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복음/영지주의문서]

 

'도마복음 연구회 창립'이 있는 이 때에, 나도 그냥 한 마디 보태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부족한 글이지만 그냥 편하게 읽어주시면 좋겠다.)

 

유학의 가장 큰 장점은 견문을 넑힐 수 있다는 것이겠다. 나도 유학을 나오기 전까지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유학 나와서 알았다. 에모리에서 공부하면서 방대한 신학연구물에 놀라서 압도당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내가 키에르케고르를 정말 좋아했는데, 미국에 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키에르케고르 연구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되어 있었다. 내가 이 틈에서 무슨 학문적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엄청 고민을 하면서 키에르케고르 전공에 대한 꿈을 접은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은 약간 후회한다. 그냥 키에르케고르 전공자로 나갔으면 지금쯤 내 삶은 또 다른 궤도를 달리고 있을 지 모르겠다. 아마튼, 나는 여전히 키에르케고르를 좋아한다.

 

'나그함마디(The Nag Hammadi Library)' 문서에 대해서 '한 마디'도 들어보지 못한 내가,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유학을 나와서이다. 그리고 조금씩 나그함마디 문서를 들여다보았고, 영지주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나그함마디 문서와 영지주의에 대해서 이해를 높이게 된 것은 일레인 페이절스(Elaine Pagels)의 책을 읽으면서부터였다. 그 시기가 2009년도,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이다.

 

사해사본과 나그함마디 문서는 비슷한 시기에 발견되었다. 에모리 유학 시절 내 지도 교수였던 캐롤 뉴섬(Carol Newsom)은 사해사본 중 지혜문헌을 연구한 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비슷한 시기에 발견된 두 문서는 비슷한 시기의 학자들을 통해 동시에 연구되었다. 물론 정통 기독교에서는 사해사본의 가치를 더 높게 보고,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나그함마디 문서를 들여다본 사람은 그 문서가 가지고 있는 '놀라움'에 대해 무시할 수 없었다. 일레인 페이절스는 나그함마디 문서 전문가로서 프린스턴 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을 했고, 영지주의를 positive하게 해석하여 소개한 학자로 유명하다. 나는 페이절스 교수의 <The Gnostic Gosples>을 읽으며, 영지주의에 한 빗장을 풀 수 있었다.

 

한국에 도마복음/영지주의/나그함마디 문서를 대중들에게 소개한 사람은 도올 김용옥이다. 그분이 하버드에서 공부할 때, 하버드에서는 사해문서와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한 연구가 붐을 이루었다. 위에서 언급한 캐롤 뉴섬이나 일레인 페이절스도 모두 하버드 출신 박사들이다. 그리고 나이 때도 비슷하다. (페이절스가 가장 선배다.)

 

14년 전부터 영지주의 문서를 읽었고 관심을 두었지만, 사실, 함께 이야기 나누며 생각을 전개시켜 나갈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주변에 영지주의 문서를 읽은 목사 동료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성경 읽고 연구하기도 바쁜데, 정통에 의해 정죄 당한 영지주의 문서를 읽는 일은 awkward 한거다.) 그래서 혼자 읽고, 글을 조금 쓰고 했다. 물론 아무도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한 번은 애틀란타에 김세윤 교수가 와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영지주의 문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세윤 교수의 강연장에 가서 강연을 들으며 마침 김세윤 교수가 옆자리에 앉아 계셔서 영지주의 문서에 대해서 질문한 적이 있다. 그때 단칼에 거절을 당했다. "목회자들이 영지주의 문서에 관심을 둘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가 바울신학의 권위자로서, 당연히 그렇게 이야기할 수 밖에없었겠지만, 김세윤 교수와 영지주의 문서에 대해서 대화를 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정통 기독교 라인에 있는 신학자들을 읽었고, 나름대로 신학에 대한 전반적인 지성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영지주의 문서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영지주의 기독교가 왜 정통 기독교에게 밀려나게 되었는지를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아주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지주의 기독교가 정통 기독교에게 정치적으로 밀려났다고 하는 것이다. 페이절스 교수의 책을 보면 그러한 정황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실제로 영지주의 기독교와 정통 기독교 간의 치열한 정치 싸움이 있었다. 특별히 영지주의 기독교 집단은 사도권과 교권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그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계속 강조했다. 게다가 정통 기독교는 대리인(사도, 사제)을 통해 하나님께 다가설 수 있지만, 영지주의자들은 직접 하나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정치 싸움이 심했다.

 

정통 기독교라고 자부하는 교회들이 너무 개판을 치고 있는 요즘, 얼마나 교회의 현실이 답답하면 영지주의 문서가 틈새를 파고 들고, 영지주의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어필을 하는 시절이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프다. 정통 기독교에 속한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엄청나게 반성해야 할 지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은 정통 기독교와 영지주의 기독교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무엇인가에 있다. 4세기까지 정통 기독교가 무엇인지 결정이 나지 않았다. 삼위일체론(기독교의 독특한 신론)의 정립도 되지 않았고, 성서(정경)도 정립되지 않았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있기 전까지 기독교에 '정통(Orthodoxy)'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진리를 위한 싸움이 치열했다. 그러나 비로소 예수 사건이 있은 지, 300년이 지나, 정통과 이단(정통의 가르침을 벗어난)을 가르는 기준이 생겼다.

 

그 기준은 이것이었다. "하나님의 의인가 아니면 사람의 의인가." 이것은 단순히 믿음인가 행위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정통 신학은 인간이 구원에 기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구원을 맡긴다. 그러나 영지주의 신학은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맡기지 않고 인간의 선함에 주목한다. 이것은 단순히 성악설, 성선설의 문제이거나 전적타락과 부분타락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인데,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고 인간의 기여를 말하는 순간, 사람 사이에 배제와 차별과 혐오가 발생하고 만다. 다시 말해, 영지주의 기독교는 도덕(지혜)을 말하고, 정통 기독교는 사랑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왜 요즘, 영지주의 문서(기독교)나 수도원 운동 같은 것에 대한 논의가 일고, 사람들이 왜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정통 기독교의 도덕이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이 바닥을 치니, 기독교 역사에서 도덕을 중요시했던 운동들이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내가 우려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영지주의 기독교나 수도원 운동은 엘리티즘(elitism)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하나님과 직접적인 합일을 이루고, 속세를 떠나서 도덕적으로 깨끗한 신앙운동을 하는 일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영지주의 기독교나 수도원 운동이 주류(mainstream)로 자리 잡지 못한 까닭이 분명히 있다. 도덕적인 기독교는 엘리티즘을 향하고, 결국은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고 혐오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신앙이 오히려 사람을 향한 차별과 배제와 혐오를 불러온다면, 이것은 구원이 저주가 될 수밖에 없다.

 

도덕은 굉장히 중요하다. 체제와 운동을 지속시키는 가장 큰 내적인 힘 중 하나이다. 요즘 기독교가 무너지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라고 하는 체제 내에 '도덕이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도덕을 중요시하는 기독교 신앙 운동(영지주의, 수도원 운동)이 치고 들어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지주의나 수도원 운동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거기까지다. 도덕을 바로 세우는 것. 하지만 인간이 구원에 다다를 수는 없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이 점을 겸허하게 인정하면서 영지주의 문서나 수도원 운동을 해 나갈 필요가 있다. 지혜와 은혜는 종이장 한 장 차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로 구원에 이르는 게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다. 정통 기독교가 지금은 개판을 치고 있지만, 구원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겸손이 있기 때문에 정통으로 불리는 것이다.

 

어떠한 약초는 독이 될 수 있고 약이 될 수 있다. 돌파가 그 약초를 쓰냐 아니면 명의가 그 약초를 쓰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온다. 영지주의 문서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신앙에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 연구를 충분히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에 오히려 혼란을 가져오는 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여러가지로 힘든 이 시절에, 명의들이 영지주의 약초를 잘 쓴다면 기독교의 아픈 상처를 회복시키는 데 긴요하게 쓰일 것이다.

 

도마복음 연구회가 명의의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