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로서의 자본주의와 지옥으로서의 모더니티]

 

이것은 발터 벤야민의 사유이다.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지구 역사에 나타난 가장 강력한 종교로 파악한다. "자본주의는 제의로만 이루어진, 교리도 없는 종교"이다. 자본주의는 '걱정'을 보편화한다. 걱정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지닌 보편적인 병리현상이다. 이 종교(자본주의)는 신학도 없고 은총도 없는 무자비한 종교로서 종국에는 신까지도 죄(부채)에 끌어들인다. 

 

자본주의는 독자적으로 탄생한 종교가 아니다. 막스 베버처럼 벤야민도 자본주의는 기독교에서 기생적으로 발전된, 기독교 신앙의 환속화(세속화)된 종교라고 말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지만, 벤야민은 더 날카롭게 말한다. "신은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 속에 편입되었다."

 

벤야민은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와 함께 지옥으로서의 모더니티를 말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 모더니티, 현대 시대는 지옥이다. 왜 지옥인가? 벤야민은 이렇게 진단한다. "문제는 세계의 모습은 가장 새로운 것에서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점, 가장 새로운 것이 항상 동일한 것으로 머문다는 점이다. 이것이 지옥의 영원성을 구성한다."

 

자본주의와 모더니티. 종교와 지옥. 이러한 체제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모든 종교는 자본주의라는 종교 안으로 포획될 수밖에 없고, 뭔가 아무리 새로운 것을 말하고 꿈꾼다고 해도 항상 동일한 것에 머무는, 시지프스 같은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리 새로운 것을 말해도, 아무리 새로운 것을 행하여도 금방 진부하고 지루해지고 만다. 존재가 종교(자본)과 지옥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는 기독교적인 자본주의일 뿐이다. 복음주의가 가진 신학의 부재, 그리고 모든 것을 죄(부채)로 빨아들여 죄의식/부채의식을 갖게 만들어, 열심을 조장해 부채(죄)를 갚게 만드는 메커니즘, 그리고 대속의 희망(부채를 갚을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 넣어,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 복음주의가 기독교적 자본주의일 뿐이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신학적 과제는 너무도 자명하다.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와 지옥으로서의 모더니티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어떻게 자본주의와 지옥에 포획된 기독교가 그 결박을 풀고 나올 수 있을 것인가. 기독교는 어떠한 미래를 제시할 것인가.

 

벤야민을 인용한 아감벤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하여 속죄가 아니라 죄로, 희망이 아니라 절망으로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는 세계의 변혁이 아니라 세계의 파괴를 목표로 한다." 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계속 파멸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문장이다. 자본주의와 지옥이 이 세상의 체제를 이루고 있는 한, 우리의 운명은 필경 파멸이 될 수밖에 없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예루살렘이 파괴될 것을 예견하시며 슬피 우시던 예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19세기에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했고, 20세기에 푸코는 인간의 사라짐(이성의 죽음/주체의 죽음)을 선언했다. 신이 사라지고 인간이 사라진 이 세상에 들어와 왕 노릇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지옥(모더니티). 그 어느때보다 신의 귀환과 인간의 귀환이 절실한 시대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손을 맞잡으시고 함께 귀환하는 시대를 꿈꿔본다. 신과 인간의 귀환. 그것은 온전한 신이시며, 온전한 인간이신, 메시아의 귀환이기도 할 것이다.

 

발터 벤야민,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조르조 아감벤, <세속화 예찬>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