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을 주목하는 이유

 

사도행전은 성령행전, 또는 기도행전이라는 별명을 가진 성경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후편으로서 누가복음을 읽은 후 읽어야 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가 같기 때문에 두 책의 강조점은 같습니다. 성령과 기도가 강조됩니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목격하고, 기도 사역을 배우게 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기도하는 주님’으로 묘사됩니다. 무슨 일을 하시든지, 예수님은 기도를 먼저 하십니다. 그래서 누가-행전은 성령행전, 또는 기도행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주님’이 부재한 상황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의 도우심과 이끄심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셨던 사역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어떻게 동일하게 수행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에서부터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의 사역, 그리고 십자가 죽음, 또한 부활과 승천까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성령 안에서 발생한 일인데, 사도행전은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교회(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것을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신앙과 사역의 매뉴얼입니다.

 

현대 기독교 신학이 교회를 비판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비판은 교회가 충분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고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야훼 신앙, 그리고 플라톤의 신학의 영향 아래 기독교인들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일신론/유일신론’으로만 생각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묵상이 부족하고, 삼위일체적 사고와 실천이 부족하다보니, 기독교 고유의 폭발력 있는 복음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충분히 사유하고 묵상하지 못하면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은 생활의 구조를 ‘가부장적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의 교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을 일신론/유일신론으로 인식하고 마니, 일상생활에서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이해보다는 ‘하나의 힘’에 집중해서 그 권위 아래 굴복하고 굴복시키는 생활 구조를 만들어 내고, 그러한 생활 구조를 오히려 편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죠.

 

일찍이 기독교 신학은 삼위일체론(Trinity)를 사유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삼위일체론에서의 쟁점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고유한 개체성을 유지하면서 삼신론이나 다신론으로 빠지지 않고 ‘한 하나님’이 될 수 있을 것인가였습니다. 이 문제는 너무도 중요하고 신비로운 것이라,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학이 발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삼위일체 신비를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신학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을 말하고 표현하고 싶은지,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왕적 군주의 모습을 가진 폭력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교제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일치를 이루지만 동시에 각자의 위격(고유의 품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민주사회를 이루어 가고, 생태 위기를 극복하는데 필수적인 신학적 통찰입니다.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강력한 신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사람들은 실제 교회생활에서, 그리고 선교활동에서 그것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한 하나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삼위 하나님이 위격을 가지고 고유의 사역을 성취하시는지,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역 속에서 몸소 경험하고, 그 경험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보여줍니다. 그래서 강력합니다. 하지만, 보여주다 보니,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그냥 우리의 눈에서만 흘러가 버리기도 합니다. 마치, TV 드라마를 보듯이 말이죠. 하지만,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이유는 우리에게 ‘구경’하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는 보여줄 수 있을 뿐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보여주고 있는 삼위일체의 역사를 눈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발생하도록 우리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 함께 사도행전을 거니는 동안,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더 사랑하게 되고, 그 신비를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실천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