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란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 것]

 

ㅡ 언어는 어수룩한 은총이다. 언어가 없었다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홉스)인 아수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겠지만, 때로 그 언어는 너무도 무력해서 우리 안의 늑대가 무시로 눈 뜨는 것을 막아내지 못한다. 무력하기 때문에, 그것은 안간힘으로 지켜내야 하는 우리의 존엄이다. 민주주의의 운명이 그와 다르지 않다. "민주주의는 최악의 제도이지만 문제는 그 어느 것도 그보다 낫지 않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윈스턴 처칠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언어를 포기하고 힘에 의존하는 순간 우리는 늑대가 되고 민주주의는 물 건너간다.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240쪽)

 

민주주의와 언어의 관계를 명확하게 풀어낸 문장이다. 언어는 인간에게 신적 능력이다. 하지만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는 좀 어수룩하다. 하이데거가 말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인간세계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어' 안에서만 살 수 있다. 언어가 입혀지지 않으면 인식 불가능하다. 그래서 김춘수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인간 존재는 언어만큼 불안하고 어수룩하다. 인간 존재는 언어만큼만 평안을 누리고 지혜로워질 수 있다. 민주주의란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 것, 이라는 말은 언어를 포기하고 그 대신 다른 것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 관계를 맺으려는 사악한 무리들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복음 같은 말이다.

 

"말(언어)로 합시다!" 언어를 포기하고 총칼을 들려 하는 자는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일은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성마저 내팽개치는 것이다. 인간에게 언어가 얼마나 중요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언어)'으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성경이 선포하겠는가.

 

언어를 거두고, 자꾸 '힘'을 사용하려는 자들이 높은 자리에 앉으면 존재는 어쩔 수 없이 위험해지는 것 같다. 우리는 시방, 위험한 시대를 살고 있다.

Posted by 장준식

[한병철의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어야 하는 이유]

 

한병철만큼 간결한 필치로 '신자유주의'를 상세히 파헤치는 철학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동독과 서독이 통일을 이루고, 소련 체제가 무너지고, 중국이 경제를 개방하면서 세계 질서는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체제'로 굳어졌다. 그게 1990년도 들어서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니까, 신자유주의 체제는 이제 30살이 넘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그동안 인류가 개발한 그 어떤 '착취'의 메커니즘 중 단연 으뜸이다. 완벽하게 '자기 착취'를 실현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키워드는 '자기 착취'(self-exploitation)이다. 이것은 그 어떤 착취 메커니즘보다 교묘하고 효과적이고 성공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자신이 자기를 착취하고 있으면서도 착취 당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한병철은 이 '자기 착취'의 신자유주의 메커니즘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자기 착취'가 매우 은밀하게, 그리고 구조적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온 인류가 현재 '신자유주의'에 포획되어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이러한 때에 '평안이 있다'라고 선포하는 것은 예레미야가 바벨론 침공을 경고할 때 '평안이 있을 것'이라고 선포하는 하나냐 같은 짓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지 않고 하나냐의 예언에 귀 기울인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자기 착취' 메커니즘을 모르면, 설교는 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는 자기번영을 위하여 모든 사회적 요소를 자기 편으로 포획한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종교는 다른 사회적 요소보다 더 신실한 신자유주의의 호위무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종교가 정치보다 더 무섭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의 '자기 착취' 메커니즘에 대항하여 지옥 같은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종교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종교에는 좋은 인재들이 많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의 복잡한 '자기 착취' 메커니즘을 깊이 파악할 줄 아는 지성과 그것에 맞설 수 있는 용기와 그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 나갈 수 있는 지혜가 있는, 좋은 인재들이 많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에 편승하여 자기 착취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 착취'를 더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부추기는 일에 종교의 힘을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한병철의 책이 '적'(enemy)이겠지만,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며 세상을 바꾸어 보려는 종말론적 비전을 가진 이들에게 한병철의 책은 아주 좋은 '아군'(friend)'가 될 것이다.

 

간결한 필치의 책이지만, 결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현대 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한병철의 책을 읽으며 거기에서 제시하고 있는 문헌들을 차근차근 공부해 나간다면, 신자유주의의 자기 착취의 메커니즘을 파악하게 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실로 예언자적인 안목을 기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남기신 선지자 7천명의 반열에 오르려면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한병철의 책을 읽어야 한다. 2023년도, 많은 이들이 한병철의 책을 통해서 '자기 착취'의 지옥에서 벗어나고, 아직도 '자기 착취'의 지옥에서 생명을 소진하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많이 구원해 내는, 매트릭스(The Matrix)의 '니오'(Neo)' 같은 삶을 살게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신앙은 좋은 것이다

 

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 해는 계묘년입니다. 검은 토끼의 해라네요. 사실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 2020년도 다 못 산 것 같은데,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2020년도 다 못 산 것 같은데, 2021년이나 2022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으면, 그저 아득하기만 합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교양영어 시간에 첫번째 수업에 배웠던 영어 텍스트의 제목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The show must go on”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을 당했어도 인생(the show)은 멈추지 않고, 일상은 그대로 흘러간다는 교훈을 담은 텍스트였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팬데믹이 닥쳐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인생이 멈추어 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세상은 그냥 그렇게 흘러서 벌써 3년이 지나 2023년을 맞았습니다.

 

최근 읽은 책 중에 『몸짓의 철학』이라는 책에 ‘앉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책은 우리의 일상의 모든 몸짓에 대한 철학적 묵상을 담은 책인데, 그 중에서 ‘앉기’라는 몸짓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앉아서 듣지 못하는 자는 진리와 진실을 경청하는 바른 몸가짐이 되어 있지 않다”(56쪽). ‘앉기’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앉으라. 그리고 성찰하라!”

 

정말 그렇습니다.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할 때, 우리는 앉아서 합니다. 대개 중요한 일은 거의 모두 앉아서 하는 일입니다. 그 중에서 뭔가를 배우고, 가르칠 때, 앉는 행위는 정말 중요합니다. 책을 읽을 때도 앉아서 읽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누워서 읽거나 서서 읽으면 집중이 잘 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도 우리는 앉아서 듣습니다. 다른 자세로 들으면 집중이 잘 안 될 뿐더러, 좋은 자세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저자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합니다. “앉음에서 오는 성찰이 없는 삶은 무엇을 이루었다고 한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불행한 삶일 수 있다”(59쪽).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앉음에서 오는 성찰’입니다. 그냥 ‘성찰’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워서도 성찰할 수 있고, 걸으면서도 성찰할 수 있고, 일하면서도 성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성찰이든, ‘앉음에서 오는 성찰’만큼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무화과나무 아래는 성경공부를 하기 가장 좋은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경건한 사람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자신이 만난 메시아 예수를 소개했고, 그 예수가 나사렛에서 온 분이라는 것을 듣고서 나다나엘은 “나사랏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며 빌립의 전도를 뿌리쳤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나다나엘을 길을 가다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자신을 알아본 것을 신기하게 여겨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의 이러한 대답을 듣자마자, 나다나엘은 빌립이 증거했을 때는 부인하다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마음을 바꾸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이 바로 ‘무화과나무’ 때문에 발생합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나다나엘은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고, 그 영이 통하여 말씀이 증거하는 메시아 예수를 만났을 때에 그분을 비로소 알아보게 된 것이죠. 이는 모두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과 인생을 성찰한 덕분입니다.

 

앉아서, 성찰해 보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로서, 우리는 어떠한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성찰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팬데믹 동안 이전에 비해 많이 느슨해진 교회 공동체를 보면서 이제는 좀 더 새로운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건강하고 활동적인 공동체로 거듭나야 할 시기가 왔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2023년도부터 ‘적극신앙 프로젝트’를 통해서 ‘신앙은 좋은 것이다’ 운동을 펼쳐나가려고 합니다.

 

신앙은 정말로 좋은 것인데,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그 가치를 너무도 잘 모르고, 신앙 이외의 다른 것에서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들을 많이 하면서 삽니다. 기후변화 공부를 하면서 더 깊이 깨닫는 것은 기후변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의 힘’ 외에는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기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갖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나약한 인간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힘보다 강하신 하나님에 기대어 연약한 나를 넘어서는 일을 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23년도를 ‘적극신앙의 해’로 선포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좋은 것이다’ 운동을 펼쳐 나가려고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 교회 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를 외치며, 변화를 갈망해야 할 것입니다. 저부터 더 열심을 내고, 변하고, 더 많이 사랑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허락하신 새로운 해 2023년도를 다음 말씀에 힘입어 ‘적극신앙’을 실천합시다.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Posted by 장준식

[창과 방패의 사회]

 

누가 창이고 누가 방패인지는 불확실하지만, 현재 우리가 맞닥뜨린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극한 대립 가운데 있는 '창과 방패'의 사회이다. 미국 차기 대선 주자 중 한 명인 플로리다주의 주지사 디샌티스는 플로리다주 교육위원회를 보수 성향의 위원들로 채우겠다고 공언했다.

 

미국은 '낙태, 동성애, 총기 규제, 불법 이민' 등의 사회적 이슈로 인하여 보수와 진보가 극명하게 나뉘어 거의 전쟁에 가까울 정도로 사회적 갈등이 심각하다. 보수층은 낙태를 반대하고, 동성애를 반대하고, 총기규제를 반대하고, 불법 이민을 반대한다. 진보층은 낙태를 찬성하고, 동성애를 찬성하고, 총기규제를 찬성하고, 불법 이민자들에 대하여 관대하다. 모두 '인권(human right)'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지만, 양쪽의 주장은 '창과 방패'의 수준이다.

 

미국의 연합감리교회(UMC) 교단도 오랜 세월 '동성애 이슈'로 인해 내홍을 겪다 이제 더 이상 그 문제로 교단을 '하나(one church)'로 유지하는 게 어렵게 되어 결국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뉘어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진영의 교회와 교인들이 UMC를 탈퇴하여 GMC(Global Methodist Church) 교단을 새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극명하게 대립되는 사회적 이슈를 중심으로 두 개의 진영이 마치 창과 방패처럼 버티고 있는 우리 사회는 점점 숨막히는 사회가 되어가는 듯하다. 한쪽에서는 ‘이 창은 어떤 방패든 뚫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 방패는 어떤 창이든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은 두 가지 심리적 결과를 가져오는 듯하다. 승리를 거머쥐려고 독해지거나, 너무 긴장감이 심하니까 아예 무감각 또는 무기력해지거나. 어느 쪽이든 건강하지 못한 병리적 현상들이다.

 

교회가 창과 방패 사이에 서서 중재를 서고 평화를 일구면 좋겠으나, 교회도 창과 방패의 사회에 편승하여 갈라지고 깨지고 있다. 보수 진영의 교회에서 주장하는 교회의 본질과 진보 진영에서 주장하는 교회의 본질 또한 창과 방패처럼 한치의 양보도 없다. 그래서 결국 서로를 정죄하고, 갈라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꼴저꼴 다 보기 싫은 교회는 유체이탈 화법을 통한 설교와 목회를 통해, 마치 교회는 우리 사회의 창과 방패의 싸움에 끼면 안 되는 것처럼 무관심한 공동체를 세운다. 오늘날 신앙이 영지주의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더 이상 보편적 가치를 상실한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각자 개별적 가치를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며 보편적 신앙을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에 도달했다. 각 교회에서 부흥을 이루겠다고 내세우는 각종 구호들이나 프로그램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저 몇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을 뿐, 우리 사회에서는 이제 더 이상 교회의 가치가 보편적 가치로 작동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창과 방패의 사회, 모든 것이 일촉즉발인 사회, 진퇴양난인 사회, 그래서 숨막히는 사회. 이 사회에서 우리 인간이 가진 어떤 지식이나 실천이 이 긴장감과 양극화와 불화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인간은 그저 전쟁을 할 수 있을 뿐, 평화적으로 창과 방패를 손에서 내려놓고 두 손을 모을 것 같지 않다. 이러한 답답함 때문에 발터 벤야민 같은 정치 철학자는 ‘메시아적 종말론’을 바탕에 깔고 철학하기를 했던 것 같다. 우리 스스로 성취하는 구원은 불가능하므로, 바깥에서 오는 구원을 갈망할 수밖에 없는 절망(또는 희망)에 휩싸여서 말이다.

 

창과 방패의 사회. 아무튼, 이 용어가 바로 우리 사회를 읽어낸 나의 통찰이다. 바라기는, 창을 쥔 자나 방패를 쥔 자나, 조금만 더 휴머니스트가 되면 좋겠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보호하지 않으면 누가 사랑하고 보호하겠는가. 전쟁보다 평화가 더 좋은 것이다. 비난보다 칭찬이 좋은 것이다. 미움보다 사랑이 더 좋은 것이다. 평화를 선택하고 칭찬을 선택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휴머니스트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물론 창과 방패를 굳건하게 쥐고 있는 자들은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순진해보이겠지만.

Posted by 장준식

[기후교회로 가는 길]

 

6. 기후변화와 예배의 변화

 

인간을 정의하는 용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입니다. 합리적 근대 사상을 열었던 데카르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인간 종(species)을 생각할 때, 다른 생물 종에 비해 인간의 두드러진 특징 중 가장 먼저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이성(reason)’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성의 능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 덕분에 인간은 다른 생물 종 위에 군림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생각의 능력(이성의 능력)’은 참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능력이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면, 인간은 그 능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이기 때문에 다른 생물 종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을 누리고 살지만, 바로 그 능력이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다른 종들의 생명까지도 위협하고 있다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인간을 정의하는 용어 중 오늘날 회복되고 강조되어야 할 것은 ‘호모 리투르기쿠스’(Homo Liturgicus)입니다.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합리적 인간(homo rationale)이나 도구적 인간(homo faber), 경제적 인간(home economicus)이 아니다. 심지어 흔히 말하는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도 아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예배하는 인간(homo liturgicus)이다”(제임스 스미스, 57쪽). 제임스 스미스가 ‘예배하는 인간’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성의 독주로 인하여 망가진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을 우리 시대에 복원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의 열망이 가득한 세상을 꿈꿨던 위대한 그리스도교의 교부입니다. 자신의 책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감없이 고백합니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ad te)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in te)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선한용, 45쪽). 이 구절을 쉬운 말로 옮기면 이런 뜻이다. ‘하나님, 우리는 당신을 마음껏 사랑하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인류를 ‘예배하는 인간(homo litrugicus)’로 명명하는 것이죠. 사랑은 상대방을 숭배하는 일, 곧 예배하는 일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사랑 빠지면 인간은 말과 행동이 바뀝니다. 사랑의 대상을 향한 숭배의 말과 행동이 넘칩니다. 상대방을 향한 나의 언어와 행동이 숭배로 넘친다면, 그것은 사랑에 빠졌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곧 예배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곧 예배하는 일과 동일합니다. 신앙인이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사랑의 행위, 그 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것도 아닙니다.

 

『기후교회』에서 짐 안탈은 기후위기를 맞아 교회의 예배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도전을 주고 상상력을 제공합니다. 그의 도전 중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현재 우리의 예배가 너무 인간중심적이라는 비판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온통 ‘인간’의 구원에만 집중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존재는 마치 ‘인간’ 외에는 없는 양, 우리는 다른 모든 피조물이 제외된, 오직 인간만이 참여하는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비판하기 위해서 짐 안탈은 윤리학자 윌리스 젠킨스(Willis Jenkins)를 인용합니다. “생물학적인 것들이 사라지는 가운데서, 다른 피조물들이 없는 예배드리기는 예배 회중들로 하여금 피조물들을 소멸시키는 힘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든다”(짐 안탈, 207쪽).

 

인간중심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한 예배는 오직 인간만이 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모르지만, 이 세상 모든 만물이 인간과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예배 드리기’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후위기를 맞아 ‘예배하는 인간’에게는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상상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배 시간에 인간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키우는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 등과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을 한 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인간에게만 분여할 것이 아니라, 반려동물에게도 분여하는 일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창조되었고,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만이 아닌 모든 피조물들이 참여하는 예배를 상상한다는 것은 인간이 기후변화에 끼치고 있는 해악들을 반성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기후위기를 초래한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의지에 대한 반영입니다. 예배의 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일입니다. 일례로, 1960년대 초반, 미국에서 흑인 인권운동이 한창 일 때, 미국 남부에 있는 흑인교회들은 그들의 예배를 흑인 인권에 초점을 맞추어 구상했습니다. 그 결과 흑인 인권 운동은 성공을 거두었고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데 이바지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힘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슨 경험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역사의 요청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예배를 구성하게 될 때, 현재 우리의 예배는 기후위기의 경험이 예배의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기후위기를 맞아 『기후교회』에서 제시되고 있는 혁신적인 예배 중 우리가 어렵지 않게 실천해 볼만한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기후 부흥집회(Climate Revival)’입니다. 우리는 대개 ‘성령 부흥집회’나 ‘말씀 부흥집회’에 익숙하지만, 성령이나 말씀이 기후위기를 무시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기후위기를 겪는 우리 시대에 성령과 말씀은 기후위기에 대하여 우리에게 하실 이야기가 더 많으실 겁니다. 기후위기에 맞서는 것이 우리 시대에 긴급히 요청되는 사명인만큼, 교회들이 연합하여 ‘기후 부흥집회’를 열어 기후위기를 초래한 우리들의 죄악을 회개하고 생명의 지속적인 번영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총과 지혜를 간구하는 일은 굉장히 고무적인 일인 듯합니다.

 

『기후교회』에서 제시되고 있는 혁신적인 예배의 다른 하나는 ‘길 위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간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에 익숙합니다. 다른 말로 ‘시민불복종예배’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예배는 예배 의식을 현장으로 끌고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길 위에서 드리는 예배’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를 초래하는 건설현장이나, 사회정의를 해치는 일이 진행되는 곳, 또는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고 있는 곳으로 직접 발걸음을 옮겨, 바로 그곳에서 현장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일에는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만, 토요일이나 공휴일에 자연이나 인간에 대하여 불의가 행해지는 현장에 가서 예배 드리는 일을 교회가 적극적으로 실행한다면, 지금처럼 교회가 사람들에게 외면당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풍경이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탄생하셨을 때에 선포된 이 말씀이 실현되는 것이겠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우리는 예배하는 인간(homo liturgicus)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하는 인간으로 불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사랑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의 예배는 너무 인간중심적인 예배에만 머물렀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인간만 창조하시고 나머지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닌 듯,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 데만 몰두하고 나머지 피조물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착취하고 파괴해 왔습니다. 그 결과,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은 ‘기후위기’입니다. 이는 사랑의 실패요 예배의 실패입니다. 예배하는 인간으로서 우리 다시,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게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모든 피조물들이 참여하는 예배를 상상하며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사랑’에 있는 듯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복지사회와 교회의 역할]

 

미국에서 산지도 벌써 20년이 되었다. 미국 와서 살다보니 한국에서 살 때와 다른 점이 정말 많았다. 그중, 목회자로서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한국에서 목회자는 세금을 내지 않지만, 미국은 목회자도 세금을 내야 한다. 

 

미국은 복지국가다. 사회보장제도가 비교적 잘 되어 있다. 한국도 복지국가로 가는 중이다. 나라가 부강해지면 가야 할 길이다. 복지국가를 이루려면 조세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어야 하고, 걷은 세금을 공평하게 써야 한다. 제도적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잘 살아도 복지국가를 이룰 수 없다.

 

옛날, 모두 못 먹고 못살았을 때 교회는 가난한 자에게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복지국가로 가면 갈수록 교회가 가난한 자에게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줄어든다. 가난한 사람들을 국가가 직접 돌보는 시스템을 갖추기 때문이다. 교회가 할 일이 줄어든다고 사회보장제도의 시행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교회는 오히려 사회보장제도가 잘 정착되도록 도와야 한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금이다.

 

복지국가에서, 그리고 사회보장제도가 공평하게 시행되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가 할 일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목회자를 비롯해서 모든 교인들이 세금을 잘 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세금이 온전히 정의롭고 공평하게 잘 쓰여지는지 사회보장제도를 잘 감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가에서 시행하는 사회보장제도에 교회가 참여하여 돕는 것이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해서 교회가 직접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은 복지국가에서는 잘 작동(workin하지 않는다. 복지국가에서 가난한 자들은 이미 나라의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도와주는 것은 별로 실제적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은 지난 20년간 미국에서 목회하면서 경험한 일이다.

 

복지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세금을 정직하게 잘 내는 일이다. 목회자부터 솔선수범하여 세금을 정직하게 내고, 교인들에게 세금을 정직하게 낼 것을 권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또한 조세제도와 사회보장제도가 정의롭고 합리적이고 공평하게 운영되도록 잘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목회하는 자로서 국가로부터 받는 혜택이 매우 크다. 이는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세금을 성실하게 내기 때문에 사회보장제도가 튼실하게 운영되는 덕분이다. 한국의 목회자들이, 그리고 한국의 교회들이 이미 복지국가를 이루고 튼실한 사회보장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선진 국가들로부터 잘 배웠으면 좋겠다. 세금을 잘 내서 사회보장제도가 잘 운영되면 생활이 어려운 한국의 목회자들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국가'라는 제도를 지혜롭게 잘 활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지혜로운 한국교회가 되면 좋겠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교회로 가는 길]

 

5. 기후변화와 제자도

 

“차이를 만들어 낼 유일한 변화는 인간의 가슴을 변화시키는 것이다”(피터 셍지, Peter Senge). 일생 동안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신영복 선생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을 덧붙입니다. 결국 우리가 일생 동안 해야 할 여행 중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 발까지 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가진 ‘제자도’라는 말이 그 뜻을 담고 있으니까요. 제자도란 제자가 가야할 길을 가리키는데, 예수를 따르는 사람(a follower of Christ)의 길이란 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니리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기후교회』는 제자도를 묻습니다. “기후위기의 세계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기후교회, 161쪽). 제자도는 매우 역동적인 개념입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리퀴드’ 개념을 빌려 제자도를 표현한다면, 제자도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liquid)’입니다. 제자도는 한 시대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따라 바뀝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실하고자 했던 신앙의 선조들은 모두 자기 시대의 문제를 못 본 척하지 않고 끌어 안고 씨름했습니다. 멀리는 로마제국의 멸망의 지켜보면서 기독교 신학을 탐구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랬고, 가까이는 나치의 포학에 맞서 제자도를 고민했던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자들, 특히 바르트나 본회퍼가 그러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는 김교신이나 다석 유영모 같은 분들이 일제시대와 영적위기에 맞서 참된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제자도란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문제가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면한 시대의 문제와 씨름하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죠.

 

제자도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신앙인은 경건한 신앙의 선배들이 물었던 질문을 동일하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회퍼가 그 질문을 한 문장으로 아주 잘 정리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Wer ist Christus für uns heute?” 우리는 ‘오늘’을 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까? 『기후교회』는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고, 그러한 일들에 맞선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주목하는 것은 지난 2세기 동안 발생한 화석연료의 추출과 그것을 이용한 물질적 성장입니다. 화석연료의 사용과 물질적 성장의 추구가 가져온 결과는 풍요만이 아니고 기후변화를 동반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에 풍요를 가져오는 바로 그것이 인간의 생명을 멸망시킨다면, 이것만큼 모순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라스무센의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에 나온 진술을 이용해 짐 안탈 목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신앙인들로서 우리도 인간의 경제가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굴러가는 것을 곁에서 가만히 서서 지켜볼 수는 없다”(기후교회, 164쪽). 지난 2백년 동안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인류가 행한 일은 경제성장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경제가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굴러간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미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총기사고를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매일 같이 총기사고가 나서 무고한 생명이 수도 없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총기규제를 하지 않습니다. 모두 돈 때문입니다. 총기 사고로 인하여 일 년에 수만 명씩 죽어 나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생태학적 비용(새명이 죽어 나가는 일)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총기구매와 사용이 허가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류는 경제성장을 위해서 모든 생태학적 비용을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병리적 현상입니다. 병입니다. 병(disease).

 

지난 2백 년간 인류 역사에서 발생한 근대화(modernity)는 경제성장을 위해 모든 것이 희생되는 근대화의 시대였습니다. 경제가 블랙홀이 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정치도, 사회도, 문화도, 그리고 종교도 모두 경제를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세운 사회는 ‘물질적 소비’위에 세워진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용어들이 가치 있고 도덕적이고 미적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성장. 소비. 발전. 중독, 과잉, 편리, 무시, 자기중심.” 인류는 오로지 이것들 위해서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소비하지 않으면, 발전하지 않으면, 중독되지 않으면, 과잉되지 않으면, 편리하지 않으면, 무시하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이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성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이 문제인 이유는 ‘삶’을, ‘생명’을, ‘생태’를 지속적이지 못하게 합니다. 삶은 지치고, 생명은 끊어지고, 생태는 망가지고 맙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제자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제자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인데,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살아가신다면 어떠한 삶을 살아가셨을까요? 생명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성장과 소비, 발전과 중독, 과잉과 편리, 무시와 자기중심에 사로잡혀 삶을 지치게 만들고, 생명을 끊어지게 하며, 생태를 망가뜨리는 길을 걸어가셨을까요? 그럴리 만무합니다(It’s absolutely not!).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난 2백년 동안의 제자도라는 것이 경제성장과 맞물려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장’이라는 용어에 매몰되어 ‘제자도란 성장을 일구는 것’인 양, 우리도 모르게 “생태학적 비용에 무관심하게 병리학적으로” 제자도를 실행해 온 듯합니다. 『기후교회』는 기후위기의 세계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물으며, 제자도를 재설정하기를 촉구합니다. 성장 대신에 탄력성을, 소비 대신에 협력을, 발전 대신에 지혜를, 중독 대신에 균형을, 과잉 대신에 적당함을, 편리 대신에 비전을, 무시 대신에 책임성을, 그리고 자기 중심적 두려움 대신에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제자도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새롭게 제시된 제자도를 한 마디로 줄여서 다시 설명하면, 오늘 우리에게 제자도란 체제 변화 운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지난 2백 년간 인류는 화석연료 사용과 경제성장 추구의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우리는 ‘화석연료’에 심하게 중독되어 있습니다. 세계 최고 부호 탑 10 가운데 3개가 에너지 사업과 관련 있습니다. 미국의 코흐 인더스트리스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드 가문, 인도의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가 그것입니다. 쓰고 나면 다시 재생할 수 없는 화석연료 대신에 재생가능한 에너지로 경제를 구성하는 체제를 우리는 새롭게 구축할 수 있을까요? 『대지의 선물』에서 웬델 베리가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이 이웃을 사랑하면서 그 이웃의 삶이 의존하고 있는 위대한 유산을 경멸하는 것은 모순이다”(기후교회, 191쪽).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제자도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이 의존하고 있는 ‘위대한 유산’을 경멸하는 것은 겉으로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이웃을 욕보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것은 신앙이나 제자도가 아니라 기만이고 사기입니다.

 

기후위기를 맞아, 우리의 제자도는 기존의 제자도와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기후위기를 맞아, 우리는 여전히 개인구원, 영혼구원만 외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예배, 설교, 기도, 선교, 친교, 봉사의 측면에서 기존의 제자도와 어우러진 새로운 제자도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로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머리는, 우리의 가슴은, 우리의 발은 무엇을 향하고 있습니까?

Posted by 장준식

[바울의 해체, 우리의 해체]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해체(deconstruction)한다. 그에게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해체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넘나드는 보편적인 구원을 이루는 것이었다. 바울의 신학이 담고 있는 정치신학은 인간(유대인)과 인간(이방인) 사이에 놓인 막힌 담을 허무는 것이었다.

 

바울 신학의 정신을 이어받은 그리스도인이 오늘날 생태 위기를 맞아 더 진행시켜야 할 해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해체시키는 일이다.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정치신학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막힌 담을 허무는 것을 넘어서(이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작업이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놓인 막힌 담을 허무는 정치신학이다.

 

바울의 정치신학이 유대인 중심의 세계관을 이방인도 포함시킨 보편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이었듯이,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정치신학은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비인간도 포함시킨 보편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이다. 유대인이 이방인에 대하여 자신들과 동일한 가치를 인정할 때 그것이 곧 구원이었듯이, 인간이 비인간에 대하여 자신들과 동일한 가치를 인정할 때, 구원이 임할 것이다.

 

비구원은 가치의 불균형에서 온다. 구원은 가치의 균형이다. 마르틴 부버가 일찍이 간파했듯이, 비구원은 '나와 그것'의 가치이다. 나 중심에서 사로잡혀 상대방의 가치를 '그것(it)'으로 상대화시키면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 차별과 혐오와 폭력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악들은 합리적이고 타당한 행위로 둔갑한다. 구원은 상대화된 '그것'의 가치는 '너(당신)'의 가치로 대등화되는 것이다. 구원은 '나와 너(당신)'의 가치이다.

 

모든 것이 그렇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상대방의 가치를 '그것'으로 전락시키는가. 자신이 무슨 성취를 이룬 것처럼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에게 특히 이러한 가치 전락이 발생한다. 동양철학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이(理)'가 상대방의 '이(理)'보다 높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을 '그것'으로 취급하며 하대하게 된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에게 이를 높이는 수단으로 전통적으로 나이, 성별, 가문, 학식 등이 쓰였고, 요즘들어서는 재산, 학벌, 외모가 자신의  '이(理)'를 높이는 수단으로 긴요하게 쓰이고 있다.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바울이 하려했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해체도 그 완성이 묘연할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 절실하게 요청되는 인간과 비인간의 해체는 이제 걸음마 단계인 듯하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수도없이 존재를 '나와 그것'으로 설정지어 차별하고 혐오하고 폭력을 저지르며 산다. 우리는 언제쯤 '나와 너(당신)'의 관계 속에서 평화를 이루고, 서로 존중하며, 서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아주 묘연할 뿐이다. 이렇게 구원이 묘연한데,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자기의 구원을 자랑하는 자들이 말하는 구원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삶 속에서 성취하려는 구원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상대방(당신)을 '그것'으로 상대화시키지 않고 '너(당신)'로 대등화시키는 것이다. 나보다 '이(理)'가 낮다고 생각되는 존재도, 나보다 '이(理)'가 높다고 생각되는 존재도, 그저 나에게는 '너(당신)'일 뿐이다. 나는 누군가를 하대하거나 누군가에게 굽실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에게 굽실대는 존재를 거부한다. 나는 나를 하대하는 존재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와 너(당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구원받은 존재이지, 상대방은 '그것'의 가치로 상대화시키는 비구원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존재가 되기를! 비구원의 존재가 아니라 구원의 존재가 되기를! 무엇보다, 요즘 더 긴급하게 요청되고 있듯이, 비인간을 '너'로 받아들이기를!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여 생명이 지속적으로 번성하기를!

Posted by 장준식

[불황과 호황: 카지노와 교회]

 

미국의 카지노 산업은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Despite high gas and food prices, there doesn't seem to be many inflation worries when it comes to gambling." 인플레이션이 심해서 개스값과 식료품 가격이 엄청 올라서 먹고 살기 힘들어졌는데, 도박장은 역대 최고의 호황을 맞았다는 기사다. 올해 3분기 실적이 무려 150억 달러란다. 이에 대하여 네바다 대학교의 도박 역사를 전공한 교수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한바탕 기회를 잡으려는 인간의 심리가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풍경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호황을 누리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도박 산업이 되었다. 사람들의 인식이 완전히 바뀐 것 같다. 불확실한 시대에 신의 인도를 받는 것보다는 돈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더 확실한 미래를 보장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가진 보편적인 생각인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각자 도생의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공동체는 없고 '개인'만 남은 세상에서 누가 우리를 구원하겠는가.

 

그동안 너무 '개인구원'만 힘써 외쳤던 복음주의 신앙이 이러한 현상을 한몫 거들은 것도 사실이다. '개인구원'이 각자도생과 무엇이 다른가.  종교가 각자도생을 endorsement(지지) 했으니,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이웃들을 돌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자기의 소유를 더 늘리려는 욕구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인 듯하다.

 

미국 투자 자본의 40%가 몰려 있다는 실리콘밸리, 내가 사는 동네도 불황을 맞고 있다. 빅테크 기업들의 layoff 사태가 줄을 잇고 있다. 우리 동네는 올 가을, 나무만 잎을 떨구어내는 게 아니라, 기업들도 나무가 이파리를 떨구어내듯 노동자들을 떨구어내고 있다. 그래서 올 가을, 바닥에 나뒹구는 낙엽이 별로 낭만적이지 않다.

 

어려운 시절, 모두가 조금씩만 양보하고 나누어서, 잘 버텨내면 좋겠다. 모두 살아남아 꽃을 피우고 다시 이파리가 무성해지길!

Posted by 장준식

[기후교회로 가는 길]

 

4. 기후변화와 새로운 도덕률

 

인간은 성공을 추구합니다. 교회도 성공을 추구합니다. 인간의 집합체이며, 공동체인 교회에게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이 땅의 수많은 교회들이 ‘부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각종 프로그램과 아이디어를 통해 성공을 추구해왔습니다. 교회의 생태계도 일반 집단의 생태계와 별반 다르지 않게 매우 경쟁적으로 성공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자신들이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호소력 있게 개발한 덕분에 성공했고, 어떤 교회들은 ‘예배, 선교, 봉사, 친교’ 등 전통적인 교회의 사역을 탁월하게 수행함으로써 성공했습니다. 또 어떤 교회들은 포스트모던 사회에 부합한 교회의 모습을 갖춤으로써 신선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 성공을 일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교회들의 성공은 우리가 현재 마주치게 된 현실 앞에서 매우 무기력해집니다. “모든 개교회는 힘겨운 새로운 현실에 직면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의 지속에 더 이상 의존할 수 없다는 현실이다”(기후교회, 139쪽). 사랑이 없으면 그 어떤 행위도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듯, 그 어떤 성공도 기후변화의 현실을 외면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후위기 시대를 맞아 교회는 ‘성공’에 대한 정의(definition)를 절대적으로 다시 세워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덕률이 요청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기후위기 앞에서 어떠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삶의 지속성을 위해서, 미래세대의 지속성을 위해서, 교회 사역의 지속성을 위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떠한 역할을 감당해야만 할까요? 『기후교회』에서 짐 안탈 목사는 지구와 이 땅 위의 생명들을 위협하는 두 개의 집단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화석연료를 뽑아냄으로써 엄청나게 부자가 되는 소수의 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피조물들을 쓰레기로 만드는 데서 이익을 얻는 발전된 산업국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거리를 두고 두 개의 집단이 명시되고 있지만, 실상 이것은 바로 ‘우리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발전된 산업국가에서 살며 화석연료를 소비하면서 생명을 보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거대한 쓰레기를 생산해 냅니다. 바로 ‘우리들’이 지구와 이 땅 위의 생명들을 위협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사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급진적인 제안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거대한 전환, 또는 놀랍게 거듭난 삶이 우리에게 요청됩니다. 이것은 기후위기 앞에서 인간의 생존을 모색하는 모든 ‘기후영성학자들(종교인이든 종요인이 아니든)’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최근 『회복력 시대』를 출간한 제러미 리프킨은 기후위기를 맞아 ‘회복력(Resilience)’을 키워드로 한 생존전략을 말합니다. ‘회복탄력성’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는 ‘Resilience’라는 용어는 ‘역경과 고난을 지나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회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리프킨은 상생을 강조합니다. 산업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은 생태계의 다른 종들과 구별된 종(spices)으로서 다른 종들을 지배하고 착취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왔으나, 이제는 인간도 지구 생태계에 종속된 하나의 종(one of them)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설정하여(또는 원래대로 돌아가)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적응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후교회』에서 짐 안탈도 같은 말을 합니다. 그는, 기후위기 앞에서 교회는 탄력적인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여기서 ‘탄력적인’이라는 용어도 ‘Resilience’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기에 직면했지만, 그 위기에 넘어지거나 휩쓸려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하여 계속해서 번성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할 의무가 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상호의존성’의 중요성과 체제를 바꾸기 위한 노력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서술합니다. 우리 동양인들은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서로 의존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러나 동양인의 삶이 서구화되면서 우리가 원래 지니고 있던 삶에 대한 가치, 즉 ‘상호의존성’의 가치는 상실된 지 오래입니다. 동양인은 자연에 순응(적응)하는 방식으로 삶을 꾸려왔습니다. 그러나 18, 19세기를 거치면서 산업화 시대를 먼저 일군 서구인들에 의해서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방식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삶의 방식이 우리 가운데 자리잡았습니다. 지배와 착취가 난무했던 서구인들의 제국시대는 동양인들로 하여금 자연에 순응하는 방식을 버리고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도록 이끌었던 것이죠.

 

그런데, 기후위기 앞에서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일군 자연에 대한 지배와 착취의 방식이 결국 얼마나 잘못된 삶의 방식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양인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우려고 합니다. 그 지혜란 바로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서로 의존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후변화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기후변화의 담론(discourse)을 이끌고 있는 서구세계의 학자들이 쓴 책들을 참고하고 있지만, 사실, 동양인으로서 우리 안에는 이미 오랜 시간동안 삶에서 채득한 ‘상호의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에 직면하여 다시 살펴보면,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진 삶의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를 앞서가는 삶의 방식이고, 올바른 도덕률에 근거한 정의로운 삶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후변화의 담론을 이끌고 있는 서구 생태학자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운다기 보다, 우리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지를 확인하고 자랑스러워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구인들에게는 회개가 필요하지만,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감사와 칭찬이 필요한 것이죠.

 

기후위기는 모든 형태의 불의를 강화합니다. 이렇게 불의가 증폭되고 있는 기후위기의 시대에 교회가 빛을 발할 수 있는 이유는, 교회는 이미 오랫동안 정의(Justice)를 교회의 특색으로 명시했으며 모든 불의에 반대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자기 정체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의 말을 인용하여 짐 안탈은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는 건설계획(building plan)을 가지고 왔지 ㅡ그의 추종자들에게 땅 위에서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데 그와 함께하자고 확신시키기를 희망하면서ㅡ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살피라고 위탁하신 생명을 주는 피조세계로부터(죽든지, 혹은 우주선을 타고) 철수하여 도망가자고 온 것이 아니다”(기후교회 144쪽). 기후위기로 인하여 증폭되고 있는 불의에 대하여 눈감고 그저 어떠한 방식으로든(죽든지, 혹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탈출하기만 하면 그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인에게 도덕적인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증폭되고 있는 불의에 맞서, 불의를 증폭시키는 원인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행동해야 합니다. 탄소생산의 진짜 비용과 탄소가 원인이 된 공해가 그 값에 반영되도록 탄소배출 기업들을 압박해야 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로 전환하는 부담을 부자들이 공정한 몫을 지불하도록 요청해야 하며, 탄소의 진정한 값을 지불하는 부담을 가난한 자들에게 떠맡기지 않도록 주장해야 합니다(기후교회, 151쪽).

 

기후변화를 마주하며,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새로운 도덕률입니다. 도덕이란 내가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준점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행위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그 수많은 행위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도덕률’이라는 기준점이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내가 하는 행동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알 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알지 못해서 선하고 도덕적인 일을 하지 못하지 악하기 때문에 선하고 도덕적인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후위기 시대에 절실하게 요청되는 도덕률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전지구적으로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 힘을 모으는데 교회는 도덕적 나침반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을 외면하면 그 어떤 성공도 교회의 부흥이 아닙니다.

Posted by 장준식

[유보된 구원]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존재가 인격적이며, 그래서 관계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관계 안에 있는 존재(being-in-relation)이다. 그러므로 존재란 타자를 위한 존재(being-for-another), 타자로부터의 존재(being-from-another), 혹은 사랑의 존재(being of love)라고 말할 수 있다.

 

어려운 말 같지만, 그리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나 혼자서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타자와 함께, 타자를 통해 존재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우리는 사랑할 때 결코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고 싶을 때는 외로울 때이다. 혼자인 것이 싫을 때, 우리는 사랑을 갈망한다. 우리는 타자를 갈망한다.

 

관계적 존재에게 구원이란 고립된 개념일 수 없다. 나 혼자만의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자기-반성과 자기-성찰을 통한 자기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내가 자기-반성과 자기-성찰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게 되었더라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구원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늘 유보되고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구원받지 못한 이웃이 있다면, 타자가 구원의 상태로 들어오지 못했다면 우리의 구원도 묘연해지는 것이다.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다른 이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다른 이들의 구원 여부와 상관없이 나의 구원은 확정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존재는 관계적이기 때문에, 어느 한 존재라도 구원에서 멀어진 존재가 있다면, 모든 존재의 구원은 유보된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존재가 관계적이기 때문이다. 99마리의 양이 구원받았어도 1마리의 양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그 한 마리의 양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 한 마리를 포기하고 구원받은 99명의 우리들에게 관심을 가져 달라고 집중해 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한 마리의 양이 구원받지 못한 것 때문에 구원은 완전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1마리의 구원받지 못한 양이 존재하는 한, 구원은 유보되고 잠정적인 것이 된다.

 

남이 어떻게 되든, 나만 살았으면 그만이고, 남이 어떻게 되든, 나만 풍요로우면 그만이고, 남이 어떻게 되든, 나만 안전하면 그만이고, 남이 어떻게 되든, 나만 건강하면 그만이고, 남이 어떻게 되든, 나만 구원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기독교 신앙에 없는 개념이다. 만약 이런 생각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면 안 된다.

 

구원은 차별이 아니라 포괄이다. 구원은 개별이 아니라 보편이다. 구원은 혐오가 아니라 사랑이다. 구원은 나 자신의 신앙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신앙에 달려 있다. 그러니, 우리는 나 자신의 신앙뿐 아니라 이웃의 신앙을 위해서도 나 자신을 내어놓아야 한다.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우리 모두의 사랑이다. 나의 구원이 상대방에게 달렸다고 생각한다면, 내 존재가 아니라 상대방의 존재가 귀한 법이다. 그러니 서로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Posted by 장준식

[심리학 또는 역사학]

 

삼위일체론은 심리학보다는 역사학이 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론이 심리학으로 기울게 된 탓은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의 흔적을 인간 내면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이 심리학으로 흐르면,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가 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비판해야 한다.

 

삼위일체론은 심리학보다는 역사학이 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삼위일체론을 정교하게 발전시킨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입장은 역사학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가를 논리적(또는 합리적)으로 전개시킨 것,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론이었다. 그래서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본성(ousia)보다 위격(hypotasis)에 집중한다. 이것은 삼위일체론이 사변, 또는 심리로 흐르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실체(substance)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이 심리학으로 흐르면,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하게 되고,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기 십상이다. 이러한 신앙은 영지주의 신앙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내면을 살펴, 즉 내면을 탐구하여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 하나님을 믿고 갈망함으로 자기 구원(개인 구원)만 이루면 그만이기에, 자기 외부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자기 구원에만 집중하고 역사를 외면하는 신앙은 영지주의 신앙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삼위일체론에서 지켜내야 할 것은 역사학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내면에 어떠한 흔적을 남기셨는지에 집중하기 보다, 역사에 어떠한 흔적을 남기셨는지, 그리고 남기고 계신지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역사의 참여자로서 역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동역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이 중요한 이유, 그리고 어거스틴과 그 이후의 신학자들보다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이 중요한 이유는 성경과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이 '역사 안에서 활동하신(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이 발달한 요즘, 기독교 신앙은 심리학의 발달과 더불어 더 개인주의적으로 흐를 위험성을 안고 있다. 아니, 우리는 이미 그것을 목격하고 있다. 이러한 위험성을 차단하고 '역사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심리학 공부는 조금 덜 하고, 역사 공부를 더 많이 하는 것이다. 역사를 알아야, 역사에 대한 영성(spirituality/정신성)이 생기고, 그 역사 안에서 활동하신(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구원 역사에 부름 받고 동참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교회에서 성경공부 좀 그만하고, 역사 공부 좀 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의 정신을 적용하여) 성경공부 반, 역사 공부 반, 이렇게 반 반씩 만이라도 하면 좋겠다. 성경이 역사의 기록인데, 우리 역사를 공부하지 않는 것은 너무도 이상한 일 아닌가. 삼위일체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시다.

Posted by 장준식

[기후교회로 가는 길]

 

3. 목표의 재설정이 필요한 교회

 

CO2.Earth에 보면 대기중 탄소 농도 수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즘 탄소 농도는 415 ppm 근처를 맴도는 듯합니다. 요즘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주식 시세 확인하는 데는 시간을 쓰지만, 탄소 농도 확인하는 데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짐 안탈 목사는 『기후교회』에서 아주 재미난 말을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주소에 살고 있는데, 그 주소는 407번지라고 합니다. 책을 쓸 당시 지구의 탄소 농도는 407 ppm이었던 듯합니다. 책이 출간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탄소 농도가 조금 더 올라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같은 주소에 살고 있습니다. 탄소 농도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의 주소를 가리킵니다. 매우 재미 있는, 그리고 의미 있는 상상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떠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제시해 주는 선지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구약의 예언서는 우리에게 좋은 지침서가 됩니다. 이사야서나 다니엘서 같은 대선지서와 아모스와 말라기 같은 소선지서를 보면,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당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피력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목표를 설정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합니다. 목표 설정을 잘한 공동체는 살아남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공동체는 멸망 당할 것이라는, 다소 단순해 보이는 메시지가 전해집니다.

 

메시지의 선포는 단순하지만, 그것을 수용하고 따르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의 메시지 선포가 현재 우리들에게 표면적으로 다가와서 그렇지, 그 당시 사람들은 살아가느라 삶에 묻혀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파악을 하지 못했으니까요.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경험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삶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모를 뿐더러, 설사 알고 있다 하더라도 삶의 방식을 바꾸거나 목표를 재설정하는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생활방식을 바꾸는 일은 하루 아침에 되지 않을 뿐더러, 많은 에너지가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흐르고, 시대는 바뀝니다. 그러면서 인류가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도 바뀝니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때그때 마다 인류가 맞닥뜨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헌신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발견합니다. 6세기의 베네딕트(Benedict)회 수도사들은 로마제국의 붕괴와 더불어 유럽의 경작지들과 숲이 파괴된 사실에 초점을 맞춰, 숲에 나무를 다시 심고 물이 흐르는 길을 새로 내고 개울과 연못을 만들어내고 퇴비거름을 개발하여 소개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들은 땅과 물의 회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신앙의 실천이자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고 믿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나치 정권에 맞서 ‘고백교회의 비상 교육 신학교’(핑켄발데/Finkenwalde)를 세워, 나치 정권이 하는 일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하고 저항하는” 그리스도인과, “영적인 훈련, 희생, 그리고 확장된 도덕적 상상력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방식의 기독교인”을 양성하고자 했습니다. (기후교회, 112쪽)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에 맞는 목표를 재설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짐 안탈 목사는 묻습니다. “교회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한때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제공해주었던 필요들을 이제는 사람들이 다른 방법들을 통해 성취하는 길을 찾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만 보더라도, 선교 초기에 사람들은 교회가 제공하는 교육이나 복지를 제공받으려고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러나 교육기관이 발달되고 복지사회가 되면서 이제 교육과 복지를 위해서 교회를 찾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민교회의 상황도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예전에 이민자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 한국 음식이나 문화에 대한 그리움 등을 달래기 위해서, 그리고 정보를 얻기 위해서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보통신과 교통수단의 발달, 그리고 경제적 풍요로 인하여 그러한 것들은 직접 해결 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즘엔 시간이 없어서 한국에 못 가지 돈이 없어서 못 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수많은 위기를 맞닥뜨리고 있는 이 시대에, 교회가 목표를 재설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요청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이것은 도덕적인 신앙의 결단입니다. 교회는 어떻게 목표를 재설정해야 할까요? 짐 안탈 목사는 교회의 목표 재설정을 위해서 미국인과 미국교회를 비판적으로 돌아보고 있는데, 그 비판은 한국인과 한국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한국 사회는 너무도 미국 사회와 닮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미국인 정서의 가장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는 엄격한 개인주의입니다. 그렇다 보니, 미국 교회는 그 정서에 부응하여 오랫동안 개인구원에 집중하는 ‘복음’을 전해왔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가 가진 특징입니다.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60, 70년대에 미국의 복음주의를 배워온 한국 목회자들에 의해서 한국교회도 미국교회처럼 개인구원에 대한 복음을 대중화시켰습니다. 이는 경제성장과 더불어 점차 개인화되어 가는 한국인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기후위기를 통해서 인간이 살아가려면 인간만 잘 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머지 피조물과도 상호의존 가운데 있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습니다. 기후위기가 교회에 주는 교훈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인간의 영혼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그동안의 신앙 행태는 잘못된 것이고, 모든 만물에 대한 구원으로 구원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이 시대의 신앙의 과제가 된 것입니다. 즉, 인간 중심의 구원론에서 하나님 중심의 구원론, 또는 종말론적 구원론으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는 구원을 말할 때 인간 개인의 구원만을 더 이상 말할 수 없고, 총체적인 구원(holistic salvation)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구의 구원 없이 인간의 구원은 없다’라는 말로 바꾸어 쓸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우리는 ‘황금률 2.0’에 대하여 반드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짐 안탈 목사는 말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부르심을 받았고, 또한 이 새로운 지구 위에서, 우리는 미래의 세대들이 오늘 바로 이웃집에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웃임을 인정해야 한다”(기후교회, 126쪽). 이 황금률은 기후변화에 맞선 청소년들의 단체 “우리 어린이들의 신뢰(Our Children’s Trust)의 활동을 통해서 부각됩니다. 이 단체의 청소년들은 지난 2015년, 미국 연방 정부를 상대로 다음과 같은 소송을 걸었습니다. “미국이 기후변화 때문에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권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하지 못한 것은 헌법을 위반한 것이다!” 황금률 2.0은 지금 현재 동시대에 존재하는 사람들만 우리들의 이웃이 아니라, 앞으로 올 세대(generation to come)도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기후변화에 도덕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 시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기후변화로 인하여 극심하게 겪게 될 당면한 사회적 문제들을 앞에 놓아두고, 교회가 목표를 재설정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목표를 재설정해야 하는 지도 분명해 보입니다. 이 주제에 대하여 우리 시대의 선지자 역할을 하고 있는 토마스 배리(Thomas Berry)나 래리 라스무쎈(Larry Rasmussen) 같은 신학자들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산업 공학기술 시대에서 생태 시대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특별히, 라스무쎈은 지난 170년간 땅에 근거한 경제로부터 자연을 착취하며 자연이 유기체적으로 신생을 못하게 만드는 산업경제로 체제가 이동하는 동안 교회는 이에 저항하지 못하고 목줄에 매인 듯 개처럼 질질 끌려왔다고 비판합니다. 기후위기 시대를 맞아, 더 이상 교회는 개처럼 질질 끌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교회는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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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훈맹정음]

 

"눈이 사람의 모든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영혼이니 시각장애인들이 배움을 포기하지 않도록 교육에 힘써달라."

ㅡ 훈맹정음 창시자 송암 박두성 선생의 유훈.

 

1926년 11월 4일, 송암 박두성 선생은 훈맹정음을 만들어 시각장애인들의 교육에 힘썼다. 일제 시대, 선생은 시각장애인들이 일본어로 된 점자를 통해서 왜곡된 역사를 배우고 있는 교육 현장에 통탄하여 한글로 된 점자를 만들어 보급했다.

 

송암 선생은 강화도 출생이다. 강화도 출신 중 훌륭한 분들이 많다. (은퇴하면 강화도 가서 살아야 하나. 귀향인가?^^)

 

송암 선생은 1931년 성서 점역에 착수하여, 1957년 신구약 모두 점역을 완성했다. 점자 성경 최신판은 대한성서공회에서 2001년에 출간한 개역개정 판이 있다. 점자 공동번역성서도 있다(1979년). 

 

이미지 정치가 판을 치는 요즘,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성경과 세상을 읽는 방법을 더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눈으로 성경을 읽고 세상을 읽었다가는, 이미지 정치의 술수에 넘어가 '개끌려가듯' 끌려다니기 쉬운 세상이다.

 

눈 버리기 쉬운 세상, 눈으로 보는 것에 실망하고 절망해서 배움이나 저항을 포기하지 말고, 영혼이 중요한 것이니 정신 바짝 차리고 더 열심히 공부하고 저항할 일이다.

 

송암 선생처럼 창조적으로 저항하는 일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평범한 사람들의 창조적 저항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반려견과 동물신학과 리추얼]

 

우리 교회 집사님네는 키우던 반려견을 안락사로 떠나 보냈다. 17년 간 한 가족처럼 지내던 반려견을 안락사로 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안락사 예약을 몇 번이나 취소하고, 또 취소했다. 그러다 사고와 노화로 인해 이제는 몸을 가누는 게 힘들고, 밤마다 아파서 울어대는 반려견을 살게 놓아두는 것은 집사님네나 반려견에게 더이상 좋은 일이 아니어서 결심을 했다.

 

반려견 해리(Harry)를 안락사 시키기로 한 날 아침, 우리는 집에 모여 함께 리추얼을 했다. 나는 예식서와 오일과 십자가를 준비했다. 우리는 헐떡이며 누워 있는 해리 곁으로 갔다. 눈을 뜨지 못하고 숨만 헐떡이는 해리 곁에서 해리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의식을 시작했다. 나는 예식사를 낭독했다.

 

"우리는 해리를 떠나 보내면서 해리를 주님 손에 맡기기 위하여 이 예식을 행합니다. 해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이제 해리는 하나님 품으로 되돌아 갑니다. 이제 해리를 떠나 보내지만,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해리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찬송가를 불렀다. "그 큰 일을 행하신 주께 영광!" 찬송가를 부른 후, 나는 주님께 기도하며 반려견을 떠나 보내는 가족들을 위로했다.

 

말씀은 이사야 11장 1-9절을 봉독했다. "하나님의 새창조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될 해리를 기억하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말씀의 요지는 이사야가 전하고 있는 종말론적 비전 안에서 우리가 갖을 수 있는 소망에 대한 이야기였다. 특별히, 그동안 해리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기억하면서, 해리가 가족들로부터 받은 은총과 해리를 통해서 가족들이 받은 은총을 기억해 보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은총을 주고 받은 사이이기 때문에, 해리와 가족들은 주님이 베풀어 주신 은총 안에서 영원히 하나가 될 것이고, 결국 이사야가 전하고 있는 종말론적 비전이 완성되는 날,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말씀을 전하고, 나는 마지막 떠나는 해리에게 오일을 바르며 축복해 주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는 해리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또한 해리를 떠나 보내면서 마음 아프지만 해리와 소중한 추억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새창조의 때에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는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오일을 한 번 바르고)성부와 (오일을 한 번 바르고)성자와 (오일을 한 번 바르고)성령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해리를 주님 품에 맡기노라."

 

해리를 주님 품에 맡기고 우리는 기도문을 함께 낭독했다. 이 기도문은 동물신학자 앤드류 린지가 쓴 것이다. 그 기도문에 해리의 이름을 넣어서, 모두 함께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낭독했다.

 

"순례자 하나님

우리와 함께 여행하시는 분

이 세계의 기쁨과 그림자들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슬픔 안에서

우리의 고통을 어루만지소서.

비통함 없이

희망을 가지고

죽음의 신비를 받아들이도록 도우소서.

이 세계의 그림자들 가운데서

삶의 혼란과 죽음의 공포의 한복판에서

당신은 우리 곁에 서 계시며

항상 축복하시고, 늘 두 팔 벌려 안아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압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며

당신께 돌아간다는 것을.

우리가 이 신비를 깊이 생각할 때

당신께서 해리에게 생명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해리를 당신의 사랑의 손에 맡깁니다.

온유하신 하나님

당신의 세계는 깨지기 쉽고,

당신의 피조물은 섬세하며,

우리 모두를 낳으시고 구원하시는 당신의 사랑은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아멘."

 

우리는 기도문을 함께 낭독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해리를 사랑의 손길로 쓰다듬어 주라고 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헐떡 거리는 해리의 머리와 배와 등과 다리 등을 가족들은 따스한 손길로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모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마지막으로 축도를 했다. 이렇게 해리는 주님 품에 맡겨졌다.

 

해리는 그날, 오후 5시 가족들과 함께 병원에 가서 안락사했다. 그리고 화장터로 보내져 2주 후면 한 줌의 재로 가족들 품에 안긴다.

 

한국보다 미국은 반려견 문화가 오래됐다. 지난 20년 간 미국에서 살면서, 그리고 목회하면서 적응하기 힘든 문화 중 하나가 반려견 문화였다. 어릴 때 개를 키우긴 했지만 그때는 반려견 개념이 었었다. 옛날에 개는 집 밖에서만 키우던, 그야말로 그냥 '동물'이었지, 애완견 또는 반려견의 개념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변했다. 미국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리고 한국도 이제는 반려견(동물) 문화가 아주 깊어졌다.

 

반려견(동물) 문화가 오랜된 서구사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동물신학이 발전했다.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개념이지만, 서구사회는 동물신학을 바탕으로 동물의 권리가 많이 발전되어 있다. 동물신학의 관점에서 동물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권리를 지닌 존재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반려견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아주 큰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냥 동물 한 마리가 죽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 중 한 존재를 잃은 것 같은 슬픔이 닥치기 때문이다.

 

반려견을 떠나보내는 예식을 준비하면서 아직까지 반려견의 죽음에 대한 기독교 리추얼이 많이 발전되지 못한 것을 본다. 특별히 한국 교회에서 반려견을 위한 리추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내 나름대로 동물신학을 바탕으로 리추얼을 구성해 보았다. 리추얼이 제대로 구성되려면 의식과 언어가 잘 정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반려견(동물)에 대한 사랑과 감사, 또는 존중에 대한 언어가 매우 빈약한 것을 본다. 함께 지내던 반려견의 죽음을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개죽음?" 이처럼, 마땅한 말이 없다.

 

문화는 하루 아침에 유통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수고가 담겨 있어야 한다. 반려견(동물)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부과된 숙제는 단순히 반려견을 심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랑을 담은 리추얼과 언어를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리추얼과 언어가 대중적으로 유통되도록 힘쓰는 일에도 반드시 힘을 써야 한다. 그래야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해서, 죽으면 마음이 찢기듯 아픈 나의 반려견(동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들의 죽음 앞에서 내가 흘리는 눈물이 우습지 않아지는 것이다.

 

나는 반려견(동물)을 키우지 않지만, 목회자로서 반려견을 잃은 교우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보듬어주려 노력한다. 동물신학이 주장하는 바, 나는 모든 동물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축복권을 지닌 존재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는 것은 목사의 마땅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 10월 22일 토요일 오전 8시 30분에 있었던 해리를 떠나 보내며 가졌던 리추얼과 그날 세상을 떠난 해리를 기억하며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