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에 대한 오해부터 짚어야겠다. 우선 대림절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가 아니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기억하고 기다리는 절기다. 그렇다면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억하는 절기이니 대림절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가 아닌가하고 의문이 들 수 있다. 이것 또한 성탄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의문일 뿐이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억하는 절기가 아니다. ‘초림이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으로 오신 것을 뜻한다. 그러면 여기서 이러한 질문을 해보자. 예수께서는 언제 이 땅에 오셨는가? 물론 단순하게 대답하면 성탄절이 그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예수께서는 정말 성탄절에 오셨는가? 이는 단순히 날짜를 따지고자 하는 질문이 아니다. ‘오신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예수께서는 2천 년 전 유대땅에 오셨다. 그러나 이 오셨다는 깨달음은 예수의 부활로 인해 생겨난 것이지 예수께서 여느 사람들처럼 이 땅에 태어난 그 사실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성탄절은 도대체 무엇인가? 성탄절은 단순히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전하기 위한 절기가 아니라, 이 땅에 오신, 다시 말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을 증거하기 위한 절기이다. 그러므로 성탄절과 짝을 이루는 절기는 대림절이 아니라 주현절이다. 성탄절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주현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통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 인간이시고 완전 신이시다 vere homo vere deus”라는 신학적 교리를 표명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예수께서 이 땅에 언제오셨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성탄절은 예수께서 이 땅에 언제 오셨는지를 보여주는 날이 아니다. 12 25일이 예수의 생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회의 교리를 모르는 데서 오는 무지에 불과하다. 부활의 빛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했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생일은 전혀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복음서보다 훨씬 먼저 씌어진 바울 서신에서는 예수의 부활만 증거될 뿐 예수의 육신적 출생에 대해서는 아무 말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다시 대림절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계속 해 보자. 대림절이 성탄절과 관계가 없다면, 그렇다면 대림절은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대림절은 오히려 창조절과 관련이 깊다. 창조절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는 절기인데 이는 아직 한국교회에 생소한 절기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생명 사건이다. 그러므로 창조절은 하나님의 생명 사건을 돌아보는 절기이다. 이 절기에는 지구의 생태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하는 절기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조금 들여다 보아야 하나님의 생명 사건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구원을 선포하셨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정의는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구원을 온전히 표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구원을 죄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려는 방식은 우리 한국 교회가 지니고 있는 한계이면서 아픔이고 뚫고 나가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구원을 죄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한국 교회가 미국의 근본주의 사상을 지닌 선교사들로부터 기독교를 전수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것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면 미국의 종교사, 특히 조나단 에드워드 이후의 미국 대부흥 운동을 살펴보면 된다. 이는 몰트만의 저서 <오시는 하나님>역사적 종말론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언급되는 문제이니, 그 책을 읽어보는 것도 도움될 거라 생각한다.

 

구원은 죄의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생명의 완성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즉 창조론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생명의 완성의 관점에서 구원을 설명하면 구원이란 생명의 완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구원은 바로 생명의 완성인 셈이다. 그것을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부활 사건이다. 그래서 부활은 생명의 완성 사건이라고 일컬어진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초림에서 일어난 구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생명 사건이, 이 생명을 완성시킨 구원 사건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구원이 은폐의 방식으로 이 땅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생명의 완성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생명의 완성이 비밀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 자들에게만 보이는 하나님의 신비라는 뜻이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명제에 길들여 진 세상은 아직 눈에 보이도록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구원(생명의 완성)이 손에 잡히질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속한 자에게는 구원이 묘연한 것이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는 구원이 확실해 진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설명하며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말한다. 은폐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구원은 우리에게 희미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 있는 방식에 대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1:1). 믿음이 은폐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구원을 보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초림이 은폐의 방식으로 구원을 이 땅 위에 선포한 것이라면, 예수의 재림은 은폐되어 있는 생명의 완성이 온전히 드러나는 때를 말한다. 우리가 지금은 알 수도 없고 예상할 수도 없는 궁극적 생명의 완성이 예수의 재림 때에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완성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시는 때이다. 대림절은 바로 이 절대생명이 오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절기이다.

 

절대생명이 오고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정말 궁금하지 않는가? 부활의 실체가 드러나는 때, 생명의 완성이 일어나는 때,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때, 그 날이 오고 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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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2. 15. 00:30

골로새서

4. ‘
이제의 시대에 속한 성도들 (1:21-23)

          
21
절은 짧은 구절이지만 여기에는 우리의 과거가 다 들어 있다. 하지만 이 과거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새사람이 된 현재 상태에서 바라본 과거의 모습이다. 이게 아니고서는 우리의 과거에서 감사를 건져낼 수 없다. 우리의 과거는 어떠했는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던존재였다. 이는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와 같은 상황이다. 우리는 탕자처럼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난 탕자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 것처럼 우리의 행실도 바르지 못했다. 악한 행실로 인해 멀리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악한 행실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으로 나의 존재를 표현한다. 우리의 존재는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존재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고 이 원수된 마음 속에서는 악한 행실이 표출된다
. 인류의 역사를 보라. 얼마나 비열하고 처참한 일들이 많이 자행되었는가를! 지난 2차 세계 대전 중에 자행되었던 유태인 대학살 사건을 보더라도 우리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과 원수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아우슈비츠사건 이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나님은 멀리 있는, 우리의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존재로까지 여겨졌다. 하나님이 안 계셔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우리 인간의 마음은 악한 행실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성도들의 이전 모습, 과거이다.

          
그러나 22절에서 그러나 이제라는 말로 완전히 변화된 새로운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시대를 일컫는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루신 화해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다 준 사건을 우리는 혁명이라고 부른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 것을 말해주는 사건이다. 천동설을 믿었던 고대인들에게 코페르니쿠스가 천명한 지동설은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혁명 정도가 아니다. 혁명은 원래 존재하고 있었던 진리를 새롭게 발견한 것에 불과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새로운 진리, 즉 새로운 창조이다. 패러다임은 또 다른 패러다임에 의해 파기될 수 있고 혁명은 다른 혁명에 의해 뒤집어 질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그 어떤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단 하나의 진리, 절대적인 진리, 새로운 창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룬 하나님과의 화해는 은혜의 사건이다
. 우리 인간의 어떠한 전제나 조건과는 상관 없이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사건이다.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사건이라고 해서 이 은혜를 받는 대상을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이 은혜는 은혜 받는 사람을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주체로 만든다. 은혜 받은 사람이 책임적으로 응답해야 하는 것은 거룩함, ‘흠 없음’, 그리고 책망할 것이 없는삶으로 나타난다. 이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제물을 설명할 때 쓰는 말인데, 하나님과 화해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시대인 이제에 속한 성도들은 은혜 받고 뒤돌아 입씻는 파렴치한이 아니라, 은혜에 책임적으로 행동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2. 12. 22:26

2011 12 1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요한복음 1:6-8, 19-28

제목: 내가 증거자 요한이다

 

우리는 세례 요한 John the Baptist’라는 명칭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에 대해서 매우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요한을 세례 주는 자로만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왜 세례를 주었습니까? 요한이 세례를 준 이유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임박한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무슨 정치적 상황이나 장소로 이해하기 쉽지만, 그것은 한 인물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인물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례 요한이라는 명칭보다는 증거자 요한 John the Witness’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져야 마땅합니다. 물로 세례를 주었던 증거자 요한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물 세례와 성령 세례는 다릅니다. 그러나 물 세례 없이 성령 세례가 임하지 않습니다. 물 세례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물 세례 없이 성령 세례가 없다는 뜻은 회개 없이 성령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머리에 물을 붓는(또는 몸을 물 속에 담갔다 올리는) 세례의식은 종교적 퍼포먼스가 아닙니다.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존재의 전향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머리에 백 번 물을 부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례의식이라는 종교적 퍼포먼스는 얼마든지 행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일어나는 그리스도를 향한 존재의 전향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교회에서 행해지는 세례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세례의식이 절기(부활절, 성탄절)마다 베풀어지긴 하지만, 존재의 전향은 세례의식을 베푸는 만큼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세례를 통해서 존재의 전향’, 즉 회개가 일어나면 그 때 성령세례가 베풀어집니다. 이것은 시간 상으로 또는 절차 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칭의와 성화가 시간 상으로, 절차 상으로 구분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편의상의 구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는 또 무엇입니까? 한국 교회는 성령세례에 대한 오해가 편만합니다. 이것도 부흥회 신앙에서 비롯된 것인데,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물 콧물 다 빼면서 토해낸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성령세례라고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거기다 한국인은 워낙 감정이 풍부한 민족이라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가 없으면 무엇인가 신적 체험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세례는 감정의 카타르시스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눈물 콧물 빼내며 겪는 감정의 카타르시스는 나훈아, 남진 오빠의 디너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성령세례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능력이 주어지는 겁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능력은 증거자 요한처럼 나는 아니다라는 자기부정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증언하러 온사람이라고 합니다. 무엇에 대한 증언이냐 하면, ‘에 대한 증언을 위해서 온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통하여 그 을 믿게 하게 하기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요한은 빛을 증언하러 온 사람이지, 그 빛이 아니라고 복음서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증거자 요한이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 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내서 예루살렘에서 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요한에게 와서 묻습니다. “네가 누구냐?” 이는 단순한 질문이 아닙니다. 정체를 밝히라는 질문입니다. 이들은 요한이 그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 또는 엘리야가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이들의 질문에 요한은 당당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엘리야가 아니다.”

 

이 대답이 쉬워 보이지만,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닙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을 일컬어 우리는 이라고 부릅니다. 연예인들을 다루는 기사에서 우리는 이러한 문구를 자주 접합니다. “자체 발광, 아무개 스타이처럼 인간은 스스로 빛나고 싶어합니다. ‘스타가 되고 싶어 합니다. “나는아니다가 아니라 나는이다가 되고 싶어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내서 예루살렘에서 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요한에게 지금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빛이오? 당신이 별(스타)이오? 당신이 그리스도요?”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질문에 우쭐해서 그렇다고 대답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빛으로, 스타로 살아가려 했을 겁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을 부추깁니다. 이렇게 하라고 꼬드깁니다. 우리보고 “‘이 되라 하고, 우리 보고 스타가 되라.”고 합니다. 이것은 태초부터 있어왔던 인간에 대한 유혹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것도 바로 아담과 하와에게 빛이 되라 하고 스타가 되라.”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게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3:5). 스스로 지혜 있는 자가 되어(스스로 빛이 되어), 하나님 없이도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라는 꼬드김이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이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삽니다. 그래서 그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그러한 유혹을 부추기는 시스템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타락했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제가 연예인이 되는 것은 나쁜 것이다. 그것은 타락한 일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을 하라고 부추기는 이 세상을 고발하는 중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내서 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꼬드기던 뱀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꼬드김과 시험에 굴하지 않고 증거자 요한은 당당하고 솔직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아니오!” 그리고 그는 자기 뒤에 올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일컬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존재의 전향이란
, 성령세례를 받는 일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나는아니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그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증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빛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빛날 수 있는 분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일이 회개(존재의 전향)이고 그것이 바로 성령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빛이신 그리스도에게로 향한 그리스도인은 분명 그 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천체에서 그것을 확인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도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합니다. 지구의 행성인 달도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까만 밤에 태양빛을 반사하는 달을 볼 수 있는 겁니다.

 

빛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눈이 시력을 갖는 이유는 빛 때문입니다. 빛이 없는 곳에서는 눈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불빛이라도 있으면 눈은 금방 그 빛에 적응해서 물체를 보게 만듭니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형광들을 껐을 때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경험을 해 보셨을 겁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나, 방 안에 있는 작은 불빛에 적응해서 다시 보이게 되는 경험을 해보셨을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밤낮으로 바라보며 그분의 빛을 이 세상에 반사시켜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태양처럼 밝게 빛나지는 않지만, 망망대해의 등대처럼 자그마한 불빛이 될 수는 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일수록 희미한 불빛은 더 빛나는 법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패배의식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뭘…’, ‘나처럼 신앙생활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어.’ 자기 자신의 초라한 신앙의 불빛을 보며 의기소침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작은 불빛이 이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을 밝혀 이 어두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눈을 보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빛나는 별이신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큰 빛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추시는 빛이십니다. 그분이 오시는 날에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얼굴과 얼굴을 대면해서 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힘을 내서 우리의 이 작은 빛을 비추는 일에 힘을 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된다는 것은 이 작은 빛을 세상에 비추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증거자 요한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증거자 요한만이 증거자 요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는 모두 증거자 요한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2. 10. 02:23

골로새서

3.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권자이시다 (1:15-20)

           15절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와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한다. 우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여기서 로고스 기독론이 나온다. 필로에 의하면 로고스를 처음 태어난 자로 불렀고, 이 로고스가 세상을 창조하는 데 중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세상은 로고스의 형상이다. 유대교의 지혜 문헌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세상을 창조할 때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플라톤적 사고와 구약성서적 사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로고스와 지혜로 불려질 수 있게 되었다. , 그리스도가 로고스요, 지혜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을 창조하는 데 중재역할을 했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리스도는 세상을 창조할 때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로 표현된다. 그리스도가 장자권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장자권을 갖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우월성이 강조된다. 그런데 이 표현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장자권, 즉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는 말은 곧 그리스도도 피조물이라는 의미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 때문에 교회 사에서 그 유명한 아리우스 논쟁이 발생한 것이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다.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갖고 계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약간 못한 존재로 표현한다. 이 논쟁으로 인해 탄생한 그리스도에 관한 단어가 호모 우시우스(동일본질론)’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는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고, 그리스도의 장자권은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이해하기 위한 단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조물에 대한 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문제가 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냐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이 처음부터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예수에게 적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고백이 탄생할 수 있었던 절대적인 이유는 초대 교회 공동체가 체험한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무덤에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 사건을 체험하고 나서 초대 교회 공동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 부활의 체험에서부터 거슬러 예수가 누구인지를 인식했다는 말이다. 부활체험이 없었다면, 예수에 대한 이러한 신앙고백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이란 기독교의 존재 근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면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예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거나 그의 삶 속에서 체험되어지지 않는다면 그의 신앙의 기반은 약할 수밖에 없다. 부활이란 종말의 사건을 이야기 하는 건데, 종말의 시간이 현재로 들어온 혁명적인 사건, 새창조의 사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종말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의 절대적인 차이점은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이라는 구체적 사건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부활이라는 구체적 사건을 통해서 만물의 주관자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1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피조물의 관계를 더욱 상세하게 설명한다. 왜 그리스도는 창조 세계에 대해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는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중요한 단어는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여기서 안에서라는 말은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첫째 장소적인 의미, 둘째 도구적인 의미, 셋째, 관계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문맥상 가장 어울리는 의미는 세 번째, 관계적인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교제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는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근거가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내적으로 이러한 교제를 이루시고, 그러한 교제가 일구어낸 것이 바로 창조이다. 이 창조는 경륜적 삼위일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구절에서 창조되었다단어는 두 번 등장하는데, 각각 단순과거형과 완료형으로 쓰였다. 여기서 좀 더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이 완료형으로 쓰인 창조되었다라는 단어이다. 언어에서 완료형이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지금까지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 과거에 한 번 있었던 창조의 사역이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의 완료형이 여기에 쓰여진 것이다. 이는 태초에 창조된 만물이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종말론적으로도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17절에서 이것에 대한 내용이 반복되고 요약되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창조 세계는 질서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모든 만물이, 이 우주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가! 골로새 교회가 이단 사상에 공격 당하고 있었던 부분이 이러한 것이었다. 창조 세계의 질서와 생명이 그리스도 외에 다른 영적인 존재들에 의해서도 유지된다는 이단 사상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퀴리오스(주님)이시라는 고백을 무색케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거짓이었다. 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영적존재들은 모두 피조물에 불과하다. 이는 그들 또한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숭배의 대상이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숭배의 대상이 아닌,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놓인 세력을 무서워해야 할, 그리고 경배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세상의 질서와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 같은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나를 숭배하지 않으면 멸망 당할 거라고! 그 중 대표적인 존재가 맘몬, 돈이다. 돈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자본주의 시스템, 신자유주의 사상이 주님 노릇을 하고 있다. 사실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은 그 힘에 질식하고 그 힘에 무서워하며 그가 만들어 내는 질서와 생명 안으로 들어가려고 안달들이다. 그 질서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낙오자여, 인생의 패배자요,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하는 바보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맘몬이 요구하는 풍요로움에 도취되어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쯤은 파리 목숨처럼 여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 분명하게 외쳐야 한다. 이 세상의 질서와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은 맘몬이 아니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러한 확신 속에 거하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충만해야 할 것이다. 어렴풋한 지식, 확신 없는 믿음 가운데 휘몰아치는 세상 세력과 어떻게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왜 오직 그리스도인가에 대한 깊은 묵상과 이해, 그리고 믿음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세상에 저항하지 못하고, 세상에 파묻혀 세상과 함께 멸망 당하고 말 것이다.

           18절 말씀에 의하면,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원래부터 진리는 그리스도가 온 우주의 머리라는 것을 말해 준다. 우주는 몸이고, 그리스도는 머리다. 몸은 머리의 통제를 받는다. 우주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놓여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땅에서 체험되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반기를 들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또는 다른 존재에 기대어 존재를 꾸려 나가려 한다. 이 상태가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이다. 죄란 근본적으로 어떠한 못된 행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향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킨다. 아름다우신 그리스도의 주권에서 벗어나 있으니, 그런 존재가 하는 모든 일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추악한 일들 밖에 더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어디에서 경험할 수 있을까? 바로 교회이다. 교회에서만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체험할 수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겠다고 고백한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래서 이리 떼 속으로 보내진 양들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에 저항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주권을 외쳐야 할 사명을 가진 선교 공동체이다.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주권만이 살아 숨쉬어야 한다.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 앞에서 머리를 들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는 과연 어떠한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깊은 묵상과 충실한 신앙고백만 있어도 교회는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 될 것이다. 아름다우신 그리스도의 주권이 살아 쉼 쉬는데, 그 숨결로 행해지는 모든 일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는가!

           19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다고 한다. 여기서 모든 충만은 하나님의 신적 능력으로 보는 것이 가장 옳은 해석일 것이다. 하나님의 신적 능력은 창조의 능력이요, 구원의 능력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것을 구원하시는 은혜의 능력이 모든 충만이다. 그러한 능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하나님이요, 구원의 하나님이요, 새창조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할 때, 예수의 인성만을 이야기할 수 없다. 역사에서 살다간,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의 제약과 고통을 받으신 예수님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적 능력으로 인해 하나님의 신성에 맞닿아 있는 분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역사의 이단 논쟁은 모두 이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고백하지 않은 것은 모두 이단으로 분류되었다. 그리스도의 인성만 강조해서도 안 되고, 그리스도의 신성만 강조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는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이 긴장관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엉뚱한 데로 흘러가지 않을 수 없다.

           20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신적 능력은 화평과 화목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곧 화평과 화목의 피라는 말이다. 이는 구약의 제사법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통해서 죄 사함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만물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룰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온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존재하게 된 것인데, 존재의 근거인 그리스도를 떠나 어떻게 존재를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신앙의 편협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부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외칠 때 거기에는 폭력성이 담길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갑자기 심판의 망치로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폭력을, 이러한 정죄를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지, 배타적이고 특수한 개념이 아니다. 신앙에 있어서,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주 만물에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총이지, 개인의 믿음이 아니다. 내가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베풀어지고, 내가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태양빛이 싫다고 한들 태양빛이 가려지는가? 내가 숨쉬기 싫다고 한들 공기가 사라지는가? 이렇듯 하나님의 은총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내가 거부할 수도 없고, 내가 폐기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은총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 상태를 기뻐하시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우주 만물과 이루신 화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화평을 기뻐하시는 거다. 우리 안에 화해가 있는가? 우리 안에 화평이 있는가? 그것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다. 그러니 그건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선물을 누리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화평 가운데 살아갈 것이요, 그 선물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불안 가운데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명확해지지 않는가? 화평 가운데 거하는 삶,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화해의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다.


Posted by 장준식
고사성어와 신앙2011. 12. 6. 06:52

호시탐탐(虎視眈眈):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본다는 말 / 어떤 일에 대비하여 방심하지 않고 기회를 노린다는 뜻


주역
64괘중에 ''라는 괘가 있는데 아래턱을 가리키는 말로 기른다는 뜻이 있습니다. 괘형은 두 양이 위아래로 있고 마음이 가운데 끼어 있는 형상으로 마치 사람이 입을 벌린 모습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괘덕으로 보더라도 이것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사람의 몸이 길러진다는 뜻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괘의 효사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거꾸로 길러지는 것도 길하다. 호시탐탐하여 그 욕심을 좇아가면 허물이 없다.” 이괘는 인간 세상의 계급에 비유한다면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기르는 위치인 대신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혼자의 힘으로는 천자를 보좌하고 백성들을 기르는 일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몸조차도 추스르기 어렵습니다. 천자와 백성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사람이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것처럼 하여 위엄을 갖추고 행동한다면 아랫사람들 또한 그를 받들게 될 것입니다. -주역(
周易) 경문(經文)-

 

긴장을 늦출 때 사고가 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사람이 긴장을 늦추는 일 없이 평생 살 수 있습니까? 스트레스 받아서 일찍 죽게 될 겁니다. ‘호시탐탐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긴장을 늦추지 말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고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귀 기울이는 것, 즉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행동 거지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서 위엄과 존귀 가운데 살아가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사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안에 살고 계신 주님의 음성에 눈을 부릅뜨고 귀기울이고, 세상을 향해서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거나 실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 않기 위해서 눈을 부릅떠야 합니다. 세상이 준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귀한 이름입니다. 귀한 이름은 귀한 줄 알고 귀하게 보존해야 귀해지는 겁니다. 눈을 부릅뜨고 삽시다. 눈을 부릅뜨는 건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뜻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 긴장을 늦추지 말고, 세상에 대하여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세상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될 것입니다. ‘호시탐탐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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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2. 5. 04:24

2011 12 4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40:1-11, 마가복음 1:1-8

제목: 주의 길을 준비하라

 

어른과 어린아이의 차이점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어른은 듣고 있는 것 같으나 듣지 않고, 어린아이는 듣지 않는 것 같으나 듣고 있습니다. 또한 어른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거나 또는 듣고 싶은 대로 듣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그대로 듣습니다. 그래서 어른 앞에서는 말을 가려서 해야 하고, 어린아이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설교를 듣고 나서 돌아서면 잊어버린다고 호소합니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설교를 듣는 것 같으나 듣지 않았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듣고 싶은 것만 듣거나 듣고 싶은 대로 들었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 그럴까요? 설교말씀을 나의 생명()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설교말씀은 나의 삶과 별로 상관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나의 생명()과는 별로 상관 없는 것이기 때문에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설교시간에 설교를 듣고 있는 것 같으나 실은 듣지 않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시죠. 지금 나는 부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음식을 만들고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런데 로비에서 어느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서 소근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음식 만드는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온통 신경이 그쪽으로 가게 됩니다. 듣지 않는 척 음식을 만들고 있긴 하나, 실상은 자신에 대해서 소근거리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죠. 자기 자신과 상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신경을 쓰는 겁니다.

 

믿음, 영성, 이런 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나의 생명()직접적으로 연관시키고 있는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느 사람을 가리켜 믿음이 좋다”, 또는 영성이 있다라고 할 때 이것은 그 사람이 신앙생활에 극성을 떤다의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극성을 떨면서 신앙생활을 해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생명()과 연관시키지 않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런 경우는 신앙생활의 초점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극성을 부리는 경우입니다. 비유하자면, 엄마가 아이의 교육에 대해서 극성을 부리는 이유가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엄마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그러는 경우와 같은 것이죠. 엄마는 자신이 못 배운 한을 아이에게 푸는 것이고, 아이의 성공을 통해서 대리만족 하려는 것이지요. 대개 이런 마음으로 아이의 교육에 대해서 극성을 부리는 엄마는 자기가 속상해 죽거나 아이를 죽음에 내몰거나 합니다.

 

신앙생활은 자기 만족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극기훈련도 아니고 극성 떨 일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의 일치를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생명과의 일치가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이시니까, 곧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생명()과 일치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저는 목회를 시작한 이래로 강단에서 계속해서 이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 교회력입니다. 그래서 저는 컬럼버스교회를 개척한 이래로 말씀선포와 교회 운영을 교회력에 맞추어 했습니다. 올해로 새로운 대림절을 맞아 6번째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교회력이라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섰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분위기는 교회력을 무시하는 겁니다. 교회력이라고 하면 대개 성탄절,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정도를 생각합니다. 그 절기들만 지키고 맙니다. 그리고 그 절기에는 명목상 감사헌금을 더 풍성이 내야 하는 것만 기억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력(절기)는 헌금내는 날로만 기억됩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으로 보여드리고 실천하려고 우리 교회는 일명 절기 헌금이라는 것을 따로 걷지 않습니다. 절기마다 헌금봉투를 따로 나누어드리지 않습니다.

 

한국교회가 교회력을 무시하는 다른 이유는 교회의 초점이 온통 부흥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부흥회신앙을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 당장 회심하고, 예수 믿고, 뜨겁게 성령체험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 나와서 지금 당장 눈물 흘리고 감격하는 것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교회력이 무의미합니다. 신앙의 형태가 뜨거운 체험중심 신앙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은 별로 무의미합니다. 신혼부부가 결혼해서 뜨거운 사랑만으로 결혼생활을 지속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이 뜨거운 사랑의 체험 이상이듯이, 그리고 결혼은 결국 환상이 아니라 일상이듯이, 신앙생활도 뜨거운 체험이상이요, 환상이 아니라 일상임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 교회력은 대림절기부터 시작합니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첫 번째 오심)과 재림(두 번째 오심)을 주제로 하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은 단순히 성탄절을 준비하는 절기가 아닙니다. 성탄절에 예수님께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그 사건을 준비하기 위해서 있는 절기가 아닙니다. 성탄절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절기가 아닙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사람됨)을 증거하는 절기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대림절로 시작되고 성탄절에서 정점에 이르는 이 시대의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휩쓸려 정작 중요한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약점을 안고 살아갑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들뜬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어떻게 잘 이용해서 돈을 얼마나 더 벌 수 있을까에만 관심을 갖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는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고 영성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돈이 나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그리고 그분의 인성은 나와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무관심, 믿음 없음, 영성 없음에 대해서 경고하고 경각심을 불어 넣어 줍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영적 각성입니다. 이들의 생명은 지금 위태롭습니다. 생명은 온데 간데 없고, 죽음이 편만합니다. 삶의 터전을 잃고 남의 나라로 끌려와서 사는데 거기에 무슨 생명의 기운이 있었겠습니까? 그저 죽지 못해 사는 것뿐이죠. 이들이 포로귀환에 대한 소망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회복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계속해서 그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70년 동안이나 이들은 포로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사람의 심리는 기대했던 것이 금방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기소침해지고 실망하게 됩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그렇게 의기소침하고 실망 가운데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장면입니다. 이들은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잃기 전, 수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우상숭배에 대한 지적과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라고 하는 메시지를 들었음에도, 이들은 끝내 하나님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생각하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들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이방신이었던 가나안의 바알, 아세라 같은 우상들이 자신들의 생명()과 더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고 포로신세가 되어서 고통 가운데 살다보니,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죠. 그 옛날 그토록 선지자들이 외쳤던 그 외침이 이제서야 귀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들은 생각했습니다. 왜 이렇게 우리가 치욕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바로 이들이 생명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렸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당연한 결론 같지만,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 아닙니다. 그 깨달음이 이사야서 40 2절 말씀에 이렇게 드러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이것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회개이기도 하지만, 소망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신들이 이렇게 바벨론 포로로 잡혀와 고통 가운데 살게 된 이유는 하나님을 저버린 것 때문이며 그래서 이들은 여호와의 손에 벌을 배나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벌을 배나 받았다는 선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 벌을 다 받았다는 희망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이제 노역의 때가 끝나고 죄악이 사함 받았으니앞으로 이들에게 일어날 일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복귀입니다.

 

말씀을 잘 보십시오. 이 일을 누가 이루십니까?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죽음과 같은 포로생활에서 생명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의 복귀는 다른 어느 누구가 아닌, 그들이 자신들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다고 생각해서 등한히 여겼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나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선포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리라.”

 

그 어느 것보다도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그야 말로 복음입니다. 생명 되신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생명을 다시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40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그 하나님이 이제는 눈에 들어옵니다. 이전에는 나의 삶(생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 하나님이 이제는 내 생명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눈에 들어오니, 그 하나님이 어떻게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는지 보입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40:11).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는 대림절기를 맞아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해야 합니까? 그 분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온통 그분을 맞이하는 일로 가득 차야 합니다. 이는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접고 산속으로 들어가, 또는 교회에 모여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날만 기다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재림신앙을 오용하는 이단들이나 저지르는 일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그 분 맞이하는 일로 온통 채우라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극성으로 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무엇인가를 하는 것으로 그분을 맞는 일에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일상을 온통 그분을 맞이하는 일로 가득 채우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마가복음에서 세례 요한이 목놓아 외치고 있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뉘우치는 행위가 아닙니다. 회개는 어떠한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전향입니다. 위에서 말씀 드린 용어로 다시 설명하면, 나의 생명()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는 겁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설명으로, 또는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끈임 없는 자기 성찰과 간구(기도) 끝에 오는 깨달음입니다. 이 말씀이 들리십니까?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2. 4. 06:01

골로새서


2.
하나님의 용서는 선행은총이다 (1:9-14)


골로새서는
머리()를 희게 만드는(노새) 서신같다. 웃기는 농담 같지만 사실이다. 한 단어 한 단어,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야 이해되기 때문이다.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한 문장 한 문장 그냥 지나치면서 읽을 수 없고, 묵상에 묵상을 거듭해야 이 말씀이 비로소 깨우쳐질 것이다(6).


이 단락은 골로새 교회를 향한 감사 기도가 담겨 있다
. 골로새 교회가 성령 안에서 잘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바울과 디모데는 이 교회를 위해 중보기도 했다.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의 행위는 서로가 서로에게 중보기도 해주는 것이다. 중보기도는 사랑의 행위이다. 중보기도는 사랑의 열매인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기도할 수 있으랴!


골로새 교회를 향한 이들의 기도는 매우 근본적인 기도이다
. 잘 성장하고 있는 골로새 교회가 소망 안에서 목적지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돕는 기도이다. 이들은 기도하다구하다를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골로새 교회를 위해 집중적으로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기도의 내용은 두 가지이다
. 하나는 하나님을 뜻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지행일치
(
知行一致)라는 한자어가 이 두 기도 제목의 관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우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아진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구원 사건을 알아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말하는 것이 된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폭력적으로 쓰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만물과의 화해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구원의 폭력적인 강요이다. 대중교통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서 외치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폭력적인 강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라는 것이다. 강요한다고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깨달아지는 신비에 속한 문제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은 윤리적 행동에로 이끌린다
. 왜냐하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윤리적 행동이란 세상이 말하는 윤리적인 사람, 세상살이를 잘 하기 위한 윤리적 행동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로서 새사람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성도가 행하는 선한 행위, 윤리적 행동의 시금석은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 말 그대로, 예수님처럼 살기가 새사람의 가치관인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는 우리를 흑암의 나라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기 때문이다
.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건져내다는 단어가 쓰이는데 이것은 구원사건을 의미한다. 이는 세례와 관련된 단어이다. 세례는 건져냄의 행위이다. 세례는 구원 사건에 대한 성례전이다. 보이지 않는 구원 사건에 대한 보이는 표시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구원의 영역인 빛의 세계에서 살게 되었다. 빛의 세계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성도라고 불리는 것이다.


흑암의 권세는 인간 현실에 처해져 있는 죄와 죽음의 세력이다. 인간 현실은 죄와 죽음으로 물들게 되어 있다. 인간 현실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죄와 죽음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게 되어 있고 행하는 모든 일 가운데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실행하는 가운데 뜻하지 않은 악()을 생산해 내게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경험하는 바이다.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을 하고 누군가를 사심 없이 도와주려고 해도 거기에서 선한 열매, 의의 열매, 행복의 열매를 맺기 힘들다. 그래서 그럴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처럼 인간은 누구든지 죽게 되어 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 아들의 나라에서 살게 된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선한 일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선한 일을 행할 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고 죄악의 냄새가 나는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을 성령에 맡길 때 결국 최후 승리를 맛보게 될 거라는 희망 속에서 선한 일 하기를 그치지 않게 된다.


그 아들 안에서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궁극적인 사건은 속량이다(14). 속량은 노예나 포로를 무력이나 혹은 금전적인 대가를 치르고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채택된 단어이지,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항간에는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속전을 치르고 우리를 구원하신 거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마귀도 하나님 손 안에 있는 존재인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손 안에 있는 존재에게 속전을 치르신다는 말인가! 이것은 이 단어에 대한 명백한 오해이다.) 속전을 치르고 우리를 해방시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 중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을 위한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먼저 은혜로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관계 회복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회개하면 용서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건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다. 우리가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용서를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만든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용서의 은혜를 보여 주는 사건이다. 십자가의 용서가 먼저라는 말이다. 십자가의 용서가 있었기에 우리는 회개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용서)을 확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선행은총이다. 이에 대한 반응이 회개이다. 하나님의 용서 없이 우리는 회개할 수 없다. 이를 거꾸로 생각하면 안 된다. 회개에 대한 보상으로 용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를 회개로 이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I2011. 12. 1. 02:08

골로새서

 

1. 복음은 살아 있다 (1:1-8)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다. 이 교회는 에베소에서 만난 에바브라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이다.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기에 권위가 그만큼 떨어질 수 있다. 그것을 염려해서인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의 근거를 하나님의 뜻에 두고 있다.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을 보면 수신자 그룹이 자신에게 얼마나 신뢰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사도됨을 변호하는 수준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 절대적 신뢰를 보여주었던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쓸 때 그는 간단하게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만 소개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부정하기까지 이른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자신의 사도됨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정황상 골로새서에서 보이는 사도 바울의 자기 소개는 자신의 권위를 좀 더 설명해야 할 상황에 처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라는 칭호는 아무에게나 붙여지지 않는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사도라 불렀지만 자신과 동역하고 있던 디모데나 에바브라에게는 사도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다. 사도는 통상 예수님께 직접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붙여지는 칭호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에게 사도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사도라는 칭호를 붙이는 일은 늘 문젯거리였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바울이 자기 자신에게 사도의 호칭을 붙인 이유는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신비로운 경험을 통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보내심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사도는 없다. 사도들의 증언만이 있을 뿐이다. 사도들의 증언은 우리가 신앙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들의 증언에 따라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씌어진 성경은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그들의 증언이 진리인지 아닌지 가려내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된 계기는 이단사상 때문이다. 바울 서신의 대부분이 모두 비슷한 계기로 씌어졌다. 얼마나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특별히 유대교의 율법에 바탕을 둔 이단사상이 골로새 교회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 교회에 들어온 이단사상의 특징은 할례를 강조하고, 율법에 규정된 음식과 절기 및 안식일 준수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왜 이단사상인가를 알려면 유대교 율법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하여 공부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을 통해 그리스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에 강조점을 둔다는 말은 부활의 초점에서 예수라는 실존 인물을 이해했다는 뜻이다. 예수라는 역사적 실존 인물은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승격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단사상을 물리치려면 올바른 그리스도론(기독론)을 정립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의 정체성이 흐려져 교회가 세상에서 그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손가락질 받는 경우를 살펴보면
, 기독론이 흐려졌을 경우에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라는 이름을 습관처럼 입에서 내뱉고, 예수의 사역의 트레이드 마크인 십자가를 부적처럼 여기 저기 달아 놓아도,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피상적인 수준에만 머물면 교회는 흔들린다. 교회의 터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골로새 교회가 이단사상에 흔들리고 있다는 말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부족했다는 반증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부족하면 이렇게 흔들리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신앙이 흔들릴 때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서 멀어져 있다는 것,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어두운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을 책망하지 않는다
. 오히려 그는 그들을 성도라고 부름으로써 격려하고 있다. ‘성도는 인격적인 탁월함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역과 예배를 위해 구별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인격이 탁월하다고 해서 그를 가리켜 성도라고 부르지 않는다. 인격이 탁월한 사람은 성인은 될 수 있어도 성도는 될 수 없다. 성도가 될 수 있는 길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역과 당신을 경배하게 하기 위해 따로 불러 세운 사람에게 성도라는 칭호가 붙여지는 것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의 사귐이다.

          
사도 바울은 또한 골로새 교인들을 일컬어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한다. 신실함은 평소에 드러나지 않는다.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 사람의 신실함이 드러나게 된다. 골로새 교회 교인들은 지금 신실함을 보여야 할 때인 것이다. 실신함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지만, 이단사상에 의해 고난에 처해진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있어 이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의미한다.

          
바울에게 골로새 교회는 기도 제목이었다
. 문제가 있어서 그랬다기 보다는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잘 지어져 갔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믿음과 사랑이 충만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믿음과 사랑이 충만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골로새 교회 교인들의 인격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복음의 속성 때문에 그렇다.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이다. 하늘의 기쁜 소식이 복음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복음도 살아 있다. 히브리서 4 2절도 그렇게 증거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활력이 있어…” 바울이 복음에 대해서 사용한 언어를 풀이해 보면 그것이 더 분명해 진다. 바울은 복음이 열매를 맺어 자란다”(6)고 표현했다. ‘열매를 맺어라는 말은 복음의 내적 에너지를 암시한다. 즉 복음이 씨를 갖고 있는 식물처럼 본질적으로 스스로 번식할 수 있는 유기체임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확장을 의미한다. 복음은 스스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간다는 뜻이다. 누룩으로 인해 빵이 부풀려지듯이,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를 이루듯이, 그렇게 복음은 스스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유기체이고 생명체이기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특별히 복음이 뿌리 내린 곳에서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자라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약속에 대한 소망이 자라난다. 바울은 에바브라에게서 골로새 교회의 이러한 모습을 들었던 것이다.

          
복음의 유기체적인 속성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상태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 신앙과 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불일치가 경험된다. 복음은 부활을 보여주지만, 현실은 죽음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씨앗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씨앗은 그저 조그마한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복음의 속성을 깨달은 사람에게 씨앗은 더 이상 조그마한 덩어리에 불과하지 않다. 그는 씨앗에서 커다란 나무를 보고, 새소리를 듣는다. 복음을 받아 든 성도는 현실에서 부활을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서 살아낸다.


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11. 30. 02:38

시편에는 전쟁과 관련된 용어가 많이 등장한다. 그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 시편은 전쟁 제의에서 낭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쟁은 고대사회에서 일상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늘 사람들의 실생활과 부딪히는 문제였다. 전쟁에서 지고 이기고는 곧 자신들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전쟁을 하기 전에 드리는 제의(예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을 것이다. 이것이 전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시편이라도 그렇게 큰 문제는 없다. 어차피 인생은 전쟁과 같지 아니한가? 요즘 시대는 총성 없는 전쟁의 시대이다. 전쟁터에서 전쟁하는 것처럼 사는 현대인들에게 일상은 곧 전쟁이다. 진짜 전쟁이 아니더라도 집을 나서기 전 이 시편에 기대어 기도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자기 중심적인 삶을 가르치는 현대 문명에서 사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기도는 다분히 자기 중심적이다. 기도를 안 하는 사람이나 기도에 몰입하는 사람이나 모두 기도의 중심에는 자신 밖에 없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기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 시편의 시인은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기도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우선 시인은 회중들이 왕을 향해 어떻게 중보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사람들의 마음이야 다 똑 같은 것 아니겠는가! 왕을 향해 중보한다는 것은 왕의 운명이 곧 자신들의 운명이라는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왕이 이기면 자신들이 이기는 것이고, 왕이 지면 자신들이 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독특한 방식으로 담아낸다. 독특하다기보다 매우 이스라엘스럽다. 그냥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에 기대어, 그리고 성소, 즉 시온에 기대어 중보한다. 왜 이들은 여기에 기대어 기도하는가?

 

그 이유는 중보기도를 드린 후 진행되는 선언에서 볼 수 있다. 선언은 단연 구원의 성취가 담겨있다. 이 구원의 성취는 매우 확고하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싸워봐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이겨놓은 당상이라는 뜻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들은 자기 자신의 능력에 기대어 기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그리고 성소(시온)’에 기대어 기도했기 때문이다. 기도의 중심에 가 들어 있지 않고, ‘하나님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승리는 확고하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 하리로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에 기대어서, 그러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더 확고하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한다. 그러한 기도는 어떤 사람이 병거, 말을 의지하는기도에 불과하다. 병거와 말처럼 유한하고 종국에는 썩어 없어질 것에 기대어 기도하는 것만큼 허망한 일이 어디 있는가? 자기성취에 기대어 기도하는 자는 결국 성취한 것을 잃고 나면 허무와 절망에 빠질 뿐이다.

 

시인은 우리에게 자기성취가 아닌,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기대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이렇게 되면 자기성취가 잘 되든 잘 되지 않든, 즉 일이 잘 풀리든 잘 풀리지 않든 그것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되어지는 일에서 성취와 승리를 만끽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든 나와 함께 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만 성취와 승리를 취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그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만약 되어지는 일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찾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분명 패배요 절망이다. 십자가 위에서 되어졌던 일은 죽음이었지만, 거기에 임했던 하나님의 은총은 분명 승리요 소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편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인의 제의적 기도는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신앙의 지표를 준다. 집을 나서기 전 기도하는 자의 기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정확한 가르침을 준다. 하나님의 이름에만 기대어 기도하라. 이미 우리의 일상은 그 안에서 무한한 성취를 이루었고 승리하였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그것을 나의 것으로 삼기만 하면 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11. 28. 06:20

2011 1127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64:1-9

제목: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는 하나님

 

삶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기다림이 있네.

우리네 삶은 시작부터

기다리고 있다는 말로 위로 받고
기다려 달라는 부탁하며 살아가네.
봄을 기다림이

꽃으로 피어나고
가을을 기다림이
탐스런 열매로 익어가듯

삶의 계절은
기다림은 고통, , 그리움이지 않은가?
기다림은 생명, 희망이지
.

우리네 삶은 기다림의 연속인데

어느 날인가?
기다릴 이유가 없을 때

떠나는 것이 아닌가?

우리네 가슴은 일생을 두고

기다림에 설레이는 것

기다릴 이유가 있다는 것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용혜원)

 

삶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위의 시와 관련해서 대답한다면, 삶이란 기다림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곳이 교회이고, 여기 모인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 기독교인의 삶은 기다림과 깊은 연관이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기다림이 없다면, 우리 기독교인의 삶은 참으로 권태로울 것입니다.

 

오늘부터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공통으로 쓰는 것은 태양과 달의 상관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달력이지만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기대와 오심,그리고 고난과 죽으심 부활하심, 그리고 승천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교회의 달력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은 태양도 아니고 달도 아니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교회력에 의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참으로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마디로 정리해서, 우리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고, 기다리면서 하는 모든 일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일종의 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시 중에서 제 가슴에 가장 와 닿는 구절은 제 2연입니다.

삶의 계절은
기다림은 고통, , 그리움이지 않은가?
기다림은 생명, 희망이지.

이 시를 쓰신 용혜원이라는 분은 목사님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기다림에 대해서 매우 신학적인 해석을 토대로 이 시를 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경험이 없는 일반 사람들에게 삶의 계절, 기다림은 그저 고통, , 또는 그리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기다림이란 바로 생명, 희망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경험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기다림이란 생명, 희망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사야서는 굉장히 광범위한 선지서입니다. 그것을 오늘 이 짧은 시간에 다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핵심만 이야기하자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담긴 40장 이후의 이사야서의 주제는 희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림절 첫 번째 주일에 이 부분을 우리는 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의 주제가 바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사야 선지자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느냐입니다.

 

사실, 오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매우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이야기 할 수 있고, 또 이야기 해야 하는 것은 희망 밖에는 없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절망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절망적일수록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듣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희망이 어떤 희망이냐는 것입니다. 희망도 희망 나름입니다. 거짓말로 드러난, 그야말로 더 절망에 빠지게 할 거짓 희망이냐, 아니면 진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진짜 희망이냐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서 엄청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그 옛날 다윗 왕조를 통해서 누리던 영광을 다 잃어버리고, 성전 파괴는 물론이요, 땅까지도 빼앗겨 버리는 비통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한마디로 삶의 근거를 모두 잃어버린 처지가 된 것입니다. 사실, 저부터도 삶의 근거를 모두 잃어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이 없어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난 때문에 고생을 해 보신 분들은 그래도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기서 삶의 근거를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은 사실 가난 때문에 겪는 고생을 훨씬 넘어서는 것입니다. 일제시대를 겪으신 분은 어쩌면 그것이 무엇인지 조금 이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 쓰신, “백범일지라는 책을 보면 일제시대에 우리 민족이 어떠한 고난을 겪었는지, 어떻게 우리 민족의 삶의 근거가 일제에 의해서 파괴되었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간접적인 이해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무튼, 절박한 상황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구원의 손길을 내밀면서 하소연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탄원기도라고 부릅니다. 우리도 살면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탄원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도, 절망적인, 그리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는 탄원기도가 저절로 나오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탄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고 탄원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위의 시 구절을 이용해서 다시 표현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고 탄원하는 것은 고통, , 그리움의 수준에 머물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사람의 탄원은 생명, 희망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은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는 분인데, 그 하나님의 강림 앞에서는 산들도 진동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떨지 않을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이렇게 경험합니까? 요즘은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어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이러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이해가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와 공의를 행하는 자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 얼마나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사느냐가 문제이고, 얼마나 공의를 행하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와 공의를 행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선대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6절 말씀이 전합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공의를 행하고 살지 않는 모습을 그려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다음 7절은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앙망하지 못하는가를 그려 보여 줍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이사야 선지자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 어떠한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여기에 선 저도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삶이 어떠한지를 일깨워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십니까? 여기에서 자유로우십니까? 당당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을 앙망합니까? 여기서 앙망한다는 말은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을 운영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사십니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내 시간에 맞추어서, 그리고 내 뜻에 맞추어서 내 삶을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살지 않다가, 7절 말씀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지 않고 살다가”, 이렇게 망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공의를 행하면서 사십니까? 구약성경에서 공의는 단순히 옳은 일을 말하지 않고, 언제나 약한 자와 결부해서 공의를 설명합니다. 소외된 자, 가난한 자, 약한 자, 억압받는 자를 얼마나 돌보면서 살아가느냐의 문제와 공의는 엮여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돌보려면, 나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고는 절대 그런 일을 행할 수 없습니다. 살아가는 이유가 나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주변의 어려운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착취의 대상이 될 뿐이지, 섬김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는 자, 그런 자는 공의를 행하지 않는 자입니다.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행한 모든 일은 사람들을 아프게만 했지, 사람들을 이롭게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6절의 말씀대로, 무늬만 의로울 뿐이지 실상은 더럽고 시들어 버린 잎사귀와 같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이스라엘이 지금 망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살지 않고, 공의를 행하지 않고 살다가 절망적인 상황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이 순간에 결코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절망 가운데 있을지라도, 희망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8절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이것은 매우 결정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해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희망입니까?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 그것도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작품(Masterpiece)라는 사실입니다. 작품은 작가의 인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작품은 작가를 말해줍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희망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절망과 고통의 상황 속에서 부정한 자와 같이 살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로움으로 우리를 다시 의롭게 해주실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9절에서 이렇게 탄원합니다.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참으로 하나님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엄청난 탄원입니다. 이러한 탄원을 듣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을 수 없으실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우리는 진흙입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은 창조주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넘어서는 말입니다. 토기장이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에 따라 우리를 빚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인격이 우리 안에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인격이 우리의 죄 때문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그것을 회복시키는 힘은 우리의 의로운 행동이나 우리의 의로운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내 의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를 구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낸 창조물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이요,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그분께서는 창조의 완성을 위해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완성은 이미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을 맞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더딜지라도, 기다리면서 고통스러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생명과 희망을 늘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입니다. 주의 백성은 주님을 앙망하는 자요, 공의를 행하는 자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과 희망 가운데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주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 아니겠습니까?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