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4. 3. 5. 13:34

연약궤를 멘 제사장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여호수아 3:7-17)

 

주님,

여호수아서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밝히 보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이 먼저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갔을 때

요단강이 마르고 그 마른 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서

가나안 땅에 입성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제사장 나라로 부르시고

언약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메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주님의 백성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아

제사장으로 세움 받았으니,

주여,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그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우리의 봉사와 섬김을 통하여

주님 나라가 드러나게 하소서.

교회 공동체로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제사장의 역할 잘 감당하게 하시고,

교회 내에서도 솔선수범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 나가는

주의 신실한 제사장이 되게 하시고,

가정에서도 주의 사랑으로 모범이 되는

제사장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소서. 우리가 따르겠나이다.

언약궤를 메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들에게

하늘의 복을 내려 주소서.

언약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4. 3. 5. 13:32

연약궤를 멘 제사장들

(여호수아 3:7-17)

 

1.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는 이스라엘

민수기(광야에서)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가데스 바네아 사건이다. 출애굽하여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견한다. 야곱 가족들의 애굽 이주 이후 430년 동안 가나안 땅에 가보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그 땅이 어떠한 땅인지 알지 못했다. 가데스 바네아 사건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등장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성경은 신명기를 지나, 여호수아서에 이르러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정탐꾼을 파견하는 이야기를 또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데스 바네아 사건 때와는 달리 두 명만 파견한다. 이것은 명백히 여호수아와 갈렙 연상시키는 정탐꾼 파견 사건이다. 여러고 성에 정탐 다녀온 두 정탐꾼의 보고는 그것을 확증해 준다. 왜냐하면 여리고 성에 파견되었던 정탐꾼 두명의 보고는 가데스 바네아 사건의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수 2:24)

 

여리고 성에 파견되었던 정탐꾼의 이야기는 광야를 지나면서 믿음이 성장한 이스라엘을 보여준다. 이제 이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단강 앞에서 섰다. 감격의 순간이다.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가 생각난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요단강 도하를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 속에서는 지난 40년간의 광야생활이 주마등처럼 흘러갔을 것이다.

 

2. 요단강을 건너는 역사적 순간

요단강 도하를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을 행하시리라”(수 3:5). 그리고 여호수아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제사장들에게 명령한다.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가라”(수 3:6). 제사장들이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언약궤를 메고 앞서 간다. 그리고 요단 물 가에 이르러서 거기에 멈춰 서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간다.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갈 때에, 여호수아는 다시 한 번 말씀을 선포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족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수 3:10)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가나안 땅에서의 삶의 여정을 앞두고, 그리고 정복전쟁을 앞두고 이스라엘이 얼마나 두려웠겠나. 그들의 마음에 용기를 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반드시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정복전쟁이라는 용어가 많이 폭력적으로 들린다. 그래서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을 정당화시켜 주는 용어가 절대 아니다. 의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의롭지 못한 세상 질서를 몰아내는, 구원행위에 대한 강력한 비유적 용어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라합의 해방일지’를 통해서 보았다.

 

3.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간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이 온전히 끊어졌다. 그래서 요단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기 좋게 바닥이 드러났다. 물이 끊겨 마른 땅이 된 요단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갔다. 여기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역할을 주목해 보자.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 부름 받았다.[1] 이 개념은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적용이 된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리스도인은 연약궤를 멘 제사장이다.

 

4. 그리스도인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의 성취이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메고 있는 것은 언약궤,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의 은혜와 복을 받고 누리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제사장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제사장 나라/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은혜와 복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 언약궤를 메고 제일 먼저 요단강에 들어가는 마인트셋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신명기에서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강 동편에서 먼저 땅을 분배 받지만, 그들이 가나안 땅에 함께 들어가 정복전쟁을 할 때 선봉에 서서 모든 이스라엘이 약속의 성취를 이룰 때까지 노력하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5.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으로 산다는 뜻이다. 교회 공동체로서 인류를 위한 봉사와 섬김에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내에서는 솔선수범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가정에서는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부담을 주려는 게 아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입으면 저절로 되는 일이다. 히브리서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 자신을 봉사와 섬김, 즉 구원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이다. 이 험한 세상에 이러한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세상의 희망이다.

 

6. 마이드셋의 변화

요단강 도하 사건은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그리고 입성하면서 이스라엘의 마인드셋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의 마인드와 광야에서 40년 유리할 때의 마인드가 같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제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이스라엘의 마인드는 애굽에서 살 때와 광야에서 살 때의 마인드와 같을 수 없다. 우리도 그렇다. 팬데믹 이전의 마인드와 팬데믹 동안의 마인드는 같지 않다. 이제 우리는 팬데믹 이후를 살면서 팬데믹 동안의 마인드로 살 수 없다. 무엇보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여호수아의 말씀처럼, 언약궤를 멘 제사장의 마인드로 우리는 전진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처럼 섬길 때, 우리에게 내리실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처럼 섬길 때,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우리 지역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 함께,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요단강을 건너가자!



[1] 성경의 이스라엘과 지금 역사의 이스라엘을 혼동하면 안 된다. 성경의 이스라엘은 신앙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이스라엘이지만, 지금 역사의 이스라엘은 성경에서 보여주는 신앙의 보편성을 성취해야 할 개별적인 나라에 불과하다. 보편성의 개념과 개별성의 개념을 혼동하면 안된다. 더불어 성경의 이스라엘과 지금 역사의 이스라엘 둘 사이에 있는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잘 가려서 성경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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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3. 5. 13:29

라합처럼 해방일지 쓰기를 간구하는 기도

(수 2:1-14)

 

주님,

라합의 놀라운 해방일지를 보았습니다.

여리고 성에서 비천한 자로 살아가던 그가

신앙을 가진 뒤 질서가 역전된 하나님 나라에서

존귀한 자로 거듭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괴로운 삶을 살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주님,

낙심치 말게 하시고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라합처럼 우리도 놀라운 해방일지를 써 나가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라합의 삶 속에서 이루신

아름다운 역설과 역전의 해방일지를

우리의 삶에도 써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주 안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그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3. 5. 13:28

라합의 해방일지

(여호수아 2:1-14)

 

라합의 해방일지를 참고 삼아 우리 자신의 해방일지를 써 나가자.

 

1. 라합을 소개하는 신약 성경

라합은 성경에서 중요한 인물로 소개된다. 라합을 소개하는 신약성경도 세 군데나 된다. 라합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신약성경은 마태복음의 족보에서이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마 1:5). 다른 한 곳은 믿음을 강조하는 성경 히브리서이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11:31). 마지막 한 곳은 행함을 강조하는 성경 야고보서이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4). 신약성경 두 군데서 소개되고 있을 만큼 라합은 중요하다.

 

2. 믿음이냐 행함이냐의 논쟁은 이제 그만

위에서 보듯이 라합은 믿음을 강조하는 성경 히브리서와 행함을 강조하는 성경 야고보서에서 동시에 등장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질병 중 하나는 믿음과 행함을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을 때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지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팽배하다. 이것은 명백히 구원과 믿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믿음이 자꾸 사변화되는 것(어떤 교리에 동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쓰여진 성경이 야고보서이다. 믿음은 어떤 교리에 대한 동의가 아니다. 믿음은 한 인격(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이다. 믿음은 사랑의 깊이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래서 믿음은 행함 그 자체이다. 교리는 필요하지만, 믿음을 교리와 결부시켜 교리와의 관계 안에서만 믿음을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오해하는 것이다.

 

3. 라합은 어떤 인물인가

한국어 성경에서 라합을 ‘기생’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그것은 히브리 원어에 표현된 라합을 순화시켜서 표현한 것이다. 히브리서나 영어 성경이나 세계 어느 나라 성경이든 라합을 ‘창녀’라고 소개한다. 우리는 라합의 직업(?)이 창녀(기생/prostitute)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창녀는 고대 사회에서 ‘빚진 자’의 대표 인물이었다. 창녀는 사회적 약자를 나타내는 명칭의 대표 중 하나였다. 성경이 라합을 소개하면서 구체적으로 그녀를 ‘창녀’라고 밝히는 것은 빚을 지게 만들고, 그 빚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드는 악한 구조에 대한 고발의 성격을 담고 있다.

 

4. 이스라엘과 라합의 상관관계

이스라엘과 라합은 매우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 당시 대표적인 노예 계급이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로 전락한 일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요셉이 총리로 있을 때와 애굽 사람들이 요셉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고 있었을 때만해도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 계급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요셉을 아는 애굽 사람이 사라지고 요셉을 전혀 모르는 새왕조가 애굽에 들어서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 계급으로 강등되었다. 이스라엘은 노예 계급으로서 약자의 대표였다. 애굽의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였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창녀로서 약자의 대표였고, 여리고 성의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였다.

 

5. 왜 라합은 이스라엘에게 관심과 소망을 두게 되었을까?

라합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라합은 자신과 같은 약자들이 결박을 풀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여리고 성의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였던 라합의 고민은 매우 분명했다. ‘어떻게 하면 이 지긋지긋한 삶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이스라엘의 행보는 라합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홍해를 가르고 탈출에 성공했고, 그 당시 이름을 날렸던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격파했다. 라합은 궁금했다.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길래 이렇게 힘없는 약자, 노예계급이 이토록큰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이끄는가? 라합은 정탐꾼에게 고백한다. “우리가 듣고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다”(수 2:11). 이 고백의 속뜻은 이런 것이다. ‘와 이런 분이 계시구나. 이런 분을 믿고 의지하고 모시면, 나의 삶에도 해가 비추겠구나! 내가 이 지긋지긋한 창녀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나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 받을 수 있겠구나!’

 

6. 라합의 신앙고백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도구원해 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합은 정탐꾼에게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다음처럼 고백한다. 매우 강력한 신앙고백이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수 2:11). 라합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한다. 그 믿음은 정탐꾼을 돕는 데서 드러난다. 라합의 행동에서 드러나듯이, 믿음은 행함 그 자체이다. 발각되면 여리고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하겠지만, 이렇게 사악한 여리고 성의 창녀로 사느니 자신의 인생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걸어보겠다는 라합의 결기가 보이는 장면이다.

 

7. 우리의 삶에 있는 우리를 괴롭히는 일들

무엇이 우리를 괴롭히는가? 나를 노예처럼 만드는 일이 무엇인가? 나를 힘들게 만들고,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나를 아무것도 아닌 자로 만드는 일이 무엇인가? 그러한 것이 있다면, 라합처럼 해방일지를 써보자. 현대인에게는 자유가 있는 것 같으나, 가만히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자유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현대성의 문제는 많은 현대 철학자/신학자들을 통해서 제기되어 왔다. 대표적인 예가 소비문화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로 소비생활을 하는 것 같으나, 소비사회를 들여다 보면 우리의 의식은 남들이 하는 대로 소비하도록 지배당하고 있다. 이러한 것만 아니다. 현대인은 자유로우나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신자유주의 소비문화 체제의 구조적 폭력에 교묘하게 희생당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우리를 구원할 자인지를 온전히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8. 믿음이란

믿음이란 행함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믿음이란 내가 지금 무엇을 갈망하고 무슨 일을 하고 있고 무엇에 마음을 주고 있는지를 보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는가를 진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고백은 이런 것이다. ‘다른 것들은 온전한 구원을 주지 못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정확한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 우리의 믿음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이 믿음이 우리를 해방으로 이끈다.

 

9. 라합의 해방

라합은 지긋지긋한 창녀의 삶에서 벗어난다. 여리고 성이 함락되어 더 이상 라합은 그 성이 정해 놓은 법에 따라 창녀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다. 라합은 여리고 성에서는 한낱 창녀/빚진 자/사회적 약자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난 뒤에(새로운 질서가 들어선 뒤에는) 라합의 인생은 역전된다. 라합은 정탐꾼 중 한 명(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는다. 보아스는 구약성경 룻기의 주인공이다.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여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는다. 여리고 성에서 라합은 그저 비천한 창녀에 불과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라합은 완전 역전된 삶을 산다. 그는 다윗의 조상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선조가 되었다.

 

10. 성경은 전복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호수아서에서 전개되는 정복 전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막 쳐들어가서 사람을 무차별하게 죽이는 무지막지한 정복이야기가 아니다. 정복 전쟁이라는 용어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용어를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정복 전쟁은 한 사회에서 비천했던 인생이 어떻게 역전을 이루어 하나님 나라에서 존귀해지는지를 보여주는 해방일지이다. 강한 자가 하나님을 등에 업고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는 이야기는 성경에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약자 편이시고, 약자의 눈물과 고통을 닦아주시고 위로해주시고 회복시키시고 역전시키시는 분이다. 라합의 해방일지는 바로 이것을 보여준다.

 

자신이 강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져야 한다. 주신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있는 곳을 섬겨야 한다. 자신이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소망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나라에서 역전될 인생을 생각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일 뿐이다.

 

라합의 해방일지는 아름답다. 이런 역설과 역전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라합의 이야기와 끈이 닿아 있는 룻기에서도 우리는 라합의 해방일지와 같은 역설과 역전의 드라마를 본다. 이 아름답고 놀라운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의 해방일지는 어떠한가를 생각해 본다. 현실이 힘들고 어렵지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라합의 해방일지를 참고삼아, 아름다운 역설과 역전이 있는 해방일지를 써 나가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3. 5. 13:26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간구하는 기도

(수 1:1-9)

 

주님,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이루어 나가기 위하여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순종하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게 하소서.

그 길을 잘 걸어가면 삶에 형통이 있을 거라고

약속하신 그 말씀을 우리가 믿고 따르오니,

주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주소서.

십자가의 길을 먼저 걸어가시며

우리를 은총으로 이끌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4. 3. 5. 13:18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수아 1:1-9)

 

1. 구약성경의 중요성

신약을 잘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사건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구약성경이다.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깊이와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깊이는 같이 간다. 여호수아의 이름은 예수와 같다. 조슈아!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예수는 메시아(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구원자/해방자)이다. 구원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원 받아 죽은 후에 천국간다는 의미를 훨씬 넘어선다. 우리의 삶 전체에서 구원이 아닌 게 없다. 궁극적으로 구원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상태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상태가 구원의 가장 근본이다. 그래서 구원은 어떤 여정으로 표현된다. 그것을 구약에서 배운다.

 

2. 모세의 시대가 가고 여호수아의 시대가 오다

이스라엘은 지금 위기를 맞았다. 모세가 더 이상 본인들과 함께 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사도행전에 제자들이 맞닥뜨린 상황과 같다. 예수님이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위기를 겪었듯이, 이스라엘도 모세가 없는 상태에서 위기의식을 가지게 됐다. 언제든지 변화의 시기는 위기와 기대가 공존하는 법이다. 지난 40년간 이스라엘을 이끌던 불세출의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지도자 자리에 서게 되었다.

 

3. 여호수아는 누구인가

여호수아를 소개하는 구절을 보면 성경은 여호수아를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고 소개하는 것을 본다. 모세는 여호와의 종으로 불렸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종자로 불린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애비는 종이었다.” 여기서 ‘종’은 사회적 계급을 지칭한다. 양반과 천민이라는 신분계급이 존재했을 때, 양반과 대비되는 천민 계급을 지칭하는 용어가 ‘종’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종’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여호와의 종’이라는 호칭은 매우 영광스러운 호칭이다. 신분계급을 나타내는 호칭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이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잇는, 다리 역할(mediator)을 감당하는 사람을 ‘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아직 모세처럼 ‘여호와의 종’으로 불리지 않았다. 그러니, 여호수아 자신도 ‘내가 과연 모세의 뒤를 이어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자기불안이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의 수종자였던 여호수아가 자신들을 잘 이끌어 가나안 땅에 들일 수 있을까 의심도 있었다. 이러한 자기불안(자기확신의 부재)와 의심은 위기를 불러오기 충분했다.

 

4. 교회 처음 부임하던 때의 회상

회상해 보면, 내가 우리교회 부임하여 처음 나눈 말씀이 여호수아의 말씀이다. 교회에 부임하여 첫 설교한 것이 토요일 새벽기도였는데, 그때 토요일 새벽기도회 때 여호수아의 말씀을 나눴다.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는 의미에서 여호수아의 말씀을 나눴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나누는 여호수아의 말씀은 늘 힘이 된다.

 

그 당시(2016년 9월) 일기를 보면, 이런 일화도 있다. 김성래 목사 딸 세린이(루시)가 꿈을 꿨는데, 우리가 큰 교회 지어서 이사 들어갔다는 꿈이었다. 그걸 그때 아이가 꿈을 꿨다고 아침에 일어나서 이야기를 해주어서, 그때, 김성래 목사가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왔었다. 그런 기록이 있다. 그 꿈이 이제 이루어지나? 비록 우리가 지어서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이제 새로운 곳으로 가려고 하는 계획을 세우고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이 때에, 그런 꿈의 이야기나, 특별히 여호수아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 알려주는 것 같다.

 

5. 전환점의 중요성

인간에게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무엇인가 삶의 변화를 앞두고 있으면 불안과 위기가 찾아오는 법이다. 이스라엘을 보라.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있었음에도 출애굽 하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싫어했다. 그래서 그들은 출애굽 한 뒤에도 광야에서 마음 상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을 살았다. 이들의 목적지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다. 그런데, 광야에서 40년을 살다 보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특별히, 루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는 아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고, 요단강 동편에 자리 잡겠다고 나섰다. 이러한 전환점에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것은 말씀과 기도이다. 그리고 대화가 필요하다. 겸사겸사 심방을 시작했다. 긴밀한 비전 나누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마음으로 비전을 공유하고 그것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6. 우리교회의 위기와 비전

지난 몇 년 간의 목회를 돌아보면, 우리교회에 부임하여 출애굽을 계획하고 실행했는데, 팬데믹을 맞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생활한 느낌이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새롭게 출발하고, 새로운 미니스트리를 열어가려고 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다. 자연재해에 가로 막혀 그 시기가 좀 늦어졌지만, 광야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나아갈 바를 좀 더 명확하게 다듬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새로운 교회로 장소를 옮겨 그곳 교회와 Partnership Ministry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시절을 지혜롭게 넘기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이고 은혜이다. 각자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살려서, 교회의 사역을 극대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우리에겐 맨파워, 아이디어, 열정이 있다. 우리가 늘 아쉬워하고 갈망했던 것은 좀 더 편안한 시설과 좀 더 보편적인 예배 시간이었다. 그리고 좀 더 긴밀하게(close) 협력할 수 있는 generous한 host 교회를 만나는 것이었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소망과 잘 어울리는 교회를 잘 찾은 거 같다. 이것을 위해 온 교회가 아주 오랫동안 기도해 왔다.

 

7. 강하고 담대하라

변화(Transition)을 마주하면 두려운 법이다. 요즘 사람들이 매일 두려움 가운데 사는 이유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가 더 이상 자신들과 함께 있지 않고, 이제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그리고 그 앞에 놓여 있는 전쟁을 앞두고, 엄청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들이 마음을 다잡고 자신들의 사명을 수행해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다. ‘강하고 담대하라!’ 모세와 함께 했던 내가 여호수아와도 함께 할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정말로 꼭 필요한 말씀이다.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8. 모세의 수종자에서 여호와의 종으로!

여호수아는 처음에 ‘모세의 수종자’로 불렸다. 그런데, 가나안 입성이라는 사명을 잘 수행한 뒤에, 여호수아는 더 이상 ‘모세의 수종자’로 불리지 않고, 모세처럼 ‘여호와의 종’으로 불린다.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수 24:29). 여호수아를 처음 소개할 때의 문구와 비교해 보라.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수 1:1). 우리에게도 이러한 영광이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향해서 함께 힘을 합하여 나아갈 때, 우리 교회 뿐 아니라, 감람산교회, 그리고 우리들의 각자 삶 속에 좋은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정말 좋은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믿음 안에서,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우리의 비전을 이루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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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24. 2. 28. 09:49

[소판 세상]

 

실리콘밸리의 상징

미션픽 정상에 오르는 길

협곡을 따라 오르다

굽이치는 바람을 만난다

고개를 숙이고 바람을 거슬러

오르다 오르다 보면

소 한 마리

또 소 한 마리

소 서너 마리

그리고 소

또 소

내 평생 개판인 세상을 보아왔어도

소판인 세상은 처음 본다

풀 뜯으며

지나가는 행인을 무심히 바라보는 소

평화로운 소판 세상을 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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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삼위일체 신학과 전망]

ㅡ 한국인이 삼위일체 신학을 어려워 하는 이유와 해결방안

 

삼위일체 신학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낯설어 하고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그리스 철학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특별히, 플라톤 철학과 그 철학이 발전해서 생긴 신플라톤주의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현대 한국인이 조선 시대 성리학을 잘 알지 못하는데, 어찌 고대 시대의 그리스 철학을 잘 알 수 있겠는가.

 

삼위일체 신학을 공부하다 보면 난관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플라톤 철학과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왜 삼위일체 신학이 그러한 언어로, 그러한 형태로, 그러한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깊이 파악할 수 없다. 기독론(Christology)을 공부하다 보면,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sus) 논쟁을 만나게 된다. 동일하게, 플라톤을 공부하다 보면 ‘역사적 소크라테스와 등장인물 소크라테스’에 대한 주제를 만나게 된다. 또한 역사적 플라톤과 철학적 플라톤의 주제도 만나게 된다.

 

역사적 예수는 2천년전 팔레스타인 땅에 실제로 존재했던 ‘인간 예수’에 대한 논의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예수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고 실제로 어떤 생각과 행동을 했는지를 탐구한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 예수를 만나기 쉽지 않다. 우리가 예수를 접하게 되는 자료는 ‘신학화된’ 예수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만나는 예수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다. 신학화된 예수다. 소크라테스도 그렇다.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있지만,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제자 플라톤이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자신의 저서에서 ‘등장인물’로 전해지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역사적 소크라테스이지만 실제로는 ‘등장인물’ 소크라테스이다.

 

플라톤 철학은 서양 사상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플라톤 철학을 모르면 서양 철학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바울에 의해서 예수 사건이 헬라 지역에 전파되고, 결국 기독교가 로마를 통해서 서양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 이상,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필수가 되었다. 특별히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서 플라톤 철학은 일종의 신학 문법으로의 역할을 감당한다.

 

역사적 플라톤은 당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역사적 플라톤은 정치적 관심과 열정으로 당대 사회를 개혁하고자 정치철학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플라톤은 그 당시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소피스트들과 한 판 대결을 벌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의 괴변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플라톤은 현실 정치에 관심을 두고 자신의 철학 사상을 펼쳐 나갔다.

 

그런데, 후대에 플라톤의 철학을 발전시킨 사람들의 관심은 좀 달랐다. 특별히 신플라톤주의를 꽃피운 플로티노스에 이르러서 플라톤 철학은 플로티노스의 신비적 형이상학을 펼치는데 활용된다.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철학을 사용하여 자신의 철학 사상을 주조해 가지만, 역사적 플라톤의 관심사였던 현실 정치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 철학을 잘 알아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잘 알아야 한다. 신플라톤주의는 플로티누스에 의해서 발전했는데,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특징은 ‘범신론적 일원론’과 ‘철학의 종교화’였다. 플라톤 철학은 이원론의 구조를 지닌다. 이데아를 상정하고, 육체와 영혼을 구별하여, 사상을 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형상계(이데아)와 현상계(현실계)에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중간 단계를 설정해서 플라톤의 이원론을 범신론적 일원론으로 재설정한다. 그리고 플라톤 철학의 현실 정치적 색채를 현실을 초월한 신비주의적 색채로 탈바꿈시킨다.

 

플로티노스는 그의 저서 『엔네아데스』를 통해 '일자'(The One) 또는 '성선'(The Good) 사상을 펼친다. 플로티노스가 플라톤 철학으로부터 이러한 사상을 전개시킨 결정적인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출현과 영지주의 신학의 만연 때문이었다. 영혼의 구원과 신에 대한 추구라는 당대의 종교적 분위기는 플로티누스로 하여금 플라톤 철학을 신비주의적 형이상학으로 발전시키도록 이끌었다. 다시 말해, 신플라톤주의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러한 시기에 발전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신플라톤주의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일례로, 일자에 대한 생각, 누스(지성)의 개념, 그리고 관상의 개념 등은 삼위일체 신학과 기독교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플로티노스와 더불어 신플라톤주의의 부흥을 이끌었던 프로클로스(Proclus)도 그리스도교 신학의 발전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철학자이다. 프로클로스의 일자의 ‘삼위일체적 구조’는 그리스도교 신학자 위-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플로클로스의 ‘삼위일체 구조’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삼위일체’ 개념을 형성하는데 깊은 영향을 미친다. 삼위일체 신학을 급격하게 발전시켰던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경에 드러난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삼위일체 신학을 신플라톤주의에서 발전시킨 철학들과 용어들을 통해서 정립한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은 어느 신학자가 발명한 개념이 전혀 아니다. 삼위일체론을 인간이 발명했다고 말하거나,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교 신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신학은 발명하는 게 아니다. 신학은 계시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로 구성한 것이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신학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하나님 고유의 존재 방식이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가 정확하게 모두 담아낼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학이란 계시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인간이 임의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사건이 발생하고, 그 예수 사건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정리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에, 그리스도교는 헬라 문명에서 꽃피고 있었다. 그때 그리스 문명은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특별히 삼위일체 교리가 정립되고 있을 당시 헬라 문명은 신플라톤주의의 지대한 영향 아래 있었고, 그들의 용어는 어떠한 사상을 보편적으로 표현하기에 적합한 철학/신학 용어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은 신플라톤주의의 철학과 신학을 발판삼아 그들의 사고구조와 용어를 통해 정립되었다.

 

그렇다고, 헬라 철학,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발전된 삼위일체론이 삼위일체론의 전부이거나 가장 정확한 계시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계시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을 어느 한 사람이나, 한 사회, 또는 한 역사적 시대가 독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여기에서 한국인이 삼위일체론을 어렵게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나온다. 헬라 철학으로 표현된 삼위일체론이 삼위일체론의 표준이고 절대적인 기준인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 자신의 언어로 열심히 표현해야만 한다. 이미 표현된 계시만이 계시가 아니다. 우리의 언어, 나의 삶의 자리에서 표현된 계시가 우리에게는 더 쉽게, 편안하게, 그리고 간절하고 진실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한국인이 삼위일체 신학을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삼위일체 신학이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처음에 정립되어 있다보니, 플라톤 철학,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에 전혀 익숙하지 않고 잘 모르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 있다. 또다른 하나의 이유는 우리의 일상언어로 하나님을 경험을 풀어내는 데 서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다른 누군가가 해놓은 것을 가져다 하나님 경험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데 익숙하다. 그렇다 보니, 내가 내 삶의 일상언어로 하나님 경험을 표현하는데 서툴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야한다는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이것을 신학적 사대주의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러면, 한국인이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 신학을 쉽게, 그리고 건전하고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좀 어렵지만 힘을 내서 플라톤 철학,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이다. 교부들이 성경을 통해 계시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용어를 어떻게 활용하여 표현하고 있는지를 공부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했는지 알 수 있게 되고, 더불어, 두 번째 과제도 수행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기게 될 것이다. 두 번째 과제는 우리의 일상언어로 우리에게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교부들이 그들의 일상언어로 하나님의 계시를 표현했던 방식을 모범삼아,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의 계시를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어떠한 인간이, 어떠한 사상이, 어떠한 시대가 독점적으로 표현하고 가둬놓을 수 있는 분이 전혀 아니시다. 그러니, 우리는 조금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남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내것으로 하나님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하나님이 더 소중하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진정 내것이 될 때, 우리는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남이 표현해 놓은 하나님을 내가 따라 표현하려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나의 언어로 하나님을 표현하게 될 때, 하나님은 남의 하나님이 아니라 비로소 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두 가지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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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2. 15. 10:00

[사순절로 들어가는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는 이제 사순절로 들어갑니다.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의 신앙을 단련하고자 합니다.

 

모두가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이 시대에

우리도 정체성의 위기를 겪으며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흔들어대야만 이익을 취하는

수많은 세력들에 의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마치 노예처럼 이리저리 끌려 다닙니다.

 

주님,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난 당하시고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내어놓아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내어놓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 사랑으로

세상을 좀 더 따스한 곳으로 만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숨쉬게 하옵소서.

 

사순절로 들어가

그곳에 임재하며 우리와 동행하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몸으로 느끼며

기도와 봉사와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대면하고(기도)
이웃과 대면하고(봉사)
나 자신과 대면하며(금식)

부족함이 없는 영혼으로 거듭나게 하옵소서.

 

사순절 동안

주님이 기뻐하시고

이웃에게 칭찬받고

자기 자신에게 뿌듯한

선하고 아름다운 일들을 넉넉하게 행하게 하셔서

우리가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주의 백성이라는 것을

온 세상이 알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소서.

 

주님, 사랑합니다.

사순절 동안 무엇보다

주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깊어지게 하시고

사랑할 때만 알 수 있는 주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셔서

신앙이 자라고 삶이 풍성해지는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이제 사순절로 들어가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은총을 비오니,

사십일 동안의 여정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빛을 비추어 주소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 받는 사람을 놓아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야 58:6-7)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4. 2. 15. 06:02

강하고 담대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수 1:1-9)

 

주님,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이루어 나가기 위하여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순종하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게 하소서.

그 길을 잘 걸어가면 삶에 형통이 있을 거라고

약속하신 그 말씀을 우리가 믿고 따르오니,

주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주소서.

십자가의 길을 먼저 걸어가시며

우리를 은총으로 이끌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