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주일을 보내며]

 

삼위일체 주일(Trinity Sunday)입니다. 기독교가 시작된 지 벌써 2천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가 정립된 지도 1700년이나 지났습니다. 이렇게 어머어마한 시간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낯설어 합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가장 큰 이유는 독특한 신관(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 신관입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정말 놀라운 신관입니다. 한 하나님을 세 위격의 관계로 파악하는데, 그것에 대한 사유가 깊고 신비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집요하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쉽게 다른 종교, 또는 다른 사상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의 독특한 하나님 사유를 잘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기독교가 시작된 지 벌써 2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낯설어 합니다.

 

삼위일체 주일을 맞아 예배를 구성하면서 삼위일체 주일에 부르는 찬송가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각각에 대한 예배 찬송을 찾아볼 수 있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예배 찬송은 없었습니다. 그만큼 아직도 우리의 일상 신앙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사유가 별로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장 시급한 일 중 하나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예배 찬송을 만들어 보급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가톨릭으로부터 종교개혁을 해서 개신교를 따로 분리하여 처음으로 한 일은 예배 의식을 바꾼 것입니다. 예배는 신앙의 일상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그 예배 안에서 무엇을 고백하고 무슨 예식을 행하느냐가 곧 우리의 신앙생활을 규정해 줍니다. 예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고백되지 않고, 고백할 수 있는 찬송이나 기도문, 또는 다른 예식이 없으면, 우리는 그만큼 삼위일체 하나님과 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죠.

 

기독교에서 삼위일체 신학을 정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런 신앙 고백을 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는 ‘고난과 죽음과 하강과 부활’을 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우리는 고백하고 신앙합니다. 바로 이러한 신앙고백은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Godhead/신적인 존재)’에게만 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만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예배를 하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에 예배하는 행위만큼 헛된 행위가 없고, 자신이 하나님이 아닌데 예배 받으려고 하는 행위만큼 악한 행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예배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둘 중 하나의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가 하나님(Godhead)이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우상숭배자이거나. 그러나 우리가 고백하다시피, 그리스도인은 우상숭배자가 아니라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온 교리가 삼위일체 신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학을 말할 때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는 신학은 사변적으로 고안된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는 이런 게 없는데 무슨 사상을 만들어 내듯이 창작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아주 큰 오해이고 불경한 말입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부를 비롯해서 현대의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고백’이지 ‘창작’이 아닌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이 창조해낸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삼위일체로 계시하셨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신이 보여주시는 대로 그것에 대해서 정직하게 고백을 할 뿐이지, 뭔가를 꾸며내는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삼위일체로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보여주시는 대로 고백을 할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적 사고를 방해하고 왜곡해온 것은 유대교의 유일신론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바탕으로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제시한 일자(一者) 신관입니다. 이러한 신관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관을 가부장적으로 이해하게 하거나 종속론적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가부장적인 신관은 존재에 위계를 만들고, 종속론적인 신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열등한 것을 만듭니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삼위일체론은 성부, 성자, 성령의 용어가 왜 사용됐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신적인 본질을 성부와 성자가 공유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지, 아들이 아버지에게 종속되고, 아들이 아버지보다 열등한 지위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전혀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골치 아픈 수학 놀이가 아닙니다. 1+1+1=1이라는 괴상한 방정식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숫자 놀음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것이고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무한한 신적인 존재가 이 땅 위에 있는 유한한 존재와 어떠한 식으로 관계(fellowship)를 맺고, 어떠한 식으로 구원을 베풀고, 어떠한 식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지에 대한 풍성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신실한 신학자들은 한 입으로 말합니다. 현재 기독교가 이렇게 쇠퇴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삼위일체 신론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유와 신앙은 그만큼 기독교의 존폐를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독교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가 함께 한 마음으로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열심히 탐구하고 고백하고 신앙하겠다’고 말이죠. 바로 이러한 다짐에 기독교 신앙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을 가슴 깊이, 진지하게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