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의 미학

인내는 신앙의 가장 위대한 덕목 중 하나다. 신앙의 여정을 걷다 보면, 예상치 못한 시련과 도전이 닥쳐온다. 때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좌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으니, 나도 너를 지키리라”(계 3:10). 하나님은 우리의 인내를 결코 헛되이 두지 않으시며, 그것을 기억하시고 보상하신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크지 않았고, 사회적 영향력이 미약한 공동체였다. 그러나 그들은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유대인 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이 그들을 배척하고 박해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보호하시며 “열린 문”을 주셨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역설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겉으로는 약해 보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강한 교회였다. 세상은 힘과 권력을 숭배하지만, 하나님은 겸손한 믿음과 인내를 귀하게 여기신다.

성경은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수많은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요셉과 욥이다. 요셉은 젊은 시절 형들의 시기로 인해 애굽으로 팔려갔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했고,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었다. 또한 욥은 극심한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고, 심지어 육체적인 고통까지 당했다. 그러나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내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전보다 더 큰 복을 주셨고, 그의 믿음과 신실함을 인정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빨리빨리 문화’ 속에서 살아간다. 스마트폰으로 몇 초 만에 정보를 얻고, 온라인 쇼핑을 하면 하루 만에 물건을 받을 수 있으며,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시대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인내’라는 덕목은 점점 더 잊혀지고 있다. 기다리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고, 고난이 닥쳤을 때 즉각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조급해지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우리와 다른 시간을 사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할 기회를 자주 잃곤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자꾸 신비를 잃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인내의 미학’을 가르쳐 준다. 인내는 단순히 참고 버티는 것이 아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며 기다리는 태도이다. 인내는 희망이다. 우리의 신앙은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과정이다. 인내는 단순히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희망을 품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능동적인 태도이다. 인내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선물을 믿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인내는 믿음의 가장 깊은 속성이다.

신앙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믿음이 연약해질 때도 있고, 기도가 공허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인내할 때마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신다. 고난이 올지라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삶이야말로 가장 복된 삶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거든, 이 말씀을 기억하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으니, 나도 너를 지키리라”(계 3:10). 우리의 신앙과 삶이 위험할 때, 이 말씀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힘들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며 나아가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내를 보시고, 우리의 삶을 지키실 것이다. 믿음의 경주에서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견디는 자가 되자. 그분이 우리를 기억하시고, 환란 날에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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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지 못한 교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어떤 교회는 살아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이다. 사데 교회가 그랬다. 겉으로는 번성했고, 명성이 있었으며, 평판도 좋았지만,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네가 살아 있다 하는 평판을 가졌으나, 너는 죽은 자다”(계 3:1).

이 말은 교회(신앙)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적용된다. 살아 있는 듯 보이지만, 정작 안에서는 메마르고 힘을 잃은 상태.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되며, 세상과도 멀어지는 삶. 그것은 곧 뒤처지는 삶이다.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생명이 단순한 습관이 되고, 숨은 쉬고 있으나 살아 있는 것 같이 않은 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삶은 점점 무력해진다.

뒤처지는 것은 무섭다. 한때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이 기쁨이었지만, 지금은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수 있다. 예배가 부담스럽고, 기도가 공허하게 느껴지며, 말씀을 들어도 마음 깊이 와닿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깨어 있지 못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방치하면, 결국 신앙은 점점 더 깊이 잠들어버리고 만다. 이러한 상태에 처해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는 인지하지 못한다.

혹시 이런 상태에 처해져 있을 지 모르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희망을 준다. "깨어 있으라. 굳건하게 하라. 기억하라. 순종하라. 회개하라" (계 3:2-3).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는 길, 뒤처진 신앙을 회복하는 길, 뒤처진 인생을 끌어 올리는 힘이 여기에 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눈을 뜨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 두고, 관계를 회복하며,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하는 것이다. 깨어 있는 신앙은 기계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성도들과 교제하며,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신앙이다. 신앙의 길에서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라이너 쿤체의 시 <뒤처진 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그는 뒤처진 새를 바라보며 그 새에게 자신의 힘을 보낸다고 말한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다. 우리가 뒤처졌을 때, 다시 날아오를 수 있도록 힘을 보내신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뒤처진 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기다려 주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 교회가 진정 살아 있으려면, 화려한 예배당이나 큰 행사보다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 먼저이다.

사데 교회처럼, 우리의 신앙도, 삶도 한때는 뜨거웠지만 지금은 식어버렸을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여전히 손을 내밀고 계신다. 일어나고 싶어도 잡아줄 손이 없을 때 우리는 절망의 늪에 빠져 죽음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은 절대 내민 손을 거두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 손을 잡을 때까지 손을 내밀고 계신다. 그러니, 그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길 바란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보내는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 우리 신앙이 다시 살아나는 날, 우리는 진정으로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걷는 자들이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서로를 돌보며, 살아 있는 교회를 만들어 가자. 이렇게 살아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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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신앙, 저항하는 예배

예배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예배는 신앙의 선언이며, 동시에 세상의 질서에 대한 저항이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 펼쳐지는 하늘의 예배는 당시 소아시아 교회들이 직면한 현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한 영적 환상이 아니라, 로마 황제 숭배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켜내려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강력한 메시지였다.

1. 보좌 앞의 유리 바다: 혼돈을 넘어선 질서
고대인들은 하나님의 보좌가 광활한 궁창 위의 바다에 세워져 있다고 상상했다.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신비로운 세계이지만, 동시에 완전한 질서를 의미하는 공간이었다. 세상의 혼돈과 폭력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좌는 흔들리지 않는다. 신앙은 바로 그 보좌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다.

2. 네 생물과 많은 눈: 불의에 대한 증언
네 생물(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은 우주를 상징한다. 그들의 몸을 덮고 있는 수많은 눈(eyes)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고난과 불의를 증언하는 상징이다. 억압받는 이들의 눈물, 폭력의 희생자들, 정의가 짓밟히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미한다. 예배는 이처럼 세상의 아픔을 직시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는 자리이다.

3. ‘거룩하다 거룩하다’의 선언: 장차 오실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지배하는 분을 향한 고백이다.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고통받는 자들에게 가장 큰 위로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춘향이가 변 사또의 횡포 속에서 이 도령을 기다리듯, 억압받는 성도들이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의 표현이다.

4. 황제가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로마 제국은 황제에게 ‘우리 주, 우리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바치게 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성도들은 그러한 칭호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임을 선포한다. 이것은 단순한 경배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지, 우리가 몸과 마음을 어디에 드려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는 선언이다. 예배는 황제 숭배에 대한 저항이었고, 오늘날에도 세상의 거짓된 권력과 이념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중심이어야 한다.

5. 예배는 저항이다
출애굽기의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예배할 것이라’고 말했다. 출애굽기가 가르쳐주는 예배는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억압을 거부하고, 자유를 선언하는 행위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어떤 모습인가? 고대 시대에 비추어 볼 때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문명과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시대의 예배는 시간이 흐른 만큼 달라져 있는가? 우리의 예배는 충분히 저항적이며, 충분히 자유한가? 예배에 야성이 살아 있는가?

교회가 힘을 잃은 이유는 바로 예배의 야성과 저항의 정신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의 권력과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았는가? 말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외치면서, 삶으로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지는 않는가?

예배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예배는 세상의 거짓과 불의에 맞서는 신앙의 결단이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 우리가 올리는 기도가 진정한 신앙의 고백이 되려면, 우리의 삶이 예배와 일치해야 합한다. 황제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신실한 예배자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위험한 신앙이며, 저항하는 예배이다. 이런 예배자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Posted by 장준식

도전을 이기는 신앙

버가모 교회는 두 얼굴을 가진 교회였다. 한쪽은 자랑스러웠다. 적대적 환경 속에서도 그들은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고, 순교자 안디바는 그들의 신앙의 본보기가 되었다. 반면, 부끄러운 얼굴도 있었다. 발람과 니골라 당의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어 우상 숭배와 음행에 빠진 이들도 있었다. 이 두 얼굴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 자신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현대인의 신앙은 버가모 교회의 현실처럼 양면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표면적 박해는 덜할지 모르지만, 거짓된 가르침과 세속적 유혹이 교묘히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있다. 세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괜찮아,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모두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러나 그 속삭임은 때로 신앙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하고, 부지불식간에 진리를 버리게 만든다.

우리는 오늘날 무수한 '발람의 가르침' 속에 살고 있다. 그 가르침은 편리함을 약속한다. 타협하면 더 쉽게,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에 주어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회개하고, 거짓된 가르침에서 떠나 바른 믿음 위에 서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생명의 초대이다. 이 초대는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배부르게 하는 '감춰진 만나'와, 하늘의 잔치에 들어갈 '흰 돌'을 약속한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삶의 피로와 분주함, 세속적 유혹, 그리고 교회에 대한 실망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감춰진 만나를 줄 것이다. 흰 돌을 줄 것이다." 이는 단순한 약속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소망이다. 우리가 흔들릴 때 붙잡을 수 있는 반석과도 같은 말씀이다.

버가모 교회의 순교자 안디바처럼, 우리의 믿음도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그 고난 속에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 거짓된 속삭임 속에서 진리를 붙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주님께서 준비하신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 우리 각자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이기는 자로 부름받았다. 이김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 던지는 거짓 속에서도,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오직 그리스도께 집중하자. 우리가 주님을 붙들 때, 주님은 우리를 승리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감춰진 만나와 흰 돌을 소망하며, 오늘도 믿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당신에게 주님의 평안과 은혜가 가득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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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충성하라: 신앙은 집중력의 문제이다

역사 속에서 서머나 교회는 고난의 상징이었다. 박해와 빈곤, 그리고 비방이라는 삼중고 속에서도 그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서머나 교회의 이야기는 단순한 고대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생생한 도전을 던지는 메시지이다.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실 때, 이는 단순한 신학적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서머나 교회 성도들의 삶을 가득 채운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건네진 위로의 속삭임이었다. 그분은 그들의 고난을 아셨다. 그들의 빈곤을, 그리고 그들을 죽음의 문턱으로 내몬 비방의 고통을 아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역설적이다. 세상은 충성의 한계를 요구한다. 이 정도면 됐다, 여기까지 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충성에는 한계가 없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신실하셨던 그분처럼, 우리 역시 끝까지 충성하라는 도전을 받는다. 이는 신앙이 단순히 머릿속에 머무는 사상이 아니라, 삶의 전부를 요구하는 헌신임을 깨닫게 한다.

서머나 교회가 그토록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부유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평가하는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들은 생명의 관을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영원한 가치를 발견했다. "네가 실상은 부유한 자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선언이다.

오늘날 우리는 서머나 교회처럼 극심한 박해를 경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의 박해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피로와 분주함, 세속적 유혹, 그리고 교회에 대한 실망이 우리의 신앙을 흔든다. 정신을 딴 데로 돌리게 만드는 이 시대의 스펙타클(화려한 이미지) 속에서,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도전이다.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신앙은 우리를 생명의 관으로 인도하며, 둘째 사망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끈다.

"죽도록 충성하라." 이 말은 단지 고난을 감내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신실함의 본질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 끝까지 집중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충성(집중)하셨듯, 우리도 끝까지 그분께 충성(집중)할 때, 생명의 관이라는 약속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집중하고 있는가? 우리의 충성은 어디까지인가? 이 질문에 답하며, 우리는 서머나 교회의 유산을 살아내야 한다. 죽도록 충성하는 믿음이야말로, 참된 부요함과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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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헤이스의 전향에 대한 한마디 논평]

1. 유승원 목사가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에 대하여 '유감'이라며 쓴 글이 이슈가 된 듯하다. 

2.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헤이스의 용어로는 '회개')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한 유승원 목사의 입장에 대하여 나는 도리어 '유감'을 표명하고 싶다. 

3. 보수적인 한인 장로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면서 '감'을 잃으셨나,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4. 리처드 헤이스가 성소수자들에게 사과한 이유는 리처드 헤이스의 성경 주석이 성소수자들을 공격하는데 근거로 쓰였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노벨이 '노벨상'을 만든 데에는 자신의 다이너마이트 발명이 선하게 쓰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는데 쓰이는 것에 대한 '회개'의 마음이 담겨 있다.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에 대한 유승원 목사의 '유감' 표명은 한국의 보수 교회에 그렇게 쓰일 것이다. 성소수자들을 공격하는데 근거로 쓰일 것이다. '거 봐라, E. P. 샌더스와 리처드 헤이스의 제자인 유승원 목사도 동성애를 반대한다!' 

5. 유승원 목사는 리처드 헤이스의 전향에 대한 근거로 감리교 신학(사변형)을 들고 있다. 유승원 목사 본인이 나사렛 교단 출신이고, 그곳의 교수를 지냈는데, 감리교 신학의 사변형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나사렛 교단도 웨슬리언이기 때문이다.

6. 성경, 전통, 이성, 경험, 이 네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이다. 어떤 것이 다른 것에 대하여 우위를 점하지 않는다. 

7. 보수 신학이 계속 난항을 겪는 이유는 성경의 절대적 우위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보수 기독교 신앙이 자꾸 세상과 충돌을 일으키고, 발목을 잡고, 뒤처지는 이유는 성경을 고착된 '이데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8. 그런데, 좀 솔직해지면 좋겠다. 성경은 하늘에 뚝 떨어진 하나님 말씀 자체가 아니지 않는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성의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과 성경을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을 말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비이성적 행위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컨텍스트 안에서 '해석'의 작업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9. 내 눈에는 동성애 문제를 성경에 근거하여 확정적으로 보는 것은 창세기에 근거해서 창조의 문제를 확정적으로 보면서 현대 과학의 발견을 배척하는 것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 

10. 성경에서 동성애에 대한 평가는 이방인, 노예, 여성의 문제처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없다는 진술은 매우 폭력적이다.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동성애는 '죄'라는 목소리를 내니까, 동성애는 죄가 맞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허용되지 않는다.'라는 말은 성경을 폭력의 도구로 사용하는 일이다.  게다가 미국은 한국의 상황과 달리 동성애를 법으로 보호하는 사회이다. 

11. 성경에서 몇 군데 언급되고 있는 동성애 관련 구절을 들어 현대 사회의 동성애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전형적인 침소봉대이다. 만약 성경 시대에 동성애 문제가 현대 사회처럼 주목 받는 문제였다면 성경은 다르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성경이 그 당시 사회적 약자들(이방인, 노예, 고아, 과부)을 따스하게 품었던 것처럼 그렇게 따스하게 품었을 것이다. 

12.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국가 폭력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국가 폭력은 인류에게 가장 큰 과제이다. 국가 폭력이 발생하는 것에 대해서는 광화문에 100만명 모아 놓고 한 마디도 성토하지 않으면서, 성경에서 거의 포착되지도 않는 동성애 문제를 가지고서는 광화문에 100만명 모아 놓고 성토하는 집단이 정말 성경을 공경하는 정상적인 집단인가. 

13. 리처드 헤이스의 '회개'를 배워 목회 현장에서 싸워볼 의지 없이 그냥 '유감'을 표명하는 일, 그것도 매우 수사적으로 유감을 표명하는 일이 좀 유감스럽다. 

14. 한국교회가 지금 싸워야 할 대상은 분명한데, 난데없이 동성애 이슈를 말하는 것도 불편하다. 약자는 좀 내버려두고, 국가와 헌법을 유린하는 사악하고 힘센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는 데 힘을 모으면 좋겠다.

 

(2025년 2월 21일에 쓴 글을 늦게 올림)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3. 13. 06:30

라오디게아 교회를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
(요한계시록 3:14-22)

주님,
라오디게아 교회가 받은 책망을 
마음 깊이 새깁니다.
쓸모가 없어 내뱉음을 받았던 교회.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미지근한 우리를 발견합니다.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지 않고
마치 우리는 아무런 도움이 없는 것처럼
순간순간 기도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주님,
회개합니다.
주님께서 문 밖에 서서 기다리시는데
우리는 ‘기도’라는 행동을 통해 문을 열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달라지겠습니다.
작은 일에라도 쓸모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무엇을 하든,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겠습니다.
무엇을 하든, 기도로 시작하겠습니다.
기도를 통해 문을 열어 드리고
내 안에 들어오신 주님과 동행하겠습니다.
우리의 쓸모를 생각하겠습니다.
주여,
우리를 통하여 주의 뜻을 이루소서.
아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3. 13. 06:25

빌라델비아 교회를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
(요한계시록 3:7-13)

주님,
인내만큼 좋은 것이 또 어디에 있는가 싶습니다.
험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그것을 이길 힘은 인내 밖에 없는 듯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
참으로 보잘것없는 교회였지만,
주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가장 크게 칭찬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으니, 나도 너를 지키리라!”
이 말씀이 너무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세상의 인내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인내는 소망이고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인내는 주의 따스한 손길을
경험하는 통로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인내하게 하시고
그 인내 안에서
주의 따스한 손을 붙잡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인내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5. 2. 16. 08:27

그리스도인의 역사인식
ㅡ 저항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요한계시록 6:1-8)

봉인은 은폐된 역사와 진실이다. 봉인을 떼는 것은 은폐된 역사와 진실이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 일을 어린 양, 즉 그리스도께서 하신다. 드러나는 역사의 진실을 서술하는데 헬라어 문법의 신적 수동태가 쓰였다. 행동이 모두 신적 수동태로 표현됐다. 그들(로마제국/지배자)의 행동 또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악행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반드시 심판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어린 양이 일곱 개의 봉인을 차례 대로 떼면서 은폐된 역사와 진실을 드러내신다. 첫째 인에서 넷째 인은 은폐된 로마 제국의 정치 경제 상황 폭로하고 있다. 악하고 폭력적인 체제가 드러난다. 이러한 것을 토대로 보면,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것은 ‘역사인식’이 분명하다. 은폐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 드러내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소양 아니겠는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역사에 눈을 감고,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가면 끝이라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은폐된 역사와 진실에 눈을 뜬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에 맞서 저항하고 싸운다는 뜻이다. 신앙은 성육신이지, 탈육신이 아니다. 신앙은 성역사이지, 탈역사가 아니다. 신앙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것인 지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실천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이다. 

성경의 이야기는 창작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대응이다. 특별히 제국주의에 대한 대응이다. 구약성경은 바벨론 제국에 대한 대응이고, 신약성경은 로마제국에 대한 대응이다. 인간의 역사는 곧 제국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국은 폭력적인 체제의 현실이고 상징이다. 인간의 역사는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창세기는 폭력적인 바벨론 창조 이야기에 대한 거부이고 저항이다. 이 세상이 폭력적으로 창조되었다면, 세상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모두 정당화되고 만다.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평화롭게, 전혀 폭력적이지 않게, 아름답게 창조하셨다. 우리는 이 창조 이야기에 따라 평화를 간구하며, 평화를 창조하며 살아야 하는 당위성을 갖는다.

출애굽기는 폭력적인 지배에 대한 거부이고 저항이다. 복음서는 로마 제국의 폭력에 대한 거부이고 저항이다. 로마의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힘에 의한 평화)는 거짓 평화다. 폭력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었다는 것은 제국의 폭력에 대한 거부이고 저항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국의 폭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즉, 우리 인간의 삶의 지향은 비폭력이어야 하고, 정의로운 사랑이어야 한다. 

왜 12.3 비상계엄이 잘못된 것인지, 그것을 왜 거부해야 하고, 왜 거기에 저항해야 하는지, 아직도 헷갈려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계엄이 아니라 계몽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양심이 없거나, 공부가 부족하거나, 성경을 지독히 오해/오독하고 있는 것이다. 계엄(Martial Law)은 전형적인 국가 폭력이다. 계엄은 군사력(폭력)을 동원하여 통치하겠다는 선포이다. 폭력을 사용하여 국민들을 다스리겠다는 것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발상이다. 이것은 성경이 그토록 경계하고, 거부하고, 저항한 것이다.  

봉인을 떼는 것은 로마제국의 실상에 대한 폭로이다. 
1) 첫째 봉인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2절). 면류관이라는 용어 때문에 오해하면 안 된다. 여기서의 면류관은 좋은 뜻이 아니다. 흰색은 승리를 상징한다. 활은 전쟁 무기에 대한 상징이다. 면류관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말한다. 흰말을 탄 자가 ‘이기고 또 이기려 했다’는 것은 제국주의적 전쟁을 통해 주변 나라들을 식민지화하는 로마제국의 군사적 승리를 폭로하는 것이다. 첫째 봉인의 뗌은 로마제국의 군사주의 폭로이고, 폭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드는 것에 대한 폭로이다. 제국의 군사주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나쁜 것이다. 성경은 군사주의를 거부하고 거기에 저항한다. 

2) 둘째 봉인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4절). 붉은 말은 유혈사태를 보여준다. 큰 칼을 들고 붉은 말을 타고 있는 것은 정치적 억압을 말한다. 일제시대 때 일본군이 한국인들을 짓밟은 거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큰 칼은 ‘마카이라’ 칼이다. 로마군의 전쟁칼은 롬파이아이다. 마카이라 칼은 권력으로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땅에서 화평(서로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없애고, 서로 죽이게 한다.  둘째 봉인의 뗌은 정치적 억압과 살육의 현실 폭로한다. 

3) 셋째 봉인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5절).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6절) 저울은 로마제국의 경제를 상징한다. 식량 가격의 폭등을 폭로한다. 되(코이닉스)는 남자 군인 한 사람에 필요한 하루치 식량의 양이다. 데나리온은 남자 노동자의 하루 임금 (여자는 반데나리온)이다. 남자가 하루 종일 일하여 자기 먹을 만큼 식량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면, 가족들은 굶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한 이유는 전쟁 때문이다. 흉년 때문이 아니다. 부자들의 음식인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는 가격 변동 없고 충분히 공급된다(해치지 말라). 세 번째 봉인의 뗌은 부자들/지배자들에게는 별로 타격이 없지만, 서민들을 빈곤과 기아와 죽음으로 몰아넣는 불의한 경제 체제 폭로하고 있다.

4) 넷째 봉인
ㅡ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이러한 것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죽이더라”(8절). 청황색은 시체의 색이다. 청황색 말을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다. 이는 제죽의 체제가 죽음의 체제라는 것을 폭로한다. 음부가 뒤 따른 이유는 로마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사회에서 배제하기 위함이다. 로마 제국의 정복 전쟁은 정복지 초토화시키고, 학살이 자행되며, 희생자들을 망각한다. 네 가지 살상 도구는 검(무기), 흉년(기근), 사망(전염병/온역/흑사병), 땅의 짐승들(부역자들/을사오적같은 인간들)이다. 네 번째 봉인의 뗌은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자들에 대한 폭력적 죽임과 사회적 배제를 폭로 한다.

성경이 묵시의 형태로 로마제국의 불의한 역사에 대해서 기록하고, 그것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로마제국의 폭력에 희생당한 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까! 네 개의 봉인은 다음의 네 가지 로마 제국주의의 살인적 현실 폭로한다. 1) 군사적 침략, 2) 정치적 억압, 3) 경제적 착취, 4) 사회적 배제. 이러한 내용이 담긴 책을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신앙하는 그리스도인의 역사인식은 어떠해야 하는지 너무도 자명하지 않나? 어떠한 형태로든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발생하고 있는 폭력들을 포착하고 거부하고 저항하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평화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역사인식이고, 신앙의 실제적 실천이다.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신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이 땅의 불의한 현실을 파악하고 보듬어,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스교 신앙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것이 아닐까? "저항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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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5. 2. 16. 08:10

사데 교회를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

(요한계시록 3:1-6)

 

우리를 살게 하시는 주님,
주의 말씀을 통해 신앙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평판이 좋고 명성이 있었지만
실상은 죽어 있는 사데 교회를 보며,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돌아봅니다.
깨어 있지 못해 뒤처진 사데 교회를 보며,
깨어 있기를 원합니다.
주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우리의 믿음이 과거의 평판과 명성에 머물러 있으려 할 때, 
주께서 다시 일깨워 주시고,
기도의 자리에서,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의 감각들이 살아나게 하소서.
주님,
서로 소통하며 살아 있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서로를 돌아보며, 
뒤처진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따뜻한 교회가 되게 하소서.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회복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더 긴밀한 소통을 이루게 하소서.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듯, 
우리도 받은 은혜를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삶의 순간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깨어 있는 신앙을 지켜나가도록 힘을 주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우리의 손을 붙드시고 다시 일으켜 주실 줄 믿습니다.
살아 있는 신앙, 살아 있는 교회로 부흥케 하실 줄 믿으며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