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시간: 시간은 인격이다

 

“신은 죽었다.” 니체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열왕기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의 고대 왕국에 대한 역사 기록입니다. 그들의 역사 기록은 독특합니다. 한국에도 삼국사기나 고려사, 또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역사 기록이 있지만, 그 기록 방식이나 내용을 보면 열왕기의 그것과 분명한 차이를 지닙니다. 한국의 함석헌 선생이 성경의 역사서처럼 한국 역사를 기록한 책이 있습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그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글이 이 글 된 까닭은 성경에 있다. 쓴 사람의 생각으로는 성경적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 똑바른 말로 역사철학은 성경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양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 역사는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이 성경의 자리에서만 될 수 있다”(12-13쪽).

 

여기서 함석헌 선생이 말하고 있는 ‘역사는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이 성경의 자리에서만 될 수 있다’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기독교는 역사를 물리적 현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인격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사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 때문에 시간은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인격이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력을 지키는데, 교회력은 단순히 교회의 행사력이 아니라 시간을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살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사람과 시간을 그냥 물리적 현상으로 보는 사람과의 차이는 엄청 납니다. 시간을 물리적 현상으로 보는 사람은 그 시간을 그냥 자신의 소유 정도로 생각하고 그 시간을 이용하여 자기의 뜻(욕망)을 이루려 하겠지만,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사람은 시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보고, 무엇보다 시간 안에서 ‘구원’을 봅니다. 우리의 시간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된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간은 단순히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열왕기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열왕기는 시간을 하나님의 인격이 활동하는 ‘그 무엇’으로 기록합니다. 그래서 시간(역사) 속에서 발생한 모든 일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그 무엇 하나, 단순한 사건 하나, 그냥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열왕기는 하나님의 인격을 치열하게 대면하여 시간(역사)을 돌아봅니다. 열왕기는 바벨론 포로의 참상을 겪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반성을 하며 돌아본 역사책입니다. 열왕기하 25장을 보면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이야기가 나오는데,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벨론과 잘 지낼 것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갈대아 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왕하 25:24). 사반의 손자 그달리야 총독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유다의 마지막 왕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애굽을 믿고 바벨론에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다 결국 멸망 당하고 맙니다. 특별히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예루살렘 성이 포위 당하자 1년 7개월 간 버티다, 결국 성을 빠져나와 도망치다 바벨론의 추격대에 붙잡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앞에 끌려와 험한 꼴을 당합니다. 시드기야는 두 눈을 뜨고 자기의 자식들이 죽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고, 그리고 자신의 두 눈이 뽑히는 치욕을 겪습니다. 놋사슬에 묶여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압송되어 거기서 비참하게 죽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부하 장수 느부사라단이 몇 년 후 예루살렘에 다시 와서 성전과 왕궁, 그리고 고관들의 집들과 예루살렘 성벽을 완전히 불사르고 무너뜨립니다. 지체 높은 사람들은 모두 포로로 잡아가고 비천한 사람들만 가나안 땅에 남겨두고 떠납니다. 이러한 일을 보면서, 남유다 사람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당연히, “신의 죽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방인(이방신)에 의해 죽은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한 성전과 왕궁, 그리고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하나님은 죽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열왕기는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에 대한 반론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끔찍한 일을 경험하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지’ 질문하고, ‘하나님은 살아계신가’ 의문을 품습니다. 그야말로 신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왕기는 무엇이 하나님(신)을 죽였는가에 대하여 강력한 클레임을 겁니다. 하나님을 죽인 것은 이방인(신)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악을 통해 총체적 파국을 만들어 놓고, 신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처럼 말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사 59:1-3).

 

폐부를 찌르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감히 ‘신의 죽음’을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부지런히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부지런히 시간을 인격으로 보아야 합니다. 시간 안으로 들어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를 구원하고 계신, 그 놀라운 ‘복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다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한 해가 가고, 새 해가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시간은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한 해가 가서 주어진 물리적 시간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구원이 가까워 온 것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텔레스는 파우스트의 영혼을 빼앗기 위해서 파우스트에게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정말로 아름답구나!”를 외치게 만듭니다. 파우스트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순간의 쾌락에 머물게 끔 타락시키려 했던 것이죠. 하지만, 시간이 인격이라는 것, 우리의 시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된 시간이라는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가는 세월’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그리스도의 인격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아끼지 않고 그 시간으로 ‘구원의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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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