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리적 신앙]

 

미국에는 거대한 심리적 병리 현상이 존재한다. 이는 인종차별에 기반을 둔 현상이다. 심리적 병리 현상은 세 가지다. Guilty(죄책감), Anger(분노), 그리고 두려움(Fear).

 

죄책감은 백인에게서 나오는 심리적 병리 현상이다. 분노는 흑인에게서 나온다. 두려움은 아시아인에게서 나온다. 미국 사회 이면에는 죄책감, 분노, 그리고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미국 사회가 건장하지 못한 이유이고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백인은 근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면서 세계를 정복했고,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많이 했다. 미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원주민 대학살의 역사가 있다. 5000만 명 정도를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잡아와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 사용했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명과 자연을 훼손한 일들이 즐비하다. 그 과정에서 백인은 '우월감'을 가지게 됐지만, 그 이면에서는 '죄책감'이 자리 잡았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백인은 '백인우월주의'를 바탕으로 자신들 이면에 있는 '죄책감'을 덮으려고 한다. 죄책감이 저변에 병리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은 '표리부동'이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사악한 마음을 품는다. 한 마디로, 속을 알 수 없다. 이들은 자신의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서 '선한 일'을 많이 한다. 무덤에 회칠이라도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한 일을 통해서 속죄하려고 한다.

 

흑인은 인종적으로 최고의 피해자이다. 사람으로 취급 받지 못하고 자신들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노예로 잡혀 와서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영혼이 있는 생명체로서 최악의 경험을 한 것이다. 그래서 흑인들에게는 '분노'가 많다. 분노가 많은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의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거칠어진다는 것이다. 감정 표현이 매우 거칠다. 미국에서 흑인은 같은 영어를 쓰지만 그 표현이 매우 거칠다. 제스처도 그렇다.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시아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산다. 삶 속에서 무슨 피해를 입을까봐 노심초사한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의 특징은 절대 다른 사람의 일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우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다. 자기가 피해 입는 것을 두려워하고, 남에게 피해주는 것을 꺼려한다. 피해를 입어도 그것을 입 밖에 꺼내기를 주저하고, 왠만한 일은 그냥 참고 넘어간다.

 

각 인종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병리적 현상은 각 인종의 신학과 예배에도 반영된다. 백인은 '죄와 용서의 신학'을 중요시한다. 백인들은 로마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고, 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셨다는 '복음'은 그들에게 그야말로 구원의 말씀이다. 게다가 이것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기도 한다. 자신들의 행동은 죄인인 '타자'를 구원하기 위한 구원 행위였다는 것이다. 우월감을 가지고 한 나쁜 행동들은 모두 그렇게 정당화 된다. 제국주의자들은 모두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일본이 뻔뻔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월한 자신들이 미개한 조선인들을 구원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졸개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흑인은 해방과 기쁨의 신학을 추구한다. 억압 당하며 산 이들에게 해방은 그 자체로 구원이다. 그래서 흑인들은 해방을 이야기하는 누가복음의 말씀이나 선지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같은 성경을 좋아한다. 예배에서도 그들의 울분을 토하고,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들을 벌주시고, 약자들을 신원해 주신다는 말씀을 들으면 '에이멘'이 합창처럼 터져 나온다. 눌린 억압을 풀어주고, 묶여 있는 분노를 발산할 때 이들은 기뻐한다. 그래서 흑인 교회의 예배는 기쁨이 충만하다. 늘 축제다.

 

아시아인의 신학은 백인과 흑인의 신학과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아시아인들의 신학은 대체로 '기복적 요소'가 강한데, 그 이유는 기복은 건강이나 물질의 복을 통해서 자신들이 가진 두려움을 극복하거나 달래주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아시아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씀에 감동을 많이 받는다. 두려움에 쌓여 있기 때문에, 그래서 소극적이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들에겐 하나님의 지도편달이 필수다. 그리고 자신들의 두려움을 보호해줄 보호막이 필요한데, 그것은 대부분 물질적 복이나 건강 또는 자식이나 가족들의 평안이다. 더이상 바라지 않는다. 사회 변혁이나 미래에 대한 깊은 관심도 없다. 그냥 자기와 자기 가족이 평안하면 그만이다.

 

각 인종의 신학이나 신앙 형태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각자 자신들의 병리적 현상을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기독교 신학, 신앙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백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죄책감(guilty)을 덮으려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하고, 흑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분노(anger)를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하고, 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두려움(fear)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한다. 이렇게 각자 기독교를 전유하는 방식이 다르다 보니, 백인이 흑인 교회나 아시아인 교회에 가는 게 불가능하고, 흑인이 백인 교회나 아시아인 교회에 가는 게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도, 아시아인이 백인 교회나 흑인 교회에 가는 게 쉽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더 재밌는 현상은 지배계층은 백인들이 전유하는 기독교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흑인이든, 아시아인이든, 지배계층은 백인들처럼 '죄책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관찰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기독교가 점점 더 쇠락하는 이유는 역사와 몸에 맞지 않은 신앙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의 복음주의를 모방하고 있다. 복음주의는 '죄책감'에 쩔은 백인들에게 최적화된 기독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복음주의는 백인 남성 지배계급에 최적화된 기독교이다. 그래서 복음주의 신학은 '죄'를 강조한다. 일단 '인간은 죄인'이라는 명제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게 디폴트이다. 우월감에 젖어 있고, 그래서 자신은 지배계급에 속해야 하고, 그래서 '아래 사람들'(?)에게 저지른 나쁜 짓은 구원 행위이다. 이런 구조의 신학은 사실 한국인들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신학이며 신앙의 옷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허영심'이라는 게 있다. 사람들은 피지배계층으로 사는 것보다 지배계층으로 사는 것을 선호한다. 이것은 평범한 서민들도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이야기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드라마에서 재벌 이야기, 예쁘고 잘 생기고 잘 나고 성공하는 이야기에 더 흥미를 가진다. 그런 것처럼, 신앙도 이왕이면 지배계급인 백인들이 형성해 놓은 복음주의를 선호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그렇게 살고 싶은 욕망의 반영이고,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 이상 지배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미국의 복음주의를 모방한 한국의 대형교회를 선호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쇠퇴하는 이유는 다방면으로 살펴봐야 하겠지만, 분명한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가 심리적 병리 현상을 달래는 데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기독교 신앙이 그러한 심리적 병리 현상을 남몰라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런 병리적 현상을 달래고 치유하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심리 기저에 있는 병리적 현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를 자신들의 병리적 현상을 달래는 데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원래 가진 '전복성'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소 잡는 데 쓰는 칼을 닭 잡는 데만 쓰는 것과 같다. 우리 시대는 소를 잡아야 하는 상황인데, 손에 쥔 칼로 닭만 잡고 있다면, 칼의 쓰임새가 너무 축소된 것이고 아까운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