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유쾌한 진실]

 

그리스도인이 진화론을 신앙에 반하는 과학적 가설로 이해하고 반대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다. 진화론은 과학적 가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라고 말하는 게 좋다. 진화론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이상 중세(medieval era)가 아니라 근대(modern era)라는 것을 말해주는 역사적 지표와 같다.

 

중세까지의 세계관은 고정된 세계관이었다. 다른 말로 중세까지의 세계관은 계층적 세계관이었다. 세상은 위계적 질서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교회에 존재하는 하이어라키는 그러한 질서의 반영이었다. 그래서 교회는 교황이 존재했고, 주교가 존재했고, 사제가 존재했고, 평신도가 존재했다. 교회의 구조는 위계적이었다. 일반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한 세계관이었다. 그래서 중세 한국의 풍경도 위계적이었다. 왕과 귀족과 중인과 천민이 존재했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사람들은 그 위계를 지키는 것이 질서를 지키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살았다.

 

진화론은 근대의 개념이다. 근대가 더이상 중세가 아닌 이유는 세상을 더이상 위계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이 세상이 위계적이지 않다는 근대적 시각의 반영이다. 진화는 역동성을 보여준다. 존재는 한 위계에 갇혀 있지 않고 역동적으로 그 존재가 변화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관을 바탕으로 새롭게 근대/현대 신학을 진술하고자 했던 신학자들은 모두 진화론에 바탕을 두고 신학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이상 중세를 사는 중세인이 아니라, 근대/현대를 사는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칼 라너를 들 수 있다. 그의 기독론은 '진화론적 관점에서의 그리스도론'이라 불린다. 라너에게 성육신 사건은 "단지 하나님이 위에서 인류에게로 내려온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진화 과정에 내재되어 있는 자기초월을 향한 내적 원동력의 실현"으로 여겨진다. (오늘의 신학과 신학자들, 128쪽)

 

그리스도인 중에 진화론을 문제 삼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아직도 중세적 사고에 갇혀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진화론의 표면적 의미에만 갇혀 있으면 진화론은 그저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하는 불경한 과학적 가설로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의 내면적 의미를 안다면, 우리는 더이상 중세를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근대/현대를 살아가는 역동적 자유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진화론이냐 창조과학이냐의 논쟁과 그것과 결부된 일련의 해프닝들은  정말 창피한 일이다. 공부가 짧다는 것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이고, 아직 자신은 중세를 살고 있다고 선포하는 미련한 고백이다.

 

칼 라너의 말처럼,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진화의 은총이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그 태생부터 진화론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오고 있고, 우리는 그 나라를 향해 가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통찰처럼 모든 만물은 'becoming' 중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진화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갇혀 있는 세계, 위계적인 세계,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세계에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마도 그런 자가 있다면 이미 공중권세 잡은 자 뿐일 것이다. 그런 세계를 고집하고 주장하는 자는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며 사람들을 착취하고 권세를 누리고 싶은 자들일 것이다.

 

존재의 역동적인 진화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답답해서 모두 멸망당했을 것이다. 진화론을 통해 이 세상은 갇혀 있거나, 고정되어 있거나, 위계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주님께 감사할 뿐이다. 진화론은 해방과 자유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