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사랑하지 않아: 탈교회 현상]

 

발음하기도 쉽지 않은 '어반자카파'의 노래 '널 사랑하지 않아'가 있다. 이별 노래다. 슬픈 노래다. 긴 노래 가삿말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가사가 전하는 핵심 내용은 이거다. "널 사랑하지 않아. 그냥 그게 전부야."

 

사랑하지 않기에, 헤어진다는 것 때문에 마음 아프지도 않고, 상대방이 눈물을 흘려도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다.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 싶지 않고, 더군다나 용서해 달라는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매달려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사랑할 수 있는 수많은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

 

상대방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의 기준은 '사랑함'이다. 그래서 어떤 환경이나 조건을 잘 만들어 놓으면 상대방은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갖는다. 사랑의 조건이나 환경을 만들었는데도,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조바심이 난다. 화도 난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사랑하지 않음'이 기준인 사람에게는 아무리 사랑의 환경이나 조건이 조성되었다 하더라도, 사랑할 마음이 없다. 그 사람의 기준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음'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라는 저서에서 '무(nothingness)'에 대하여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인간은 존재를 기준으로 무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무는 존재의 반대, 존재의 부정, 존재가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무는 존재를 기준으로 생각할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게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존재를 기준으로 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무 자체를 생각해 보려고 했다. 무 자체를 생각하면, 존재를 기준으로 해서 무를 생각할 때와 다른 생각이 가능하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은 이런 것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저출산 문제가 아주 심각한 사회 문제이다. 그렇다 보니, 정부는 이런 저런 정책을 통해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정부가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 내놓은 정책들은 모두 '출산'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출산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제거하거나, 출산을 장려할 수 있는 정책들이 잘 정비되면 출산율이 높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기준을 바탕으로 진행하는 정책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가 삶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람한테 아무리 사랑의 환경과 조건을 인위적으로 조성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게 되지 않는 것처럼,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는 것이 삶의 기본 바탕인 사람한테 아무리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 준다고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

 

왜 교회가 쇠퇴하는가? 왜 기독교가 쇠퇴하는가? 사람들은 그 이유를 여러 군데서 찾는다. 가장 그럴싸한 이유는 교회가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목회자들이 부도덕 하고, 교회가 사회보다 못한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개선하면 다시 교회는 부흥할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의 역사가 임하면 교회는 다시 부흥하거라 믿고,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얼마전 미국의 켄터키주 소재 애즈베리 대학교에서 나타난 부흥 현상 같은 것에 고무된 반응을 보인다. 저런 현상이 릴레이처럼 발생하면 교회의 부흥이 다시 활기를 되찾을 거라고 믿는다.

 

왜 교회가 쇠퇴하는가? 왜 기독교가 쇠퇴하는가? 사실 이유는 너무도 간단한다. 널 사랑하지 않아,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 이와 같이, "교회를 가고 싶지 않아!"가 답이다. 기준이 바뀌었다. '교회를 가야지'가 기준이었다가, 이제는 '교회를 가고 싶지 않아'가 기준이 되었다. '교회를 가야지'가 존재라면, '교회를 가고 싶지 않아'가 무이다. 존재에서 무로 그 기준이 바뀌었다. 예전에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무조건 낳아야 한다는 것이 삶의 기준이었다면, 요즘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기준이 된 것처럼, 기준이 바뀌었다. 그냥, 사람들은 교회를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교회를 가고 싶지 않은 게 기준인 사람들에게 아무리 교회 다니기 좋은 환경과 조건을 조성해 준다고 해도, 즉, 교회가 사명을 잘 수행하고, 목회자가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고, 사회보다 높은 문화 수준을 유지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교회에 오지 않는다. 왜? 그냥, 교회 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가고 싶도록 만들 수 있을까? 이것은 '교회'라고 하는 사회의 한 부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전체를 들여다 보며, 사회 전체가 생각의 전환을 이룰 수 있도록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1997년 IMF 사태 이후로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깊숙이 편입되면서 사회 사체가 변했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은 사회를 '총체적인 효율적 시스템화' 시킨다는데 있다. 이것은 다양성을 말살하고 모든 것을 획일화시키는 시스템이다. 개인이 총체적 시스템의 효율적 부품으로 기능할 뿐이지, 그 시스템 바깥에서 자율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구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스템의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자신의 인생을 효율적으로 조직화시키지 않으면 뒤처지고 먹고 살기 힘들다는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시스템 안에서 잘 작동하도록 다그친다. 누가 착취하지 않아도 스스로 착취한다.

 

살며, 생각하며, 사랑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일, 그리고 누군가와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 친밀한 관계를 갖는다는 일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출산율도 낮을 수밖에 없고, 동시에 교회가 쇠퇴할 수밖에 없다.

 

사회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교회가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해도 교회는 계속해서 쇠퇴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다시 사는 방법은 교회 안에서 '우리들만의 리그'를 형성할 것이 아니라 교회 밖으로 나아가 사회 자체를 변혁시키려는 '투쟁'을 해야 한다.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제국에 맞서는 하나님 나라 체제이다. 제국은 '총체적인 효율적 시스템화'를 추구한다. 그래야 통치가 용이하고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거기에 맞서 하나님의 생명의 풍성함, 즉 생명의 다양성과 자유로운 번성을 이루려 노력했다.

 

나쁜 교회와 좋은 교회의 차이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제국에 협력하는 교회는 나쁜 교회이고, 제국에 저항하는 교회는 좋은 교회이다. '총체적인 효율적 시스템화'를 용이하게 하는 교회는 나쁜 교회이고, 거기에 저항하여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다양한 인생과 생명이 풍성하게 존재하도록 그 길을 열어주는 것이 좋은 교회이다.

 

교회 다니고 싶지 않아. 탈교회 현상. 이것은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다.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교회의 부흥은 없다. 그냥 그렇게 교회는 계속 문을 닫을 것이다. To be or not to be, 이것이 문제다.

 

(이 글은 충코의 철학 ‘저출산의 근본 이유 고찰’에서 영감을 얻어 쓴 글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