이었습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한국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누비는 장면을 보면 그동안 얼마나 한국 축구가 발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선수도 다수 보유하고 있고, 전체적인 기량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16강 이상)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죠. 단순한 몽상이 아니라, 현실에 바탕을 둔 짜릿한 소망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신앙)생활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신앙)생활은 누구 하나의 특출한 믿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구성원들의 평균적인 영성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사 시대를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사와 같은 놀라운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이 한 명 있다고 해서 그 공동체가 번성하지 않습니다.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가 없어도, 모든 구성원들의 마음이 한 마음을 이루어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다면 그 공동체는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협동정신을 키워야 합니다. 나 혼자 믿고, 나 혼자 은혜 받고, 나 혼자 하늘의 복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버려야 합니다. 교회(신앙)생활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 몸이 되어서 하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영성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공동체에 속한 모든 분들이 일정 수준의 영성을 지니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거름이 되어 주고 힘이 돼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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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10. 10. 08:34

노마십가(駑馬十駕): 둔한 말이 열흘 동안 수레를 끌고 다닌다라는 뜻 / 이는 곧 재주 없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사람에 미칠 수 있음을 비유함

 

순자의 수신편에는,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고 하지만, 둔한 말일지라도 열흘 동안 달려 간다면 이를 따를 수 있다(夫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則亦及之矣)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반 걸음이라도 쉬지 않으면 절룩거리며 가는 자라도 천리를 갈 수 있고, 흙을 쌓는데도 멈추지 않고 쌓아나가면 언덕이나 산을 이룰 것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노마(駑馬)란 걸음이 느린 말을 가리키며, 재능이 없고 무능한 사람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말이 수레를 끌고 다니는 하루 동안의 노정(路程)을 일가(一駕)라 하니, 십가(十駕)란 곧 열흘간의 노정을 말합니다. 이는 곧 재주 없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사람에 미칠 수 있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 순자(荀子) 수신편(修身篇) –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재주 없는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됩니다. 어느 정도까지 따라갈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이상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재능을 지닌 사람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더디게 성장하는 나를 기다려주지도 않습니다. 하루 만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를 노마가 열흘 동안 달려서 따라간다 한들, 그것이 노마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뱁새가 황새 좇아가다가는 가랑이만 찢어지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자꾸 그런 것을 요구합니다
. 앞서 가는 사람을 따라가야 거기에 무슨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것에 휘말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각자의 교유한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남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자기 자신의 고유한 성품과 속도를 찾고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 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우쭐대지 말아야 합니다. 노마는 하루에 백리 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얼마나 성실하게 가느냐이지, 나에게 주어진 길이 아닌데 남 따라서 그 길을 달려가느라 괜한 고생하는 건 미련한 짓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자신의 속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빨리 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속도를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내가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빨리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별로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빨리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심은 방향이 올바를 때 효과를 내는 것이지, 방향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 열심 때문에 오히려 화를 당하게 됩니다. 올바른 방향을 향해 알맞은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주신 은혜대로만 해 보십시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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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히브리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5:12). 예수를 믿은 지 꽤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 아이의 초보 신앙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히브리서 공동체(교회)를 향한 질타입니다.

 

초보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5:13), 아직도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여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는 존재의 차원이기도 하지만, 기능의 차원이기도 합니다. 존재 자체가 아직도 어린 아이의 인격 수준에 머문 사람은 몸이 커도 여전히 다른 사람이 자신을 뒤치다꺼리 하게 만듭니다. 기능의 차원에서도 선한 일을 하지 못합니다. 뭔가 창조적인 일, 남에게 힘이 되어 주고 아름다움을 생산해 내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초보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은 하나님께 받은 약속, 기업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받았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했을 때 그 땅은 그들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기업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은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과 치열한 전쟁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들의 구원(약속, 기업)을 이룬 것이죠. 신앙 생활에서 믿음의 성장이 꼭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성장이 없으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받은 기업(구원)을 지켜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오해를 합니다. ‘한 번 믿고 나면 구원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건 정말 큰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계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절대 구원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겠지만, 배교와 같은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경계 밖으로 애써 떨어져 나간 사람에게는 구원이 머물러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은총을 입었다가 시간이 지나 대놓고 그 은총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 즉 배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6:6)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곳곳에서 믿는 이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하나님의 도(말씀)를 배워야 하며, 구원을 기업으로 받은 자답게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하지 않으면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다는 말씀에 긴장하고,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교회가 됩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9. 26. 03:34

2011 9 2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출애굽기 17:1-7

제목: 하나님은 생명을 주신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앞 부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의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시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하루에 모든 가족이 먹을 양 만큼만 거두라고 명령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길 바라신 것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오늘 만나가 내리고 나면 언제 만나가 또 다시 내릴지, 솔직히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 먹을 만큼만 만나를 거두어 들이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가운데 하루 이상 먹을 치의 만나를 거두어 저장해 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저장해 둔 만나는 곧 다 썩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먹지 못하게 됐습니다. 이는 단순히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더 많이 갖고 싶어합니다. 욕심도 인간이 살아가면서 너무 부리면 그렇게 좋은 것은 못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심을 시험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검소하게 살기를 바라신 것이 아닙니다. 이는 신앙에 대한 시험이었다는 것이죠. 광야에서 하루 하루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험이고 도전입니다. 인간 마음이야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일을 준비해 두는 것이 뭐가 그리 잘못된 것이겠습니까?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 진짜로 자기들 가운데 있는지 확신이 안 섰다는 겁니다. 그것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셨다고 하는 만나가 눈 앞에 있긴 하지만, 그것을 내려 주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그들 눈에는 만나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나에만 집착을 합니다. 만나를 거두어 들이는데만 신경을 골두한 나머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까마득한 이야기로 듣고,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만나를 필요 이상으로 모읍니다. 이미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만나 즉 먹을 것이 이들에게는 생명을 주는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은 계속해서 나타났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 눈에는 우리 가운데 계신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였습니다. 이들은 진실로 헷갈렸던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계신 걸까?’

 

이스라엘 백성은 신광야를 떠나, 르비딤이라는 곳에 도착을 해서 캠프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곳에 물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나아와 극심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불평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15장에서도 마라라고 하는 곳에서 물이 써서 먹지 못한 것을 두고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혜를 주셔서 해결했습니다만, 이번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물을 두고 또 불평을 합니다. 이번에는 매우 극렬하게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이 불평의 이면에는 이전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모세의 반응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물을 두고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할 때 모세는 이렇게 응답을 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바로 이겁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시험입니까?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의 시험이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셨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정말로 당신을 믿는지 안 믿는지를 시험하셨는데,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말로 계신지 안 계신지를 시험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불경스러운 광경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는가?” 복음서에서도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 당하실 때 마귀를 향해 이런 외침을 던지지 않으셨습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어지지도 않는 하나님을 무작정, 막무가내로 믿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나약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시험은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라는 사람이 어느 날 나타나서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애굽의 바로 왕과 맞서 싸워 이겨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이들은 어쨌든 바로 왕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쁨을 가지고 희망 가운데 모세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것이 막막해져 버렸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삶에 혼란이 온 것이죠. 이들이 바로 왕을 피해서 도착한 곳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없는 광야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누구든지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믿음과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커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에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아무리 커도 삼시 세끼 밥 먹고 살아야 하고, 믿음이 아무리 커도 가족들의 생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16 3절과 오늘 우리가 읽은 17 3절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선 16 3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리고 17 3절입니다.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생각해 보십시오. 적어도 이들이 애굽에 있었을 때에는 이렇게 광야에서 불안에 떨면서 굶주리는 것처럼 그렇게 굶주리지는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인간 취급 받지 못하고 개처럼 살았어도, 적어도 이들은 배를 채울 수 있었고 목마를 때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시겠다고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무엇이 구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이들은 지금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에 처해진 것 같았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지금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처한 현실입니까? 예수를 믿기로 하고 교회 다니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다가오는 현실 아닙니까? 우리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 믿으면 모든 일이 형통하고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러면서 누군가의 전도로 교회로 따라 나서긴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셨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구원인지 모르겠다는 울림이 이 마음 속에서 들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믿음이란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의심일 때가 많습니다. 도대체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길일까? 내가 올바른 선택을 내린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선 이 길 위에서 우리는 수 없이 이런 의심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두렵고 떨렸습니다. 이렇게 따라 나서긴 했는데, 바로의 손에서 구원을 베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분이 또 다른 바로와 같은 신이 아닐까? 애굽의 바로 왕도 자기 자신이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꼼짝 없이 바로 왕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덕에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배불리 먹고 목마르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바로의 소모품으로 소모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왕의 한 마리 짐승처럼, 개처럼 살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큰 맘 먹고 따라 나선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바로 왕과 같지 않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명하고 계셨습니다. 애굽에서 행하셨던 10가지 재앙을 봐도 그렇고, 홍해를 가른 사건도 그렇고, 물을 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신 것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 가지고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기에는 뭔가가 부족했던 것이죠.

 

이러한 전체적인 상황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또 한 번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믿음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명하여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호렙 산에 있는 반석 위에 서서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릴 때 썼던 그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대로 합니다. 그리고 반석에서는 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물을 마시고 살아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는 것 같았던 애굽에서는 결국 기다리고 있는 것이 바로 왕으로 인한 죽음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것 같았던 광야에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십자가에서 그것을 결정적으로 확인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 같았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참된 역사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산 것 같으나 죽은 자로 살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죽은 것 같으나 산 자로 살고 싶으십니까?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의심이 들 때마다 저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는 의심이 아니라, 확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죽은 것 같은 상황, 마른 뼈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가 의지하고 믿을 분은 한 분 하나님 밖에는 안 계십니다. 끝까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붙들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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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9. 23. 06:56

양포지구(楊布之狗): 양포라는 사람의 개 / 겉이 달라졌다고 해서 속까지 달라진 걸로 알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양주(
楊朱)의 아우 양포(楊布)가 아침에 나갈 때 흰옷을 입고 나갔었는데, 돌아올 때는 비가 오기 때문에 흰옷을 검정 옷으로 갈아입고 들어왔습니다그러자 집에 기르고 있는 개가 낯선 사람으로 알고 마구 짖어댔습니다. 양포가 화가 나서 지니고 있던 지팡이로 개를 때리려 하자 형 양주가 그것을 보고 양포를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개를 탓하지 마라. 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일 너의 개가 조금 전에 희게 하고 나갔다가 까맣게 해 가지고 들어오면 너는 이상하게 생각지 않겠느냐?" –한비자(韓非子)

 

이 고사성어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다니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적 사건이 세상에서 초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기적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사건은 그야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지만, 예수님의 이적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징표였습니다.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이적을 베푸시면서 놀라운 능력과 힘 보여주셨던 예수님은 이상하게도 아무런 힘도 없이 초라하게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상황을 보고 매우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급기야 예수님을 조롱하기까지 했습니다. “남은 구원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더냐!” “네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십자가에서 당장 내려와 봐라!”

 

십자가 사건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옷은 흰 옷에서 검은 옷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전파하는 흰옷이 벗겨지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검은 옷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절망과 실망에 사로잡혀 패닉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겉 모양이 달라졌다고 속 모양까지 달라진 것으로 착각한 것이죠.

 

우리 인간은 겉 모양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죄성입니다. 그래서 2천 년 전 사람들이 골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멈춘 것처럼 보인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절망 속에서 좌절해야 할까요?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 끝이 형편 없어 보이는 십자가일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을 믿고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할까요? 무엇이 생명의 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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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