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에 대한 오해부터 짚어야겠다. 우선 대림절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가 아니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기억하고 기다리는 절기다. 그렇다면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억하는 절기이니 대림절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가 아닌가하고 의문이 들 수 있다. 이것 또한 성탄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의문일 뿐이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억하는 절기가 아니다. ‘초림이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으로 오신 것을 뜻한다. 그러면 여기서 이러한 질문을 해보자. 예수께서는 언제 이 땅에 오셨는가? 물론 단순하게 대답하면 성탄절이 그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예수께서는 정말 성탄절에 오셨는가? 이는 단순히 날짜를 따지고자 하는 질문이 아니다. ‘오신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예수께서는 2천 년 전 유대땅에 오셨다. 그러나 이 오셨다는 깨달음은 예수의 부활로 인해 생겨난 것이지 예수께서 여느 사람들처럼 이 땅에 태어난 그 사실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성탄절은 도대체 무엇인가? 성탄절은 단순히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전하기 위한 절기가 아니라, 이 땅에 오신, 다시 말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을 증거하기 위한 절기이다. 그러므로 성탄절과 짝을 이루는 절기는 대림절이 아니라 주현절이다. 성탄절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주현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통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 인간이시고 완전 신이시다 vere homo vere deus”라는 신학적 교리를 표명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예수께서 이 땅에 언제오셨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성탄절은 예수께서 이 땅에 언제 오셨는지를 보여주는 날이 아니다. 12 25일이 예수의 생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회의 교리를 모르는 데서 오는 무지에 불과하다. 부활의 빛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했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생일은 전혀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복음서보다 훨씬 먼저 씌어진 바울 서신에서는 예수의 부활만 증거될 뿐 예수의 육신적 출생에 대해서는 아무 말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다시 대림절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계속 해 보자. 대림절이 성탄절과 관계가 없다면, 그렇다면 대림절은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대림절은 오히려 창조절과 관련이 깊다. 창조절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는 절기인데 이는 아직 한국교회에 생소한 절기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생명 사건이다. 그러므로 창조절은 하나님의 생명 사건을 돌아보는 절기이다. 이 절기에는 지구의 생태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하는 절기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조금 들여다 보아야 하나님의 생명 사건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구원을 선포하셨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정의는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구원을 온전히 표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구원을 죄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려는 방식은 우리 한국 교회가 지니고 있는 한계이면서 아픔이고 뚫고 나가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구원을 죄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한국 교회가 미국의 근본주의 사상을 지닌 선교사들로부터 기독교를 전수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것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면 미국의 종교사, 특히 조나단 에드워드 이후의 미국 대부흥 운동을 살펴보면 된다. 이는 몰트만의 저서 <오시는 하나님>역사적 종말론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언급되는 문제이니, 그 책을 읽어보는 것도 도움될 거라 생각한다.

 

구원은 죄의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생명의 완성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즉 창조론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생명의 완성의 관점에서 구원을 설명하면 구원이란 생명의 완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구원은 바로 생명의 완성인 셈이다. 그것을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부활 사건이다. 그래서 부활은 생명의 완성 사건이라고 일컬어진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초림에서 일어난 구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생명 사건이, 이 생명을 완성시킨 구원 사건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구원이 은폐의 방식으로 이 땅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생명의 완성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생명의 완성이 비밀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 자들에게만 보이는 하나님의 신비라는 뜻이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명제에 길들여 진 세상은 아직 눈에 보이도록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구원(생명의 완성)이 손에 잡히질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속한 자에게는 구원이 묘연한 것이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는 구원이 확실해 진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설명하며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말한다. 은폐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구원은 우리에게 희미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 있는 방식에 대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1:1). 믿음이 은폐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구원을 보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초림이 은폐의 방식으로 구원을 이 땅 위에 선포한 것이라면, 예수의 재림은 은폐되어 있는 생명의 완성이 온전히 드러나는 때를 말한다. 우리가 지금은 알 수도 없고 예상할 수도 없는 궁극적 생명의 완성이 예수의 재림 때에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완성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시는 때이다. 대림절은 바로 이 절대생명이 오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절기이다.

 

절대생명이 오고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정말 궁금하지 않는가? 부활의 실체가 드러나는 때, 생명의 완성이 일어나는 때,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때, 그 날이 오고 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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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