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바깥으로]

 

이번 한국 방문 중 신촌에 가서 연세대와 홍익문고를 들렀다. 학교 구경 잘 하고, 교내 식당에서 밥 잘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예전 학교 다닐 때 습관처럼, 홍익문고에 들러 책 한권을 샀다. 나희덕 시론집 <문명의 바깥으로>.

 

예전 학교 다닐 때 습관처럼, 지하철에서 책을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서문을 읽고, 첫번째 챕터를 읽었다. 내가 요즘 깊은 관심을 갖고 교회 식구들과 공부하고 있는 '기후변화'에 대한 주제였다. 제목은 '자본세에 시인들의 몸은 어떻게 저항하는가'. 도나 해러웨이에 대한 언급을 시작으로, 백무산, 허수경, 그리고 김혜순의 시를 분석한 글이다. 그리고 다시 도나 해러웨이를 언급하며 글을 맺는다. 마지막 부분을 직접 옮겨본다.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해러웨이는 자본세의 파괴가 극심한 지구 곳곳에서 그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창의적 공동체들을 '퇴비 공동체'라고 불렀다... 따라서 만물과 '살'을 공유함으로써 그들과 함께하는 '시쓰기'는 일종의 '친척 만들기' '퇴비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 심보선의 말을 빌리면, "시란 시인의 고뇌에서 탄생하여 나아가는 수직적인 이행이 아니라, 하나의 몸에서 또다른 몸으로 나아가는 평면적 확장"이다. 그는 수평적 이행과 새로운 고동체의 탄생을 위해 모든 형태의 이분법과 위계를 부정하고 낯선 타자들과 함께하는 것, 이러한 저항과 창조는 생태적인 동시에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37쪽).

 

인류세/자본세를 맞아, 시인의 시쓰기는 일종의 '친척 만들기' '퇴비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는 나희덕의 말은 희망적이다. 시인들만이라도 저항과 창조에 적극적이면 숨통이 트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시인들만의 저항과 창조만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게 참 어려운 시절인 듯하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대가 파괴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고 피난처를 복구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관심이 없다기 보다, 정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책의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이, 문명의 바깥으로 향하는 것은 저항과 창조의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문명에 갇혀 있는 듯하다. 문명의 바깥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산다. 문명의 바깥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는 마치, 애굽에서 400 여년동안 살던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는 일과 같다. 그들은 문명국인 애굽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발터 벤야민이 사유했듯이, 우리 시대는 또다시, 아니 더 절실하게 '메시아적 사유'가 필요하다. 문명의 바깥으로 우리를 데리고 나갈 메시아가 필요하다. '시쓰기'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에게 시적 상상력이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메시아가 될 수 없으니, 메시아가 도래하는 강력한 상상력이라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 메시아를 상상하는 일은 또한 생태적인 동시에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