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6. 14. 05:59

쉐마신앙

ㅡ 눈의 문화에서 귀의 문화로!

(창세기 11:27-12:9)

 

1. 창세기는 큰 이야기들로부터 시작한다. 천지창조의 이야기.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이야기. 노아의 방주 이야기(홍수 이야기), 그리고 바벨탑 이야기. 이러한 이야기들은 그냥 흥미거리로 써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들이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이라는 시에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2.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간다”는 말처럼, 공부를 해보면, 우리가 창세기의 첫 열 한 장에서 무엇을 읽고 가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색깔이 달라지는 것 같다. 그만큼 창세기 첫 열 한 장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고, 그것을 해석해 내는 일이 쉽지 않으며, 그것을 들여다볼 때 아주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분명한 것은, ‘내 눈에서 무엇을 읽어가든’ 그것이 너와 나 사이에 평화가 있는 해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창세기의 첫 열 한 장은 인간의 실존이 어떠한 것인지를 그림언어로 제시함으로써, 인간이 어떻게 하면 서로 죽이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레비나스 같은 철학자는 “You shall not kill me.”라는 윤리적 대전제를 만들어, 서로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타자의 윤리학’을 전개시키기도 했다.

 

4. ‘이게 뭐지?’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큰 이야기들이 쭉 나온 이후에, 뜬금없이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브람이다. 아브람의 이름은 ‘강한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브람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바로 전에,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의 이야기가 짧게 등장한다. 데라는 아브람의 아버지다. 아브람은 그의 아버지 데라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를 떠난다.

 

5. 인간은 어린 시절이 중요하다. 어린 시절 무엇을 경험했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 성경은 아브람의 어린 시절에 대한 정보를 많이 제공하지 않고 있다. 창세기 11장 27~32절에 걸친, 아주 짧은 정보를 통해서 아브람의 어린 시절을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아브람의 아버지는 데라이고, 데라는 아들 셋을 낳았는데, 첫째가 아브람이었고, 둘째가 나홀이었고, 셋째가 하란이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데라의 셋째 아들, 즉 막내 아들이 일찍 죽었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한 곳은 그들의 고향 갈대아의 우르였다.

 

6. 그들의 결혼 이야기도 나온다. 첫째 아들 아브람은 사래와 결혼을 했는데 자식이 없었고, 둘째 나홀은 밀가나와 결혼을 했는데, 밀가나는 하란의 딸이었다. 근친결혼이 이루어진 듯하다. 이것은 고대근동 지방에서 평범하게 발생하던 일이었다. 근친결혼, 계대결혼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고대인들의 가족 문화 중 하나였다. 이야기는 사래에게 집중된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아들 아브람 가족과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계획이다. 아마도, 둘째 아들 나홀 가족은 그냥 갈대아 우르에 계속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7. 그런데, 원래 계획이 틀어지는 정황이 아주 짧게 나온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던 데라는 하란에 이르러 그 마음을 바꾸고 그냥 하란에 정착해서 산다. 그리고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하란 땅에서 죽는다. 아버지 데라가 왜 가나안 땅으로 가는 원래 계획을 포기하고 하란 땅에 정착하여 거기서 죽을 때까지 살았는 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다만 여호수아 24장에서 여호수아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세겜에 모아놓고 마지막 설교를 할 때,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의 이름이 등장한다.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수 24:2).

 

8. 무슨 이유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란에 주저 앉아 살았다. 그리고, 여호수아에 의하면,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가지 못하고 하란에 주저 앉아 산 가장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는 우상숭배였다. 여기서 우상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우상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중간에 주저 앉히게 만드는 힘이고 유혹이다. 마음을 빼앗아 원래 집중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우상은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어떤 실체에도 덧씌워져서 힘을 발휘하는 어떤 세력이다.

 

9. 창세기 12장 1절은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의 계획을 물려 받는 장면이 분명하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 땅은 다른 곳이 아니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원래 가고자 했던, 가나안 땅이었다. 아버지 데라는 그 목적을 실현하는데 실패했지만, 아들 아브람 덕분에 그 목적을 달성한다. 이 지점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이제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어른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야말로, 아버지에게 종속된 추종자에게서 벗어나, 이제 독자적으로 삶을 꾸려가는 지도자가 된 것이다.

 

10. 추종자와 지도자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일까? 추종자는 눈의 문화를 가지고 있고, 지도자는 귀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상은 우리의 눈을 유혹한다. 우상은 눈의 문화를 발달시킨다. 눈에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그것을 추종하게 만든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에덴 동산에서 발생한 선악과 사건이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나타나 하와를 유혹한 것은 눈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가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11. 추종자들을 만들어 내어 그에게서 이익을 취하려 하는 자들은 모두 눈을 유혹하는 스펙터클을 생산한다. 화려하고 큰 것,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혹하게 만드는 것을 만든다. 우리 시대가 그렇다. 온갖 것들이 그렇다. 눈을 못 떼게 만든다. 우리의 눈을 붙잡아 두는 문화를 만든다. 눈이 즐거워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에 홀린듯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을 따라 간다. 우리는 추종자로 살아간다. 그냥 그 자리에 눌러 앉는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처럼.

 

12. 지도자는 그렇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그것의 추종자가 되지 않는다. 지도자는 귀의 문화를 따르는 사람이다.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하란 땅에 눌러 앉아 살지 않았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현대인이 가장 잘하는 것은 눈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무엇이 예쁜지, 무엇이 고급스러운 것인지 잘 안다. 그리고 무엇이 수치스러운 것인지 잘 안다. 현대인은 남의 눈에 미치지 못할 때 수치심을 느낀다. 그래서 남의 눈에 좋게 보이려고, 온갖 외형적인 것을 갖추기에 바쁘고 그것을 위해서 모든 비용을 쓴다.

 

13. 아브람이 강한 아버지에서 아브라함(많은 민족들의 아버지)으로 거듭난 이유, 이름이 바뀐 이유는 그가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서 추종자로 머물러 산 게 아니라, 고요한 가운데 들려오는 세밀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지도자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분명히 들렸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그러나, 에덴동산에 있던 하와와 아담(사람들)은 들리는 것에 의해서 행동하지 않고 보이는 것에 의해서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망했다. 눈의 문화보다 귀의 문화가 중요하다. 에덴동산은 그것을 알려준다.

 

14. 아브람이 왜 아브라함이 되어, 우리의 믿음의 조상, 즉, 우리의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특별히 눈의 문화가 거침없이 발전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귀의 문화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눈의 문화와 귀의 문화는 대척점에 서 있다. 눈의 문화는 휘황찬란하다. 그러나 귀의 문화는 고요함을 추구한다. 휘황찬란 한 곳에서는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 구절은 신명기 6장 4절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이것을 ‘쉐마’라고 한다. 구약성경은 쉐마신앙을 말하고 있다.

 

15. 하나님은 우리를 추종자가 아니라 지도자가 되라고 부르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을 최대한 멀리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여 우리를 그곳에 붙들어 놓으려고 한다. 데라가 하란을 떠나지 못한 이유는 그가 하란 땅에서 눈의 문화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하란은 우르로부터 북쪽으로 960km 떨어진 지역에 있는데,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최고로 발달한 상업도시였다. 왜 데라가 하란을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우상숭배에 빠졌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16.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눈의 문화가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요즘 시대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너무도 눈의 문화가 발달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믿으려 하지 않고, 배척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쉐마의 하나님’이시다. 귀를 기울여야 들리는 하나님이시다.

 

17. 실제로 현대인들이 가장 잘 못하는 게 귀를 기울이는 것 아닌가. I am listening. I am all ears. 이것은 내가 너에게 온전히 귀 기울이고 있다. 내가 마음을 온전히 너에게 두고 있다. 나는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라는 뜻이다. 우리 가운데 왜 그렇게 평화가 없는가? 서로가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자기의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나도 잘 못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상대방에게 가장 서운할 때가 언제인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을 때이다. 그러므로, 눈의 문화가 극도로 발달된 이 시대에, 우리가 주의하며 다시 되찾아야 할 문화는 귀의 문화이다.

 

18. 눈의 문화에 압도당한 이들은 그저 추종자가 될 뿐이다. 그러나 눈의 문화에서 벗어나 귀의 문화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할 줄 아는 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지도자가 될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어서, 그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존경받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삶을 살라고 부르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추종자가 되지 말고, 지도자가 되자. 보이는 것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들려오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가 되자. 그러기 위해서 오늘부터 당장, 핸드폰을 좀 내려놓고, 여러분이 사랑하고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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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6. 14. 05:57

페리코레시스를 간구하는 기도

(마태복음 28:16-20, 고린도후서 13:11-13)

 

주님, 삼위일체로 우리에게 오셔서 감사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믿고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이고 힘인지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다른 것에 근거해서 살아가지 말게 하시고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로 살아가게 하셔서

나의 삶과, 교회 공동체와 이 세상이 더욱더 생명력 넘치도록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 주옵소서.

더 간절하게, 더 진지하게, 더 유쾌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예배하겠사오니,

주여,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의 모습을 보여주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몸소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6. 14. 05:54

성령의 숨을 간구하는 기도

(사도행전 2:1-21)

 

주님,

성령강림절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우리를 이 자리에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잘 기억하여

이제부터라도 성령 없는 육신이 아닌

성령을 영원히 받은 새사람으로 거듭나서

생명의 영을 받은 사람답게

이해하며, 용서하며, 사랑하며, 생명을 풍성히 나누는

믿음의 자녀로 살게 하옵소서.

이 기쁜 소식을 아직도 모르고 여전히 육신 가운데서

죄의 고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는 자들이 되게 하시고,

생명력 넘치는 삶으로 성령이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주님,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도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도록,

우리의 소망이 되어 주옵소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 모든 역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6. 14. 05:52

사랑의 더듬이를 간구하는 기도

(행 17:22-31)

 

주님,

우리에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더듬이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그 더듬이는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받는 것을 경험할 때,

우리는 주님을 발견합니다.

주여, 우리의 삶이 날마다 주님 안에 있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삶은 사랑이 가득한 삶입니다.

사랑이 가득한 삶을 살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드러나고

그럴 때, 더욱더 우리의 삶은 생명이 가득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생명이 없어 힘들어하는 삶이 있다면,

주여, 우리에게 힘을 주사,

예수사랑으로 그 생명을 보듬게 하시고,

그 생명이 다시 힘을 얻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우리 삶 가운데 풍성하게 넘치게 하옵소서.

날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며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6. 14. 05:50

충분한 삶을 간구하는 기도

(요한복음 10:1-10)

 

우리의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선한 목자로 오신 주님,

우리도 주님처럼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부족한 삶이 아니라 풍성한 삶이 되게 하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은혜에 힘입어,

우리의 것을 나누며, 풍성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6. 14. 05:48

정확하게 사랑받기를 간구하는 기도

(마태복음 21:1-11)

 

주님,

종려주일에 우리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고통이 많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고통을 받으신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르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살아가지 못한 이들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고 불필요한 고통에 휩싸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간절한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데,

우리는 연약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삶을 고통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우리의 삶을 의미 있는 삶, 구원 사건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놓는 일을 신실하게 행하게 하옵소서.

그리할 때 우리의 삶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삶,

구원받은 삶, 그리고 구원을 베푸는 거룩한 삶이 될 줄 믿습니다.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낍니다.

반대로, 정확하게 사랑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말씀에 잇대어, 정확하게 사랑을 주고받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서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해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

구원의 사랑을 베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6. 9. 05:54

[장어와 한국교회]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한 번에 한 책만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책을 읽을 때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다. 물론 책들마다 장르가 다르다. 나 같은 경우도 문학책, 철학책, 역사책, 시집/소설, 신학책, 그리고 자기계발서류책 등을 동시에 읽어 나간다. 요즘 내가 읽는 책 중에 <나비처럼 읽고 벌처럼 쓴다>라는 비평수업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인이다. 일본인 저자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학문적 역량이 꽤 높다.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지식의 저력이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어 저작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축적된 지식의 저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은 한글로 된 저작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지 못한 까닭도 크다.

 

세종대왕 시대부터 한글이 쓰이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영향으로 한문으로 된 책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근대에는 일제의 영향으로 일본어로 된 저작이 상당수 축적되었다. 그래서 한국의 근대문학을 전공할 때도 일본어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한국 근대 문학은 일제강점기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는데, 그때 문인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한글뿐 아니라 일본어로 저작을 남겼다. 윤동주도, 이상도 그렇다. 그래서 한국 근대문학을 공부하는데 일본어는 필수다.

 

일본인이 쓴 책을 읽다 보면, 그들의 역사 경험과 한국인의 역사 경험은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지금 읽고 있는 비평수업 책인 <나비처럼 읽고 벌처럼 쏜다>에서도 그것이 드러난다. 일례로, 비평을 설명하면서 쓰기에 대한 수업을 진행할 때 예로 쓰이는 문학작품은 『금빛 여우』라는 작품이다. 여기에서 장어라는 주제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 장어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 어떻게 글쓰기에 반영하는 부분에서 일제강점기 시대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또한 1930년 전후의 신문 기사를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하자 장어의 영양이나 조리법 등에 관한 다양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이 항목의 첫머리에 인용한 것처럼 1930년에는 장어의 치어가 한국이나 중국에서 공중 운송되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조선’이나 ‘지나’라는 단어가 사용된 점도 포함해서 식민지주의 시대를 연상시키는 제목입니다. 아무래도 장어는 당시 사람들에게 제국주의적 권력을 사용해서라도 손에 넣고 싶을 만큼 매우 관심 있는 식재료였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155-156쪽).

 

만약 한국인이 이와 같은 비평수업 책을 저술했다면 어땠을까? 동일하게 장어에 대한 주제로 비평수업을 진행할 때, 일제감정기에 저술된 문학작품에서 그 예를 가지고 왔다면, 지금 일본인이 서술한 것과 완전히 다른 역사 경험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장어 때문에 제국주의적 권력에 희생당한 조선인들의 애환이 담긴 작품이었을 것이다. 동일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한쪽에서 장어는 제국주의적 권력을 사용해서라도 손에 넣고 싶을 만큼 매우 관심 있는 식재료였고, 다른 한쪽에서 장어는 착취를 연상시키는, 치가 떨리는 식재료였을 것이다.

 

제국주의를 경험한 사람들의 역사인식과 식민지를 경험한 사람들의 역사인식이 같을 수 없다. 경험이 다르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다른 역사경험을 가진 두 나라, 일본과 한국이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을 같이하며 동반자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정말 쉽지 않아 보인다.

 

별생각 없이 맛있게 먹었던 장어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식탐을 채우기 위해 제국주의적 권력을 조선인들에게 휘둘렀다는 역사를 알게 되니까 장어를 더 이상 맛있게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민족적 저항의식이 생겨나는 듯싶다. 하지만, 내가 별 시답지 않은 장어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로 고민한 것은 ‘교회’이다. 물론 이것도 직업병이겠다.

 

한국교회는 왜 이렇게 뒤틀려 있을까? 장어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은 한국교회에는 한국인의 역사경험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역사경험은 결코 제국주의자들과 같지 않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제국주의자들의 경험이 반영된 신학과 실천이 더 주류를 차지한 것 같다. 약자의 경험이 더 반영된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강자의 경험이 더 반영된 교회 같다는 뜻이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빌리 그래함 목사 한국 전도대회 50주년 기념 집회’가 열렸다. 그 행사에 약 7만명 정도가 ‘동원’됐다. 그 대회를 주관한 교회들이나 목사들, 그리고 거기에서 선포된 ‘메시지’를 보면, 여전히 전도방식이 ‘제국주의적’이다. 무엇보다 목적을 위해서 교인들이 ‘동원’되는 점이 그렇다. 또한 내가 그 기사를 보면서 가장 아쉬워했던 것은 그 많은 인원이 여러가지 이유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곳에 ‘동원’됐다면 어땠을까 였다. 그랬다면 그것은 ‘동원’이 아니라 ‘참여’가 되었을 것이다.

 

지난 4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마침 세월호 9주년 기억예배가 있어서 안산생명안전공원에서 열린 예배에 참석했다. 약 500명 정도가 참석했다. 주최 측에서는 이것도 많은 인원이라며 기뻐했다. 더군다나 예배를 방해하는 세력이 없어서 좋았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왜 사람들은 이곳에 생명안전공원이 세워지는 것을 싫어햐나고. 그랬더니, 대답이 아주 난감했다. 땅값 떨어지는 것을 걱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 같이 먹고 살기 힘든 시대에 그러한 걱정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그런 걱정을 덜어주는 정책을 펴면 될 것이다.

 

다만, 그곳에 한국교회가 합심하여 빌리 그래함 목사 한국 전도대회 50주년을 기념하는 대신에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바로 그곳에 7만명이 함께 모여 예배 드렸다면, 세월호 문제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비화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벌써 사건규명을 명확하게 하여 책임자 처벌과 향후 안전대책, 그리고 유가족 돌봄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 빌리 그래함 목사가 뭐라고 그 사람의 전도대회를 기념하기 위해서 수억원을 써가며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한국사회와 교회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본인이 쓴 비평수업 책 한 권 읽으면서 나의 생각은 왜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기까지 도달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다시 사는 길은 우리 한국인들의 역사적 경험이 충분히 반영된 신학과 실천을 토대로 교회가 세워지고 미래를 펼쳐 나아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들의 역사경험을 무시한 채 교회가 세워지면, 교회는 여전히 유체이탈 교회로 ‘영혼구원’ 타령만 하게 될 것이다. 교회가 말하는 ‘영혼’이란 도대체 어떤 영혼인가. 그러나 저러나, 장어를 먹기 힘들게 됐으니, 기력을 어떻게 보충해야 할지, 갑자기 막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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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6. 6. 02:52

삼위일체와 우리의 미래

(마태복음 28:16-20, 고린도후서 13:11-13)

 

1. 이게 무슨 곡인지 맞춰 보라. 

강강술래.mp3
2.76MB

 

2. 강강술래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강강술래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강강술래는 국가무형문화재 제 8호이며, 2009년 9월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국가무형문화재 1호는 종묘제례악이고, 5호에는 판소리가 지정되어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목록을 보면 현재 150개 정도 지정되어 있다. 강강술래가 가진 가치와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고 크다. 강강술래는 주로 전라도 도서지역인 해남·무안·진도·완도 등지에서 음력 8월 15일 밤(추석)에 예쁘게 차려입은 부녀자들이 공터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둥근 원을 만들어, '강강술래'라는 후렴이 붙은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면서 뛰는 놀이이다.

 

3. 다음과 같은 재미난 유래도 있다. “정유재란의 명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이 수병(수군)을 거느리고 해남의 우수영에서 왜군과 대치할 때의 일화가 있다. 조선 수병들이 매우 많은 것처럼 보여 왜군이 함부로 침입해 들어올 수 없게 하기 위하여 부녀자들로 하여금 남자 차림을 하고 떼지어 올라가 옥매산(玉埋山) 허리를 빙빙 돌게 했다. 그러자 바다 위의 왜군들은 이순신의 군사가 엄청나게 많은 줄로 알고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 버렸다 한다. 싸움이 끝난 뒤 부근의 마을 부녀자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강강술래'라는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즐기던 것이 바로 오늘날의 강강술래라 한다. 따라서 한자어 '강강수월래(強羌水越來)'는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고 해석된다는 것이다.” 강강술래를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연관지어 설명한 유대이다.

 

4. 그러나 백과사건의 설명에 따르면 강강술래가 이순신 장군의 의병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강강술래>는 원시시대의 부족이 달밤에 축제를 벌여 노래하고 춤추던 유습(풍습)에서 비롯된 민속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대로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달의 운행원리에 맞추어 자연의 흐름을 파악하였고, 따라서 우리 나라 세시풍속에서 보름달이 차지하는 위치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즉, 달이 가장 밝은 추석날이나 정월대보름날이면 고대인들은 축제를 벌여 춤과 노래를 즐겼고, 이것이 정형화되어 <강강술래>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승된 <강강술래>를 이순신이 의병술(擬兵術)로 채택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널리 보급되고 더욱 큰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5. 삼위일체 주일이다. 삼위일체 주일에 강강술래에 대해서 이렇게 길게 말한 이유는 삼위일체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예가 우리나라 전통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정말 다행이고 축복이다. 기독교의 신론은 유일신론도 아니고 다신론도 아니다.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두 개의 문화가 있다. 히브리 문화와 그리스 문화다. 히브리 문화는 유일신 문화다. 그리스도 문화는 다신론 문화다. 이후에 그리스 신론은 신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의해서 매우 철학적이고 사변적으로 변하여, 기독교에 영향을 미친다.

 

6.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의 신앙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점은 신론이다. 기독교 신론은 유일신도 아니고, 다신론도 아니다. 기독교의 신론은 삼위일체론이다. 기독교 신론을 까닥 잘못 해석하면, 유일신론에 빠지거나 삼신론(다신론)에 빠질 수 있다. 4세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서 삼위일체론이 확립되기 전까지, 300여년 동안 기독교는 유일신론도 아니고 삼신론도 아닌, 삼위일체론을 세우기 위해서 무한한 노력을 했다.

 

7.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론을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삼위일체론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은 용어인데, 이후의 신학자들이 철학적/신학적 사유를 통해서 만들어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오해이다.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세워 나간 교부들이나 신학자들,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는 삼위일체론을 발명한 것이 전혀 아니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가 삼위일체론을 말하는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 경험이 삼위일체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스스로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만큼, 보여주시는 것만큼만 알 수 있다. 그것을 계시(revelation)이라 한다.

 

8.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경험했다. 그렇게 경험한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사건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삼위일체로 드러낸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유일신론도 아니고 다신론도 아닌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9. 삼위일체를 말할 때 기독교인들조차도 헷갈려하는 것은 이것이 수학놀이인줄 안다는 것이다. 1+1+1=1. 이렇게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쉽게, 삼위일체론은 비합리적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1+1+1이 1이 될 수 있냐고 말이다. 1+1+1=3이 되어야지. 이것은 삼위일체론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고, 삼위일체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방증일 뿐이다.

 

10. 삼위일체는 수학이 아니라 교제(fellowship/relationship)를 나타내는 말이다. 삼위일체는 신적 교제이다. 그리고 피조물과의 교제이다. 삼위일체가 품고 있는 근본적인 교제(fellowship)의 의미를 담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인 용어는 ‘perichoresis (페리코레시스)’이다. 이것은 그리스어이다. 초대교회의 신실한 교부들이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을 포착하여 표현한 언어가 ‘페리코레시스’이다. 초대교회는 그리스어를 썼다. 7세기 이후 이슬람의 등장과 함께 동방교회 지역이 모두 이슬람화 되면서, 그 이후 교회의 언어는 라틴어로 바뀌었지만, 그 이전까지 교회의 주류 언어는 그리스어였다.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씌어진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바꾼 것을 셉투아진트(Septuagint, 70인역)라고 한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어 구약성경을 봤다.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에 인용한 구약성경의 구절들은 모두 그리스어 구약성경인 셉투아진트이다.

 

11. 교부들이 삼위일체가 무엇인지를 그림언어로 포착한 것이 ‘페리코레시스’이다. 내가 위에서 강강술래를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페리코레시스의 뜻은 ‘빙글빙글 돌면서 춤춘다는 뜻’이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강강술래’가 딱 페리코레시스이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이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려면, 한 사람이라도 슬픔과 고통에 짓눌려 주저 앉아 있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게 슬픔에 주저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위로하고, 안아주고, 그가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 기쁨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12. 페리코레시스는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깊이 침투하는 사건을 말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깊이 침투하여, 슬픔에는 슬픔으로 안아주고, 기쁨에는 기쁨으로 반응하여, 서로가 서로의 삶을 깊이 보듬어 주며, 그 무한한 기쁨과 사랑을 서로 공유하며 손에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강강술래 춤을 추는 것이, 페리코레시스이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삼위이면서 하나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림언어로 포착한 것이 페리코레시스이다. 우리의 용어로는 강강술래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13. 오늘 우리는 삼위일체주일을 맞아, 주님의 말씀을 받아, ‘삼위일체와 우리의 미래’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살펴보고 있다. 우리가 오늘 받은 말씀은 그래도 명시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드러내는 말씀들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선교적 사명을 전달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사명을 전달하고 있고,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린도교회 공동체를 위로하고 축복하고 있다.

 

14. 삼위일체는 사변(상상물)이 아니라, 실재이다. 우리의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실재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래도 소망을 가지고, 힘을 내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손에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시며 우리에게 그 기쁨과 사랑을 쏟아부어 주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힘을 낼 수 있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것, 이 세상을 감싸 안고 있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이다. 무한한 사랑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현실을 보는 것이 믿음이다.

 

15.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페리코레시스의 모습으로 존재하시고, 우리에게 그러한 모습을 계시해 주신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고 이유이다. 슬픈 일을 당했거든 그 슬픔 때문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망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 인간의 존재가 가장 낮아지는 순간은 실패했을 때, 병들었을 때, 육신이 약해졌을 때, 그리고 죽음을 맞딱드렸을 때 등이다. (사랑과 생명이 적을때) 그런 슬픔 가운데 처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죄책감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좀 더 당당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페리코레시스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무한한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16. 우리의 미래가 어디에 달려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로서의 우리이기도 하고, 개인으로서의 우리이기도 하다. 우리 공동체의 미래, 내 삶의 미래가 어디에 달려 있는가.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알고 사랑하고, 경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페리코레시스이시구나. 강강술래이시구나. 저렇게 사랑과 기쁨이 넘치시구나. 저렇게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보듬어 안으시며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는구나. 이것을 알고 경험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공동체의 미래와 우리 개인의 삶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17.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은 종말론적이다. 지금 여기에서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의 기쁨과 생명을 충만히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아픔과 고통에 처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온전히 위로 받기 전까지 우리의 구원은 유보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슬픔과 고통이 없다고, 나는 구원받았다고, 나만 기뻐할 수 없다. 구원은 관계적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가 있으면 나의 구원도 아직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향해 나가가고 있는 중 일뿐이다. 선교란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에서 소외되는 자가 없도록 돌보고 그들을 기쁨과 생명으로 초대하는 일이다. 구원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이웃에게 달려 있다. 이웃의 구원이 곧 나의 구원이다. 구원은 이렇게 철저히 관계적이다.

 

18. 우리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가 드러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게 부흥 아닌가? 우리 사회(세상)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가 드러나는 사회(세상)가 되길 소망한다. 그게 좋은 사회(세상), 사람 사는 사회(세상), 행복한 사회(세상) 아닌가? 우리의 개개인의 삶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 강강술래가 드러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게 정말 의미 있는 삶, 거룩한 삶, 구원받은 삶, 행복한 삶이 아닌가? 삼위일체에 우리의 모든 미래가 달려 있다. 그러니, 우리 더 간절히, 더 진진하게, 더 유쾌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예배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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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삼위일체 주일을 보내며]

 

삼위일체 주일(Trinity Sunday)입니다. 기독교가 시작된 지 벌써 2천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가 정립된 지도 1700년이나 지났습니다. 이렇게 어머어마한 시간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낯설어 합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가장 큰 이유는 독특한 신관(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 신관입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정말 놀라운 신관입니다. 한 하나님을 세 위격의 관계로 파악하는데, 그것에 대한 사유가 깊고 신비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집요하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쉽게 다른 종교, 또는 다른 사상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의 독특한 하나님 사유를 잘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기독교가 시작된 지 벌써 2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낯설어 합니다.

 

삼위일체 주일을 맞아 예배를 구성하면서 삼위일체 주일에 부르는 찬송가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각각에 대한 예배 찬송을 찾아볼 수 있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예배 찬송은 없었습니다. 그만큼 아직도 우리의 일상 신앙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사유가 별로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장 시급한 일 중 하나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예배 찬송을 만들어 보급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가톨릭으로부터 종교개혁을 해서 개신교를 따로 분리하여 처음으로 한 일은 예배 의식을 바꾼 것입니다. 예배는 신앙의 일상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그 예배 안에서 무엇을 고백하고 무슨 예식을 행하느냐가 곧 우리의 신앙생활을 규정해 줍니다. 예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고백되지 않고, 고백할 수 있는 찬송이나 기도문, 또는 다른 예식이 없으면, 우리는 그만큼 삼위일체 하나님과 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죠.

 

기독교에서 삼위일체 신학을 정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런 신앙 고백을 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는 ‘고난과 죽음과 하강과 부활’을 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우리는 고백하고 신앙합니다. 바로 이러한 신앙고백은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Godhead/신적인 존재)’에게만 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만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예배를 하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에 예배하는 행위만큼 헛된 행위가 없고, 자신이 하나님이 아닌데 예배 받으려고 하는 행위만큼 악한 행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예배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둘 중 하나의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가 하나님(Godhead)이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우상숭배자이거나. 그러나 우리가 고백하다시피, 그리스도인은 우상숭배자가 아니라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온 교리가 삼위일체 신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학을 말할 때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는 신학은 사변적으로 고안된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는 이런 게 없는데 무슨 사상을 만들어 내듯이 창작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아주 큰 오해이고 불경한 말입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부를 비롯해서 현대의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고백’이지 ‘창작’이 아닌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이 창조해낸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삼위일체로 계시하셨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신이 보여주시는 대로 그것에 대해서 정직하게 고백을 할 뿐이지, 뭔가를 꾸며내는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삼위일체로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보여주시는 대로 고백을 할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적 사고를 방해하고 왜곡해온 것은 유대교의 유일신론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바탕으로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제시한 일자(一者) 신관입니다. 이러한 신관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관을 가부장적으로 이해하게 하거나 종속론적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가부장적인 신관은 존재에 위계를 만들고, 종속론적인 신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열등한 것을 만듭니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삼위일체론은 성부, 성자, 성령의 용어가 왜 사용됐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신적인 본질을 성부와 성자가 공유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지, 아들이 아버지에게 종속되고, 아들이 아버지보다 열등한 지위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전혀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골치 아픈 수학 놀이가 아닙니다. 1+1+1=1이라는 괴상한 방정식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숫자 놀음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것이고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무한한 신적인 존재가 이 땅 위에 있는 유한한 존재와 어떠한 식으로 관계(fellowship)를 맺고, 어떠한 식으로 구원을 베풀고, 어떠한 식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지에 대한 풍성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신실한 신학자들은 한 입으로 말합니다. 현재 기독교가 이렇게 쇠퇴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삼위일체 신론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유와 신앙은 그만큼 기독교의 존폐를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독교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가 함께 한 마음으로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열심히 탐구하고 고백하고 신앙하겠다’고 말이죠. 바로 이러한 다짐에 기독교 신앙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을 가슴 깊이, 진지하게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도마복음/영지주의문서]

 

'도마복음 연구회 창립'이 있는 이 때에, 나도 그냥 한 마디 보태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부족한 글이지만 그냥 편하게 읽어주시면 좋겠다.)

 

유학의 가장 큰 장점은 견문을 넑힐 수 있다는 것이겠다. 나도 유학을 나오기 전까지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유학 나와서 알았다. 에모리에서 공부하면서 방대한 신학연구물에 놀라서 압도당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내가 키에르케고르를 정말 좋아했는데, 미국에 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키에르케고르 연구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되어 있었다. 내가 이 틈에서 무슨 학문적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엄청 고민을 하면서 키에르케고르 전공에 대한 꿈을 접은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은 약간 후회한다. 그냥 키에르케고르 전공자로 나갔으면 지금쯤 내 삶은 또 다른 궤도를 달리고 있을 지 모르겠다. 아마튼, 나는 여전히 키에르케고르를 좋아한다.

 

'나그함마디(The Nag Hammadi Library)' 문서에 대해서 '한 마디'도 들어보지 못한 내가,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유학을 나와서이다. 그리고 조금씩 나그함마디 문서를 들여다보았고, 영지주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나그함마디 문서와 영지주의에 대해서 이해를 높이게 된 것은 일레인 페이절스(Elaine Pagels)의 책을 읽으면서부터였다. 그 시기가 2009년도,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이다.

 

사해사본과 나그함마디 문서는 비슷한 시기에 발견되었다. 에모리 유학 시절 내 지도 교수였던 캐롤 뉴섬(Carol Newsom)은 사해사본 중 지혜문헌을 연구한 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비슷한 시기에 발견된 두 문서는 비슷한 시기의 학자들을 통해 동시에 연구되었다. 물론 정통 기독교에서는 사해사본의 가치를 더 높게 보고,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나그함마디 문서를 들여다본 사람은 그 문서가 가지고 있는 '놀라움'에 대해 무시할 수 없었다. 일레인 페이절스는 나그함마디 문서 전문가로서 프린스턴 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을 했고, 영지주의를 positive하게 해석하여 소개한 학자로 유명하다. 나는 페이절스 교수의 <The Gnostic Gosples>을 읽으며, 영지주의에 한 빗장을 풀 수 있었다.

 

한국에 도마복음/영지주의/나그함마디 문서를 대중들에게 소개한 사람은 도올 김용옥이다. 그분이 하버드에서 공부할 때, 하버드에서는 사해문서와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한 연구가 붐을 이루었다. 위에서 언급한 캐롤 뉴섬이나 일레인 페이절스도 모두 하버드 출신 박사들이다. 그리고 나이 때도 비슷하다. (페이절스가 가장 선배다.)

 

14년 전부터 영지주의 문서를 읽었고 관심을 두었지만, 사실, 함께 이야기 나누며 생각을 전개시켜 나갈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주변에 영지주의 문서를 읽은 목사 동료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성경 읽고 연구하기도 바쁜데, 정통에 의해 정죄 당한 영지주의 문서를 읽는 일은 awkward 한거다.) 그래서 혼자 읽고, 글을 조금 쓰고 했다. 물론 아무도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한 번은 애틀란타에 김세윤 교수가 와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영지주의 문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세윤 교수의 강연장에 가서 강연을 들으며 마침 김세윤 교수가 옆자리에 앉아 계셔서 영지주의 문서에 대해서 질문한 적이 있다. 그때 단칼에 거절을 당했다. "목회자들이 영지주의 문서에 관심을 둘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가 바울신학의 권위자로서, 당연히 그렇게 이야기할 수 밖에없었겠지만, 김세윤 교수와 영지주의 문서에 대해서 대화를 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정통 기독교 라인에 있는 신학자들을 읽었고, 나름대로 신학에 대한 전반적인 지성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영지주의 문서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영지주의 기독교가 왜 정통 기독교에게 밀려나게 되었는지를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아주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지주의 기독교가 정통 기독교에게 정치적으로 밀려났다고 하는 것이다. 페이절스 교수의 책을 보면 그러한 정황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실제로 영지주의 기독교와 정통 기독교 간의 치열한 정치 싸움이 있었다. 특별히 영지주의 기독교 집단은 사도권과 교권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그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계속 강조했다. 게다가 정통 기독교는 대리인(사도, 사제)을 통해 하나님께 다가설 수 있지만, 영지주의자들은 직접 하나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정치 싸움이 심했다.

 

정통 기독교라고 자부하는 교회들이 너무 개판을 치고 있는 요즘, 얼마나 교회의 현실이 답답하면 영지주의 문서가 틈새를 파고 들고, 영지주의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어필을 하는 시절이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프다. 정통 기독교에 속한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엄청나게 반성해야 할 지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은 정통 기독교와 영지주의 기독교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무엇인가에 있다. 4세기까지 정통 기독교가 무엇인지 결정이 나지 않았다. 삼위일체론(기독교의 독특한 신론)의 정립도 되지 않았고, 성서(정경)도 정립되지 않았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있기 전까지 기독교에 '정통(Orthodoxy)'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진리를 위한 싸움이 치열했다. 그러나 비로소 예수 사건이 있은 지, 300년이 지나, 정통과 이단(정통의 가르침을 벗어난)을 가르는 기준이 생겼다.

 

그 기준은 이것이었다. "하나님의 의인가 아니면 사람의 의인가." 이것은 단순히 믿음인가 행위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정통 신학은 인간이 구원에 기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구원을 맡긴다. 그러나 영지주의 신학은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맡기지 않고 인간의 선함에 주목한다. 이것은 단순히 성악설, 성선설의 문제이거나 전적타락과 부분타락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인데,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고 인간의 기여를 말하는 순간, 사람 사이에 배제와 차별과 혐오가 발생하고 만다. 다시 말해, 영지주의 기독교는 도덕(지혜)을 말하고, 정통 기독교는 사랑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왜 요즘, 영지주의 문서(기독교)나 수도원 운동 같은 것에 대한 논의가 일고, 사람들이 왜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정통 기독교의 도덕이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이 바닥을 치니, 기독교 역사에서 도덕을 중요시했던 운동들이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내가 우려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영지주의 기독교나 수도원 운동은 엘리티즘(elitism)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하나님과 직접적인 합일을 이루고, 속세를 떠나서 도덕적으로 깨끗한 신앙운동을 하는 일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영지주의 기독교나 수도원 운동이 주류(mainstream)로 자리 잡지 못한 까닭이 분명히 있다. 도덕적인 기독교는 엘리티즘을 향하고, 결국은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고 혐오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신앙이 오히려 사람을 향한 차별과 배제와 혐오를 불러온다면, 이것은 구원이 저주가 될 수밖에 없다.

 

도덕은 굉장히 중요하다. 체제와 운동을 지속시키는 가장 큰 내적인 힘 중 하나이다. 요즘 기독교가 무너지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라고 하는 체제 내에 '도덕이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도덕을 중요시하는 기독교 신앙 운동(영지주의, 수도원 운동)이 치고 들어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지주의나 수도원 운동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거기까지다. 도덕을 바로 세우는 것. 하지만 인간이 구원에 다다를 수는 없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이 점을 겸허하게 인정하면서 영지주의 문서나 수도원 운동을 해 나갈 필요가 있다. 지혜와 은혜는 종이장 한 장 차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로 구원에 이르는 게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다. 정통 기독교가 지금은 개판을 치고 있지만, 구원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겸손이 있기 때문에 정통으로 불리는 것이다.

 

어떠한 약초는 독이 될 수 있고 약이 될 수 있다. 돌파가 그 약초를 쓰냐 아니면 명의가 그 약초를 쓰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온다. 영지주의 문서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신앙에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 연구를 충분히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에 오히려 혼란을 가져오는 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여러가지로 힘든 이 시절에, 명의들이 영지주의 약초를 잘 쓴다면 기독교의 아픈 상처를 회복시키는 데 긴요하게 쓰일 것이다.

 

도마복음 연구회가 명의의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