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7. 20. 03:39

생각을 바꾸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창세기 50:19-21)

 

1. 요셉은 성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요셉과 더불어서 입지전적한 일물로 다니엘이 있다. 한 명 더하면, 에스더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파란만장했던 삶에 더해, 매우 높은 지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에,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의 자리에, 에스더는 바사(페르시아)의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자녀들이 이들처럼 성공한 인생을 살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그리고 에스더처럼 아이들이 잘 자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2. 이들처럼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결을 배우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집중적으로 살펴볼 요셉은 ‘꿈 꾸는 자’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별명이 그렇게 좋은 뜻으로 붙여진 것은 아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비아냥거리면서 붙여준 별명이다. 그러나 그런 별명이 어떻게 붙여졌는지와는 별개로 요셉의 인생을 바꾸어 준 것은 바로 ‘꿈’이었다.

 

3.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세 개의 꿈이 등장한다. 하나는 요셉 자신의 꿈이고, 다른 하나는 보디발의 아내 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거기서 만난 고위관리 두 사람,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바로의 꿈이다. 요셉 자신이 꾼 꿈은 형들의 분노를 샀고, 결국 그것 때문에(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지만)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다. 감옥에서 만난 두 사람의 꿈은 요셉이 감옥에서 나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갈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바로의 꿈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로 이끌어 주었다.

 

4. 심리학(Psychology), 또는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이라는 학문이 있다. 이 분야는 ‘유대인 학문’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 학문의 창시로 널리 알려진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비롯해, 알프레드 아들러, 멜라니 클라인 등, 정신분석학의 대가들은 대부분 유대인이다. 나는 심리학이 유대인에게서 비롯되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이 학문을 발전시킨 것이 요셉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유대인 심리학자들은 구약 성경을 읽었을 것이고, 그 중에서 요셉의 꿈 이야기는 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대표 저서 중 하는 <꿈의 해석>이다. 심리학은 인간의 정신 세계를 연구하는 학문인데, 인간의 정신(Soul/Mind)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5. 우리 시대에 정신분석학의 위용은 대단하다. 그만큼 프로이트의 영향이 크다는 뜻이다. 요즘 사람들은 두 개의 정신분석학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정신분석학, 다른 하나는 개의 정신분석학. 한국 예능(시사) 프로그램을 보면, 두 명의 강사가 프로그램을 주름잡고 있다. 한 명은 정신과의사인 오은영 원장이고, 다른 한 명은 개조련사 강형욱 원장이다. 오은영과 강형욱은 현재 한국 사람들의 실질적인 사제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왜 저 사람이, 왜 저 강아지가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를 못해서 갈등이 증폭하는데, 그들의 행동 뒤에는 그 행동을 이끄는 어떠한 ‘심리(정신)’이 있다는 보여줌으로써, 저 사람이나, 저 개를 이해하게 되고, 관계를 다시 회복해 나간다.

 

6. 프로이트 이후에 심리학(정신분석학)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는데, 그 중에서 아주 색다른 심리학을 발전시킨 사람들이 있다. 빅터 프랭클, 아론 벡, 마틴 셀리그만이 그들이다. 빅터 프랭클은 아유슈비츠 생존자로서 의미치료라는 심리학을 발전시킨다. 아론 벡은 인지 행동치료라는 심리학을, 마틴 셀리그만은 긍정 심리학을 발전시킨다. 이들은 모두 유대인이다. 이들이 발전시킨 심리학의 공통적인 생각은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을 바꾸면 우리가 느끼는 방법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7. 이러한 생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심리학자는 빅터 프랭클이다. 빅터 프랭클이 쓴 <삶의 의미를 찾아서>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굉장히 유명한 문장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지냈던 사람들은 그 막사들을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자신의 마지막 빵조각을 나눠주던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은 아니었어도, 그들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하나만은 빼앗을 수 없다는 것, 즉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고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마지막 자유를 박탈할 수 없다는 충분한 증거를 제시한다.

 

8. 아우슈비츠 관련 문서들을 읽어보면(한나 아렌트),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그야말로 개돼지로 전락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다 빼앗기고, 인권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그야말로 좀비처럼 살아간다. 몸을 씻을 곳도 없고, 화장실도 없어서, 수용소 안에 있는 사람들 몸에서는 심한 악취가 났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빅터 프랭클이 위에서 진술한 것 같은 위대한 정신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진 고유의 자유라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말한다. 어떠한 상황 속에 있더라도, 우리가 생각을 바꾸면, 보여지는 현실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고 말이다.

 

9. 유대인들이(물론 극소수이지만) 아우슈비츠와 같은 절대 절망의 상황 속에서 빅터 프랭클이 진술한, 그러한 위대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앙은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이다. 신앙은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러한 상황에 닥치면 그 이야기를 삶 속에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게 신앙이다.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이유는 우리가 신앙을 갖기 위함인데,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이야기가 내 삶 속에서 작동하도록 우리의 삶을 이야기에 내어주는 것이다.

 

10. 요셉은 충분히 복수의 칼날을 갈 수 있는 억울하고 기분 나쁜 일을 경험했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애굽의 노예로 팔렸으며, 노예의 신분으로 애굽에서 개돼지나 다름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렇게 사는 동안 마음 속으로, ‘내가 만약 잘 돼서 성공한다면, 나의 인생을 이렇게 나락으로 빠뜨린 인간들을 절대로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 거야.’라고 되새김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요셉은 ‘나의 인생은 왜 이래’, 하면서 한탄하고 한탄하면서 비뚤게 나갔을 가능성을 얼마든지 품고 살았다. 그런데, 요셉 이야기에서 가장 큰 반전,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것은 그가 어려운 중에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요셉이 우리의 예상을 깨고 이런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번역성경으로 다시 읽어보면, 더 명확하게 우리 마음에 요셉의 고백이 들어온다.

 

두려워들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 대신 벌이라도 내릴 듯 싶습니까? 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형들과 형들의 어린것들을 돌봐 드리리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은 우리가 읽은 개역개정 성경에는 제대로 번역되지 않았다. “이렇게 위로하는 요셉의 말을 들으며 그들은 가슴이 터지는 듯하였다.”

 

11. 우리가 사는 시대에 많은 이들이 ‘신앙 무용론’을 말한다. 신앙을 갖는 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신앙은 삶에 소용이 없는 듯, 신앙을 버리거나,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이 그렇게 신앙 무용론을 펼치며 신앙을 버리거나 신앙 공동체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니, 신앙인이 가장 열심히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는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것이다. (성경공부 하지 말고, 성경과 연애하라!)

 

12.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것은 생각을 바꾸는 작업이다. 신앙의 깊이에 들어간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질적으로 다르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이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의 갇힌 생각을 열어 다른 세상으로 이끄신다는 뜻이다. 지금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을 바꾸면 된다. 생각을 바꾸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요셉의 이야기를 그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다. 그렇게 요셉 이야기를 마음에 품은 사람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없다.

 

13. 생각은 바꾼다고 바꿔지는 게 아니다. 그렇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지 못해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산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지 못해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주며 산다. 고통을 받는 사람이나 고통을 주는 사람이나,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다. 심리학(정신분석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생각이 한순간에 바뀌는 것도 아니다. 생각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은 신앙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신앙은 이야기를 품는 것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생각을 바꾸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고,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구원은 이렇게 온다.

 

14. 지난 몇 주간, 우리는 창세기의 족장들 이야기를 보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그냥 듣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신앙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어야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고, 이삭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어야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고, 야곱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어야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요셉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어야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 신앙을 통해, 성경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일을 통해, 우리의 삶이 더 좋은 삶으로 전진해 나아가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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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이삭처럼 사랑하기

 

이삭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식은 부모를 본받기도 하지만, 부모를 반면교사 삼기도 합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반면교사 삼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이삭의 독특한 경험이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이삭이 살면서 자신 만이 경험한 사건, 즉 이삭이 다른 족장들(아브라함, 야곱, 요셉)과 다른 삶을 살게 한 그만의 독특한 인생 경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스마엘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모리아산 제물 사건입니다. 두 사건 모두, 이삭에게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각인된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과 하갈을 광야로 쫓아낸 이유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도, 모두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이삭은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언약이 뭐길래?!” 그런데, 이삭이 쌍둥이 아들을 낳고 보니, 이들 가운데도 ‘언약’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되리라.” 그러면 이삭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아버지처럼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에서를 광야로 내쳐야 했을까요? 이삭은 자신의 끔찍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렇게 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결코 언약 때문에 자식을 사지로 내모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끝까지 큰 아들 에서를 지킬 거야. 사랑할 거야.” 이삭은 사랑하기로 결단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저명한 유대인 랍비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가 쓴 책에서 이삭에 대한 삶을 해석하는 부분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이삭이 에서를 사랑한 것은 에서가 그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아버지들의 모습이다”(매주 오경 읽기, 64쪽). 그러면서 이삭이 그러한 결정을 한 것은 이삭이 경험한 아버지와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을 내놓습니다. 즉, 이삭이 에서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한 것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 자신을 죽이려 한 사건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눈시울을 뜨겁게 만듭니다. 족장들 중에서 가장 평탄한 삶을 산 것 같고, 가장 믿음이 없는 것 같고, 무난한 삶을 산 것 같은 이삭이 사실은 가장 힘든 삶을 살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도, 야곱도, 요셉도 아버지(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형 이스마엘, 즉 아브라함의 큰 아들을 죽음에 내몰았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고 하는 트라우마 속에서 평생 살았을 것입니다. 그 사건을 보면서 이삭도 마음 속에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도 버리면 어떡하지?’ 그런데 실제로 그와 비슷한 일이, 아니 더 큰 충격적인 일이 발생합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 든 것이죠.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제사 드리러 갔던 모리아 산에서 이삭은 정말 죽다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향한 이삭(아들)의 마음을 차갑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삭의 경험은 아주 원초적입니다. 이삭의 경험은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경험입니다. 마땅히 사랑받아야 할 존재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일입니다. 이삭은 아버지(부모)와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그 단절의 경험이 이삭을 평생 괴롭혔습니다. 이삭은 야곱과 요셉처럼 물리적 단절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단절의 경험, 아버지(부모)와의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 누구보다도 더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이유불문하고 에서를 덮어놓고 사랑한 것은 “이삭 자신이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 결박당했던 사건이 초래했던 부자간의 관계 단절을 치유하는 일이었다”(조너선 색스)는 진술은 눈시울을 적시게 만듭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던 이삭이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이삭의 상처를 치유했을 뿐만 아니라, 에서의 상처도 치유합니다. 이삭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에서는 동생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합니다. 이삭은 평화롭게 죽었고, 에서는 나중에 동생 야곱이 하란 땅에서 돌아올 때 얍복강에서 ‘죽이고 싶었던 동생’ 야곱과 화해합니다. 에서가 동생 야곱에 대하여 마음을 푼 것은 아버지 이삭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상처를 치유합니다. 사랑은 구원입니다. 이삭처럼 사랑하면, 우리들의 상처도 치유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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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성서는 변혁이다]

 

앎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지의 폐기가 아니다. 앎이 늘어난다고 해서 미지의 영역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한 방식의 지적 탐구는 실존에 대한 불안을 통제하기 위한 자기중심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앎은 무한으로 뻗어 나간다. 앎이 늘어날 때마다 우리는 더 경이로워하고, 미지의 영역은 한층 더 넓어진다. 본문, 전통, 공동체, '나'는 기술을 좀 더 능숙하게 익히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본문도, 전통도, 공동체도, '나'도 베일에 가려진, 통찰과 계시를 필요로 하는 신비다. 이들에 대한 앎은 숙달된 기술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여를 통해 선물로 받게 된다.

ㅡ 월터 윙크, <성서는 변혁이다>, 130-131쪽.

 

이 책의 첫 문장은 충격적이다. "역사 비평은 파산했다."(Historical biblical criticism is bankrupt.)

이 책은 역사 비평이 왜 파산했는지, 그리고 파산한 역사 비평에 어떠한 새로운 경영 방침이 필요한지를 밝히고 있다.

 

역사 비평이 '파산'했다는 말은 역사 비평이 죽었다는 말이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파산했다는 것은 새로운 경영 방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즉, 역사 비평을 전혀 필요 없는 구시대 유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 비평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

 

이 책은 성서학자들에게 가하는 일침이다. 모더니티의 유산인 성서 비평을 통해서 성서학자들이 어떻게 권력을 쥐게 되고, 그것을 이용해서 학문과 공동체가 어떻게 분열시켰으며, 분열된 결과 어떠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학문과 공동체가 분열되어 있는 비극적 상황을 치유하기 위한 시도이다. 이 책은 성서 연구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주장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변증법적 해석학'(dialectical hermeneutic)이다. 이 책은 대부분은 이것에 대한 서술이다. 이 변증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해석자와 성서본문 사이에 있는 주체-대상 이분법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잘 보여준다. 변증법적 해석학을 설명해 나가면서 쓰이는 두 가지 도구는 1) 지식 사회학적 분석과 2) 정신 분석학적 비평이다.

 

이 책이 주장하는 성서해석의 중요성은 이 책이 인용하고 있는 리처드 팔머의 진술에서 드러난다.

"참된 해석은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것이며 존재가 새롭게 드러나는 것이다. 해석은 현재와 분명한 관계가 있는 활동이다. 해석자는 해석을 통해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을 한다"(115쪽).

우리는 왜 성서를 읽는가? 왜 우리는 성서를 해석하는가? 왜 우리는 성서와 교제를 나누는가? 답은 변혁(transformation)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악한 일의 대부분은 '자기 중심성/자기집중'이라는 교만의 죄 때문이다(판넨베르크). 이러한 죄는 성서본문 해석의 왜곡에도 관여한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를 왜곡한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성을 잃고, 세계는 파괴된다.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변증법적 해석학'은 그것을 치유할 힘을 제공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감명 받은 문장 중 하나이다.

 

"위대한 신화와 종교 문헌들 가운데 그 무언가는 우리와 만나며 특별히 나자렛 예수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를 만나고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보여준다. 이때 '나'는 나에 관한 앎을 얻기 전에 먼저 내가 알려짐을 안다. 무언가는 대상을 통해 '나'의 계산을 뛰어넘는 깊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깊이를 통해 나는 '나'를 중심으로 짠 전략에서 벗어나 모든 피조물과 다시 연합하기 시작한다. 변증법의 과정을 거쳐 주체-대상의 이분법이 주체-대상의 관계로 대체되면, 그리하여 지평들의 친교가 이루어지면, 본문과 만남을 통해 우리의 삶은 변혁될 수 있다"(116쪽).

 

이 문장은 모더니티가 망쳐 놓은 '주체-대상의 관계'를 치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더니티의 발명 중 최고는 '주체-대상의 이분법'이고, 모더니티의 발명 중 최악도 '주체-대상의 이분법'이다. 인간이 자연을 대상화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삶은 비극으로 치닫았고, 급기야 기후변화 문제를 야기하여 집단 자살 상태에 들어섰다. 모더니티가 낳은 그렌델 '주체-대상의 이분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따라, 인류의 운명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에는 그 해결책이 담겨 있다. '주체-대상의 관계'가 그것이다. 지평들의 친교. 결국 친교가 중요하다.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 대상이되 대상이지 않은 주체들의 친교.

 

월터 윙크의 책은 솔직하고 담백해서 좋다. 허세가 없다. 아는 것을 친절하게 말해주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한다. 이는 존 도미닉 크로산 책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책을 읽으면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이 책에서 인용되고 있는 T.S 엘리엇의 시를 옮겨 적는다. 이 책이 말하고 싶은 해석의 깊이를 잘 전하고 있다.

 

그대가 알지 못하는 곳에 이르려면

그대는 무지의 길로 가야 한다.

그대가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하려면

그대는 무소유의 길을 가야 한다.

그대가 그대 아닌 것에 이르려면

그대는 그대가 아닌 길을 거쳐 가야 한다.

그대가 모르는 것만이 그대가 아는 것이다.

(<사중주 네 편>에 실린 East Coker라는 시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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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쁨의 편지]

 

218쪽. 나가며. "사랑해서 행복합니다."

책의 마지막을 읽어내려가며, '나가며', 눈물이 흘렀다.

떠나보낸 남편을 '프레드릭'에 비유하며, 남편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사랑을 고백하는 부분에서 눈물이 그냥 흘렀다.

 

이 책은 '기쁨의 편지'이다. 그런데, 그 기쁨을 전하는 사람은 이미 세상에 없는, 고인이 되었다. '로슈 이신근'. 누구라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일 것이다. 무명이다. 로슈라는 이름은 예수원에서 얻는 신명이다. '뿌리'라는 뜻이다. 로슈라는 신명도, 이신근이라는 이름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로슈라는 신명과 이신근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와 박힌다. 아주 평온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마샬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은 <미디어의 이해>라는 책에서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a is the message)"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경우에 따라서 매우 보수적인 말이다. 미디어, 즉 전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메시지의 경중이 갈린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유명하고 저명한 사람이 전하는 메시지는 사람들이 귀담아들을 만하고, 무명한 자가 전하면 사람들이 메시지를 귀담아듣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전하는 자, 즉 미디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명백히 정치적 수사다.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아젠다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정치적 수사다. 사실, 미디어보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다. 누가 전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메시지 자체보다 그 메시지를 전하는 '미디어(메신저)'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별거 아닌 메시지를 뭔가 있는 메시지로 둔갑시키기 위해서 '스펙터클'을 조성한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런 내용 없는 메시지에 영혼을 털털 털린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공허한 이유이기도 하다.

 

메시지가 중요하다. 로슈 이신근. 무명이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기독교 신앙의 무게를 맛보게 해준다. 그는 '비운동성 섬모 증후군'이라는 희귀병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약한 몸 때문에 생명은 그에게 늘 '문제'(matter)'였다. 그래서 그에게 '생명'은 '살라는 명령'이었다. 생명이 '살라는 명령'이 아니면, 그는 살아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삶과 죽음에 대한 '테마여행'처럼 꾸며져 있다. 들어가며 뭉클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가게 되고, 나올 때 그 뭉클한 마음에 눈물이 맺힌 채로 나오게 된다. '희년함께'에서 간사로 일하며 경험한 것들 뿐만 아니라, 공부하며 배우고 깨달은 신앙과 세계의 이야기가 담담한 일상의 언어로 잘 풀어져 있다. 신학자들의 언어처럼 현학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시장의 언어처럼 정제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삶 자체가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답게 그의 언어는 '종말론'을 품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오늘은 영원이고, 사랑은 구원이고, 신앙은 종말 그 자체다.

 

그가 감당했던 육체와 삶의 고통은 개인적으로 남지 않는다. 그의 고통은 자기를 넘어 타인에게로, 그리고 사회에로 확대된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따뜻하다. 그에게 신앙은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공동체적이다. 그에게 신앙은 혐오와 차별이 아니라 포용과 안아줌이다. 생명은 원래 그런 것이다. 살라는 명령이다. 살고자 하는 자를 살지 못하게 하는 폭력만큼 악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생명을 향한 따뜻한 '살림'이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희년의 정신을 체현한 신앙인 답게 그의 시선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통받는 인류에게 확장된다. 신앙이 이것을 말하지 않고 신앙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할 수 없다. 교회를 향한 그의 비판은 날카롭고 정직하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 안에서 자본주의의 영향력은 교회 밖과 다르거나 덜하지 않다. 대다수 교인이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을 살기보다 한국이 선택한 자본주의 세상을 산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122쪽). 그래서 그에게 '기쁨'은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간다'의 유체이탈이 아니다. 그에게 기쁨은 오늘 여기에서 '차별과 가난'이 없는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위해 싸우다 영원한 하늘 나라로 갔다.

 

그에게 결혼은 현실 바깥에 있는 상상이었다. 선천적으로 약한 몸 때문에 결혼을 꿈꾸지 못했다. 그런데 '희년함께' 운동을 하면서 뜻밖의 사랑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고, 두 아이까지 하나님께 선물로 받게 된다. 그 두 아이의 이름은 '희서'(기쁨의 편지)와 '예서'(사랑(예수님)의 편지)이다. 아직 어린 두 딸을 남겨두고 눈을 감는 게 고통스러웠겠지만, 그가 남긴 신앙의 유산은 두 딸을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편지로 키우기에 충분하다. 두 딸이 성장하여 아빠의 유작을 읽게 되면, 두 아이의 마음을 그 어느 누구보다 밝게 빛나게 될 것을 믿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고 믿는 이유는 '나가며'에서 고백한 이신근의 아내 이소영의 사랑 때문이다. 아내 이소영은 이렇게 고백한다. "프레드릭을 닮은 당신은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시인처럼 따뜻한 말로 나를 녹이는 사람이었어요. 손으로 핸드폰을 쥐는 것조차 힘들었던 당신이 힘겹게 꾹꾹 늘러 쓴 마지막 메시지를 기억해요. '당신을 만난 건... 꿈같은 선물이었어.' 당신의 메시지에 나도 간절한 마음으로 답장을 했어요. '당신도 나에게 꿈같은 선물이었어요'"(221쪽).

 

눈물 고인 눈으로, 책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가족 사진을 보았다. 저절로 기도가 나왔다. "희서와 예서가 아빠가 남겨준 신앙과 사랑의 유산 가운데서, 엄마의 사랑과 보호 속에서 잘 크게 해주세요. 그리고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깊은 슬픔을 안고 살아갈 아내 이소영을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그 무엇에도 꺾이질 않을 사랑으로 두 아이를 잘 키우며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세요."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면한다.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이것은 분명 '기쁨의 편지'이다.

 

*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어울릴 책은 단연 <슬픔의 노래>이다. 기쁨의 노래와 슬픔의 노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위로이다. 위로가 필요한 이 시대에, 우리 모두 위로 받고 힘을 내길, 진심으로 바란다.

 

* 로슈 이신근 형제, 평안히 잠드소서.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7. 11. 06:31

예의를 간구하는 기도

(창 37:12-36)

 

주여,

예의라는 좋은 말은 마음에 품게 하소서.

친절한 행동을 통해 피어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품게 하소서.

우리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우리가 행동할 때 믿음을 담고 기도를 담으면

그것이 헤세드가 되고, 예의가 되어서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구원의 일들이 샘솟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잊지 말게 하시고, 그 품위에 걸맞게 예의를 갖추어 행동하게 하시며

친절한 행동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우리도 친절한 행동을 통해 구원하는 일을 많이 하는

좋은 사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예의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7. 11. 06:27

예의

(창세기 37:12-36)

 

1.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미국에 온지 딱 20년만이다. 살면서 미국 시민권 취득을 취득해야겠다는 갈망을 가진 적은 없다. 그런데, 살다 보니 미국 시민권이 내게로 왔다. 미국 시민권 취득을 계기로, 어떻게 하다 나는 미국에 왔으며, 이렇게 시민권을 취득하게 되었는지,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미국에 대한 좋은 마음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 초등학교/중학교 시절(1980년대),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콘텐츠가 변변치 못했다. 그때 TV에서는 주로 미국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아버지는 나와 함께 미국 드라마 보는 것을 좋아하셨다. 함께 ‘A특공대’(The A Team)도 보고, ‘전격 제트 작전’(The Knight Rider)도 보았다. 그리고 ‘V’라는 SF 드라마도 보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미국 드라마들이다. 서부 영화도 즐겨봤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내 이름은 튜니티’였다. 나중에 미국 와서 찾아보니 이 드라마의 영어 타이틀은 ‘My name is Trinity’였다.

 

2. 아버지는 나에게 미국 유학의 꿈을 키워 주셨다. 아버지는 목원대에서 신학공부를 하셨는데, 그 당시 아버지의 은사들 중 에모리대학교 출신이 몇 분 계셨다. 대학을 진학할 때쯤 아버지는 종종 미국 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고, 특별히 내가 에모리대학교로 유학을 가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내가 대학을 다닐 당시 주미대사가 에모리대학교 총장 출신인 제임스 레이니였다. 이 분 이야기를 하시면서 에모리대학교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에모리대학교 유학을 꿈꾸웠다. 아버지는 내가 미국으로, 그것도 에모리대학교로 유학 나오는 것을 못보고 세상을 떠나셨지만, 나는 이렇게 미국에서 유학도 하고 자리잡고 살고 있다. 게다가 생각도 못한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3. 누군가의 친절한 행동은 이렇게 인생을 바꾸어 놓는 것 같다. 나의 경우에 아버지의 친절한 행동이 나의 인생을 여기까지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친절한 행동 때문일 것이다. 각자의 그런 삶의 이야기가 참 궁금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누군가의 ‘친절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친절한 행동.’ 우리는 이것을 ‘예의’라고 부른다. ‘예의 있게 행동하다’, 또는 ‘예의를 갖춰 행동하다’라는 말은 상대방에게 친절한 행동을 하라는 뜻이다. 영어로 예의는 ‘civility’이다. ‘Civil’은 시민이라는 뜻이다. 또한 ‘예의 바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Civilization은 ‘문명’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시민이 된다. 문명인이 된다는 뜻은 여러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사는 사회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예의 있게 행동하는 사람’, 즉 서로가 서로에게 친절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문명이란, 그런 사람들이 이룬 사회를 뜻한다. (서로 못잡아먹어 안달인 사람, 문명 = 야만인/야만문명)

 

4. 창세기 37장은 네 번째 족장 요셉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이다. 그런데 그 시작이 참으로 비참하다.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문제의 발단은 요셉의 아버지 야곱에게서 시작된다. 야곱은 슬하의 12명의 아들들 중 요셉을 가장 사랑했다. 야곱이 요셉을 가장 사랑한 이유는 그가 요셉을 노년에 얻었고, 또한 자기가 가장 사랑한 부인 라헬의 첫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어찌하다 보니 야곱은 네 명의 부인을 두게 되었지만, 자신이 진짜 마음으로 사모하고 원했던 부인은 라헬이었다. 야곱이 네 명의 부인을 맞이하게 된 것은 라헬을 부인으로 얻기 위한 노력 중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긴 일이다.

 

5. 아버지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친절했다. 야곱은 요셉에게 예의를 갖추어 대했다. 아들 요셉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그러한 마음은 요셉이 입고 다녔던 채색옷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요셉의 동생 베냐민은 너무 어린 아이라 제외하고, 요셉의 형 10명은 채색옷을 입지 못했다. 야곱의 요셉에 대한 편애는 다른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를 낳았다. 요셉 이야기의 발단은 두 가지의 감정이 교차해서 발견된다. 사랑과 미움. 사랑의 마음도 강렬하고, 미움의 마음도 강렬하다. 이 두 마음이 아주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다. 무슨 일이 발생할 것만 같은 분위기다.

 

6. 어느 날, 요셉의 형들은 양 떼를 몰고 집을 멀리 떠나 양 떼를 먹이러 갔다.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형들에게 보내 안부를 전하고 그들에게서 안부를 가져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요셉이 자신들 있는 곳으로 오는 것을 본 형들은 미움의 마음을 표출할 기회를 얻는다. 미움의 끝은 죽음(폭력)이다. 형들은 요셉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때 형제들을 반기를 들고 나온 형제가 있었다. 르우벤이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였다. 르우벤이 왜 요셉을 죽이려는 계획에 반기를 들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르우벤의 친절한 행동은 요셉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르우벤의 계획은 이랬다. 일단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대지 않고 살려 둔 틈을 타서, 자신이 다른 형제들 몰래 구덩이로 돌아와 요셉을 구출하여 아버지에게로 되돌려 보내려 했다.

 

7. 르우벤의 계획이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이스마엘(에돔) 무역상이 애굽으로 장사를 하러 가던 것이 형제들 눈에 들어왔다. 이때는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나서, 요셉을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는 일까지는 하지 말고, 요셉을 그 무역상들에게 노예로 팔아 애굽으로 데리고 가도록 했다. 르우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일은 유다의 계획대로 진행됐다. 그 사실을 몰랐던 르우벤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구덩이로 돌아왔으나, 요셉이 이미 사라진 뒤였다. 르우벤은 당황하여 옷을 찢고 분노하고 슬퍼한다. 장자로서, 아버지 야곱에게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요셉에게 발생한 일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들은 사실은 숨기고, 요셉의 옷에 짐승의 피를 발라 아버지 야곱에게 가지고 갔고, 야곱은 사랑하는 요셉이 짐승에게 잡아 먹혀 죽은 줄 알고, 심히 슬퍼했다. 정말 마음 아픈 장면이다.

 

8.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 이것이 야곱의 가정 불화를 통해서 발생할 거라는 것을 야곱과 그의 자녀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의 친절한 행동을 통해 인생이 바뀌기도 하고, 누군가의 친절하지 않은 행동을 통해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나의 행동이다. 나의 행동은 어떠한가.

 

9. 성경에 보면, 누군가의 예의, 친절한 행동을 통해 인생이 바뀌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다윗이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다윗이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사울의 왕이었지만 다윗을 사랑한 요나단 덕분이었다. 요나단의 예의, 친절한 행동 덕분에 다윗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사울 왕에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된다. 이러한 예의, 친절한 행동은 다윗에게 전달이 되고, 다윗은 요나단처럼 친절한 행동을 이어간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뒤 다윗은 요나단의 후사를 돌본다. 사무엘하 9장에 보면 그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있는데,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거두어 재산을 물려주고 왕자들과 똑 같은 대접을 한다.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절었다. 패망한 왕가의 자손이고 장애를 가진 자로서 비참한 인생을 살다 죽을 운명에 처해있었지만, 므비보셋은 다윗의 친절한 행동 덕분에 인생이 바뀐 대표적인 인물이다. (따뜻한 이야기)

 

10. 우리는 ‘예의’라는 말을 들으면 동양적인 사고를 한다. ‘예의’라는 말을 들으면 공자와 맹자를 떠올린다. 그래서 예의라는 말을 고리타분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웬 ‘예의’? 공자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지만 성경에서의 예의는 공자님과 맹자님이 말씀하신 것과 결이 좀 다르다. 성경에서 예의는 헤세드를 뜻한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의를 갖추어 대하신다. 즉, 친절한 행동을 하신다. 하나님의 친절한 행동이 우리를 살린다. 그리스도인이 예의 있게 행동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것을 알고 증거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11.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 그만큼 우리의 행동은 무겁고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헤세드와 같이 친절한 행동, 즉, 구원을 가져오는 행동이 되게 끔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동은 단순히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행동에만 머물면 안 된다.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입은 행동이 되도록 우리의 행동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행동이어야 한다. 행동 하나 하나에 믿음을 담아서 하는 행동, 행동 하나 하나에 기도를 담아서 하는 행동, 그것을 ‘예의’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친절한 행동이고, 하나님의 헤세드가 역사하는 구원의 행동이다.

 

12. 미국 시민이 된다는 것은 미국의 문명이 담고 있는 가치를 존중하고 그 가치를 공유하며 그 가치를 실현하면서 사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해진 하나님 나라의 문명(civilization)이 담고 있는 가치를 존중하고 그 가치를 공유하며 그 가치를 실현하면서 사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그 가치는 헤세드, ‘예의’에 담겨 있다. 친절한 행동. 구원하는 행동. 생명을 살리는 행동.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행동.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친절한 행동, 예의, 헤세드를 통해서 구원 받았다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친절한 행동, 예의, 헤세드를 구현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13. 우리의 행동을 돌아보자. 지금 나의 행동은 친절한 행동인가. 헤세드인가. 예의인가. 나의 행동이 친절한 행동으로서,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고 있는가. 순간순간 행동할 때마다,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지 말고, 그 행동에 믿음을 담아서, 그 행동에 기도를 담아서 행동하라. 나의 행동이 예의가 되게 하라. 친절한 행동을 하라. 구원이 샘솟는 헤세드의 행동이 되게 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들이 누리는 권세이자 행복이다. “예의 있게 행동합시다!” “친절한 행동을 합시다!” 예의를 통해서 우리 모두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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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독교 신앙과 미래]

 

존 쉘비 스퐁. 미국 성공회의 감독입니다. 지난 팬데믹 기간(202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머리가 거부하는 것을 결코 가슴이 예배할 수 없다”는 신념 아래서 계몽주의 이래 엄청난 변화를 맞이한 세상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발견하여 대중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한 명의 기독교 사제(목회자)입니다. 이분이 쓴 책 중에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Why Christianity Must Change or Die)>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제목부터 내용까지 아주 도발적인 책입니다. 보수적인 전통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읽으면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를만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1998년도에 출간되었습니다. 벌써 25년 된 책입니다. 25년 전에 기독교의 미래를 예견하고, 그 미래를 걱정하고, 거기서 그친 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기독교 신앙이 여전히 의미 있는 것으로 작동하려면 기독교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제시한 책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기독교 신앙을 지속 가능한 종교로 거듭나게 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한 선각자들이 한 두 명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말은,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 어느 때부터인가 기독교의 위기를 감지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들이 감지한 기독교의 위기는 일반 대중들에게(일반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피부로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 그리고 정치적 격변과 바이러스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면서, 기독교의 위기는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수면 위에 떠올랐습니다. 이는 마치 ‘기후변화 문제’가 몇몇 과학자들에게만 기우가 된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기우가 된 경우랑 같습니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이제 세상은 기독교를 걱정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독교 내에서는 두 가지의 극명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이 극보수화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 신자(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교회를 안 나가는 사람들)가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극보수화 시키는 사람들은 결집을 위해서 배제와 차별과 혐오의 전략을 씁니다. 타종교에 대한 혐오, 소수자에 대한 혐오 등 이러한 전략을 통해 내부결집을 다집니다. 가나안 신자들은 기독교 내부 문제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방관자’로 남기 쉽습니다. 그냥 교회를 안 나갑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기독교 인구의 약 30퍼센트 정도가 교회 출석을 안 하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기독교인 10명 중 3명은 교회를 안 나가고 있다는 것이죠.

 

신앙의 극보수화든, 가나안 신자의 증가든, 모두 마음 아픈 일입니다. 두 방향은 모두 바람직지 않습니다. 신앙을 지키겠다고 신앙을 보수화시키는 문제나, 교회가 마음에 안 든다고 교회를 그냥 떠나버리는 것도 교회를 위한 일이 전혀 아닙니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를 지키며 기독교 신앙을 올바로 세워보겠다고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노력은 참 귀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모두가 허심탄회하게 지난 2천년 간의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치열하게, 많은 토론과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미래를 열어가야 하는 시대를 맞이한 듯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어디에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는지, 두 가지 정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입니다. 무엇이든지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신학을 정립한 교부로서 지대한 공헌을 했고, 종교개혁은 기독교를 좀 더 신실하게 구성하고자 노력을 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신학 가운데는 현재 21세기와 양립하기 어려운 신학, 다시 말해, 현재의 세상과 어울리기 힘들게 만든 결정적인 오류가 있다는 게, 요즘 신학자들의 비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의 박사, 사랑의 박사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 교부입니다. 은총, 사랑, 이것은 정말 중요한 기독교 신앙이죠.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총)이 주어졌으므로 생각할 필요 없고 그 말씀에 그저 순종만 하면 된다는 신학을 펼칩니다. 생각의 자리에 순종을 배치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기독교인들은 ‘사고(생각함)’보다는 ‘순종’을 더 높은 가치로 여기며 살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생각’ 보다 ‘순종’을 강조하게 된 것이죠.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고력’을 지닌 존재인데 그것을 작동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순종적인 인간 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만들었습니다. 계몽주의, 이성의 시대를 거치면서 기독교의 순종 논리는 기독교 신앙을 세상과 부대끼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사고력이 결여된 인간, 이것은 맹목적인 순종을 낳게 하는 독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또는 교회에서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비이성적인 행동을 보이는 기독교인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종교개혁은 기독교 신앙을 좀 더 신실하게 만들고자 한 노력이었지만, 결정적인 실수를 한 가지 합니다. 과학을 등진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 중세의 기독교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위에 세워졌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철학을 발전시키고 확립한 철학자입니다. 옛날에는 과학을 철학자들이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방법론을 따라 신학방법론을 발전시킨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자연신학이라 불립니다. 요즘 말로 하면, 과학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과학의 언어로 신학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은 기독교를 새롭게 한다는 명목으로 ‘르네상스 운동’에 동참합니다. 르네상스는 과거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새로움’이란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돌아간 과거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때, 종교개혁자들은 자연철학/자연신학을 버립니다. 이것은 크나큰 실수였다는 게, 요즘 신학자들의 비판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자연철학/자연신학, 즉 과학을 버리는 바람에 과학을 등지는 ‘반지성주의 신앙’이 기독교 내에 자리를 잡았다는 겁니다.

 

요즘,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답답해하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대표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사고력의 부재’와 ‘과학을 등진 반지성주의’를 답답해 합니다. 그렇다면, 21세기에 기독교가 여전히 의미 있는 신앙체계로 세상에 기여를 하려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적어도 두 가지는 자명합니다. 교회에서 순종의 가치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사고력의 가치도 동시에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순종은 생각의 끝에 가서 필요한 것이지, 사고력을 눌러버리는 권력이 아닙니다. ‘합리적 의심과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인간 사회는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사고력을 기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자명합니다. 역사 공부를 하는 겁니다. 성경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역사 공부를 통해서, 역사 안에서 기독교 신앙의 위치와 역할을 고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 교회에서는 과학 공부가 필요합니다. 과학의 언어와 사고를 익히고, 신앙을 과학의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지성이 필요합니다. 과학의 발견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과학의 언어와 신앙의 언어가 배타적이 아니고 진리를 위한 친구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바람이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성경공부와 더불어 역사공부와 과학공부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역사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으로 거듭나면 좋겠습니다. 또한 과학의 언어와 신앙의 언어가 어떻게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지, 탐구하고 나누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말이 통하는 인간’으로 거듭나면 좋겠습니다. 기독교의 미래는 이렇게,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자기를 넘어서는 신앙]

 

미국에는 거대한 심리적 병리 현상이 존재합니다. 이는 인종차별에 기반을 둔 현상입니다. 심리적 병리 현상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Guilty(죄책감), Anger(분노), 그리고 두려움(Fear). 죄책감은 백인에게서 나오는 심리적 병리 현상입니다. 분노는 흑인에게서 나옵니다. 두려움은 아시아인에게서 나옵니다. 미국 사회 이면에는 죄책감, 분노, 그리고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 사회가 건장하지 못한 이유이고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주요 요인 중 하나입니다.

 

백인은 근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면서 세계를 정복했고,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원주민 대학살의 역사가 있습니다. 5000만 명 정도를 학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잡아와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명과 자연을 훼손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 과정에서 백인은 '우월감'을 가지게 됐지만, 그 이면에서는 '죄책감'이 자리 잡았습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백인은 '백인우월주의'를 바탕으로 자신들 이면에 있는 '죄책감'을 덮으려고 합니다. 죄책감이 저변에 병리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은 '표리부동'입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사악한 마음을 품습니다. 한 마디로, 속을 알 수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서 '선한 일'을 많이 합니다. 무덤에 회칠이라도 하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선한 일을 통해서 속죄하려고 합니다.

 

흑인은 인종적으로 최고의 피해자입니다. 사람으로 취급 받지 못하고 자신들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노예로 잡혀 와서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영혼이 있는 생명체로서 최악의 경험을 한 것이죠. 그래서 흑인들에게는 '분노'가 많습니다. 분노가 많은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의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거칠어진다는 것입니다. 감정 표현이 매우 거칩니다. 흑인 영어는 매우 거칩니다. 제스처도 그렇습니다.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삽니다. 삶 속에서 무슨 피해를 입을까봐 노심초사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의 특징은 절대 다른 사람의 일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매우 소극적이고 수동적입니다. 자기가 피해 입는 것을 두려워하고, 남에게 피해주는 것을 꺼려합니다. 피해를 입어도 그것을 입 밖에 꺼내기를 주저하고, 왠만한 일은 그냥 참고 넘어갑니다. 아시아인이 미국에서 폭력에 쉽게 노출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각 인종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병리적 현상은 각 인종의 신학과 예배에도 반영됩니다. 백인은 '죄와 용서의 신학'을 중요시합니다. 백인들은 로마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고, 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셨다는 '복음'은 그들에게 그야말로 구원의 말씀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행동은 죄인인 '타자'를 구원하기 위한 구원 행위였다는 것이죠. 우월감을 가지고 저지른 나쁜 행동들은 모두 그렇게 정당화됩니다. 제국주의자들은 모두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뻔뻔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월한 자신들이 미개한 조선인들을 구원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반성이 어렵습니다.

 

흑인은 해방과 기쁨의 신학을 추구합니다. 억압당하며 산 이들에게 해방은 그 자체로 구원입니다. 그래서 흑인들은 해방을 이야기하는 누가복음의 말씀이나 선지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같은 성경을 좋아합니다. 예배에서도 그들은 울분을 토하고,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는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들을 벌주시고, 약자들을 신원해 주신다는 말씀을 들으면 '에이멘'이 합창처럼 터져 나옵니다. 눌린 억압을 풀어주고, 묶여 있는 분노를 발산할 때 이들은 기뻐합니다. 그래서 흑인 교회의 예배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늘 축제입니다.

 

아시아인의 신학은 백인과 흑인의 신학과 결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아인들의 신학은 대체로 ‘기복적 요소'가 강한데, 그 이유는 건강이나 물질의 복을 통해서 자신들이 가진 두려움을 극복하거나 달래주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씀에 감동을 많이 받습니다. 두려움에 쌓여 있기 때문에, 그래서 소극적이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들에겐 하나님의 지도편달이 필수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두려움을 보호해줄 보호막이 필요한데, 그것은 대부분 물질적 복이나 건강 또는 자식이나 가족들의 평안입니다. 더이상 바라지 않습니다. 사회 변혁이나 미래에 대한 깊은 관심도 없습니다. 그냥 자기와 자기 가족이 평안하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아시아인들은 정치 참여를 잘 하지 않습니다.

 

각 인종의 신학이나 신앙 형태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각자 자신들의 병리적 현상을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기독교 신학, 신앙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백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죄책감(guilty)을 덮으려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하고, 흑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분노(anger)를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하고, 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두려움(fear)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합니다. 이렇게 각자 기독교를 전유하는 방식이 다르다 보니, 백인이 흑인 교회나 아시아인 교회에 가는 게 불가능하고, 흑인이 백인 교회나 아시아인 교회에 가는 게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도, 아시아인이 백인 교회나 흑인 교회에 가는 게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쇠퇴하는 이유는 다방면으로 살펴봐야 하겠지만, 분명한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가 심리적 병리 현상을 달래는 데 너무도 큰 에너지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이 심리적 병리 현상을 남몰라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런 병리적 현상을 달래고 치유하는 것을 훨씬 넘어섭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심리 기저에 있는 병리적 현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를 자신들의 병리적 현상을 달래는 데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원래 가진 '전복성'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소 잡는 데 쓰는 칼을 닭 잡는 데만 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시대는 소를 잡아야 하는 상황인데, 손에 쥔 칼로 닭만 잡고 있다면, 칼의 쓰임새가 너무 축소된 것이고 아까운 것이겠죠.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바로 그 원인을 없애는데 쓰여야겠죠. 원인을 없앨 수 있는 힘이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결과를 치료하는 데만 쓰이는 것은 아까운 일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좀 더 폭넓게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밝혀주고 치유하는 데 쓰이면 좋겠습니다. 신앙을 너무 자신의 심리적 불안을 달래는 데만 쓰지 말고, 신앙의 지평을 넓혀 나가면 좋겠습니다. 자기를 넘어서는 좋은 신앙인이 됩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7. 11. 06:16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

(창세기 28:10-19)

 

1. 구약의 족장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네 명의 족장.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 이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신앙을 형성해 나간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신앙은 한 순간에 이룰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그냥 삶의 여정인 것 같다. 내가 무슨 교리를 믿는다고 해서, 내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안 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신앙을 곧바로 생성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여행과 같다. 생명의 여행. 또는 생명으로의 여행.

 

2. 족장 중에 야곱이라는 인물을 만나면 생각이 조금 복잡해진다. 거짓말로 장자권을 빼앗아 달아나는 것을 보면 야곱은 그렇게 의인 같아 보이지 않는다. 어떤 영웅다운 면모도 없다. 그런데 왜 야곱은 당당히 족장의 반열에 들어 신앙의 아버지가 되었을까? 무엇이 그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으며, 무엇이 그를 신앙의 아버지로 만들어 주었을까? 우리는 족장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배우고 익혀야 할까?

 

3. 야곱은 위기를 자초한 듯싶다. 아버지를 속여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것 때문에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살해 위협을 당했다. 아버지 이삭은 죽을 날이 가까워 형 에서의 살의를 막아줄 힘이 없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도망 칠 수밖에 없었다. 야곱은 외삼촌이 살고 있는 하란 땅을 향해 무조건 길을 나섰다. 그에게는 오직 목숨을 건져야겠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야곱은 도망쳤다. 그리고,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야곱은 깜깜한 밤에 ‘한 곳에 이르렀다’. 그곳이 어딘지 몰랐다.

 

4. 그런데 거기서 야곱은 놀라운 경험을 한다. 지친 몸을 바닥에 누이고 잠이 들었는데, 엄청난 꿈을 꾼다. 성경은 그 꿈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히브리어 ‘베히네이’를 네 번 사용하여 표현한다. 보라!’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보라!’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고.’ 보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5. 우리나라 말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히브리어 원어는 어떤 긴장을 조성한다. 야곱은 ‘한 곳에 이르렀다.’ 여기서 한 곳은 히브리어 ‘하마콤’인데, 바로 그곳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우연히, 뜻밖에 만나게 될 것을 넌지시 지시하고 있다.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들은 야곱의 이 이야기를 읽어 나가다가, ‘하마콤’이라는 용어에 이르러서, 긴장할 것이다. ‘와, 이제 곧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겠구나.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만나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숨죽여 성경을 계속 읽어 나갈 것이다.

 

6. 야곱의 이야기가 특별한 이유, 그의 이야기가 우리의 신앙을 ‘좋은 신앙’으로 안내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정말 우연히, 뜻밖에 하나님을 만나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위급한 상황은 하나님과의 우연한 조우를 더욱더 부각시켜 준다. 야곱은 집에서 멀리 떠나 혼자 위험에 처한 중에 하나님을 만났다. 야곱은 어두운 밤 중에 있는 사람이었다. 생명이 간당간당한 상황에 던져진 사람이었다. 희망보다 절망이 컸고, 삶보다 죽음에 가까웠던 사람이다.

 

7. 지난 몇 주 사이에 보았던 신문 기사 중 마음에 남는 기사가 하나 있다. 가수 최성봉의 죽음이다. 2011년 코리아갓텔런트를 통해서 혜성처럼 등장한 최성봉이 최근 자살하여 죽었다. 3살 때 부모에게 버려져, 고아원과 길바닥을 전전하며 살았던 최성봉은 어느날 우연히 성악에 관심을 갖게 되고, 때로는 귀동냥으로, 때로는 누군가의 호의로 성악을 배웠다. 그리고, 코리아갓텔런트에 출연하여 심사위운들을 놀래키고, 그 이후 인생에 꽃이 피는 듯했다. 그러다, 몇 년 전 거짓 투병 사건이 탄로나 대중의 뭇매를 맞고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지난 달(6월) 20일, SNS에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여 죽었다.

 

8. 최성봉의 죽음에 대한 후속 기사를 보면, 아무도 시신을 거두려 하는 가족이 없어서 무연자 처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장례식도 제때 못 치루고 있다는 기사였다. 최성봉의 죽음과 야곱의 이야기가 오버랩 됐다. ‘어두운 밤에 있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는 어두운 밤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어두운 밤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자신은 밝은 빛 가운데 있다고 자신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두운 밤을 지나게 되는 상황을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 상황에 불현듯 놓이게 될 수 있다.

 

9. 나는 최성봉의 죽음을 기사로 접하며 다시 한 번 ‘친구 되어 주기’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해보았다. ‘사람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서서 그의 친구가 되어 주어야겠구나’하는 다짐을 했다. 너무 나의 일, 나의 고민에만 파묻혀, 사람들의 고민과 아픔, 그가 뒤집어쓰고 있는 어둠을 외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혹시 내가 어두운 밤을 맞이하거든 당황하지 말고, 야곱 이야기를 떠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어두운 밤은 우연히, 뜻밖에, 준비를 하지 못했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0. 내가 오늘 최성봉의 이야기와 야곱의 이야기를 말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선,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싶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장례조차 치르고 있는 그를 위로하고 싶다.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길! 그리고, 좀 더 마음을 열고 서로가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 주라는 것이다. 마음을 열어 친구가 되어 주는 것도 쉽지 않고, 마음을 열고 나에게 다가오는 친구를 받아들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어둠’을 맞닥뜨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때 그 어둠에서 하루 빨리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어둠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를 곁에 두는 것이다. 그 친구는 의외로 평소에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아닐 수 있다. 그러니, 서로 마음을 열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11. 무엇보다, 우리는 야곱의 이야기, 야곱이라는 족장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한다. 신앙이란 이야기를 품는 것이다. 어두운 밤에 있던 야곱은 가장 중요한 것을 경험했고,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 전혀 기대하지 못한 장소, 전혀 기대하지 못한 시간, 우리가 가장 연약할 때, 우리가 가장 어두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것을 아낌없이 나눌 때,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들에게 친구가 되어주려고 마음을 활짝 열 때, 그 모든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

 

12. 무엇보다 사는 게 힘든 이들이 많은 이 때에, 즉 누군가의 사랑이 그리워 몸부림 치는 사람이 많은 이때에, 우리는 더욱더 누군가에게 다가가 적극적으로 친구가 되어줄 필요가 있다. 1945년 1월, 아우슈비츠에서 독일 군인들이 병자들만 남기고 도망친 후, 열흘 동안 추위 속에 아무 식량도 없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프리모 레비가 동료에게서 빵 한 조각을 받아 나누어 먹은 장면을 기억하면서 이런 고백을 했다. “처음으로 죄수에서 인간이 되었다.” 어두운 밤에 있는 중에는 아무리 조그만 사랑의 나눔도 생명을 보듬고 살릴 수 있다.

 

13.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 우리가 나눌 이 빵과 포도주도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준다.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 오늘 간증도, 오늘 찬양도, 모두 이것을 가리킨다.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 여기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어두운 밤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친구가 되어주고, 혹시 내가 어두운 밤을 보내고 있다면, 바로 그 어둠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 어둠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 빛으로 나아오길 빈다. God is here. I am your friend. Don’t worry. Be strong. Be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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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후변화 문제와 탈성장 공부를 위한 안내]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하기 원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자 간략히 안내를 드립니다.

 

기후변화 문제는 단순히 '기후가 변화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덥던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고, 춥던 날씨가 갑자기 더워지고, 또는 비가 안 오던 지역에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지 않던 지역에 눈이 내리지 않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눈이 내리지 않던 지역에 눈이 내리면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눈 구경해서 좋다, 이런 식으로 기후변화 문제를 접근하면 안 됩니다.

 

기후변화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식량폭동'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후변화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통과하면 인류가 맞닥뜨리게 될 가장 비극적인 일은 '식량폭동'입니다. 농사가 되지 않고,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해양생물이 급격히 줄어들게 됩니다. 날씨 변화로 추운 것과 더운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지만, 식량이 없으면 인류는 곧바로 야만의 상태에 빠집니다.

 

최근에 미국 UC Davis 연구진이 국제 학술지 '퀘터네리 리서치'에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남미 안데스 산맥 중남부 지역에서 470~1540년 사이에 나타난 사람 간 폭력 행위를 유골을 통해 분석했는데, 두개골 조사를 통해서 폭력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그 지역에 폭력이 난무했는지를 분석한 결과, 그 당시 그들이 겪은 기후변화가 그러한 폭력을 이끌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고산 지대로 갈 수록 폭력이 심해졌는데, 기후변화가 닥치자 식량 부족으로 인해서 식량을 차지하기 위한 폭력 난무했다는 연구 결과입니다. 이것은 끔찍한 진실입니다.

 

기후변화 특강을 할 때, 처음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게 중요한 지 아세요?" 대부분 이 질문에 답을 못합니다.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탄소가 한 번 배출되고 나면 배출된 탄소는 지구 대기권 내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탄소는 배출되고 나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탄소는 배출되면 배출될수록 지구에 온실효과를 높여 기온을 상승시키는 주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탄소는 무조건 배출을 줄여야 하고, 결국 탄소 배출을 zero 수준까지 낮춰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인류의 삶의 방식/문명은 탄소를 배출하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이면에는 자본주의가 있고요. 그래서 기후변화 문제는 자본주의를 되돌아보는 철학적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할 때, 마음을 열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이상한 질문을 합니다. "왜 교회에서 기후변화 공부를 해? 기후변화 문제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결해 주지 않으실까? 그냥 우리는 주어진 것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면 되는 거 아니야?" 기독교인은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것은 평소 교회에서 기독교 창조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배우지 못하고 오직 구원론에만 매달린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와 구원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할 때는 처음으로 창조론에 대한 이해를 다시 정립하는 것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조생태영성을 말하는 책들을 먼저 읽는 것이죠. 생태문명연구소에서 나온 '생태문명 시리즈' 책들을 읽으면 됩니다.

 

그런 후에, 짐 안탈이 쓴 <기후교회> 읽기를 권합니다. 짐 안탈은 미국에서 가장 왕성하게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서 운동을 펼치는 활동가입니다. 목회자이기도 하고요. 이 책을 읽으면, 아주 실제적인 운동 방향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기독교 단체뿐만 아니라 일반 단체와의 활동 영역과 네트워킹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 단체들이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미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우리는 뭐 하고 있었나, 반성하게 됩니다.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를 접하게 됩니다. 인간성의 파괴, 그리고 자연의 파괴의 배후에는 자본주의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기 때문이죠. 또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으로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한국 사회에는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이 '빨갱이'로 잘못 알려져 곤욕을 치르고 있지만, 이제는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을 바르게 평가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미의 해방철학자 엔리케 두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21세기에 마르크스 사상이 점차 중요해지리라 생각한다... 마르크스 사상은 우리의 현실을 읽는 새로운 눈이 될 것이다"(탈성장, 115쪽).

 

마르크스 사상에 대해서 그동안 가졌던 잘못된 시선을 거두어내고 그의 사상의 진가를 습득하도록 도와주는 책들은 여러가지 있으나,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가 가장 최근의 연구성과를 반영한 대중서로서 적절한 것 같습니다. 사이토 고헤이라고 일본의 신진 학자인데(무려 1987년생), 독일에서 새롭게 출간되고 있는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인 'MEGA'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한, 마르크스 전공자입니다. 어렵지 않은 이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그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어떤 사회를 제시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후변화 문제를 공부할 때 빼놓지 말고 공부해야 하는 것은 실제 우리의 현실 사회에서 탄소 배출이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배출되는 지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온통 탄소를 배출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냥 누리는 '행복한 일상'이 얼마나 탄소를 무자비하게 배출하고 있는 지, 우리는 잠시 멈추어서 속속들이 살펴보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탄소 배출의 메커니즘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현실에서 탄소 배출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무자비하게 발생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책은 <탄소로운 식탁>입니다. 세계일보 환경전문 기자가 쓴 책인데, 알기 쉽게, 탄소 배출의 원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쏙쏙 머리 속에 들어올 수 있게, 톡톡 튀는 문장으로 잘 정리한 책입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책상에서 쓴 책이 아니라 발로 뛰며 쓴 책입니다. 기자 답게 현장 답사를 하고 관련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아주 현실적인 문제들을 담아낸, 탄소 배출에 관한 수작입니다. 꼭 한 번 읽어 보시기를 강추합니다.

 

기후변화 문제의 종착지는 '탈성장'(degrowth)입니다. 탈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우리의 생각과 생활방식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탈성장 논의는 매우 철학적이고, 매우 신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탈성장 논의는 필연적으로 '고해성사'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인류가 살아온 역사의 궤적을 돌아보며, 인류의 살아온 길이 실은 성장과 진보가 아니라 죽음으로 치닫는 길이었다는 처절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탈성장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합의된 논의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그리고 탈성장으로 가는 길은 매우 험난합니다. 종교적인 메타노이아 수준의 '돌이킴'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탈성장'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이루고, 도달해야만 하는 고지와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마음을 열고 서로 협력하면서 '탈성장'에 대한 논의를 진지하게 해나가야 할 시점입니다. 그러니까, 현재 모든 제 분야에서 최고의 의제는 '탈성장'입니다. 정치도, 경제도, 철학도, 과학도, 그리고 신학도 '탈성장'의 주제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각 분야마다 접근 방법은 다르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문제의식만은 동일합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믿습니다.

 

기후변화 문제와 탈성장 주제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싶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어떤 책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진에 나온 책들 중 제가 위에서 언급한 책들부터 읽기 시작하면 됩니다. 그리고 사진에 나온 책들을 한 권씩 구매하여 읽어나가면 기후변화 문제와 탈성장에 대하여 '컨셉'이 생길 것입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컨셉'을 갖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컨셉을 가지고 나면 불안하거나 두려움 없이, 방향을 설정하고 그 길을 잘 걸어갈 수 있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두려움만 쌓여가고 절망만 늘어갑니다. 공부(하는 행동)가 중요한 이유는 막연하던 것에 길을 놓아주고 지도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길을 찾고 지도를 갖게 되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절망 대신 희망을 마음에 품을 수 있습니다.

 

기후 변화 문제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 숨만 쉬고 있지 말고, '공부하는 행동'을 취해 보세요. 뭐라도 할 수 있는 지혜와 뭐라도 하고 싶다는 용기가 생겨날 것입니다. 이것이 기후 변화 앞에서 멸망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인류의 희망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