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픈 주제다.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수도 없이 신앙의 말썽꾸러기로 등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냥 방치해 둘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노릇’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뼈 속부터 종말론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소망은 ‘현세’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다. 여기 말하는 이 미래가 바로 ‘종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종말’ 또는 ‘미래’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정리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은 채 기독교인들에게 전달되는 데 있다.
‘종말’이란 무엇인가? ‘종말론’이란 무엇인가? 이는 단순히 우리와 이 세계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그 이상인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느 성도가 이에 대해서 설명을 요구할 때, 이것을 정확하게 또는 건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목회자가 얼마나 있을까?
사실 우리의 목회현장에서 ‘종말’을 묻는 성도도 없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현세’에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목회자들도 ‘종말’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없다. 묻지도 않는데, 뭣 하러 대답하겠는가? 서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듯이 묻지도 않고 대답하지도 않고, 그저 이 땅에서의 번영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를 기독교로 머물지 못하게 하고, 여느 종교나 특히 한국 역사와 한민족의 정서에 면면히 흘러온 샤머니즘으로 통합시키는 ‘영적 간음’이다. 이스라엘이 왜 망하게 되었는가? 구약성경은 선지자들의 입을 빌어 그 이유를 분명하게 ‘우상숭배’로 드러내고 있다. 우상숭배라고 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좇아갔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다.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붙들지 못하고, 이방신과 ‘더불어’ 붙들었다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구약성경에서 지적하는 ‘우상숭배’요, 종교적 ‘혼합주의’이다.
오늘날 이 시대의 교회가 ‘종말’에 대해서 질문도 하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은근슬쩍 기독교를 ‘혼합주의’로 밀어 넣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용서 받을 수 있는 죄가 아니다. 기독교의 존재 근거를 허무는 죄요 기독교인이기를 포기하는 죄요,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를 걷어 차 버리겠다는 것을 말한다. ‘종말’을 묻지 않겠다는 것은 곧 ‘자멸’의 길을 걷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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