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다시 살려면]

 

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가 분석한 현대사회의 현상.

 

ㅡ 스펙타클은 "보이는 것은 좋은 것이며, 좋은 것은 보이는 것이다"라고 말할 뿐이다. 스펙타클이 원칙적으로 요구하는 태도는 무기력한 수용이다.

ㅡ 스펙타클은 현대의 수동성의 제국 위에 머물고 있는 결코 지지 않는 태양이다.

ㅡ 사회생활을 지배하는 경제의 첫 번째 국면은 인간이 실현하는 모든 것을 존재로부터 소유의 관점으로 규정하는 명백한 퇴행을 초래한다.

ㅡ 인간의 특권적 감각은 다른 시대에는 촉각이었다. 스펙타클은 그것을 시각으로 대체한다.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신비화되기 쉬운 감각인 시각은 현대사회의 일반화된 추상과 일치한다.

 

이 정도만 살펴보아도, 우리 시대가 '스펙타클 사회'인 것과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모두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구조로 돌아간다. 그래야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정치. 이 두 분야만 봐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스펙타클의 사회인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스펙타클 정치, 스펙타클 종교.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정치와 종교만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런 곳만이 부흥을 한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스펙타클을 일으키는데 귀재이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부흥하는 교회는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것을 잘하는 교회들이다. 이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낳을 수밖에 없다. 자본과 인력이 있는 대형교회는 상대적으로 스펙타클을 일으키기 쉽다. 반대로 자본과 인력이 없는 교회들은 스펙타클을 일으키지 못한다. 결국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대형교회로 교회들은 흡수되어 간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현상이 정치를 망가뜨리고, 교회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포퓰리즘 정치, 포퓰리즘 종교. 위에서 기 드보르가 지적하고 있느 것처럼,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정치와 종교를 통해 사람들은 점점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간다. 스펙타클의 위력에 일방적으로 그들이 강요하는 것은 수동적으로 수용할 뿐, 저항하지 못한다.

 

이는 고도로 발달된 상품 사회, 즉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베오울프의 그렌델일 뿐이다. 스펙타클은 그렌델의 엄마 물의 마녀이다. 원래는 추악한 모습이지만, 물의 마녀이기에 자기의 모습을 스펙타클하게 변형시켜 사람들의 마음을 꾀어낸다. 그 꾀임에 넘어간 사람들은 모두 희생자가 될 뿐이다.

 

교회가 스펙타클을 일으킨다는 것은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세속에 물드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신비한 현상은 교회에서 그토록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외치면서도 정작 교회 자체가 세속에 물들어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데 혈안이라는 것이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생명의 힘을 지키려면,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일에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저항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수동적으로 수용하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 상품 사회의 무력한 소비자로 전락시키며 소비의 희생자로 만들어 버리는 스펙타클 사회에서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인지, 오히려, 너무 자명하지 않은가?

 

스펙타클 사회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너무 자명하다.

1)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교회에 가지 않기

2) 스펙타클을 일으키지 않기

3)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목회자 조심하기

4) Indication 해서 쉽게 말하면, 대형교회 가지 않기

5) 대형교회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기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었다. '한국교회는 대형교회와 대형교회가 되고 싶은 교회, 이렇게 두 종류의 교회 밖에 없다. 목사도 마찬가지. 대형교회 목사와 대형교회 목사가 되고 싶은 목사, 이렇게 두 종류의 목회자 밖에 없다.' 물론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 스펙타클 사회의 교회/목회자 현상을 잘 지적한 듯하다.

 

교회가 다시 살려면, 스펙타클을 일으키는 우리 사회에 저항해야 한다. 쉽게 말해,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해야할 일을 하면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도록, 조용히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예배 조용히 드리고, 진실한 교제 나누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손길을 내밀되, 그냥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하는 것이다. 흑탕물을 맑게 만드는 법은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다. 이처럼 스펙타클이 너무 심해 흑탕물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 우리 삶, 우리 신앙을 다시 맑게 만드는 방법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요즘 우리 시대의 교회들이 어려운 이유는 무슨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너무나 많은 일을 해서 스펙타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스펙타클 사회에 저항하지 못하고 이 사회의 요구를 따라가면서 가뜩이나 스펙타클 사회 때문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더 지치고 힘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스펙타클 사회에 저항하는 교회가 진짜 교회다.

스펙타클 사회에 저항하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고로 존재한다.

Posted by 장준식

[성만찬에 대한 세 가지 생각]

 

기독교 예배의 중심에는 성만찬이 놓여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오랜 세월 동안 성만찬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신학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특별히 예배학(Liturgical Theology)의 발달이 더딘 탓도 있습니다. 새로운 밀레니엄(2000년) 전만 해도 한국의 신학교에는 예배학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예배학을 전공한 신학자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예배의 중심에 놓인 성만찬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예배학에서 가장 유명한 신학자는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입니다. 화이트 교수가 쓴 『기독교 예배학 입문』(Introduction to Christian Worship)은 예배학 분야의 교과서로 널리 쓰이는 책입니다. 이 책은 1980년에 쓰였습니다. 한국에 이 책이 번역 소개된 것은 2000년도입니다. 이와 더불어, 2000년대 이후 예배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한국의 각 교단 신학교에 포진하게 되면서 예배에서 성만찬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성만찬은 보통 영어로 ‘The Eucharist’(유카리스트)라고 합니다. 성만찬에 관한 명칭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존재합니다. ‘주님의 만찬’(Lord’s Supper), ‘떡을 뗌’(Breaking of Bread), ‘성례전’(Divine Liturgy), ‘미사’(Mass)’,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 그리고 ‘주님의 기념’(Lord’s Memorial) 등입니다. (화이트, 261쪽) 여기서 ‘주님의 만찬’과 ‘거룩한 교제’는 비교적 우리들에게 익숙한 용어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성만찬을 영어로 표기할 때 ‘Holy Communion’이라고 씁니다. 위의 용어에서 ‘미사’도 많이 들어본 용어일 겁니다. 천주교의 예배를 ‘미사’라 부릅니다. 이 말은 곧 천주교에서 예배와 ‘성만찬’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예배를 ‘감사성찬례’의 뜻으로 ‘미사’(Mass)’라고 부릅니다. 천주교 예배에 참석한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실제로 천주교는 성만찬이 예배의 ‘중심’입니다. 모든 예배에서 성만찬을 합니다. 그들에게 예배란 곧 성만찬이기 때문입니다.

 

성만찬의 보편적인 용어는 ‘유카리스트’(Eucharist)’입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받은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처음 교회(예루살렘교회)의 풍경을 보면, 교회가 세워진 뒤 교회의 구성원이 교회에서 행한 일은 ‘떡을 뗀’ 것입니다. 위의 용어에서 보았듯이, 이것은 성만찬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만찬은 교회가 처음 시작된 이래 교회에서 행하여 온 활동들 중 가장 핵심적인 활동에 해당합니다.

 

성만찬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 즉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드십니다. 그 유월절 식사 시간에 떡(빵)과 포도주를 축사하신 후에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시며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때만 해도 제자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뒤에 제자들은 그때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 만찬에서 나누었던 떡과 포도주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교회가 세워진 이후에 성만찬은 기독교 예배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외에 성만찬을 언급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며 그들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만찬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서에서 보았듯이, 유대인들은 세 가지 율법의 조항을 물고 늘어지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혔습니다. 음식 정결법, 절기법, 할례가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음식 정결법에 대한 문제가 고린도교회에 발생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가르침을 주면서 바울은 성만찬을 언급합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여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여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교회에서 성만찬이 ‘예식’으로 자리잡으면서 성만찬에 대한 복음서의 구절이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쓴 편지에서 예식문을 가져다 썼다는 겁니다. 성만찬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복음서나 고린도전서나 별로 차이가 없지만, 예배의 예문으로 쓰이기에는 고린도전서의 진술이 더 적합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복음서(마 25장, 막 14장, 눅 22자)와 고린도전서(고전 11장)의 성만찬에 대한 말씀을 비교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복음서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섞어서 성만찬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내어 주시면서 하신 말씀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성만찬 하나에도 이렇게 재밌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후 1500년간 성만찬에 대한 논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 종교개혁 시기에 이르러 성만찬에 대한 결렬한 논쟁이 발생합니다. 성만찬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보면, 종교개혁의 갈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때 발생한 성만찬 논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화체설(Transubstantiation), 다른 하나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 그리고 또다른 하나는 상징적 기념설(Symbolic Memorialism)입니다. 그냥 기념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화체설은 가톨릭 측의 신학이고, 공재설은 루터의 주장이고, 기념설은 쯔빙글리의 주장입니다. 각 ‘설’을 이해하는데 기본이 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입니다. 좀 크게 이야기하면 헬라철학이 성만찬 논쟁의 바탕입니다. 특별히, substance(실재)의 개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헬라철학에서 substance는 물자체를 말합니다. 어떠한 사물의 그 자체를 substance(실재)라고 지칭합니다. 성만찬에서는 빵과 포도주를 사용합니다. 빵은 빵의 substance가 있고, 포도주는 포도주의 substance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될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성만찬에 대한 신학이 갈립니다. 1) 가톨릭이 주장하는 화체설이란 substance가 transfer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가 예수님의 살과 피의 substance로 변화(transfer)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2) 루터가 주장하는 공재설이란 substance가 함께(con)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가 가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살과 피로 transfer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는 변하지 않더라도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와 함께(con) 예수님의 살과 피의 substance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직접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빵과 포도주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함께 실제로 임한다(real presence)는 뜻입니다. 3) 쯔빙글리가 주장했던 기념설은 가톨릭이나 루터의 주장을 모두 부인합니다. 성만찬에 덧입혀진 철학적 논의를 다 거두어 내고, 그냥 빵은 빵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이지 어떻게 이게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고, 어떻게 거기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실제로 함께 할 수 있느냐고, 아주 나이브하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쯔빙글리는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그냥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 성만찬이지, 거기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실제로 임하는 것은 아니라고, 아주 심플하게 말합니다.

 

성만찬에 대한 생각은 교회의 분열을 가지고 왔습니다. 루터는 화체설을 거부하고 공재설을 주장하면서 가톨릭에서 분리되었고, 쯔빙글리는 루터의 공재설을 거부하고 기념설을 주장하면서 종교개혁 운동을 함께 벌여왔던 루터와 작별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성만찬에 대한 신학 문제는 보통 큰 이슈가 아니었습니다. 성만찬에 대한 의견 차이로 루터는 쯔빙글리와 작별하게 되는데, 루터는 갈라설 때 쯔빙글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와 나는 영이 다르다!” 그리하여 오늘날 기독교에서 성만찬을 이해하는 세 갈래가 생겼습니다. 가톨릭 입장의 화체설. 루터의 입장인 공재설. 쯔빙글리의 입장인 기념설. 개신교의 주류 교단(감리교,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은 루터의 공재설 입장에서 성만찬을 이해합니다. 루터 이후에 종교개혁 2세대인 칼뱅이 성만찬 신학을 조금 다듬기는 합니다만, 큰 틀에서는 루터의 공재설 입장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침례교는 쯔빙글리의 기념설을 따릅니다. 우리교회는 개신교 주류 교단의 성향이니, 루터의 공재설을 따르는 입장인 것이죠. 물론 개인마다 다른 입장을 가질 수는 있지만요. 성만찬 하나에도 이렇게 흥미진진한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교회는 생명이고 사랑이다

 

최근 미국에서 <The Great Dechurching>이라는 책이 발간됐습니다. 한국어로는 ‘대규모 탈교회’ 정도로 옮길 수 있을 듯합니다. 영어에서 ‘de’자를 붙이면 ‘분리나 이탈’을 의미하니까, ‘de-churching’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조어’입니다. 이런 신조어가 생겼다는 것이 참 안타깝고 마음 아픕니다.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성장경제에서 ‘떠나야 한다’는 의미로 ‘Degrowth’(de-growth)/탈성장’라는 신조어가 생겼고, 이것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좋은 뜻의 신조어인데 반해, de-churching(탈교회)라는 용어는 교회의 위기를 표현한 신조어이기에 그리 좋은 뜻은 아닌 거죠.

 

책의 저자들이 조사(research)를 해보니, 지난 25년 동안 미국에서 자그마치 4천만명 정도가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미국 성인의 15% 정도에 해당되는 규모라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는 한 가지로 설명될 수 없겠지만, 주된 이유는 ‘소련 붕괴’, ‘극우에 결부된 기독교’, 그리고 ‘인터넷의 발달’ 등이 제시됐습니다. 구소련과 미국은 악과 선의 체제 대결로 미국인들에게 비춰졌는데, 소련이 붕괴되고 나서 악의 축이 사라졌기에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극우세력과 복음주의 교회들이 영합하게 된 것도 사람들이 교회에서 관심을 멀리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터넷(정보통신)의 발달로 누군가의 간섭없이 기독교 세계관 바깥의 세계관을 접하게 된 것도 기독교를 떠나게 된 요인입니다.

 

미국의 탈교회 현상을 설명하는, 그럴싸한 이유들이지만, 제 생각하는 이유는 조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탈교회 현상 문제는 좀 더 심층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 중 하나가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심층적으로 일으키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복음주의권 학자들은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주의 자체가 기독교의 자본주의화를 통해 부흥을 일군 미국 특유의 기독교 신앙체제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탈성장(자본주의로부터의 탈출)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반해, 미국 복음주의권 교회에서는 아직도 자본주의성장신화를 비호하며 탈성장을 오히려 비판하고 기후변화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탓을 자본주의 체제에 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미국의 탈교회 현상(또는 한국 교회의 탈교회 현상)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자본주의 문화 때문인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고, 이윤과 이익을 남기는 것을 최대의 과제로 삼는 자본주의 문화는 인간의 생명 현상을 말도 못하게 축소시킵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동료를 동료 인간으로 대하지 못하게 하고, 서로 이익을 취하는 사이로 만듭니다. 삶의 모든 부분을 시장화(market)시켜, 이윤과 이익을 위해 생명을 소모시키는 장으로 삶을 변환시켜버립니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은 생명을 나누는 사이가 더 이상 아니게 됩니다. 인간의 삶은 고립되고 파편화됩니다. 서로가 서로의 고통에 무관심합니다.

 

생명현상이 줄어든 것은 고스란히 비혼과 저출산으로 드러납니다. 사랑을 하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서로의 삶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회성이 줄어듭니다. 소통하지 않습니다. 무반응과 무관심으로 인해 사회가 삭막합니다. 사람들 사이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도 동일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자연은 인간의 이윤과 이익을 위한 착취의 대상일 뿐이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할 동료 ‘생명’이 전혀 아닙니다. 이렇게 생명력은 말도 못하게 축소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명백한 병폐입니다.

 

생명현상이 줄어든 사회에서 탈교회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교회는 생명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사건은 생명현상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생명력이 넘칠 때 교회는 부흥하게 되어 있고, 생명력이 축소될 때 교회는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생명현상인 성령으로 인하여 이 땅에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확장된 가족(extended family)입니다. 비혼과 저출산 사회에서 교회가 함께 생명현상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서 결혼이나 출산이 발생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랑이 없는 곳에서 교회는 생겨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책에서 아주 실질적인 사회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비영리단체 경영컨설팅업체 브리지스팬그룹에서 “미국 주요 6개 도시에서 신앙에 기반을 둔 비영리기관이 해당 지역 사회안전망의 40%를 제공한다”는 내용을 2021년에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가 사라지는 것은 사회안전망이 사라지는, 아주 실질적인 위협이라는 지적입니다. 교회가 사라지면 어려운 사람들은 더 어려운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사라지면 사회안전망이 줄어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가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 사회에 ‘사랑’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게 더 큰 문제입니다. 지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은 오직 ‘사랑’ 뿐인데,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교회가 사라진다는 것은 세상을 이길 힘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더 지옥이 되어 갑니다.

 

교회는 세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교회는 세력을 키워 누군가를 지배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랑을 키워 세상을 섬기는 생명체입니다. 교회는 마치 어머니의 자궁과 같습니다. 교회 하나가 없어지면, 사랑이 줄어듭니다. 교회를 여느 사회 집단으로 보는 것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숫자가 아니라 능력입니다. 생명이 형편없이 축소된 우리 시대, 그래서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우리 시대, 우리는 마음 아파해야 합니다. 단순히 교회 숫자가 줄었다고, 교인 숫자가 줄었다고 아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없음을, 사랑이 없음을, 그래서 사람들의 고통이 더 심해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아파해야 합니다. 교회는 생명이고 사랑입니다. 이 악한 시대를 이기고 견딜 힘입니다. 교회를 사랑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성경 읽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

 

4세기에 활동했던 사막의 교부 에피파니우스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는 절벽이요 깊은 심연이다.”

 

기독교 영성가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에 대한 탐구를 진지하고 처절하게 했습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고, 오롯이 하나님과 대면하기 위하여 무던히도 애썼습니다. 그 중에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c.345-377)라는 사막의 교부가 있습니다. 이 수도사가 개발한 영성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 가운데 있을 때 우리의 생각을 어지럽히고 산만하게 방해하는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 유형을 밝히고, 그것을 이 길 힘인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한 것입니다.

 

에바그리우스가 밝힌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탐식’

(2) ‘음욕’

(3) ‘탐욕’이 그 뒤를 잇고,

(4) ‘슬픔’

(5) ‘분노’

(6) ‘아케디아’가 있고,

(7) ‘헛된 영광’

(8) ‘교만’이 있습니다.

 

1)~3)은 인간의 기본 욕구입니다. 4)의 슬픔은 인간의 기본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느끼는 좌절감의 감정입니다. 그래서 이 슬픔은 시기나 질투의 감정으로 나타나 인간을 괴롭힙니다. 5)의 분노는 슬픔의 시기가 지나면 오는 것인데, 인간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처음에는 슬픈 감정에 휩싸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슬픔이 분노로 바뀝니다. 대개 타자(other people)를 향한 폭력은 이 감정에 휩싸이게 될 때 발생합니다.

 

6)의 ‘아케디아’는 한국말로 옮기기 힘든 용어인데, 권태, 절망, 무기력, 우울 등의 감정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 아케디아가 무서운 것은 이 감정은 사람을 자살로 이끄는 치명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슬픔과 분노의 시기를 지나면, ‘아케디아’의 상태, 즉 우울한 상태가 되고, 이때는 타자를 해치는 게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해치게 됩니다.

 

7)의 헛된 영광은 ‘자기애, 자기의(self-righteousness), 인정욕구’를 의미합니다. 자기애가 강하고, 자기의를 표출하며, 인정욕구를 갈망하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조차 모릅니다. 불쌍한 인생이지요. 그리스 신화에서 나르키소스(Narcissus)가 가졌던, 그런 욕망이죠.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 부릅니다. 나르키소스는 물가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것에 매혹되어 결국 그 환영을 쫓아 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8)의 교만은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위에 올려놓은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교만은 단순히 자기를 다른 사람보다 낫게 여기는 행위가 아닙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 그것이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겸손한 척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교만은 결국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 최고의 악한 행동인 것이죠.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여덟 가지의 악한 생각을 제시하고, 이것을 이길 힘은 성경을 읽은 데서 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악한 생각에 대응하는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위의 악한 생각 중에서 ‘아케디아’에 대한 대응 말씀을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제시합니다.

 

‘아케디아’의 사례 중 ‘아케디아에 빠졌을 때 형제들에게 얼른 가서 위로를 받고 싶다는 유혹’에 맞서 주님은 시편 77편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영혼은 위로도 마다하네. 하나님을 생각하니 즐거워지네. 내가 이 말을 하니 내 얼이 아뜩해지네” (『안티레티코스』 VI, 24).

 

우리는 성경 읽는 법을 배우는 것, 성경 읽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합니다. 요즘엔 스마트폰으로 성경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스마트폰이나 다른 전자기기가 없어 그냥 성경책을 손수 펴서 보아야 할 때보다 성경을 더 안 읽는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을 열어서 성경을 읽을라 치면 그보다 재밌어 보이는 온갖 자극적인 기사나 영상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왕도는 없습니다. 스마트폰을 좀 내려놓고, 아날로그식으로 종이 성경책을 곁에 가까이 두고 수시로 성경을 들여다 보는 것이 최선입니다. 성경을 왜 읽어야 하는 지 모르겠다고, 혹시, 투덜거림이 내 안에서 올라오는 분이 있다면, 신앙의 선배로부터 배워보세요. 성경은 하나님께로 가는 그 험난한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안내자입니다. 성경은 힘입니다. 이 힘을 잃지 마세요. 힘이 있어야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갈 수 있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인 성경을 가까이 두고, 자주, 펴서 읽어보세요. 성경이 힘을 주고, 길이 되어 줄 겁니다. 성경(말씀)은 우리의 최종병기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사도행전을 주목하는 이유

 

사도행전은 성령행전, 또는 기도행전이라는 별명을 가진 성경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후편으로서 누가복음을 읽은 후 읽어야 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가 같기 때문에 두 책의 강조점은 같습니다. 성령과 기도가 강조됩니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목격하고, 기도 사역을 배우게 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기도하는 주님’으로 묘사됩니다. 무슨 일을 하시든지, 예수님은 기도를 먼저 하십니다. 그래서 누가-행전은 성령행전, 또는 기도행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주님’이 부재한 상황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의 도우심과 이끄심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셨던 사역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어떻게 동일하게 수행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에서부터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의 사역, 그리고 십자가 죽음, 또한 부활과 승천까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성령 안에서 발생한 일인데, 사도행전은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교회(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것을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신앙과 사역의 매뉴얼입니다.

 

현대 기독교 신학이 교회를 비판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비판은 교회가 충분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고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야훼 신앙, 그리고 플라톤의 신학의 영향 아래 기독교인들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일신론/유일신론’으로만 생각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묵상이 부족하고, 삼위일체적 사고와 실천이 부족하다보니, 기독교 고유의 폭발력 있는 복음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충분히 사유하고 묵상하지 못하면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은 생활의 구조를 ‘가부장적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의 교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을 일신론/유일신론으로 인식하고 마니, 일상생활에서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이해보다는 ‘하나의 힘’에 집중해서 그 권위 아래 굴복하고 굴복시키는 생활 구조를 만들어 내고, 그러한 생활 구조를 오히려 편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죠.

 

일찍이 기독교 신학은 삼위일체론(Trinity)를 사유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삼위일체론에서의 쟁점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고유한 개체성을 유지하면서 삼신론이나 다신론으로 빠지지 않고 ‘한 하나님’이 될 수 있을 것인가였습니다. 이 문제는 너무도 중요하고 신비로운 것이라,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학이 발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삼위일체 신비를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신학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을 말하고 표현하고 싶은지,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왕적 군주의 모습을 가진 폭력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교제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일치를 이루지만 동시에 각자의 위격(고유의 품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민주사회를 이루어 가고, 생태 위기를 극복하는데 필수적인 신학적 통찰입니다.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강력한 신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사람들은 실제 교회생활에서, 그리고 선교활동에서 그것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한 하나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삼위 하나님이 위격을 가지고 고유의 사역을 성취하시는지,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역 속에서 몸소 경험하고, 그 경험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보여줍니다. 그래서 강력합니다. 하지만, 보여주다 보니,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그냥 우리의 눈에서만 흘러가 버리기도 합니다. 마치, TV 드라마를 보듯이 말이죠. 하지만,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이유는 우리에게 ‘구경’하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는 보여줄 수 있을 뿐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보여주고 있는 삼위일체의 역사를 눈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발생하도록 우리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 함께 사도행전을 거니는 동안,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더 사랑하게 되고, 그 신비를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실천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양심과 비양심]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양심이란 자기 사랑을 거부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타인을 위해 죽는 사람을 '천재'라고 부르는데, 소크라테스, 예수, 바울 등을 꼽는다.

 

양심적인 종교 저술가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저술가는 항상 논쟁적이고, 따라서 항상 반대파에 눌려서 고통을 받거나 반대파의 공격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그 반대파라는 것은 그의 시대에 있어서 독특한 악과 표리일체를 이루고 있다. 만일 그 악을 이루고 있는 것이 왕이나 황제, 교황이나 주교들, 그리고 권력자들이라고 한다면, 그가 그들의 공격과 표적이 되어 있다는 사실로써 종교적인 저술가라는 사실이 인지될 수 있다"(관점, 97쪽).

 

키에르케고르는 외톨이였다. 그 자신이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종교적 저술가였고, 국가와 교회로부터 핍박을 받았고, 자가면역질환인 척수병으로 투병을 했다. 그가 외로웠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존재의 무'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존재의 무는 비양심적 상태를 말한다. 존재하는데 양심 없이 존재하는 사람들은 자기 사랑하기에만 바쁘지, 타인을 향한 사랑을 실천/실현하지 않으며 산다. 자기 자신 이외에는 목적을 두지 않고, 타인을 수단으로 삶으로 사는 자들을 비양심적 존재, 즉 존재의 무라고 부른다.

 

키에르케고르는 <집단(군중)은 거짓이다 The Crowd is Untruth>라는 짧은 글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집단(군중)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집단을 이끄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보다 인간 존재의 의미를 모독하는 자는 없습니다"(생각하는 사람을 빛나게 도와주는 할아버지들, 26쪽).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을 싫어했다. 집단(군중)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겔의 정반합(변증법)은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반(Antithese)'을 없애는 방식으로 평등과 평화를 이룬다고 생각을 했다. 이것을 나치에 적용해 보면, 정(독일인), 반(유대인), 합(평화로운 세상)이라고 할 때, 나치는 유대인을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지금도 나치식 변증법이 보수 집단에서 통용되고 있다. 반(Antithese)을 없애는 방식으로 사회 통합과 평화를 이루려고 하는 생각은 언제나 '혐오와 폭력'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비양심적인 행동이다. 자기(These)만 사랑하고 타인(Antithese)을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인가 진보인가는 어떤 변증법으로 세계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가에서 갈린다. 보수는 '반(Antithese)'을 없애거나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려 하고, 진보는 '반'을 끌어안고 융합하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양심은 타인(반/Antithese)를 위해서 나를 내어놓는 일이다. 비양심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여 타인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반(Antithse)'를 없애거나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려 하지 않고, '반'을 끌어안고 융합하는 방식으로, 즉 '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반'을 없애고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려는 욕망이 훨씬 더 강한 것을 볼 수 있다. 군중(집단)을 모으고 그 힘으로 '반'을 없애고 굴복시키기에 혈안일 뿐이다. 이에 맞선 양심적인 사람들은 핍박을 받는다. 외로워진다. 양심을 지키며 사는 일은 어렵다. 양심을 지키는 자는 늘 '유혹자'로 산다. 양심을 저버리라는 유혹.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오늘 밤에도 유혹이 거세다.

Posted by 장준식

영국교회에서 배우라

 

19세기, 20세 초, 영국의 별명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the empire on which the sun never sets)였죠. 이 별명은 특별히 영국에만 붙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국을 이루었던 나라들에게 일반적으로 붙여졌던 별명이고, 이제 이 별명은 미국에게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국을 주목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발전된 이후 사회가 급변하면서 겪게 되는 모든 문제점들을 제일 먼저 겪은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농촌 중심 사회에서 도시 중심 사회로의 변경을 가장 먼저 경험한 나라입니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기계가 발명되고, 기계를 이용한 산업은 농촌을 붕괴시키고 도시 문화를 형성합니다. 농사 짓고 살던 농부들은 더 이상 농촌에서 일 자리를 얻을 수 없어 도시로 몰리게 되는데, 그것 때문에 도시 빈민 문제가 영국 사회를 괴롭혔습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이 18세기입니다. 이때 존 웨슬리 목사님이 벌였던 ‘Methodist’ 운동은 도시 빈민들을 구제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그것을 계기로 ‘감리회’(Methodist)라는 교파가 탄생합니다.

 

도시가 발달하면서 발생하는 각종 사회적 문제를 먼저 경험한 영국에서는 정치이론과 사회이론이 발달합니다.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다 보니, 정치/사회 이론이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영국은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주자를 받아들였고,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나라의 사람들이 이주해서 영국 사회의 한 부분을 구성하면서 각종 사회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특별히, 종교 문제가 컸는데, 이슬람 국가 또는 힌두 국가에서 이주하여 온 이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영국 사회에서는 일찍이 ‘다원주의’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다원주의는 영국 사회의 통합과 안정을 위해서 채택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폭력사태가 발행하여 나라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죠. 보수 기독교인들은 ‘다원주의’라는 말을 들으면 매우 불쾌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을 단순히 신앙의 타협으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서로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은 타협이 아니라 평화입니다. 일찍이 존 로크가 <기독교의 합리성>(1695년 출간)에서 주장했듯이, 신앙은 ‘온유와 말씀선포와 모범적인 삶’으로 ‘설득’해야 하는 것이지, 힘으로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국 사회는 2차대전 이후에 아주 급격하게 변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종교 지형입니다. 영국국교회(성공회)에서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교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인구는 10% 밖에 되지 않습니다. (선교형 교회, 91쪽) 이것도 벌써 20년 전 통계이니, 지금은 그 인구가 더 줄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2차 대전 이후에 주일학교에 참석하는 어린이들의 비율이 매우 급격히 줄었는데, 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교회의 문화와 자연스럽게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신앙의 전수가 잘 되지 않았던 겁니다. 어려서 교회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교회에 안 다닐 가능성이 엄청 큽니다. 어린 시절의 교회 경험이 없기 때문에 교회를 아주 낯선 곳으로 받아들입니다.

 

영국교회는 기독교의 쇠퇴를 이미 2차 대전 이후, 1950년대부터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그리고 기독교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사회에서 어떻게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할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전세계 기독교 국가 중에 영국만큼 기독교의 쇠퇴를 먼저 경험한 나라도 없고, 영국만큼 교회와 신앙을 깊이 고민해본 국가도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 기독교 신앙의 쇠퇴를 경험하고 있는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의 교회들은 영국 교회에서 배울 게 참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세대가 자녀세대에게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선교학 연구에 의하면, 어릴 때 교회에 대하여 좋은 경험을 가진 사람일수록 일생동안 계속하여 교회를 잘 다닐 가능성이 클 뿐 아니라, 어른이 되어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더라도 교회로 다시 돌아올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가보았던 동물원이나, 엄마가 해 주신 음식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에게 어린 시절의 경험은 일평생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세대의 책임은 큽니다. 사무엘이 은퇴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 12:23-24).

 

교회의 풍경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은 여러가지 사회적 요인도 작용했지만, 우리 자신도 우리의 모습을 조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교회에 대하여 ‘좋은 경험’을 하도록 잘 이끌지 못한 것은 아닌지, 반성을 해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여 한마음으로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교회에 대하여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조금 더 헌신한다면, 광야에서 길을 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조금 더 힘을 모아, 좋은 교회를 세워보아요.

Posted by 장준식

그리스도인의 시간: 시간은 인격이다

 

“신은 죽었다.” 니체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열왕기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의 고대 왕국에 대한 역사 기록입니다. 그들의 역사 기록은 독특합니다. 한국에도 삼국사기나 고려사, 또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역사 기록이 있지만, 그 기록 방식이나 내용을 보면 열왕기의 그것과 분명한 차이를 지닙니다. 한국의 함석헌 선생이 성경의 역사서처럼 한국 역사를 기록한 책이 있습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그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글이 이 글 된 까닭은 성경에 있다. 쓴 사람의 생각으로는 성경적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 똑바른 말로 역사철학은 성경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양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 역사는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이 성경의 자리에서만 될 수 있다”(12-13쪽).

 

여기서 함석헌 선생이 말하고 있는 ‘역사는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이 성경의 자리에서만 될 수 있다’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기독교는 역사를 물리적 현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인격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사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 때문에 시간은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인격이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력을 지키는데, 교회력은 단순히 교회의 행사력이 아니라 시간을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살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사람과 시간을 그냥 물리적 현상으로 보는 사람과의 차이는 엄청 납니다. 시간을 물리적 현상으로 보는 사람은 그 시간을 그냥 자신의 소유 정도로 생각하고 그 시간을 이용하여 자기의 뜻(욕망)을 이루려 하겠지만,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사람은 시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보고, 무엇보다 시간 안에서 ‘구원’을 봅니다. 우리의 시간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된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간은 단순히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열왕기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열왕기는 시간을 하나님의 인격이 활동하는 ‘그 무엇’으로 기록합니다. 그래서 시간(역사) 속에서 발생한 모든 일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그 무엇 하나, 단순한 사건 하나, 그냥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열왕기는 하나님의 인격을 치열하게 대면하여 시간(역사)을 돌아봅니다. 열왕기는 바벨론 포로의 참상을 겪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반성을 하며 돌아본 역사책입니다. 열왕기하 25장을 보면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이야기가 나오는데,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벨론과 잘 지낼 것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갈대아 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왕하 25:24). 사반의 손자 그달리야 총독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유다의 마지막 왕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애굽을 믿고 바벨론에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다 결국 멸망 당하고 맙니다. 특별히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예루살렘 성이 포위 당하자 1년 7개월 간 버티다, 결국 성을 빠져나와 도망치다 바벨론의 추격대에 붙잡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앞에 끌려와 험한 꼴을 당합니다. 시드기야는 두 눈을 뜨고 자기의 자식들이 죽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고, 그리고 자신의 두 눈이 뽑히는 치욕을 겪습니다. 놋사슬에 묶여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압송되어 거기서 비참하게 죽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부하 장수 느부사라단이 몇 년 후 예루살렘에 다시 와서 성전과 왕궁, 그리고 고관들의 집들과 예루살렘 성벽을 완전히 불사르고 무너뜨립니다. 지체 높은 사람들은 모두 포로로 잡아가고 비천한 사람들만 가나안 땅에 남겨두고 떠납니다. 이러한 일을 보면서, 남유다 사람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당연히, “신의 죽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방인(이방신)에 의해 죽은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한 성전과 왕궁, 그리고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하나님은 죽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열왕기는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에 대한 반론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끔찍한 일을 경험하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지’ 질문하고,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의문을 품습니다. 그야말로 신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왕기는 무엇이 하나님(신)을 죽였는가에 대하여 강력한 클레임을 겁니다. 하나님을 죽인 것은 이방인(신)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악을 통해 총체적 파국을 만들어 놓고, 신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처럼 말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사 59:1-3).

 

폐부를 찌르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감히 ‘신의 죽음’을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부지런히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부지런히 시간을 인격으로 보아야 합니다. 시간 안으로 들어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를 구원하고 계신, 그 놀라운 ‘복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다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한 해가 가고, 새 해가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시간은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한 해가 가서 주어진 물리적 시간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구원이 가까워 온 것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텔레스는 파우스트의 영혼을 빼앗기 위해서 파우스트에게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정말로 아름답구나!”를 외치게 만듭니다. 파우스트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순간의 쾌락에 머물게 끔 타락시키려 했던 것이죠. 하지만, 시간이 인격이라는 것, 우리의 시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된 시간이라는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가는 세월’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그리스도의 인격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아끼지 않고 그 시간으로 ‘구원의 일’을 합니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심과 비양심  (0) 2024.01.11
영국교회에서 배우라  (0) 2024.01.10
가장 간절한 신앙고백  (0) 2023.12.27
존 로크: 기독교의 합리성  (0) 2023.12.22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사람들  (0) 2023.12.10
Posted by 장준식

가장 간절한 신앙고백

 

요즘 한국 드라마 중에 ‘고려-거란 전쟁’이라는 게 있습니다. 배우 최수종이 오랜만에 사극 주인공으로 출연했어요. 최수종이 고려의 충신 강감찬으로 분해서 나옵니다. 한국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타면 낙성대역이 있는데, 강감찬 장군의 집터 입니다. 서울대 옆에 있어서, 모르는 사람은 또다른 대학교인 줄 알죠.

 

고려 시대 고려를 괴롭히던 제국은 거란입니다. 거란족의 득세 때문에 고려는 늘 숨죽이며 살았습니다. 고려의 왕은 거란 황제에게 허락을 받아야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한국 역사를 보면 늘 주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의 그늘 아래서 살았죠. 지금은 미국의 그늘 아래 살고요. 약소국의 설움입니다.

 

구약의 열왕기를 보면 이스라엘도 동일한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애굽, 앗수르, 그리고 바벨론의 등살에 늘 괴로워합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우방국가이지만, 애굽이 이스라엘에게 늘 살가웠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애굽도 앗수르와 바벨로에 밀려 결국 이스라엘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들 이야기를 보면 국제 정세가 더 안 좋아집니다.

 

요시야 왕이 애굽 왕 느고와의 전투에서 죽고, 그 뒤를 이은 여호아하스는 애굽 왕의 재가를 받은 왕이 아니라 애굽 왕에 의해 3개월만에 축출당하고 맙니다.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끌려가 거기서 죽습니다. 대신 여호야김이 왕위에 오릅니다. 여호야김의 통치도 아주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애굽에 의해 왕위에 올랐기에 친애굽 정책을 썼지만, 바벨론의 침공으로 어쩔 수 없이 바벨론에게 줄을 서게 되죠. 그러다 애굽과 바벨론의 전투에서 애굽이 승리를 거두자 다시 애굽에 손을 내밀었다가 바벨론에게 괘씸죄가 걸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죽습니다. 그 이후, 국운이 다하여, 여호야긴, 시드기야 왕을 거치며,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 당합니다.

 

요즘에 발생하는 전쟁을 보아도 전쟁은 온 나라를 초토화시키고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요즘보다 더 비참했습니다. 인류 사회는 전쟁을 막아보려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쟁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비참함 가운데 최고였습니다. 요즘, 우리들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지 않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요시야가 죽고, 남유다의 마지막 네 왕은 격동의 세월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매우 박합니다. 모두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정치를 해도 살아남을까 말까 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남유다는 안타깝게도 좋은 정치인을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멸망 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렇게 멸망 당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열왕기 사가들은 상식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 기록을 남깁니다. 그 기록을 보면, 그렇게 남유다가 멸망 당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기록과 거리를 두고 보아서 그렇지, 감정을 이입해서 보면, 이러한 고백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하셨어요!’라고 신앙고백 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러한 어려운 일이 나에게 닥친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어요!’라고 고백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열왕기 사가들(역사를 기록한 사람들)의 기록은 그야말로, 처절한 기록이고, 가장 간절한 신앙고백입니다. 열왕기 사가들이 우리들에게 주는 신앙의 교훈은 준엄합니다. 1) 망하더라도 하나님 안에서 망해야 다시 살 수 있다. 2)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는 생명이다. 3)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하라. 이 신앙이 옳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건은 단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입니다. 열왕기 사가들은 나라가 망한 상황 속에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두었습니다. 망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살아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실 거라는 강력한 소망입니다.

 

너무 비참한 일을 겪으면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나에게 벌을 내리신 거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비참함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그 비참함에서 나를 건지실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처절한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도 배웁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다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그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배신하거나 욕하거나 신세한탄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신앙은 이 삶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좋을 때는 누구나 ‘할렐루야 아멘’ 할 수 있지만,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우리의 입술에서는 과연 어떠한 말이 나올까요? 사실, 좋을 때 ‘하나님께서 하셨다!’라고 신앙고백 하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힘들고 지칠 때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늘 기쁘고 즐거운 가운데 찬송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오길 소망합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일이 있더라도, 주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믿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큰 유익이 있습니다. 좌절금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신앙의 깊이에 들어간 이들의 실제 상황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주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믿어보세요. 무덤 문을 열고 부활의 역사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가장 강력한 신앙의 무기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존 로크: 기독교의 합리성]

ㅡ 로크에게서 배우는 기독교

 

중세를 벗어나 근대의 문을 열었던 정치 사상가 존 로크(John Locke). 홉스, 그리고 루소와 더불어 반드시 살펴야 하는 인물이다. 서구 근대 사상가들은 단순히 정치 철학을 펼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종교(기독교)를 비판했다. 그래서 근대 사상가들의 저술은 눈여겨봐야 할 신학 서적이기도 하다. 중세의 사고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종교 기반 사회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까지 국가는 종교(교회)의 시녀였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과 비슷하다). 가부장제를 생각해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유교의 종교적 이념을 통해서 설명해 보자면, 국가는 왕을 보존하는 기구로 기능한다. 모든 국민은 왕을 받들어 모시는 일에 동원된다. 국민의 개별적인 삶은 모두 왕을 위한 헌신으로 표현된다. 가정은 이러한 왕정제도의 미니어처 역할을 했다. 집안의 어른,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는 가정의 왕으로 군림했다. 가정은 ‘가장’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가정의 모든 활동은 가장을 보존하는 데 헌신된다. 가장을 좀 더 확대하면 ‘가문’이 된다. 가문의 모든 식솔들은 가문의 안위를 위해서 희생된다.

 

서구 중세는 종교가 사회의 기반이었다. 국가도 국민도 모두 종교를 보존하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중세의 왕이 왕권 신수설을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왕은 신의 뜻을 받드는 사람이다. 왕은 종교(교회)를 지키고 번성하게 하는데 특별한 임무를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왕은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교회를 보호했고, 교회는 왕에게 신적인 능력을 부여해 왕을 신성화시켰다. 그래서 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고, 교회는 온갖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근대 정치사상은 바로 이것에 제동을 건 것이다. 그래서 근대 사상가들의 저술들은 모두 국가와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하다. 또한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국가와 종교의 역할을 정의하는 데 힘을 쏟는다. 그 중에 존 로크가 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 마음대로 하라.” 언뜻 보면 낭만적으로 들리는 이 말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이다. 이 말은 국가와 교회가 이방인들의 개종을 위해서는 ‘강제적인 힘’을 사용해도 된다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기독교는 진리이고, 그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강제적인 힘을 사용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랑에 있다.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아 구원에서 멀어진 이방인들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는 강제적인 힘을 사용해서라도 그들을 구원받게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로크를 비롯한 근대 사상가들은 이러한 논리에 반대한다. 그러면서 로크가 펼친 사상은 ‘관용론(toleration)’이다.

 

로크의 사상적 배경을 보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로크는 엄격한 칼빈주의적인 배경에서 성장을 했고, 유명한 청교도 설교가인 오웬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로크는 연인 마다리스 마샴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깊은 통찰을 할 수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한다. 물론, 여자도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 서로 잘 만나면 좋은 일이 생긴다. 로크도 그랬다.) 로크의 연인 마샴의 아버지는 그 당시 유명했던 캠브리지 플라톤주의자인 랄프 커드워쓰(Ralph Cudworth)이다. 로크는 연인 마샴의 권고로 성경과 신학서적을 열심히 읽었다. 특별히, 로크는 마샴의 아버지 랄프 커드워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것은 로크가 캠브리지 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다.

 

캠브리지 플라톤주의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Radical Orthodoxy’(급진적 정통주의)로 알려진 사조이다. 물론 오늘날 급진적 정통주의는 로크 당시의 캠브리지 플라톤주의를 보완, 발전시킨 신학사상이지만, 그 기조는 같다. 이들은 당시에 새로 시작되는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사회가 세속화되는 것을 반대하고, 고전적인 기독교 신앙, 즉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적 기반, 또는 세계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오늘날 급진적 정통주의 신학을 이끌고 있는 존 밀뱅크, 캐서린 픽스톡, 그레이엄 워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을 신학의 틀에서 해석하는 작업을 한다. 세속의 영역과 신학의 영역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신학의 영역 안에 있다는 뜻이다. (급진 정통주의 신학을 조금 더 알고 싶으면, 바이블 오디세이에서 ‘급진적 정통주의’를 검색해 읽어 보시라.)

 

종교(기독교)에 대한 로크의 생각은 그의 주요 저서 <인간 오성론>, <통치론> 등에 나타나 있지만, 그것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저서는 1695년에 출간된 <기독교의 합리성>(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이다. 중세의 종교(기독교)는 다분히 강제적이었다. 국가가 국민들에게 신앙을 강요했다. 근대 사상가들은 이러한 종교 형태는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인간 영혼의 문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서 외부의 힘에 의해서 결정되면 안 되고, 순전히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의 배경에는 그 유명한 ‘사회 계약설’이 있다. 통치자에게 주어지는 국가 권력은 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과의 합의에 의한 계약에서 온다는 것이다. 사회 계약설은 개개인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자유를 중시한다. ‘계약’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오는 자유이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 더 이상 외부의 개입이나 강제를 거부하는 근대 사상은 기독교의 전파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 전파는 국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 종교는 국가의 도움이나 국가의 강제력 없이 스스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힘이 약화된 것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로크의 의도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영혼의 문제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사적인 것이기에, 그래서 남에게, 그것이 국가라할지라도, 절대로 남에게 맡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에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크는 신앙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영혼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외적인 힘에 의해서 강제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다면 종교는 어떻게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을까? 로크는 여기에 대해서 세 가지를 말한다. 온유, 설교, 그리고 모범적인 삶이다. 이것을 설득(Persuasion)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종교는 설득을 통해서 전파되어야 하지, 힘에 의해서 전파되면 안된다는 뜻이다. 로크는 자신의 저서 <기독교의 합리성>에서 더 이상 국가의 힘에 의지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교회를 향해서 사람들을 설득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전파하는 방법에 대해서 논한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로크는 기존의 전통이나 신학자들의 의견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여 나름의 대답을 내놓는다. 그래서 <기독교의 합리성>의 부제는 ‘성서에 제시된 대로’(As delivered in Scripture)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로크는 캠브리지 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신앙을 이성의 한계 안에 가두려 하지 않고 이성을 넘어서는 계시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로크가 신앙을 이성의 한계 안에 가두려 했던 이신론자들이나 유니테리언들과는 다른 신앙의 결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기독교의 합리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대개 ‘합리성’은 이성에 근거를 두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로크는 이성의 연역적인 관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제안자(계시자)가 신실하면 믿을 만하여 그 명제(주장/복음)에 동의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계시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대한 신뢰가 곧 합리적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계시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로크가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애인 잘 만난 덕?)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로크가 ‘기적’(miracle)’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로크는 <기독교의 합리성>에서 기적은 계시나 예언이 참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을 보면, 기적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로크는 이 점을 들어 복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의해서 기독교는 외부(국가)의 힘(도움) 없이 전도/선교를 할 수 있는데, 그 능력이 바로 말씀과 기적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로크가 기적을 기독교 전파의 강력한 수단 중 하나로 보는 것은 참 흥미롭다. 로크에게 기적은 사람을 외부에서 강제로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설득하는 도구이다.

 

로크는 기적과 더불어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도구 도덕을 말한다. 여기에서 로크는 역사적인 신앙과 구원하는 신앙을 구분한다. 역사적인 신앙은 단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원하는 신앙을 말한다. 그것은 참된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삶으로의 도약이다. 이것을 로크는 도덕이라고 일컫는다. 국가의 도움이나 강제력 없이 기독교를 전파해야 하는 입장에서 교회(그리스도인)는 사람들에게 도덕인 삶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이 곧 설득의 도구이다.

 

국가의 강제나 도움 없이 기독교를 전파해야는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을 통해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다시 정리하면, 로크는 온유와 설교와 모범적인 삶을 제시한다. 이것을 통해 사람들을 설득해야지, 다른 방법을 통해서 신앙을 강요하거나 강제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국가로부터 더 이상 비호를 받지 못하는 교회의 연약함 때문이 아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영혼의 문제는 국가조차도 개입할 수 없는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정치철학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면서 발전했다. 특별히 근대 정치철학은 국가와 교회(종교)가 결탁한 것 때문에 발생해온 비극적인 일들에 대해서 반성하며 그것을 개선해 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근대 사상가들은 국가와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국가의 역할과 교회의 역할을 새롭게 정립하고, 각자에게 주어진 임무를 구별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세속화라고 부르지만, 세속화라는 말이 곧 신앙의 축소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서구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모두 종교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로크도 그 당시 영국 국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본인이 성경을 직접 연구해 보니 영국 국교회가 성경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크는 성경으로 돌아가자(성서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성서로 돌아가자. 정말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게 참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해석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로크가 말하고 있는 ‘관용’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로크의 종교 관용론의 핵심은 종교다원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파제도를 말하는 것이다. 로크의 종교 관용은 기독교 신앙을 전제한 관용이다. 다만, 기독교 신앙 안에서 자유가 허락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 당시 영국 국교회의 횡포를 겨냥한 것인데, 영국 국교회와 청교도 전쟁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반영한 것이다. 관용이란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표현하는 다양한 교회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교파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 관용은 혐오와 전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한다.

 

교회의 선교가 어려운 시절이다.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한 가지 방법은 근대 정치사상가들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로크, 홉스, 루소, 그리고 칸트를 비롯한 근대 정치철학자들의 책은 단순히 정치철학 서적이 아니다. 모두 국가와 교회를 비판하는 정치신학서적이다. 그들은 교회를 그냥 무작정 비판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안을 제시한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비판에 눈이 가려져 고개를 돌리지만, 그러지 말고, 그들이 비판하면서 제시하는 대안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 어려움 시절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좋은 지혜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로크가 말하는 설득의 원리를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온유, 설교, 모범적인 삶. 그리고 기적.

Posted by 장준식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사람들

 

남유다의 요시야 왕은 한국으로 따지면 구한말의 고종 왕 같은 존재입니다. 나라의 운명을 어떻게든 좋게 바꾸어 보려고 노력을 많이 한 왕입니다. 요시아는 아버지 왕, 아몬이 암살을 당한 바람에 그 자리에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쉬운 인생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왕위에서 31년간 통치합니다. 국운이 풍전등화에 놓인 상황에서 통치를 열심히 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역대 왕 중에서 히스기야와 더불어 최고의 찬사를 받은 왕입니다.

 

요시야 시대에는 예레미야와 스바냐가 활동을 했습니다. 예레미야나 스바냐를 읽어보면 명확히 드러나고 있지만, 요시야 시대는 국제정세가 매우 안 좋을 때였습니다. 남유다는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해야 했고, 전통적인 우방 애굽과 가까이 지내면서 새로운 제국으로 발돋움은 바벨론의 세력 확장에 대응을 해야 했습니다. 요시야 시대는 뭔가 심상치 않은 국운이 맴돌던 때입니다. 마치 한국의 구한말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요시야는 기울어지고 있는 국가의 운명을 바로 세워보고자 고군분투하면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왕권 강화 정책을 폅니다. 그 중 하나가 성전 수리입니다. 종교를 바로 세우는 일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필수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성전 수리를 하는 도중에 율법책 하나가 발견됩니다. 이 사건을 요시야 왕과 더불어 대신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국가의 가장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던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발견된 율법책이라, 이것을 통해서 뭔가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던 것이죠. 요시야 왕은 율법책 발견을 토대로 국가의 운명을 바꾸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의 개혁 정책을 간절하고 처절했습니다.

 

요시야 시대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마음이 애처로워지기도 하지만, 배우는 게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몇 사람을 살펴보면, 첫째로 요시야 왕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여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26세의 젊은 나이에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성전 수리를 위해서 제사장 그룹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신앙이 깊은 왕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요시야 왕은 겸손과 회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신앙인입니다. 율법책이 발견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자, 그는 곧바로 옷을 찢고 회개합니다. 말씀을 들으려 하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나중에 훌다의 예언을 통해서 그가 유다 멸망의 비극을 경험하지 않고 죽게 되는 은혜를 누리는 원인이됩니다.

 

말씀을 들으려는 자세. 이것은 신앙의 리트머스지 역할을 합니다. 신앙 상태를 평가할 때, 말씀을 들으려는 자세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여호야김 왕은 완전히 정반대의 행동을 합니다. 여호야김은 율법책을 손에 들게 되었을 때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불에 던져 태워버립니다. 신앙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교회 나오는 것부터 발걸음을 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려움이 닥칠수록 말씀을 들으려 예배의 자리를 더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어려움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서기관 사반(Shaphan)입니다. 서기관 사반은 요시야 왕의 비서실장 역할을 하던 인물입니다. 사반은 요시야 왕의 의중을 잘 파악하여 개혁을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사반 가문은 어려운 시대에 빛의 역할을 합니다. 예레미야를 보면, 가문 전체가 예레미야를 돕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반의 세 아들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돕습니다. 아히감은 예레미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를 보호해 주고, 엘라사는 예레미야의 목회서신을 바벨론에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마랴는 정부관리로서 자기 방에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낭독할 수 있도록 방을 내어줍니다. 사반의 손자 그다랴는 시드기야 왕 후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한 뒤 총독이 되어서 유다를 통치합니다.

 

어려운 시기에 요시야가 왕권을 강화하고, 제사장 그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성전수리를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반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남유다 백성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반의 가문이 적극적으로 도왔기 때문입니다. 사반과 그의 가문이 없었다면, 요시야 왕의 개혁도, 예레미야의 말씀사역도 진행조차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반과 그의 가문은 길이길이 기억될 만합니다. 그리고, 사반처럼 사역을 돕는 신앙인, 그런 집안이 되는 것은 참 영광스러운 일이고 고마운 일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사반과 같은 신앙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사람들 중 여선지자 훌다가 있습니다. 훌다는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했던 인물입니다. 예루살렘 둘째 구역은 히스기야 왕 때 확장한 구역입니다. 히스기야 왕 때는 이미 북이스엘이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난민들이 남유다로 유입되던 시기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히스기야가 세운 곳이 바로 예루살렘 둘째 구역입니다. 훌다가 그곳에 살았다는 뜻은 그가 북이스라엘 출신 선지자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요시야 왕 당시 예레미야와 스바냐 같은 걸출한 선지자들이 활동했음에도, 성전 수리 도중 발견된 율법책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을 듣기 위해 여선지자 훌다를 찾았다는 것은 그녀가 그만큼 예언자로서 덕망이 높았다는 뜻입니다.

 

훌다는 이미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 당한 것을 경험한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왜 북이스라엘이 멸망 당했는지도 알고 있는 선지자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훌다의 마음은 애처롭고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남유다가 북이스라엘의 길을 따르지 말아야 하는데, 그 길로 가는 것 같아 그 누구보다도 애처롭고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훌다는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과 요시야가 생전에 유다 멸망의 참상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을 전하고 있지만, 그 예언을 전하는 심정은 남유다가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멸망을 피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훌다의 예언은 짧지만, 거기에 담긴 간절함은 우주보다 컸을 것입니다.

 

어려움을 이겨나가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닮고 싶기도 합니다. 어려움을 남몰라라 하지 않고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여 더 좋은 상황으로 공동체를 인도하려는 사람들의 고군분투는 우리의 마음에 용기를 줍니다. 좋은 공동체는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좋은 공동체는 어려움을 이겨나가려는 사람들의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힘을 보태고 힘을 합치고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뜻밖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요시야, 사반, 훌다 같은 믿음의 자녀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장 간절한 신앙고백  (0) 2023.12.27
존 로크: 기독교의 합리성  (0) 2023.12.22
종말인가 종말론인가  (0) 2023.12.08
신적인 것  (1) 2023.12.07
자기 반성의 시간  (1) 2023.12.03
Posted by 장준식

종말인가 종말론인가

 

우리 시대의 결정적 사건 두 가지.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이다. 이 두 가지 사건 앞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것은 종말인가, 종말론인가. 종말이라고 한다면, 인류는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으로 인하여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인간을 매우 당황스럽게 만든다. 기후변화와 AI는 인간이 자초한 일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은 인간이 스스로를 종말로 몰아 세운 사건이다.

 

앤서니 레반도프스키(Anthony Levandowski). 미래의 길(WOTF: Way of the Future)의 교주다. 이 교주는 AI를 통해 신의 섭리를 따르려는 목적으로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2015년 설립했고, 2017년에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팬데믹 기간에 이런저런 이유로 문을 닫았다, 최근 다시 문을 열었다. 이 종교는 AI를 예배한다. 교주 레반도프스키는 묻는다. “가장 똑똑한 인간보다 10억 배나 더 똑똑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뭐라고 부를 수 있냐?” AI를 신(God)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다는 뜻이다. 실리콘밸리에 세워진 AI교는 벌써 수천명의 신도를 모았다. 인간은 머지않아 AI에게 지구 통치의 자리를 넘겨줄 것이다. 이것은 종말인가, 종말론인가.

 

재신론(anatheism)이라는 개념으로 현대 신학을 새롭게 구성하고 있는 신학자 리처드 카니(Richard Kearney)는 이렇게 말한다. “재신론은 망각된 것을 향한 미래 내지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신적 역사의 부름을 향한 미래를 제안합니다. 그것은 ‘이후의 사유’ 내지 ‘이후의 정서’ 그 이상의 것으로서 ‘이후의-신앙’입니다. 이후의 신앙은 종말론적입니다”(재신론, 11쪽). 프로이트, 맑스, 니체 이후 서구 사회에서 신 개념은 이들의 비판을 거쳐 살아남은 것만 유통될 수 있었다. 종교(기독교)에 대한 이들의 비판의 그물은 촘촘하여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것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 신앙은 크게 두 가지이다. 프로이트, 마르크스, 니체 등이 구축해 놓은 근대의 그물을 통과했거나, 아니면 이들이 만들어 놓은 그물을 우회했거나, 이 두 가지 중 하나이다. 리처드 카니의 재신론은 전자이다. 그물을 통과한 신적인 것을 모아 다시 신론을 구성한 것이다.

 

리처드 카니는 자신의 신학을 종말론이라 부른다. 이미 존재했던 성스러운 것을 다시 발견했거나,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에 대한 선취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다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은 종말인가 종말론인가. 다시 말해,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은 인간이 스스로를 멸망의 길로 이끄는 종말의 사건인가, 아니면 성취되지 않은 것의 선취 사건인가.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으로 인하여 프로이트, 마르크스, 니체 이후 불과 100년만에 종교(기독교)를 향한 그물은 더 촘촘해졌다. 팬데믹을 지나며 그리스도인의 감소가 두드러진 것은 이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촘촘한 그물을 통과하지 못하고 그리스도 신앙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교회가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을 신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면 앞으로 교회는 더 많은 사람을 잃게 될 것이다.

 

인간은 종말을 원하지 않는다. 인간은 종말론을 원한다. 기후변화로 인하여, 그리고 AI의 출현으로 인하여 사라질 운명이라면 우리의 신앙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기후변화는 인간의 멸종을 가져올 것이고, AI의 출현 또한 인간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다. 이렇게 종말이 확실한 시대에 신학을 한다는 것,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 로크: 기독교의 합리성  (0) 2023.12.22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사람들  (0) 2023.12.10
신적인 것  (1) 2023.12.07
자기 반성의 시간  (1) 2023.12.03
제국과 교회  (0) 2023.11.28
Posted by 장준식

[신적인 것]

ㅡ 어떤  존재론적 자율성(Auto)

 

1) 아리스토텔레스 - 부동의 동자(ummoved mover): 모든 사물을 운동하게 하는 원인이면서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 것

2) 기독교의 신 개념 - 부동의 동자로서의 신 (스콜라 신학)

3) 데카르트 - 자기의식적인 자아 (코기토 철학)

4) 스피노자 - 자기원인적인 자연

5) 칸트 - 자율성(autonomy): 자기의식적인 자아도, 자기원인적인 자연도 아닌, 다만 자율성으로서의 자유

6) 마르크스 - 자본

7) 하이데거 - 테크놀로지 (기술의 바깥이 없는 시대)

8) 푸코 - 권력

9) 4차 산업혁명 - 자동화/자율화 (사물 인터넷): 인공지능(AI)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신학의 역할: 부동의 동자, 무제약적인 존재로서 자리매김 한 신적인 것에 대한 비판의 역할

ㅡ 그것이 정말 구원을 주는가

ㅡ 그것이 정말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해 주는가

ㅡ 그것이 정말 행복을 주는가

ㅡ 그것이 정말 도덕적인 세상을 만드는가

ㅡ 그것이 정말 세계사랑을 이루는가

ㅡ 그것이 정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가

ㅡ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특별히 우리 시대에 신학이 주목해야 할 '신적인 것'은 '자본과 테크놀로지와 권력'이다. 자본과 테크놀로지와 권력에 대한 비판이 정치신학의 과제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사람들  (0) 2023.12.10
종말인가 종말론인가  (0) 2023.12.08
자기 반성의 시간  (1) 2023.12.03
제국과 교회  (0) 2023.11.28
한국 사회의 두 가지 불행  (1) 2023.11.28
Posted by 장준식

자기 반성의 시간

 

구약의 열왕기는 자기 반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은 역사를 돌아보며 자기 반성을 진지하게 합니다. “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은 멸망 당하여,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왔는가?” 열왕기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자기 반성’입니다. 열왕기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게 아닙니다. 철저한 자기 반성입니다. 열왕기를 ‘성경’으로 읽는 그리스도인은 열왕기를 통해서 반드시 자기 반성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 반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자기 반성을 잘 하지 못합니다. 마땅히 자기 반성에 쏟아부어야 할 시간을 유튜브 보거나 SNS를 확인하는데 빼앗깁니다. 칼 뉴포트(Cal Newport)는 자신의 책 ‘딥 워크’(deep work)에서 무엇인가에 몰입하는 것을 힘들어 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스마트폰의 사용으로 인하여 현대인들은 어느 한 가지 일에 몰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집중력이 감소됩니다. 칼 뉴포트는 하나의 일에 3-4시간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요즘 시대에, 한 가지 일에 3-4시간 집중하면 큰 성공을 거두는 대가가 될 수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만큼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한 가지 일에 3-4시간 집중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그나마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적어도 예배 시간만큼은 집중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생활 마저도 안 하는 사람들은 스마트 폰을 내려놓고, 어느 한 가지에 몰입하고 집중하는 일에 더 큰 어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한 훈련을 할 수 있는 삶의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21장은 므낫세 왕의 치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장에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자기 반성은 열왕기하의 후반부로 갈수록 멸망의 원인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과 반성을 쏟아놓습니다. 므낫세 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곳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멸망한 원인을 ‘출애굽 때부터 이스라엘이 죄를 쌓고 쌓은 것’에서 찾습니다. 죄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쌓이는지조차 모를 수 있습니다. 자기 반성의 시간을 진지하게 갖지 않으면, 어느새 죄는 쌓이게 마련입니다.

 

성경에 보면, 죄사함의 표현을 ‘씻다’(wash)라는 말을 통해서 합니다. 몸을 생각하면 죄를 씻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림언어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 몸을 씻지 않고 살면 온갖 질병에 걸려 일찍 죽을 가능성이 큽니다. 홈리스들에 대한 보건의학 통계를 보면, 홈리스들은 일반 사람들에 비해서 질병이 많고 수명이 짧다고 합니다. 물론 가족 또는 사회에서 소외되어 외롭고 힘든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 더 직접적인 원인은 위생이라고 합니다. 홈리스들은 잘 씻지 않습니다. 씻을 수 있는 시설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홈리스들은 위생에 어려움이 있어 일반인들에 비해서 질병에 걸릴 확률도 높고 평균수명이 현저하게 짧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 늘 오던 홈리스들이 오랜 동안 안 보이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잘 씻기만 해도 병에 걸리는 것을 많이 예방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씻는다는 것은 죄를 쌓아 두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으나, 적어도, 죄를 쌓아 두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신앙의 능력, 신앙의 유익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 즉 예배는 ‘씻는 행위’입니다. 매일 씻지 않으면 때가 쌓여서 몸이 불결해지고 병약해지기 쉬운 것처럼,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 죄를 쌓아 놓게 됩니다. 죄는 영혼의 바이러스와 같아서 제때 씻어내지 않으면, 또는 치료하지 않으면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자기 반성은 결국 ‘씻는 행위’입니다. 나의 영혼(soul)에 혹시라도 쌓일지 모르는 죄를 부단히 씻어내는 행위입니다. 씻기만 잘해도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것처럼, 자기 반성만 잘해도 인생을 복되고 값어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영혼이 깃드는 것도 맞는 말이고, 건강한 영혼이 육체를 건강하게 보존하는 것도 맞습니다.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현대인들의 삶의 성패를 가릅니다. 자기 반성의 시간을 통해 삶이 더 풍성해지기를 소망합니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말인가 종말론인가  (0) 2023.12.08
신적인 것  (1) 2023.12.07
제국과 교회  (0) 2023.11.28
한국 사회의 두 가지 불행  (1) 2023.11.28
감사절 풍경  (1) 2023.11.27
Posted by 장준식

[제국과 교회]

 

현대사회에서 교회는 남유다 왕국처럼 작은 나라이다. 앗수르와 바벨론이라고 하는 거대 제국, 즉 자본주의의 끊임없는 압박과 요구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교회는 제국(자본주의)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자율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게 녹록치 않다.

 

열왕기를 보면, 제국의 압박과 요구를 수용하여 과도한 행보를 보이는 왕(아하스)도 있고, 제국의 압박과 요구에 저항한 왕(히스기야)도 있다. 그러나 결국, 남유다는 제국의 압박과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멸망하고 만다.

 

열왕기를 보고 있으면, 마치 자본주의 제국에 맞서 힘겹게 생존하고 있는 이 시대의 교회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어떤 교회는 자본주의의 압박과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도 하고, 어떤 교회는 자본주의의 압박과 요구에 저항하기도 한다. 그런데, 결과는 같다. 점점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압박과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교회는 좀 더 오래 살아남을지 모르지만, 긴 시간을 두고 보면, 결국 같은 길을 간다. 멸망.

 

우리는(교회는) 머지않아 나라를 잃고 멸망 당하여 디아스포라가 된 유대민족처럼 디아스포라가 될 지 모른다. 영토를 확보하기 힘들고, 국민을 모으기 힘들고, 독자적인 정치와 경제 체제를 갖추기 힘들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성경의 유대인들에게 말씀 중심의 신앙(시나고그 신앙)이 생기게 된 것은 더 이상 성전 중심의 신앙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성전 중심의 신앙을 하는 마지막 세대일지 모른다. 우리 시대가 지나고 나면,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처럼 교회는 더 이상 성전 중심의 신앙을 하는 게 힘들어 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유대 나라가 사라졌다고 해서 유대인이 사라지거나 여호와 신앙이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교회가 사라졌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사라지거나 그리스도 신앙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신앙을 지켜나가는 형태가 바뀔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야 한다.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나 자신이 성전이 되어 어느 곳에 있든지, 어느 형편에 있든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을 성육신같이 이루고 사는 삶을 연습해야 한다.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적인 것  (1) 2023.12.07
자기 반성의 시간  (1) 2023.12.03
한국 사회의 두 가지 불행  (1) 2023.11.28
감사절 풍경  (1) 2023.11.27
오래 사는 게 좋은 걸까?  (0) 2023.11.19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