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권 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1. 성직자 권력, 평신도 권력에 무릎 꿇다
연말이 되면 방송사들은 고민에 빠진다. ‘어떠한 스타에게 상을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그런데 연말 시상식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방송사들은 시청자들에게 엄청난 ‘욕’을 먹어왔다. 시청자들에게 먹는 ‘욕’이 부담스러웠는지 언제부턴가 방송사들은 가수들에게 주던 상을 없앴다. 그리고 이름도 ‘가요제전’ 등으로 바꾸어 몇몇 가수에게 시상을 하기보다 가수들이 만드는 축제 형식으로 연말 시상식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연예계 전체에 확산되고 있다. 시상 자체를 없앤 것은 아니지만 상을 ‘퍼주는’ 방식으로 연말 시상식의 분위기를 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분석한 어느 기자는 이러한 현상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는 사실상 방송 권력의 몰락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물론 방송권력이 몰락한 것은 아니다. 이전에 비해서 방송사가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위치로 내려 앉은 것뿐이다. 이는 스타권력이 방송권력을 앞질렀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옛날에는 스타들이 방송사의 눈치를 봐야 했다.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타지 못해도 방송사의 요청이 있으면 시상식에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 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권력의 위치가 바뀌다 보니, 방송사가 스타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타지 않으면 방송사가 주최하는 연말 시상식에 스타들은 참여하지 않으려 한다. 스타의 권력이 방송사의 권력을 앞질렀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방송사는 스타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상을 ‘퍼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시청률과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방송사로서는 이러한 궁여지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방송계의 권력 이동 현상은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의 이동 현상을 떠올리게 한다. 연말이 되면 교회들은 고민에 빠진다. ‘어떠한 성도에게 직분을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그런데 연말에 열리는 당회가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시험에 드는 성도가 생기고 한동안 교회가 시끄러워 진다. 그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겪는 목회자의 고통은 참으로 가혹하다. 연말이 다가오면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위장병에 걸릴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어느 때부터인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직분을 ‘퍼주기’ 시작했다. 직분을 주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의 입장에서 두 가지 현상을 말해 준다. 첫째, 평신도 권력이 성직자의 권력을 앞섰다는 것이다. 둘째, 더 이상 ‘직분’은 충성된 주님의 일꾼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자신의 목회에 대해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자. “왜 목회가 이렇게 힘 드는가?” 목회의 업무가 너무 고되어서? 일하는 것에 비해 보수가 너무 적어서? 설교 준비가 너무 힘들어서?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답을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결국 이것 아니겠는가? 목회가 힘든 근본적인 이유는 성직자의 권력이 평신도의 권력에 무릎 꿇었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교회의 권력 구조에서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에 힘들다는 것이다.
평신도의 권력이 성직자의 권력을 앞서고 있는 구조에서의 목회는 몇 가지 근본적인 병폐를 낳는다. 첫째, 복음이 정직하게 선포되지 못한다. 기독교의 성경은 근본적으로 ‘부활신앙’을 증거한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백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부활신앙”보다는 눈에 잘 보이고 손에 확실하게 잡히는 “바알신앙”을 원한다. 이것은 평신도를 폄하 하는 말이 아니다. 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바알신앙”의 위험성을 알리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주문하셨으나 결국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 좇다가 패망하고 말았다. 백성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고관들이나 제사장 그룹은 백성들에게 “여호와 신앙”을 주지 못하고 그들이 원하는 “바알신앙”을 주고 말았다. 이것이 예언서에서 그토록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고관들과 제사장 그룹을 비판하는 이유다.
목회자가 일반 평신도들의 눈치를 보게 되면 이와 똑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부활신앙”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힘들고 어려운, 그래서 현실의 문제에만 집착하게 되는 ‘백성들’에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바알신앙”을 전파하게 된다. 이것은 이미 ‘교회성장’과 ‘번영신학’이라는 현대 교회의 패러다임을 통해서 증명된 사실이다. ‘교회성장’은 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는 집단이라는 증거이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삶도 번영하게 될 것이라는 부푼 기대감을 갖게 하는 요소이다. 그래서 목회자나 평신도나 모두 교회성장에 매달린다. 교회성장을 위해서 첫 번째로 갖추어야 할 요소가 멋진 예배당을 짓는 일이 된다. 성전 건축은 그 옛날 다윗 왕조에게 내리셨던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자신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게 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교회는 수십억, 또는 수백억, 수천억 원의 은행 빚을 떠안고서라도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목숨을 건다. 성건 건축이 교회성장의 기초요 번영하는 삶의 보이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둘째, 평신도의 권력이 성직자의 권력을 앞서게 되면 목회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 운동’이 되지 못하고 ‘사교 모임’이 되고 만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세례 요한이 그랬듯이, 예수께서 그랬듯이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사람들에게 그에 합당한 회개를 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 세례 요한이 그리고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신 이유가 이것 아닌가!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면서 불의와 맞서 회개를 외치다 그것을 듣기 싫어하는 권력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평신도의 권력이 성직자의 권력을 앞서게 되면 목회자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기 보다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 권력을 쥐고 있는 평신도에게 잘 보이고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의 눈과 귀를 거스르는 행동과 말을 하지 않게 된다. 그들이 잘못해도 잘못했다는 말을 못하게 되고, 그들의 눈과 귀를 시원하게 해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당연한 결과다. 권력을 쥐고 있는 평신도가 교회를 나가게 되면 목회자는 당장 먹고 살 걱정부터 해야 하니 무슨 방도가 있겠는가! 그래서 목회자는 권력자인 평신도를 교회에 묶어두기 위해서 연말에 있는 당회에서 자격도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직분’을 남발할 수밖에 없다. 목회자가 평신도 권력에 협상할 수 있는 카드가 ‘직분’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직분’은 더 이상 섬김의 자리, 충성의 자리,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평신도 권력에 부응해 주는 ‘당근’ 밖에는 되질 않는다.
이 글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겠지만 한편으로는 ‘평신도 그룹을 너무 폄하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밝히 건데, 그런 생각이 든다면 이 글을 쓰는 목적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평신도의 자질을 거론하고 있는 글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에 대해서 분석하는 글이다. 평신도의 권력이 성직자의 권력을 앞설 때 나타나게 되는 현상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평신도의 권력이 성직자의 권력을 앞설지라도 평신도가 성령 안에서 깨어 있다면 오히려 성직자를 일깨우는 역할을 하게 되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지만, 교회의 현실을 들여다 볼 때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지금 성직자의 권력이 평신도의 권력을 앞서야 한다고 우회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중세 교회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또 다른 병폐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쩌란 말인가?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것은 성직자의 권력과 평신도의 권력이 팽팽한 긴장감을 이루어 대등하게 평화적으로 연합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직자의 권력과 평신도의 권력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도 아니다. 권력의 평등은 나중 문제이다. 현 시점에서 시급한 것은 이것에 대한 반성이다: “왜 성직자의 권력이 평신도의 권력에 무릎 꿇게 되었는가? 어떻게 교권(성직자의 권력)을 회복할 것인가?”
이것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목회자들의 목회는 영영 힘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쓸데 없는 데다 에너지를 소비하다 결국 목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먹고 사는 데 급급한 ‘삯꾼 목자’로 전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목회자들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리고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한다. 교권의 회복 없이 목회는 자부심과 영광의 일이 아니라 영영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오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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