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것은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바다의 가능성은 수수께끼처럼 난해하다. ...인류는 깊은 심연의 바다보다 우주를 훨씬 더 많이 방문했다. 바다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바다를 존중하지도 않는다. 바다를 약탈하고 더럽히면서 죽이고 있다. 우리 자신도 함께."

(탄소로운 식탁, 232쪽)

 

우리교회에서 진행하는 [기후변화프로젝트]에서 읽는 책 <탄소로운 식탁>에서 인용하고 있는 자크 아탈리의 글입니다. <탄소로운 식탁>에서 저자는 우리의 먹거리와 탄소배출의 상관관계를 살피고 있는데, 축산업과 농업, 그리고 어업 순으로 상관관계를 보여줍니다.

 

우리 식탁에 고기가 올라오기까지, 우리 식탁에 곡물이 올라오기까지, 그리고 우리 식탁에 해산물이 올라오기까지, 우리는 그냥 무심히 먹고 즐거워하지만, 우리의 먹거리가 생산되는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하게 탄소를 배출하는 구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먹으면서 지구를 죽이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이대로 가다 가는 어느 시점, 우리는 더 이상 먹지 못하고 굶어 죽거나, 아니면 그냥 갑작스럽게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먹을 것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만큼 지구가 황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먹는 것 때문이죠. 물론 이러한 일을 상상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고 두렵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망치기만 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위의 문장에 나와 있습니다. "바다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바다를 존중하지도 않는다. 바다를 약탈하고 더럽히면서 죽이고 있다." 바다 뿐이겠습니까? 무엇이든,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려 하니, 그 대상에 대하여 경외심을 갖지 않습니다. 경외심이 없으니 존경도 없습니다. 존경이 없으니 마구 착취하는 것이죠.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했지만, 이것은 ‘앎’에 대한 왜곡을 낳았습니다. 왜 알려고 할까요? 우리는 그동안 앎에 대한 이유를 왜곡하며 살았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앎을 통해서 상대방을 통제하고 착취하고, 상대방을 통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썼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앎'을 내세워, 인간을 파괴하고 착취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지난 세월 우리가 지내온 전형적인 근대의 풍경입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야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안다’는 뜻의 히브리어’야다’는 아주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마치 남녀가 깊이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요. 깊은 사랑 안에 거하는 것만큼 성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성경에서 '안다'라는 말을 '야다'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앎이란 경외를 불러오는 것이기 때문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룩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앎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도 하나님을 앎의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일은 '경외'로운 일입니다.

 

상대방을 인식하고 알아간다는 것은 상대방을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앎은 경외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경외가 있어야 상대방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생기는 법입니다. 존경의 마음의 있어야 상대방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와 더불어 생명을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폭력과 착취도 들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기후위기를 겪고 있습니까? 앎에 대한 인식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는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곡과 무관심이 기후위기를 낳은 근본 원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야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에 대하여 안다면(야다), 그것은 경외이어야 마땅합니다. 앎을 통해서 경외 이외의 다른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앎이 아니라고 말 수 있습니다.

 

경외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앎은 앎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알려고 하는 자는 경외를 먼저 간구해야 합니다. '앎'이 알량한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우리 시대에, 앎에 대한 구도적 자세를 회복하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구원과도 같습니다. 안다는 것은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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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