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와 우리의 미래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의 신앙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점은 신론입니다. 기독교 신론은 유일신(monotheism)도 아니고, 다신론(polytheism)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론은 삼위일체론(Trinity)입니다. 기독교 신론을 까닥 잘못 해석하면, 유일신론에 빠지거나 삼신론(다신론)에 빠질 수 있습니다. 4세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서 삼위일체론이 확립되기 전까지, 300여년 동안 기독교는 유일신론도 아니고 삼신론도 아닌, 삼위일체론을 증언하기 위해서 무한한 노력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론을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삼위일체론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은 용어인데, 이후의 신학자들이 철학적/신학적 사유를 통해서 만들어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오해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세워 나간 교부들이나 신학자들,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는 삼위일체론을 발명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가 삼위일체론을 말하는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 경험이 삼위일체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만큼, 보여주시는 것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계시’(revelation)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경험한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사건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삼위일체로 드러낸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유일신론도 아니고 다신론도 아닌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서와 바울 서신은 삼위일체 신앙 고백의 교과서입니다.)

 

삼위일체를 말할 때 기독교인들조차도 헷갈려 하는 것은 이것이 ‘수학놀이’인줄 안다는 것입니다. 1+1+1=1. 이렇게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쉽게, 삼위일체론은 비합리적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1+1+1이 1이 될 수 있냐고 말이죠. 1+1+1=3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요. 이것은 삼위일체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용어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고, 삼위일체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삼위일체는 수학이 아니라 교제(fellowship/relationship)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삼위일체는 신적 교제입니다. 그리고 피조물(창조세계)과의 교제입니다. 삼위일체가 품고 있는 근본적인 교제(fellowship)의 의미를 담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인 용어는 ‘perichoresis (페리코레시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어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실한 교부들이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을 포착하여 표현한 언어가 ‘페리코레시스’입니다. 페리코레시스의 뜻은 ‘빙글빙글 돌면서 춤춘다’는 뜻입니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강강술래’가 딱 페리코레시스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강강술래 춤을 추듯이, 손에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춤 추는 것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정말 흥겹고 기쁘고 생명력이 넘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페리코레시스의 모습으로 존재하시고, 우리에게 그러한 모습을 계시해 주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고 살아갈 힘입니다. 슬픈 일을 당했거든 그 슬픔 때문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망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가 가장 낮아지는 순간은 실패했을 때, 병들었을 때, 육신이 약해졌을 때, 그리고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등입니다. 사랑과 생명이 적을 때 우리는 힘들어합니다. 그런 슬픔 가운데 처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죄책감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당당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페리코레시스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미래가 어디에 달려 있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저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알고 사랑하고 경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페리코레시스이시구나. 강강술래이시구나. 저렇게 사랑과 기쁨이 넘치시구나. 저렇게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보듬어 안으시며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는구나. 이것을 알고, 그분의 부르심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공동체의 미래와 우리 개인의 삶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누구도 ‘강강술래의 기쁨과 생명력’(페리코레시스)으로부터 소외되는 존재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더 사랑하세요!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