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찬에 대한 세 가지 생각]

 

기독교 예배의 중심에는 성만찬이 놓여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오랜 세월 동안 성만찬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신학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특별히 예배학(Liturgical Theology)의 발달이 더딘 탓도 있습니다. 새로운 밀레니엄(2000년) 전만 해도 한국의 신학교에는 예배학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예배학을 전공한 신학자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예배의 중심에 놓인 성만찬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예배학에서 가장 유명한 신학자는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입니다. 화이트 교수가 쓴 『기독교 예배학 입문』(Introduction to Christian Worship)은 예배학 분야의 교과서로 널리 쓰이는 책입니다. 이 책은 1980년에 쓰였습니다. 한국에 이 책이 번역 소개된 것은 2000년도입니다. 이와 더불어, 2000년대 이후 예배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한국의 각 교단 신학교에 포진하게 되면서 예배에서 성만찬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성만찬은 보통 영어로 ‘The Eucharist’(유카리스트)라고 합니다. 성만찬에 관한 명칭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존재합니다. ‘주님의 만찬’(Lord’s Supper), ‘떡을 뗌’(Breaking of Bread), ‘성례전’(Divine Liturgy), ‘미사’(Mass)’,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 그리고 ‘주님의 기념’(Lord’s Memorial) 등입니다. (화이트, 261쪽) 여기서 ‘주님의 만찬’과 ‘거룩한 교제’는 비교적 우리들에게 익숙한 용어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성만찬을 영어로 표기할 때 ‘Holy Communion’이라고 씁니다. 위의 용어에서 ‘미사’도 많이 들어본 용어일 겁니다. 천주교의 예배를 ‘미사’라 부릅니다. 이 말은 곧 천주교에서 예배와 ‘성만찬’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예배를 ‘감사성찬례’의 뜻으로 ‘미사’(Mass)’라고 부릅니다. 천주교 예배에 참석한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실제로 천주교는 성만찬이 예배의 ‘중심’입니다. 모든 예배에서 성만찬을 합니다. 그들에게 예배란 곧 성만찬이기 때문입니다.

 

성만찬의 보편적인 용어는 ‘유카리스트’(Eucharist)’입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받은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처음 교회(예루살렘교회)의 풍경을 보면, 교회가 세워진 뒤 교회의 구성원이 교회에서 행한 일은 ‘떡을 뗀’ 것입니다. 위의 용어에서 보았듯이, 이것은 성만찬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만찬은 교회가 처음 시작된 이래 교회에서 행하여 온 활동들 중 가장 핵심적인 활동에 해당합니다.

 

성만찬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 즉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드십니다. 그 유월절 식사 시간에 떡(빵)과 포도주를 축사하신 후에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시며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때만 해도 제자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뒤에 제자들은 그때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 만찬에서 나누었던 떡과 포도주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교회가 세워진 이후에 성만찬은 기독교 예배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외에 성만찬을 언급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며 그들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만찬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서에서 보았듯이, 유대인들은 세 가지 율법의 조항을 물고 늘어지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혔습니다. 음식 정결법, 절기법, 할례가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음식 정결법에 대한 문제가 고린도교회에 발생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가르침을 주면서 바울은 성만찬을 언급합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여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여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교회에서 성만찬이 ‘예식’으로 자리잡으면서 성만찬에 대한 복음서의 구절이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쓴 편지에서 예식문을 가져다 썼다는 겁니다. 성만찬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복음서나 고린도전서나 별로 차이가 없지만, 예배의 예문으로 쓰이기에는 고린도전서의 진술이 더 적합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복음서(마 25장, 막 14장, 눅 22자)와 고린도전서(고전 11장)의 성만찬에 대한 말씀을 비교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복음서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섞어서 성만찬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내어 주시면서 하신 말씀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성만찬 하나에도 이렇게 재밌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후 1500년간 성만찬에 대한 논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 종교개혁 시기에 이르러 성만찬에 대한 결렬한 논쟁이 발생합니다. 성만찬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보면, 종교개혁의 갈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때 발생한 성만찬 논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화체설(Transubstantiation), 다른 하나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 그리고 또다른 하나는 상징적 기념설(Symbolic Memorialism)입니다. 그냥 기념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화체설은 가톨릭 측의 신학이고, 공재설은 루터의 주장이고, 기념설은 쯔빙글리의 주장입니다. 각 ‘설’을 이해하는데 기본이 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입니다. 좀 크게 이야기하면 헬라철학이 성만찬 논쟁의 바탕입니다. 특별히, substance(실재)의 개념을 잘 알아야 합니다.

 

헬라철학에서 substance는 물자체를 말합니다. 어떠한 사물의 그 자체를 substance(실재)라고 지칭합니다. 성만찬에서는 빵과 포도주를 사용합니다. 빵은 빵의 substance가 있고, 포도주는 포도주의 substance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될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성만찬에 대한 신학이 갈립니다. 1) 가톨릭이 주장하는 화체설이란 substance가 transfer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가 예수님의 살과 피의 substance로 변화(transfer)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2) 루터가 주장하는 공재설이란 substance가 함께(con)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가 가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살과 피로 transfer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는 변하지 않더라도 빵과 포도주의 substance와 함께(con) 예수님의 살과 피의 substance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직접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빵과 포도주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함께 실제로 임한다(real presence)는 뜻입니다. 3) 쯔빙글리가 주장했던 기념설은 가톨릭이나 루터의 주장을 모두 부인합니다. 성만찬에 덧입혀진 철학적 논의를 다 거두어 내고, 그냥 빵은 빵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이지 어떻게 이게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고, 어떻게 거기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실제로 함께 할 수 있느냐고, 아주 나이브하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쯔빙글리는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그냥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 성만찬이지, 거기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실제로 임하는 것은 아니라고, 아주 심플하게 말합니다.

 

성만찬에 대한 생각은 교회의 분열을 가지고 왔습니다. 루터는 화체설을 거부하고 공재설을 주장하면서 가톨릭에서 분리되었고, 쯔빙글리는 루터의 공재설을 거부하고 기념설을 주장하면서 종교개혁 운동을 함께 벌여왔던 루터와 작별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성만찬에 대한 신학 문제는 보통 큰 이슈가 아니었습니다. 성만찬에 대한 의견 차이로 루터는 쯔빙글리와 작별하게 되는데, 루터는 갈라설 때 쯔빙글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와 나는 영이 다르다!” 그리하여 오늘날 기독교에서 성만찬을 이해하는 세 갈래가 생겼습니다. 가톨릭 입장의 화체설. 루터의 입장인 공재설. 쯔빙글리의 입장인 기념설. 개신교의 주류 교단(감리교,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은 루터의 공재설 입장에서 성만찬을 이해합니다. 루터 이후에 종교개혁 2세대인 칼뱅이 성만찬 신학을 조금 다듬기는 합니다만, 큰 틀에서는 루터의 공재설 입장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침례교는 쯔빙글리의 기념설을 따릅니다. 우리교회는 개신교 주류 교단의 성향이니, 루터의 공재설을 따르는 입장인 것이죠. 물론 개인마다 다른 입장을 가질 수는 있지만요. 성만찬 하나에도 이렇게 흥미진진한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