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경계한 두 가지]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를 짚어보면 교회는 두 가지를 경계해 온 것이 보인다.

1) 반지성/반이성

2) 엘리트주의(엘리티시즘)

 

1) 교회는 언제나 합리적 신앙을 추구했다

안셀무스의 명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Faith seeking understanding."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이성과 신앙은 대립관계에 있지 않다. 서로를 보완해준다. 이성 없이 신앙이 존재하지 않고, 신앙 없이 이성이 존재하기 힘들다. 이성은 합리성을 확보한다. 합리성의 확보는 인간이 가진 특징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이나 식물과는 달리 대자적 존재이다. 대자적 존재란 자기 자신을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 존재를 말한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자기 분리가 가능하다. 동물이나 식물에게는 없는 능력이다. 이것이 바로 이성이다.

 

교회가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성을 통해 신앙을 이해하고 바라보고자 한 이유는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짐과 동시에 그래야만 건전한 신앙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합리성, 즉 한 발짝 물러나서 조망하는 절차를 밟지 않으면 신앙은 그냥 자기 만족이나 자기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양이 되기 쉽다. 합리성이 결여된 신앙은 자기도 죽이고 남도 죽이는 악한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언제나 반지성/반이성을 경계해 왔다. 지성을 무시하거 이성을 거부하는 류의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 뿐 아니라 어느 신앙 체계라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지성과 이성을 거부하는 신앙체계는 사람들을 우매화시켜 통치하기 편하게 만들어 맹목적인 신앙인을 양산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을 강요하는 종교(신앙) 지도자는 그들을 착취하려는 악한 자이다.

 

맹목적인 신앙, 지성과 이성을 무시하는 신앙은 좋은 신앙이 아니라 나쁜 신앙이다. 믿음은 합리성을 발판삼아 하나님께 도약하는 행위이지 합리성을 무시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말하는 자기 성찰은 지성과 이성을 무시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성찰은 자기 자신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 자기를 대자적 존재로 머물게 하여 신앙의 합리성을 확보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최고의 합리적 행위이다. 기도는 지성과 이성의 향연이다.

 

2) 교회는 엘리트주의를 경계한다

교회의 역사는 엘리트주의와의 싸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교회는 엘리트주의를 경계해 왔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두개파, 젤롯파, 에세네파, 그리고 바리새파는 모두 엘리트주의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사두개파는 기득권자들로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고, 젤롯파는 혁명을 꿈꾸면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고, 에세네파는 더러운 세상과의 분리를 통해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고, 바리새파는 아주 사소한 율법까지 지킬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을 통해서 자신들의 다름을 주장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 등장한 첫 이단 종파인 영지주의는 전형적인 엘리트주의자들이다. 요한복음과 일반서신들에는 영지주의와 싸운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다. 영지주의는 깨달음을 중요시했다. 영지는 감추어진 지식을 말한다. 감추어진 천상의 지식을 깨달을 수 있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갖췄거나 아니면 특별히 선택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지, 즉 감추어진 지식을 깨달았다고 믿는 자들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꼈고, 이는 곧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차별하는 근거가 되었다.

 

모든 이단 종파, 사이비 주교는 영지주의 아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전형적인 레토릭이 있다. '비밀'이라는 말이다. 비밀이라는 용어를 자주 쓰는 종파나 종교 지도자는 대개 자신들이 무슨 특별한 능력을 지녔거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한다. 일례로, 신천지의 이만희 같은 경우도 자신이 성경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어떤 신령한 은사가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성경의 비밀을 들은 신도들은 자신들도 특별한 존재가 된 것같은 착각을 가지게 된다. 이들은 전혀 엘리트가 아님에도 자신들이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갖는다. 그래서 이단 종파는 더 강력한 조직력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교회는 언제나 이런 엘리트주의를 경계해 왔다. 도덕적 엘리트주의와 영지적 엘리트주의는 언제나 교회의 경계 대상이었다. 교회를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런 엘리트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교회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영지적으로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아니다. 죄인이란 뭔가 특별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그냥 수많은 제약과 연약함 속에서 부족하지만 어떻게든 주어진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성을 거부하고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존재론적 차별성을 즐기는 것은 바람직한 신앙의 삶이 전혀 아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 그래서 뭔가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열심을 내는 사람은 좋은 신앙인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의 신앙을 지성과 이성에 비추어 보며 합리성을 확보하여 평범해지려는 것이 좋은 신앙의 자세이다. 반지성/반이성은 믿음이 아니다. 엘리트주의는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보편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