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과 비양심]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양심이란 자기 사랑을 거부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타인을 위해 죽는 사람을 '천재'라고 부르는데, 소크라테스, 예수, 바울 등을 꼽는다.

 

양심적인 종교 저술가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저술가는 항상 논쟁적이고, 따라서 항상 반대파에 눌려서 고통을 받거나 반대파의 공격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그 반대파라는 것은 그의 시대에 있어서 독특한 악과 표리일체를 이루고 있다. 만일 그 악을 이루고 있는 것이 왕이나 황제, 교황이나 주교들, 그리고 권력자들이라고 한다면, 그가 그들의 공격과 표적이 되어 있다는 사실로써 종교적인 저술가라는 사실이 인지될 수 있다"(관점, 97쪽).

 

키에르케고르는 외톨이였다. 그 자신이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종교적 저술가였고, 국가와 교회로부터 핍박을 받았고, 자가면역질환인 척수병으로 투병을 했다. 그가 외로웠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존재의 무'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존재의 무는 비양심적 상태를 말한다. 존재하는데 양심 없이 존재하는 사람들은 자기 사랑하기에만 바쁘지, 타인을 향한 사랑을 실천/실현하지 않으며 산다. 자기 자신 이외에는 목적을 두지 않고, 타인을 수단으로 삶으로 사는 자들을 비양심적 존재, 즉 존재의 무라고 부른다.

 

키에르케고르는 <집단(군중)은 거짓이다 The Crowd is Untruth>라는 짧은 글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집단(군중)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집단을 이끄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보다 인간 존재의 의미를 모독하는 자는 없습니다"(생각하는 사람을 빛나게 도와주는 할아버지들, 26쪽).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을 싫어했다. 집단(군중)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겔의 정반합(변증법)은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반(Antithese)'을 없애는 방식으로 평등과 평화를 이룬다고 생각을 했다. 이것을 나치에 적용해 보면, 정(독일인), 반(유대인), 합(평화로운 세상)이라고 할 때, 나치는 유대인을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지금도 나치식 변증법이 보수 집단에서 통용되고 있다. 반(Antithese)을 없애는 방식으로 사회 통합과 평화를 이루려고 하는 생각은 언제나 '혐오와 폭력'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비양심적인 행동이다. 자기(These)만 사랑하고 타인(Antithese)을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인가 진보인가는 어떤 변증법으로 세계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가에서 갈린다. 보수는 '반(Antithese)'을 없애거나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려 하고, 진보는 '반'을 끌어안고 융합하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양심은 타인(반/Antithese)를 위해서 나를 내어놓는 일이다. 비양심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여 타인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반(Antithse)'를 없애거나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려 하지 않고, '반'을 끌어안고 융합하는 방식으로, 즉 '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반'을 없애고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려는 욕망이 훨씬 더 강한 것을 볼 수 있다. 군중(집단)을 모으고 그 힘으로 '반'을 없애고 굴복시키기에 혈안일 뿐이다. 이에 맞선 양심적인 사람들은 핍박을 받는다. 외로워진다. 양심을 지키며 사는 일은 어렵다. 양심을 지키는 자는 늘 '유혹자'로 산다. 양심을 저버리라는 유혹.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오늘 밤에도 유혹이 거세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