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만의 신앙과 게하시의 불신앙

ㅡ 게하시처럼 하면 안 되는 이유

 

신앙은 삶의 상태입니다. 신앙과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 지를 보면 신앙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삶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전에는 ‘저렇게’ 살았었는데, 신앙을 갖은 후에는 더 이상 ‘저렇게’ 살 수 없고, 이제는 ‘이렇게’ 살게 되는 것이죠. 물론 이것이 그 사람의 성품(성격)까지도 변하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타고난 성품은 신앙을 가진 이후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가진 후에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삶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한 신앙의 삶이 무엇인지, 우리는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 사람으로서 이방인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병에 걸려 어려움에 처했고, 그것을 긍휼히 여긴 ‘몸종(나아만 장군 아내의 몸종)’이 나병을 고칠 방도를 일러줍니다. 그렇게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오게 되고, 이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열왕기하 5장은 오롯이 나아만 장군 이야기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나아만 장군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아만 장군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가 구원받는 방식은 매우 독특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나아만 장군의 신앙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나아만 장군의 신앙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나아만 장군에게서 보이는 신앙의 모습은 6가지 정도 됩니다. 첫째는 그가 ‘하나님 앞에 섰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겸손을 말합니다. 나병이 낫기 전,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병을 고치기 위해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을 때, 그는 엘리사 선지자가 자신 앞에 서서 자신을 알현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병을 고침 받은 후, 엘리사 선지자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엘리사 선지자 앞에 선 것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경험한 사람, 즉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섭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아만 장군은 직접적인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 아나이다”(왕하 5:15). 이전에 나아만 장군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였습니다. 이것은 신에 대한 간접고백일 뿐입니다. 그러나 나아만 장군은 신앙을 갖게 된 후, ‘너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에서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으로, 고백의 방향을 바꿉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의 이야기 아니라, 이제 자신의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은 하나님을 완전히 ‘삶’으로 경험하게 하고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은 ‘너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나의 실존으로 파고 들어오는 사건입니다.

 

셋째,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예물(gift, blessing)을 드립니다.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병 고침을 받고자 올 때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병고침을 받은 후 엘리사 선지자에게 드리는 선물은 새로운 선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올 때 가지고 온 선물입니다. 그러나 처음 가지고 올 때의 선물과 이제 신앙을 가진 후 엘리사 앞에 내어 놓는 선물의 성격은 완전히 다릅니다. 처음에 나아만 장군이 선물을 가져올 때 그 선물의 성격은 ‘포상품’이었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쳐준 것에 대한 보상, 또는 ‘시혜’(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것) 정도의 의미를 가진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을 갖게 된 나아만 장군의 예물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표징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표현하는 성례전 같은 성격을 가집니다. 신앙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모두 그러한 뜻을 가집니다.

 

넷째, 나아만 장군은 자유를 얻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예배하겠다고 선포합니다. 그런 의미로 이스라엘의 흙을 얻어갑니다. 그러면서 나아만 장군은 자신이 모시는 아람 왕과 함께 림몬 신전에 들어가서 절하게 될 때, 그것은 림몬 신을 섬기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윗사람을 모시는 신하 된 입장에서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을 밝힌 후,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그의 용서 구함에 이런저런 말을 보태지 않고 그저 ‘평안히 가라’고만 대답합니다. 신앙은 이렇게 자유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에게만 매인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더 이상 아람의 신 림몬에게 매여 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신앙은 나를 속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선언입니다.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에게 예물을 받지 않은 이유는 명백합니다. 구원은 거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무엇인가를 받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구원은 교환이 아닙니다. 구원은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나아만 장군을 당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인정했습니다. 이 자체, 이 관계 자체가 구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으로부터 예물을 받을 이유와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관계에는 어떤 가격이 매겨지거나 교환가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안에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나아만 장군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은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 게하시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거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이는데, 다음과 같이 게하시를 저주합니다.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왕하 5:27). 게하시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토록 가혹한 저주를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게하시가 가혹한 저주를 받은 이유를 아는 것만으로도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매우 가치 있는 말씀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게하시가 거짓말을 통해서 나아만 장군에게 예물을 받은 것 때문에 가혹한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너무 지나친 처벌 같아 보입니다. 게하시의 거짓말을 보면 그렇게 큰 거짓말도 아닙니다. 그리고 나아만 장군에게 가서 예물을 억지도 빼앗아 온 것도 아닙니다. 거짓말 수준이 애교 수준이고, 나아만 장군은 게하시에게 예물을 기꺼이 내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게하시에게 가혹한 저주가 임하는 이유가 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왕하 5:20). 여기에 보면,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을 ‘이 아람 사람 나아만’이라고 부릅니다. 게하시에게 나아만 장군은 여전히 이방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반란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나아만 장군에게 ‘구원’을 베푸셔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아만 장군을 ‘타자화’시켜서,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 자신이 뒤집어버리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살면서 나아만에게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배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게하시 사건을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사람들, 즉 구원하신 사람들을 우리가 임의대로 ‘이방인’ 취급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제대로 배우고 이해해도, 신앙인이 자기 마음대로 누군가를 ‘이방인/타자’ 취급하며,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게하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나아만 장군을 자기 마음대로 이방인 취급하여 그에게 폭력(거짓말/물품강탈)을 행사했습니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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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