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행위]

 

우리는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을 통해서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의 행위를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함’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신앙이란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창조신앙이란 인간 존재와 하나님과의 연결성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가장 인간다울 뿐만 아니라,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신앙은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길(way)에 대해서 많은 묵상과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것을 은혜의 방편(means of grace)라고 하는데, 감리교의 효시, 존 웨슬리(John Wesley) 목사님이 제시한 것이 가장 유명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은혜의 방편은 경건과 선행으로 나누어지는데, 경건(practices of piety)에는 성경읽기, 기도, 금식, 정기적인 예배 참석, 성례전, 교제(fellowship), 성경공부 등이 있고, 선행(good works)에는 병자 방문, 감옥에 갇힌 자 방문, 배고픈 사람 먹이기, 기부, 정의 추구 등이 있습니다. 물론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은혜의 방편들을 찾아볼 수 있겠죠.

 

엘리사의 전성시대를 알리고 있는 에피소드들을 담은 열왕기하 4장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신앙의 행위가 제시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신앙의 행위는 위에서 살펴본 ‘은혜의 방편’과 좀 다릅니다. 은혜의 방편은 외적인 것이지만,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에서 제시되는 것은 내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행위는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깊어져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외적인 은혜의 방편이 진실한 신앙의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에서 제시되는 ‘내적인 은혜의 방편’은 무엇일까요?

 

열왕기하 4장은 과부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선지자 생도가 아내와 두 아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남편을 잃은 여인은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서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살아보지만 결국 삶의 막바지에 다다릅니다. 더 이상 생활비도 없고, 두 아들이 노예로 팔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남편의 스승이었던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엘리사 선지자에게 ‘살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내적인 은혜의 방편 첫번째는 ‘간절함’입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왕하 4:1).

 

과부의 부르짖음에 엘리사 선지자는 응답합니다.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하랴?”(왕하 4:2). 사실 과부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란 이제 기름 한 그릇 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적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이 가진 것에서부터. 엘리사 선지자는 기름을 담을 빈 그릇을 최대한 많이 빌려오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빌려온 기름 그릇을 가지고 들어가 문을 닫고 기름을 부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두 번째 내적인 은혜의 방편을 보는데, 그것은 ‘순종’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이웃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과부는 엘리사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한 번 더 어려운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 지시대로 방에 들어가 기름을 붓습니다. 순종하지 않았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렇게 과부와 두 아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엘리사 전성시대의 다음 에피소드는 수넴 여인 이야기입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를 존귀하게 여기고 극진히 대접합니다. 수넴 여인은 앞에 등장했던 과부와는 다른 신분을 가진 여인입니다. 부유했고 존경받던 집안의 여인입니다. 그런데 수넴 여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수넴 여인이 돋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무시당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푸대접 받던 시절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극진히 대접했다는 데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 시대는 겉으로는 부강했으나 속으로는 매우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아합 왕이나 아하시야 왕 이야기를 보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었고, 하나님의 사람을 푸대접했습니다. 엘리야는 심지어 핍박을 받았습니다. 엘리사도 사람들에게 별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시절에 하나님의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극진히 대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세 번째 내적인 은혜의 방편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섬김’입니다. 섬김을 받은 엘리사 선지자는 뭔가 답례를 베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수넴 여인에게 무엇을 해줄까를 묻습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수넴 여인은 그러한 상태를 돌려서 말합니다. “나는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왕하 4:13). 현재 상태에 만족하고 있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왜 바라는 게 없겠습니까? 그 당시 여인에게 정말 중요했던 것은 자식인데, 자식이 없는 수넴 여인의 처지를 알게 된 엘리사 선지자는 그녀의 태를 열어줍니다. “한 해가 지나 이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왕하 4:16).

 

정말로, 엘리사 선지자의 예언대로 수넴 여인은 일 년 후에 아들을 품에 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어린 아들이 조금 성장하여 개구장이 아이가 되었을 때 추수하는 아버지를 보러 밭에 나갔다가 ‘머리야 머리야’ 하면서 쓰러집니다. 망연자실한 수넴 여인은 죽은 아들을 데려다가 엘리사 선지자가 묵는 방 침실에 눕혀 놓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 있던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갑니다. 갑자기 자신을 찾아오는 수넴 여인을 멀리서 보고 엘리사 선지나는 몸종 게하시를 보내 맞이합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엘리사를 보자마자 수넴 여인은 엘리사의 발을 붙잡고 주저 앉습니다. 그리고 자식 잃은 괴로움을 표출합니다.

 

섬김을 통해서 선물로 받은 아들이 변고를 당하자 수넴 여인은 망연자실했습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 아픔을 표현하며 도움을 구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네번째 내적 은혜의 방편을 봅니다. 그것은 ‘신뢰’입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왕하 4:30). 엘리사는 수넴 여인과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죽어서 침상에 누워 있는 아이를 살려냅니다. 수넴 여인의 신뢰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셨고, 수넴 여인은 그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간절함, 순종, 섬김, 신뢰, 이러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외적인 은혜의 방편들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정기적인 예배에 참석하고, 친교를 나누고, 성경공부 하는 일, 그리고 어려운 이들을 돕고 정의를 구하는 일들, 이 모든 일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좋은 방편(means)들 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간절함, 순종, 섬김, 그리고 신뢰입니다. 이러한 내적인 은혜의 방편들이 자리를 굳건하게 잡고 있어야 외적인 은혜의 방편들이 빛을 발합니다. 외적인 은혜의 방편들을 연습하면서 내적인 은혜의 방편들을 추구하는 신앙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성숙한 신앙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좋은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