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몰락과 인권의 종말]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실존한다는 '상상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는 마치 화폐라는 존재 자체가 실존한다는 상상을 하며 화폐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화폐를 손에 넣기 위해서 생명을 소진하는 일과 같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존재할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해 보면, 그런 것 같지 않다. 인권이 너무도 많이 짓밟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결코 인간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보라. 인간에게 인권이 있는가.

 

우리는 그저 상상 세계에서만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상상'할 뿐이다. 그 상상력을 깨는 무수한 요인들이 존재하므로, 우리는 쉽게 상상세계에서 이탈한다. 그래서 어떠한 존재는 다른 존재에게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너는 나의 세상에서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는 나에게 인간대접(인권)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말이 설정되고 나면, 인권은 없고 폭력만 난무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국민국가의 몰락과 인권의 종말>이라는 글에서 국민국가의 쇠퇴는 필연적으로 인권의 위축을 함축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국민국가의 몰락(민주주의의 몰락)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다. 국가가 몰락하고 있으니, 인권이 묘연하다. 인권이 위축되고 있으니, 탄식소리만 들려온다.

 

우리는 시리아 난민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마음 아파한다. 지중해를 건너다 배가 파산되어 목숨을 잃은 수많은 난민들에 관한 소식. 선택할 여지도 없이 희생되는 아이들의 모습. 그러나, 그 난민에 대한 소식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강 건너 불구경'인지 모른다. 뉴스를 보면서 안타까워 하지만, 그러한 일이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마음을 떠받치고 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민국은 난민의 위험성을 가장 많이 품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이다. 전쟁에 휩싸이거나 경제적 몰락을 경험하게 되면, 한국인은 난민이 되어 황해를 건너다, 현해탄을 건너다, 태평양을 건너다, 지중해를 건너다 희생당한 시리아 난민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국민국가의 몰락(민주주의의 몰락)은 이러한 비극을 잉태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몰락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거나, 민주주의의 몰락의 위험성을 전혀 모르며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살고 있다는 착각이 삶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민주주의가 위기를 겪고 몰락하고 있어 인권(생명)이 위협 받고 있는데도, 엔터테인먼트만 즐기고 있다.  거리는 한산하고 공연장은 붐빈다.

 

위기를 감지 못하면, 곧 닥칠 재앙의 비참한 희생자가 되고 만다.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 비상경보기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 듯하다.

Posted by 장준식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와 지옥으로서의 모더니티]

 

이것은 발터 벤야민의 사유이다.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지구 역사에 나타난 가장 강력한 종교로 파악한다. "자본주의는 제의로만 이루어진, 교리도 없는 종교"이다. 자본주의는 '걱정'을 보편화한다. 걱정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지닌 보편적인 병리현상이다. 이 종교(자본주의)는 신학도 없고 은총도 없는 무자비한 종교로서 종국에는 신까지도 죄(부채)에 끌어들인다. 

 

자본주의는 독자적으로 탄생한 종교가 아니다. 막스 베버처럼 벤야민도 자본주의는 기독교에서 기생적으로 발전된, 기독교 신앙의 환속화(세속화)된 종교라고 말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지만, 벤야민은 더 날카롭게 말한다. "신은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 속에 편입되었다."

 

벤야민은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와 함께 지옥으로서의 모더니티를 말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 모더니티, 현대 시대는 지옥이다. 왜 지옥인가? 벤야민은 이렇게 진단한다. "문제는 세계의 모습은 가장 새로운 것에서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점, 가장 새로운 것이 항상 동일한 것으로 머문다는 점이다. 이것이 지옥의 영원성을 구성한다."

 

자본주의와 모더니티. 종교와 지옥. 이러한 체제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모든 종교는 자본주의라는 종교 안으로 포획될 수밖에 없고, 뭔가 아무리 새로운 것을 말하고 꿈꾼다고 해도 항상 동일한 것에 머무는, 시지프스 같은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리 새로운 것을 말해도, 아무리 새로운 것을 행하여도 금방 진부하고 지루해지고 만다. 존재가 종교(자본)과 지옥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는 기독교적인 자본주의일 뿐이다. 복음주의가 가진 신학의 부재, 그리고 모든 것을 죄(부채)로 빨아들여 죄의식/부채의식을 갖게 만들어, 열심을 조장해 부채(죄)를 갚게 만드는 메커니즘, 그리고 대속의 희망(부채를 갚을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 넣어,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 복음주의가 기독교적 자본주의일 뿐이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신학적 과제는 너무도 자명하다. 종교로서의 자본주의와 지옥으로서의 모더니티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어떻게 자본주의와 지옥에 포획된 기독교가 그 결박을 풀고 나올 수 있을 것인가. 기독교는 어떠한 미래를 제시할 것인가.

 

벤야민을 인용한 아감벤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하여 속죄가 아니라 죄로, 희망이 아니라 절망으로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는 세계의 변혁이 아니라 세계의 파괴를 목표로 한다." 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계속 파멸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문장이다. 자본주의와 지옥이 이 세상의 체제를 이루고 있는 한, 우리의 운명은 필경 파멸이 될 수밖에 없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예루살렘이 파괴될 것을 예견하시며 슬피 우시던 예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19세기에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했고, 20세기에 푸코는 인간의 사라짐(이성의 죽음/주체의 죽음)을 선언했다. 신이 사라지고 인간이 사라진 이 세상에 들어와 왕 노릇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지옥(모더니티). 그 어느때보다 신의 귀환과 인간의 귀환이 절실한 시대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손을 맞잡으시고 함께 귀환하는 시대를 꿈꿔본다. 신과 인간의 귀환. 그것은 온전한 신이시며, 온전한 인간이신, 메시아의 귀환이기도 할 것이다.

 

발터 벤야민,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조르조 아감벤, <세속화 예찬>

Posted by 장준식

삼위일체와 우리의 미래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의 신앙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점은 신론입니다. 기독교 신론은 유일신(monotheism)도 아니고, 다신론(polytheism)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론은 삼위일체론(Trinity)입니다. 기독교 신론을 까닥 잘못 해석하면, 유일신론에 빠지거나 삼신론(다신론)에 빠질 수 있습니다. 4세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서 삼위일체론이 확립되기 전까지, 300여년 동안 기독교는 유일신론도 아니고 삼신론도 아닌, 삼위일체론을 증언하기 위해서 무한한 노력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론을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삼위일체론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은 용어인데, 이후의 신학자들이 철학적/신학적 사유를 통해서 만들어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오해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세워 나간 교부들이나 신학자들,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는 삼위일체론을 발명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가 삼위일체론을 말하는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 경험이 삼위일체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만큼, 보여주시는 것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계시’(revelation)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경험한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사건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삼위일체로 드러낸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유일신론도 아니고 다신론도 아닌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서와 바울 서신은 삼위일체 신앙 고백의 교과서입니다.)

 

삼위일체를 말할 때 기독교인들조차도 헷갈려 하는 것은 이것이 ‘수학놀이’인줄 안다는 것입니다. 1+1+1=1. 이렇게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쉽게, 삼위일체론은 비합리적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1+1+1이 1이 될 수 있냐고 말이죠. 1+1+1=3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요. 이것은 삼위일체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용어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고, 삼위일체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삼위일체는 수학이 아니라 교제(fellowship/relationship)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삼위일체는 신적 교제입니다. 그리고 피조물(창조세계)과의 교제입니다. 삼위일체가 품고 있는 근본적인 교제(fellowship)의 의미를 담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인 용어는 ‘perichoresis (페리코레시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어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실한 교부들이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을 포착하여 표현한 언어가 ‘페리코레시스’입니다. 페리코레시스의 뜻은 ‘빙글빙글 돌면서 춤춘다’는 뜻입니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강강술래’가 딱 페리코레시스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강강술래 춤을 추듯이, 손에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춤 추는 것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정말 흥겹고 기쁘고 생명력이 넘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페리코레시스의 모습으로 존재하시고, 우리에게 그러한 모습을 계시해 주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고 살아갈 힘입니다. 슬픈 일을 당했거든 그 슬픔 때문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망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가 가장 낮아지는 순간은 실패했을 때, 병들었을 때, 육신이 약해졌을 때, 그리고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등입니다. 사랑과 생명이 적을 때 우리는 힘들어합니다. 그런 슬픔 가운데 처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죄책감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당당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페리코레시스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미래가 어디에 달려 있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저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알고 사랑하고 경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페리코레시스이시구나. 강강술래이시구나. 저렇게 사랑과 기쁨이 넘치시구나. 저렇게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보듬어 안으시며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는구나. 이것을 알고, 그분의 부르심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공동체의 미래와 우리 개인의 삶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누구도 ‘강강술래의 기쁨과 생명력’(페리코레시스)으로부터 소외되는 존재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더 사랑하세요!

Posted by 장준식

[삼위일체 주일을 보내며]

 

삼위일체 주일(Trinity Sunday)입니다. 기독교가 시작된 지 벌써 2천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가 정립된 지도 1700년이나 지났습니다. 이렇게 어머어마한 시간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낯설어 합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가장 큰 이유는 독특한 신관(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 신관입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정말 놀라운 신관입니다. 한 하나님을 세 위격의 관계로 파악하는데, 그것에 대한 사유가 깊고 신비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집요하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쉽게 다른 종교, 또는 다른 사상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의 독특한 하나님 사유를 잘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기독교가 시작된 지 벌써 2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낯설어 합니다.

 

삼위일체 주일을 맞아 예배를 구성하면서 삼위일체 주일에 부르는 찬송가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각각에 대한 예배 찬송을 찾아볼 수 있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예배 찬송은 없었습니다. 그만큼 아직도 우리의 일상 신앙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사유가 별로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장 시급한 일 중 하나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예배 찬송을 만들어 보급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가톨릭으로부터 종교개혁을 해서 개신교를 따로 분리하여 처음으로 한 일은 예배 의식을 바꾼 것입니다. 예배는 신앙의 일상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그 예배 안에서 무엇을 고백하고 무슨 예식을 행하느냐가 곧 우리의 신앙생활을 규정해 줍니다. 예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고백되지 않고, 고백할 수 있는 찬송이나 기도문, 또는 다른 예식이 없으면, 우리는 그만큼 삼위일체 하나님과 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죠.

 

기독교에서 삼위일체 신학을 정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런 신앙 고백을 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는 ‘고난과 죽음과 하강과 부활’을 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우리는 고백하고 신앙합니다. 바로 이러한 신앙고백은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Godhead/신적인 존재)’에게만 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만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예배를 하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에 예배하는 행위만큼 헛된 행위가 없고, 자신이 하나님이 아닌데 예배 받으려고 하는 행위만큼 악한 행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예배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둘 중 하나의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가 하나님(Godhead)이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우상숭배자이거나. 그러나 우리가 고백하다시피, 그리스도인은 우상숭배자가 아니라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온 교리가 삼위일체 신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학을 말할 때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는 신학은 사변적으로 고안된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는 이런 게 없는데 무슨 사상을 만들어 내듯이 창작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아주 큰 오해이고 불경한 말입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부를 비롯해서 현대의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고백’이지 ‘창작’이 아닌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이 창조해낸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삼위일체로 계시하셨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신이 보여주시는 대로 그것에 대해서 정직하게 고백을 할 뿐이지, 뭔가를 꾸며내는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삼위일체로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보여주시는 대로 고백을 할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적 사고를 방해하고 왜곡해온 것은 유대교의 유일신론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바탕으로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제시한 일자(一者) 신관입니다. 이러한 신관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관을 가부장적으로 이해하게 하거나 종속론적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가부장적인 신관은 존재에 위계를 만들고, 종속론적인 신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열등한 것을 만듭니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삼위일체론은 성부, 성자, 성령의 용어가 왜 사용됐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신적인 본질을 성부와 성자가 공유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지, 아들이 아버지에게 종속되고, 아들이 아버지보다 열등한 지위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전혀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골치 아픈 수학 놀이가 아닙니다. 1+1+1=1이라는 괴상한 방정식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숫자 놀음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것이고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무한한 신적인 존재가 이 땅 위에 있는 유한한 존재와 어떠한 식으로 관계(fellowship)를 맺고, 어떠한 식으로 구원을 베풀고, 어떠한 식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지에 대한 풍성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신실한 신학자들은 한 입으로 말합니다. 현재 기독교가 이렇게 쇠퇴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삼위일체 신론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유와 신앙은 그만큼 기독교의 존폐를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독교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가 함께 한 마음으로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열심히 탐구하고 고백하고 신앙하겠다’고 말이죠. 바로 이러한 다짐에 기독교 신앙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을 가슴 깊이, 진지하게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도마복음/영지주의문서]

 

'도마복음 연구회 창립'이 있는 이 때에, 나도 그냥 한 마디 보태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부족한 글이지만 그냥 편하게 읽어주시면 좋겠다.)

 

유학의 가장 큰 장점은 견문을 넑힐 수 있다는 것이겠다. 나도 유학을 나오기 전까지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유학 나와서 알았다. 에모리에서 공부하면서 방대한 신학연구물에 놀라서 압도당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내가 키에르케고르를 정말 좋아했는데, 미국에 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키에르케고르 연구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되어 있었다. 내가 이 틈에서 무슨 학문적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엄청 고민을 하면서 키에르케고르 전공에 대한 꿈을 접은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은 약간 후회한다. 그냥 키에르케고르 전공자로 나갔으면 지금쯤 내 삶은 또 다른 궤도를 달리고 있을 지 모르겠다. 아마튼, 나는 여전히 키에르케고르를 좋아한다.

 

'나그함마디(The Nag Hammadi Library)' 문서에 대해서 '한 마디'도 들어보지 못한 내가,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유학을 나와서이다. 그리고 조금씩 나그함마디 문서를 들여다보았고, 영지주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나그함마디 문서와 영지주의에 대해서 이해를 높이게 된 것은 일레인 페이절스(Elaine Pagels)의 책을 읽으면서부터였다. 그 시기가 2009년도,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이다.

 

사해사본과 나그함마디 문서는 비슷한 시기에 발견되었다. 에모리 유학 시절 내 지도 교수였던 캐롤 뉴섬(Carol Newsom)은 사해사본 중 지혜문헌을 연구한 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비슷한 시기에 발견된 두 문서는 비슷한 시기의 학자들을 통해 동시에 연구되었다. 물론 정통 기독교에서는 사해사본의 가치를 더 높게 보고,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나그함마디 문서를 들여다본 사람은 그 문서가 가지고 있는 '놀라움'에 대해 무시할 수 없었다. 일레인 페이절스는 나그함마디 문서 전문가로서 프린스턴 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을 했고, 영지주의를 positive하게 해석하여 소개한 학자로 유명하다. 나는 페이절스 교수의 <The Gnostic Gosples>을 읽으며, 영지주의에 한 빗장을 풀 수 있었다.

 

한국에 도마복음/영지주의/나그함마디 문서를 대중들에게 소개한 사람은 도올 김용옥이다. 그분이 하버드에서 공부할 때, 하버드에서는 사해문서와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한 연구가 붐을 이루었다. 위에서 언급한 캐롤 뉴섬이나 일레인 페이절스도 모두 하버드 출신 박사들이다. 그리고 나이 때도 비슷하다. (페이절스가 가장 선배다.)

 

14년 전부터 영지주의 문서를 읽었고 관심을 두었지만, 사실, 함께 이야기 나누며 생각을 전개시켜 나갈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주변에 영지주의 문서를 읽은 목사 동료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성경 읽고 연구하기도 바쁜데, 정통에 의해 정죄 당한 영지주의 문서를 읽는 일은 awkward 한거다.) 그래서 혼자 읽고, 글을 조금 쓰고 했다. 물론 아무도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한 번은 애틀란타에 김세윤 교수가 와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영지주의 문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세윤 교수의 강연장에 가서 강연을 들으며 마침 김세윤 교수가 옆자리에 앉아 계셔서 영지주의 문서에 대해서 질문한 적이 있다. 그때 단칼에 거절을 당했다. "목회자들이 영지주의 문서에 관심을 둘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가 바울신학의 권위자로서, 당연히 그렇게 이야기할 수 밖에없었겠지만, 김세윤 교수와 영지주의 문서에 대해서 대화를 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정통 기독교 라인에 있는 신학자들을 읽었고, 나름대로 신학에 대한 전반적인 지성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영지주의 문서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영지주의 기독교가 왜 정통 기독교에게 밀려나게 되었는지를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아주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지주의 기독교가 정통 기독교에게 정치적으로 밀려났다고 하는 것이다. 페이절스 교수의 책을 보면 그러한 정황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실제로 영지주의 기독교와 정통 기독교 간의 치열한 정치 싸움이 있었다. 특별히 영지주의 기독교 집단은 사도권과 교권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그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계속 강조했다. 게다가 정통 기독교는 대리인(사도, 사제)을 통해 하나님께 다가설 수 있지만, 영지주의자들은 직접 하나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정치 싸움이 심했다.

 

정통 기독교라고 자부하는 교회들이 너무 개판을 치고 있는 요즘, 얼마나 교회의 현실이 답답하면 영지주의 문서가 틈새를 파고 들고, 영지주의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어필을 하는 시절이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프다. 정통 기독교에 속한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엄청나게 반성해야 할 지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은 정통 기독교와 영지주의 기독교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무엇인가에 있다. 4세기까지 정통 기독교가 무엇인지 결정이 나지 않았다. 삼위일체론(기독교의 독특한 신론)의 정립도 되지 않았고, 성서(정경)도 정립되지 않았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있기 전까지 기독교에 '정통(Orthodoxy)'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진리를 위한 싸움이 치열했다. 그러나 비로소 예수 사건이 있은 지, 300년이 지나, 정통과 이단(정통의 가르침을 벗어난)을 가르는 기준이 생겼다.

 

그 기준은 이것이었다. "하나님의 의인가 아니면 사람의 의인가." 이것은 단순히 믿음인가 행위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정통 신학은 인간이 구원에 기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구원을 맡긴다. 그러나 영지주의 신학은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맡기지 않고 인간의 선함에 주목한다. 이것은 단순히 성악설, 성선설의 문제이거나 전적타락과 부분타락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인데,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고 인간의 기여를 말하는 순간, 사람 사이에 배제와 차별과 혐오가 발생하고 만다. 다시 말해, 영지주의 기독교는 도덕(지혜)을 말하고, 정통 기독교는 사랑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왜 요즘, 영지주의 문서(기독교)나 수도원 운동 같은 것에 대한 논의가 일고, 사람들이 왜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정통 기독교의 도덕이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이 바닥을 치니, 기독교 역사에서 도덕을 중요시했던 운동들이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내가 우려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영지주의 기독교나 수도원 운동은 엘리티즘(elitism)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하나님과 직접적인 합일을 이루고, 속세를 떠나서 도덕적으로 깨끗한 신앙운동을 하는 일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영지주의 기독교나 수도원 운동이 주류(mainstream)로 자리 잡지 못한 까닭이 분명히 있다. 도덕적인 기독교는 엘리티즘을 향하고, 결국은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고 혐오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신앙이 오히려 사람을 향한 차별과 배제와 혐오를 불러온다면, 이것은 구원이 저주가 될 수밖에 없다.

 

도덕은 굉장히 중요하다. 체제와 운동을 지속시키는 가장 큰 내적인 힘 중 하나이다. 요즘 기독교가 무너지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라고 하는 체제 내에 '도덕이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도덕을 중요시하는 기독교 신앙 운동(영지주의, 수도원 운동)이 치고 들어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지주의나 수도원 운동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거기까지다. 도덕을 바로 세우는 것. 하지만 인간이 구원에 다다를 수는 없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이 점을 겸허하게 인정하면서 영지주의 문서나 수도원 운동을 해 나갈 필요가 있다. 지혜와 은혜는 종이장 한 장 차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로 구원에 이르는 게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다. 정통 기독교가 지금은 개판을 치고 있지만, 구원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겸손이 있기 때문에 정통으로 불리는 것이다.

 

어떠한 약초는 독이 될 수 있고 약이 될 수 있다. 돌파가 그 약초를 쓰냐 아니면 명의가 그 약초를 쓰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온다. 영지주의 문서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신앙에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 연구를 충분히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에 오히려 혼란을 가져오는 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여러가지로 힘든 이 시절에, 명의들이 영지주의 약초를 잘 쓴다면 기독교의 아픈 상처를 회복시키는 데 긴요하게 쓰일 것이다.

 

도마복음 연구회가 명의의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Posted by 장준식

[신자유주의 체제의 악마성]

 

"금융 시장은 연금 연령 인상, 급여 축소, 노동 유연성 향상을 요구한다. 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지배한다."

(<탈성장>, 69쪽)

 

'연금 연령 인상'은 인간을 부려먹을 수 있을 때까지 부려먹겠다는 뜻이고, '급여 축소'는 노동력의 가치를 평가절하시키겠다는 뜻이고, '노동 유연성 향상'은 노동자를 노예 취급하겠다는 뜻이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이처럼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체제다. 

 

신자유주의 체제를 수용한 요즘 국가가 악마인 것은 금융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의 보이는 손으로 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최고의 우상숭배자인 것이다. 요즘 정부가 하는 일은 연금 연령 인상, 급여 축소, 노동 유연성 향상을 위한 일들뿐이다.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한 대승적 결단이라는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이고 있지만, 한 마디로, 악마 짓이다. 인간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고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노동 시간의 단축이다. "시민의 자치 활동을 이루려면, 그만큼 많은 휴식처가 필요하고, 토론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도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탈성장>, 83쪽).

 

노동에 시달린 현대인은 무기력과 무관심에 빠져 있다. 이것은 세상을 바꾸어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기득권 세력들의 기획이다. 이러한 악마적 기획들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말하지 않고 '복음'을 말할 수 없다. 이런 것을 외면하면서 복음만을 외치는 자는 '보이지 않는 손'에 봉사하는, 또 하나의 우상숭배자에 불과하다.

Posted by 장준식

[문명의 바깥으로]

 

이번 한국 방문 중 신촌에 가서 연세대와 홍익문고를 들렀다. 학교 구경 잘 하고, 교내 식당에서 밥 잘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예전 학교 다닐 때 습관처럼, 홍익문고에 들러 책 한권을 샀다. 나희덕 시론집 <문명의 바깥으로>.

 

예전 학교 다닐 때 습관처럼, 지하철에서 책을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서문을 읽고, 첫번째 챕터를 읽었다. 내가 요즘 깊은 관심을 갖고 교회 식구들과 공부하고 있는 '기후변화'에 대한 주제였다. 제목은 '자본세에 시인들의 몸은 어떻게 저항하는가'. 도나 해러웨이에 대한 언급을 시작으로, 백무산, 허수경, 그리고 김혜순의 시를 분석한 글이다. 그리고 다시 도나 해러웨이를 언급하며 글을 맺는다. 마지막 부분을 직접 옮겨본다.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해러웨이는 자본세의 파괴가 극심한 지구 곳곳에서 그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창의적 공동체들을 '퇴비 공동체'라고 불렀다... 따라서 만물과 '살'을 공유함으로써 그들과 함께하는 '시쓰기'는 일종의 '친척 만들기' '퇴비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 심보선의 말을 빌리면, "시란 시인의 고뇌에서 탄생하여 나아가는 수직적인 이행이 아니라, 하나의 몸에서 또다른 몸으로 나아가는 평면적 확장"이다. 그는 수평적 이행과 새로운 고동체의 탄생을 위해 모든 형태의 이분법과 위계를 부정하고 낯선 타자들과 함께하는 것, 이러한 저항과 창조는 생태적인 동시에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37쪽).

 

인류세/자본세를 맞아, 시인의 시쓰기는 일종의 '친척 만들기' '퇴비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는 나희덕의 말은 희망적이다. 시인들만이라도 저항과 창조에 적극적이면 숨통이 트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시인들만의 저항과 창조만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게 참 어려운 시절인 듯하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대가 파괴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고 피난처를 복구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관심이 없다기 보다, 정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책의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이, 문명의 바깥으로 향하는 것은 저항과 창조의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문명에 갇혀 있는 듯하다. 문명의 바깥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산다. 문명의 바깥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는 마치, 애굽에서 400 여년동안 살던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는 일과 같다. 그들은 문명국인 애굽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발터 벤야민이 사유했듯이, 우리 시대는 또다시, 아니 더 절실하게 '메시아적 사유'가 필요하다. 문명의 바깥으로 우리를 데리고 나갈 메시아가 필요하다. '시쓰기'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에게 시적 상상력이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메시아가 될 수 없으니, 메시아가 도래하는 강력한 상상력이라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 메시아를 상상하는 일은 또한 생태적인 동시에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Posted by 장준식

인사만 잘해도 좋은 그리스도인이다

 

로마서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로마서를 바울의 교리서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한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저명한 신약 학자 스캇 맥나이트는 로마서를 거꾸로 읽어보라고 제안합니다. 이것은 로마서를 1장에서부터 읽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의 마지막 장인 16장부터 읽는 방식입니다. 로마서 16장을 먼저 읽으면, 우리는 로마서에서 ‘교리’를 먼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먼저 만납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라”(롬 16:1).

 

뵈뵈를 로마교회에 소개하는 문구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로마서 16장의 내용은 온통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바울은 ‘문안하라’라는 말을 합니다. 지금 바울은 인사 중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인사하는 중입니다. 우리는 인사하는 일을 별거 아닌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사’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긴 공간을 할애하여 인사를 나누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 교회에 바울이 편지를 써서 보낸 이유이기도 합니다.

          

로마교회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는 자라온 환경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두 부류는 한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많은 갈등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갈등이 깊어지면 서로 간에 가장 먼저 끊기는 것이 ‘인사’입니다. 인사는 단순히 안부를 묻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자신들의 삶에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인사를 안 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자신들의 삶에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6장에 열거되고 있는 이름들은 모두 이국적인 이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떤 사람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인지, 이방인 그리스도인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로마교회 구성원들은 바울의 이 편지를 읽으면서 거기에 열거된 이름들이 누구인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아주 잘 알았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인사를 나눌 것을 권면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1장에서부터 논의한 내용의 결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서로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 갈등, 그 갈등 때문에 발생한 상처, 반목, 이러한 것들을 거두어들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받아들이는 일은 ‘인사’로부터 시작합니다.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라는 사회학 용어가 있습니다. 팬데믹 동안 이 말을 사용해서 서로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거리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사회학에서 ‘사회적 거리’는 원래 사람들 사이에 서로를 서로의 삶에 얼마나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측정하는 데 쓰는 용어입니다. 일례로, 한국인은 타인종을 자신들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굉장히 큰 거리감을 둡니다. 특정 인종은 회사나 마을에서 인사 정도 나누는 것, 그들과 식사 정도 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결혼을 통한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합니다. 이러한 것을 두고 ‘사회적 거리’라는 말을 씁니다.

          

팬데믹 동안 아시안 혐오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지금도 아시안들은 미국 사회에서 매우 약자로 살아갑니다. 그만큼 미국 사회에서 아시안들은 사회적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사회적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는 ‘인사’보다는 ‘폭력’을 쓰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어떤 사람인지 가리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인사를 반갑게 나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 거리가 가깝다는 뜻이고, 서로가 서로를 자신들의 삶에 잘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애석하게도 혐오와 폭력이 늘어난 요즘 세상에서, 아시아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좀 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손쉬우면서 의미 있는 일은 ‘인사’입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 보세요. 인사만 잘 해도 좋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의 인사에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와 복음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Posted by 장준식

나아만의 신앙과 게하시의 불신앙

ㅡ 게하시처럼 하면 안 되는 이유

 

신앙은 삶의 상태입니다. 신앙과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 지를 보면 신앙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삶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전에는 ‘저렇게’ 살았었는데, 신앙을 갖은 후에는 더 이상 ‘저렇게’ 살 수 없고, 이제는 ‘이렇게’ 살게 되는 것이죠. 물론 이것이 그 사람의 성품(성격)까지도 변하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타고난 성품은 신앙을 가진 이후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가진 후에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삶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한 신앙의 삶이 무엇인지, 우리는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 사람으로서 이방인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병에 걸려 어려움에 처했고, 그것을 긍휼히 여긴 ‘몸종(나아만 장군 아내의 몸종)’이 나병을 고칠 방도를 일러줍니다. 그렇게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오게 되고, 이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열왕기하 5장은 오롯이 나아만 장군 이야기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나아만 장군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아만 장군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가 구원받는 방식은 매우 독특합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나아만 장군의 신앙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나아만 장군의 신앙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나아만 장군에게서 보이는 신앙의 모습은 6가지 정도 됩니다. 첫째는 그가 ‘하나님 앞에 섰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겸손을 말합니다. 나병이 낫기 전,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병을 고치기 위해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을 때, 그는 엘리사 선지자가 자신 앞에 서서 자신을 알현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병을 고침 받은 후, 엘리사 선지자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엘리사 선지자 앞에 선 것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경험한 사람, 즉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섭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아만 장군은 직접적인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 아나이다”(왕하 5:15). 이전에 나아만 장군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였습니다. 이것은 신에 대한 간접고백일 뿐입니다. 그러나 나아만 장군은 신앙을 갖게 된 후, ‘너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에서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으로, 고백의 방향을 바꿉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의 이야기 아니라, 이제 자신의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은 하나님을 완전히 ‘삶’으로 경험하게 하고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은 ‘너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나의 실존으로 파고 들어오는 사건입니다.

 

셋째,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예물(gift, blessing)을 드립니다.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병 고침을 받고자 올 때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병고침을 받은 후 엘리사 선지자에게 드리는 선물은 새로운 선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올 때 가지고 온 선물입니다. 그러나 처음 가지고 올 때의 선물과 이제 신앙을 가진 후 엘리사 앞에 내어 놓는 선물의 성격은 완전히 다릅니다. 처음에 나아만 장군이 선물을 가져올 때 그 선물의 성격은 ‘포상품’이었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쳐준 것에 대한 보상, 또는 ‘시혜’(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것) 정도의 의미를 가진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을 갖게 된 나아만 장군의 예물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표징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표현하는 성례전 같은 성격을 가집니다. 신앙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모두 그러한 뜻을 가집니다.

 

넷째, 나아만 장군은 자유를 얻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예배하겠다고 선포합니다. 그런 의미로 이스라엘의 흙을 얻어갑니다. 그러면서 나아만 장군은 자신이 모시는 아람 왕과 함께 림몬 신전에 들어가서 절하게 될 때, 그것은 림몬 신을 섬기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윗사람을 모시는 신하 된 입장에서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을 밝힌 후,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그의 용서 구함에 이런저런 말을 보태지 않고 그저 ‘평안히 가라’고만 대답합니다. 신앙은 이렇게 자유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에게만 매인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더 이상 아람의 신 림몬에게 매여 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신앙은 나를 속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선언입니다.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에게 예물을 받지 않은 이유는 명백합니다. 구원은 거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무엇인가를 받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구원은 교환이 아닙니다. 구원은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나아만 장군을 당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인정했습니다. 이 자체, 이 관계 자체가 구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으로부터 예물을 받을 이유와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관계에는 어떤 가격이 매겨지거나 교환가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안에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나아만 장군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은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 게하시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거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이는데, 다음과 같이 게하시를 저주합니다.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왕하 5:27). 게하시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토록 가혹한 저주를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게하시가 가혹한 저주를 받은 이유를 아는 것만으로도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매우 가치 있는 말씀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게하시가 거짓말을 통해서 나아만 장군에게 예물을 받은 것 때문에 가혹한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너무 지나친 처벌 같아 보입니다. 게하시의 거짓말을 보면 그렇게 큰 거짓말도 아닙니다. 그리고 나아만 장군에게 가서 예물을 억지도 빼앗아 온 것도 아닙니다. 거짓말 수준이 애교 수준이고, 나아만 장군은 게하시에게 예물을 기꺼이 내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게하시에게 가혹한 저주가 임하는 이유가 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왕하 5:20). 여기에 보면,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을 ‘이 아람 사람 나아만’이라고 부릅니다. 게하시에게 나아만 장군은 여전히 이방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반란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나아만 장군에게 ‘구원’을 베푸셔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아만 장군을 ‘타자화’시켜서,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 자신이 뒤집어버리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살면서 나아만에게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배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게하시 사건을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사람들, 즉 구원하신 사람들을 우리가 임의대로 ‘이방인’ 취급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제대로 배우고 이해해도, 신앙인이 자기 마음대로 누군가를 ‘이방인/타자’ 취급하며,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게하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나아만 장군을 자기 마음대로 이방인 취급하여 그에게 폭력(거짓말/물품강탈)을 행사했습니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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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종려주일을 보내며

 

종려주일(Palm Sunday)입니다. 부활절 전 주일이기도 합니다. 부활절 전, 예수님은 종려주일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을 종려주일로 부른 것,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부활절로 부른 것은, 모두 그 사건이 일어난 후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돌아보며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손에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쳤기 때문입니다. 호산나의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입니다. 이들이 바라는 구원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제국에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BC 587년), 그 이후에 나타난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 제국에 의해 순차적으로 지배를 당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사분오열된 그리스 제국은 지역 안배를 통해서 권력을 나누어 가졌는데,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린 제국을 ‘셀레우코스 제국’이라 부릅니다. 그 중에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황제가 유대인의 성전에 우상을 배치하여 성전을 더럽힌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이 발단이 되어 유대인들이 혁명을 일으킵니다. 그것이 바로 BC 164년에 마카비가 일으킨, 그 유명한 마카비 혁명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때의 혁명을 기념하기 위하여 ‘하누카’를 지키고 있습니다. 12월이 되면, 기독교인들은 ‘성탄절’(Christmas)를 지키지만, 유대인들은 ‘하누카’(Hanuka)를 지킵니다.

 

하지만 마카비 혁명을 통한 유대인의 독립도 오래 못 가고, 로마 제국에 의해서 또 지배 상태에 들어가게 되죠. 그래서 기원전 2세기와 1세기를 지나는 동안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 사상’이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가 와서 제국을 몰아내고 자신들을 구원해 줄 거라는 사상이 유대인들 사이에는 팽배했고,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습니다. 이는 마치 일제시대에 저항시인 이육사가 <광야>라는 시를 통해서 ‘초인’이 도래하여 조선을 구원해 줄 것을 기대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녀를 낳으면 ‘Jesus’라고 붙이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Jesus는 여호수아(Joshua)와 같은 뜻을 지닌 이름인데, 그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입니다. 그러니까, Jesus에는 이미 ‘메시아’의 의미가 들어가 있는 것이죠.

 

이런 일련의 역사적 사건을 보면,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어떠한 구원을 원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마 제국을 이스라엘 땅에서 몰아내고 마카비처럼 혁명을 이루어 나라를 되찾고, 이스라엘의 민족성과 종교를 지켜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긴급한, 현실적인 구원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그들의 소망대로 예수님의 구원이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더 깊은 차원에서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셨던 것이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현실에서 제국을 몰아내고 주권을 되찾았다고 하더라도, 그 나라는 오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종려주일을 맞아 주님을 맞이하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입니다. 아주 깊은 간절함이 담긴 말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당장 구원받아야 할 것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 나 자신의 문제, 가족의 문제, 직장의 문제, 또는 사회적 문제 등,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 일단 호산나를 외치며, 그러한 문제들이 해결되고 평안을 되찾을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간구하는 것은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궁극적인 구원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깊은 묵상을 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종려주일입니다. 종려나무가 이스라엘에서는 흔한 나무라 그 나뭇가지를 꺾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던 것이겠죠. 만약 한국에서 이 일이 발생했다면, 한국 산천에 흔한 개나리나 진달래를 꺾어서 예수님을 환영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손에 잡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간절한 마음으로 ‘호산나’를 외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는 그 길에 우리는 무엇을 놓아드릴 수 있을까요? 아마도, 교회 뜰에 핀 유채꽃 같은 것을 꺾어서 그 길에 놓아드리면 어떨까요? 아무튼, 우리의 일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를 외치면서, 우리의 삶의 문제를 주님께 말씀드리면 좋겠습니다. 호산나는 종려주일에만 외치는 특별한 구호가 아니라, 그냥 우리의 일상에서 흔하게 외치는 구호가 되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신앙의 행위]

 

우리는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을 통해서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의 행위를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함’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신앙이란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창조신앙이란 인간 존재와 하나님과의 연결성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가장 인간다울 뿐만 아니라,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신앙은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길(way)에 대해서 많은 묵상과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것을 은혜의 방편(means of grace)라고 하는데, 감리교의 효시, 존 웨슬리(John Wesley) 목사님이 제시한 것이 가장 유명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은혜의 방편은 경건과 선행으로 나누어지는데, 경건(practices of piety)에는 성경읽기, 기도, 금식, 정기적인 예배 참석, 성례전, 교제(fellowship), 성경공부 등이 있고, 선행(good works)에는 병자 방문, 감옥에 갇힌 자 방문, 배고픈 사람 먹이기, 기부, 정의 추구 등이 있습니다. 물론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은혜의 방편들을 찾아볼 수 있겠죠.

 

엘리사의 전성시대를 알리고 있는 에피소드들을 담은 열왕기하 4장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신앙의 행위가 제시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신앙의 행위는 위에서 살펴본 ‘은혜의 방편’과 좀 다릅니다. 은혜의 방편은 외적인 것이지만,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에서 제시되는 것은 내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행위는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깊어져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외적인 은혜의 방편이 진실한 신앙의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에서 제시되는 ‘내적인 은혜의 방편’은 무엇일까요?

 

열왕기하 4장은 과부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선지자 생도가 아내와 두 아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남편을 잃은 여인은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서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살아보지만 결국 삶의 막바지에 다다릅니다. 더 이상 생활비도 없고, 두 아들이 노예로 팔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남편의 스승이었던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엘리사 선지자에게 ‘살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내적인 은혜의 방편 첫번째는 ‘간절함’입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왕하 4:1).

 

과부의 부르짖음에 엘리사 선지자는 응답합니다.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하랴?”(왕하 4:2). 사실 과부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란 이제 기름 한 그릇 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적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이 가진 것에서부터. 엘리사 선지자는 기름을 담을 빈 그릇을 최대한 많이 빌려오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빌려온 기름 그릇을 가지고 들어가 문을 닫고 기름을 부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두 번째 내적인 은혜의 방편을 보는데, 그것은 ‘순종’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이웃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과부는 엘리사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한 번 더 어려운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 지시대로 방에 들어가 기름을 붓습니다. 순종하지 않았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렇게 과부와 두 아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엘리사 전성시대의 다음 에피소드는 수넴 여인 이야기입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를 존귀하게 여기고 극진히 대접합니다. 수넴 여인은 앞에 등장했던 과부와는 다른 신분을 가진 여인입니다. 부유했고 존경받던 집안의 여인입니다. 그런데 수넴 여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수넴 여인이 돋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무시당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푸대접 받던 시절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극진히 대접했다는 데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 시대는 겉으로는 부강했으나 속으로는 매우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아합 왕이나 아하시야 왕 이야기를 보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었고, 하나님의 사람을 푸대접했습니다. 엘리야는 심지어 핍박을 받았습니다. 엘리사도 사람들에게 별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시절에 하나님의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극진히 대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세 번째 내적인 은혜의 방편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섬김’입니다. 섬김을 받은 엘리사 선지자는 뭔가 답례를 베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수넴 여인에게 무엇을 해줄까를 묻습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수넴 여인은 그러한 상태를 돌려서 말합니다. “나는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왕하 4:13). 현재 상태에 만족하고 있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왜 바라는 게 없겠습니까? 그 당시 여인에게 정말 중요했던 것은 자식인데, 자식이 없는 수넴 여인의 처지를 알게 된 엘리사 선지자는 그녀의 태를 열어줍니다. “한 해가 지나 이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왕하 4:16).

 

정말로, 엘리사 선지자의 예언대로 수넴 여인은 일 년 후에 아들을 품에 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어린 아들이 조금 성장하여 개구장이 아이가 되었을 때 추수하는 아버지를 보러 밭에 나갔다가 ‘머리야 머리야’ 하면서 쓰러집니다. 망연자실한 수넴 여인은 죽은 아들을 데려다가 엘리사 선지자가 묵는 방 침실에 눕혀 놓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 있던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갑니다. 갑자기 자신을 찾아오는 수넴 여인을 멀리서 보고 엘리사 선지나는 몸종 게하시를 보내 맞이합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엘리사를 보자마자 수넴 여인은 엘리사의 발을 붙잡고 주저 앉습니다. 그리고 자식 잃은 괴로움을 표출합니다.

 

섬김을 통해서 선물로 받은 아들이 변고를 당하자 수넴 여인은 망연자실했습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 아픔을 표현하며 도움을 구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네번째 내적 은혜의 방편을 봅니다. 그것은 ‘신뢰’입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왕하 4:30). 엘리사는 수넴 여인과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죽어서 침상에 누워 있는 아이를 살려냅니다. 수넴 여인의 신뢰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셨고, 수넴 여인은 그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간절함, 순종, 섬김, 신뢰, 이러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외적인 은혜의 방편들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정기적인 예배에 참석하고, 친교를 나누고, 성경공부 하는 일, 그리고 어려운 이들을 돕고 정의를 구하는 일들, 이 모든 일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좋은 방편(means)들 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간절함, 순종, 섬김, 그리고 신뢰입니다. 이러한 내적인 은혜의 방편들이 자리를 굳건하게 잡고 있어야 외적인 은혜의 방편들이 빛을 발합니다. 외적인 은혜의 방편들을 연습하면서 내적인 은혜의 방편들을 추구하는 신앙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성숙한 신앙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좋은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당신 탓이 아닙니다]

 

내가 '거대서사'에 대한 분석과 이야기를 자주 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어서 그렇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 내 삶이 왜 이렇게 힘든지, 거대서사를 이해하고 나면 내가 이렇게 힘든 이유가 내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 전공은 정치신학이다. 정치신학을 전공하기 위해서는 정치철학 공부는 필수다. 정치 철학자들의 책을 읽으면 거대서사를 알 수 있다. 거대서사는 우리가 왜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혀 준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우리 고유의 것이라기 보다 대개 큰 세력에 의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길들여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 같으나 그것은 착각일 뿐 우리는 무엇인가에 노예로 살아갈 때가 많다.

 

기독교인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신앙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지 잘 분간을 못한다. 이는 마치, 회심 전 바울과 같다. 회심 전 바울, 즉 사울이 행한 일은 불의한 일이었으나 자기 자신은 신앙의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더 '열심'을 냈다.

 

열심은 좋은 것이나 방향이 잘못되면 열심은 오히려 독이 된다. 그래서 언제나 열심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아무리 열심이 있어도 방향이 잘못되어 있으면 헛된 것이요, 별로 열심이 없어도 방향이 올바르면 결정적인 순간에는 큰 힘을 발휘한다. 열심을 추구하기 보다 올바른 방향을 찾는 게 중요하다.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열심을 내는 일은 '선동'에 가깝다. 열심을 내는 일은 재밌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심을 내는 것에 더 마음을 두기도 한다. 그러나 올바른 방향을 찾는 일에는 별로 흥미를 못 느낀다. 재미도 없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열심을 내는 일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방향을 찾는 일이다. 방향을 찾은 뒤에 열심을 내도 늦지 않다. 방향을 찾았으면 열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 대개 방향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소란한 법이다. 방향을 찾은 사람은 요란스럽지 않게 그냥 그 길을 간다.

 

하나님보다 더 큰 서사는 없다. 이것은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첫 번째 믿음이다. 구약의 십계명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그러면서 우상을 만들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만들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이 말씀에 '아멘' 하지만, 대개는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지만 않을 뿐, 하나님 아닌 서사에 지배당하면서 산다.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큰 서사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서사 안에 살지 못하고 우리를 둘러싼, 하찮고 보잘것없는 서사에 일희일비하면서 산다.

 

십계명에서 말하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다른 서사에 지배당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가장 큰 서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서사 안에서 살면 우리가 맞닥뜨리는 작은 서사들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작은 서사가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것 인양, 두려움에 떨며, 그 작은 서사에 복종한다. 완전 우상숭배자다.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서사는 우리보다 크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거대서사라 부른다. 그러한 거대서사를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서사에 압도당하거나 희생당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을 가지는 이유는 우리를 압도하거나 우리를 희생시키는 거대서사가 사실은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거대서사에 비추어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고,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함을 얻기 위함이다.

 

우리는 여러가지 거대서사에 둘러싸여 산다. 우리를 둘러싼 거대서사를 알고 나면, 무엇보다 힘을 빼고 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나의 신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얼마나 거대서사의 노예로 살고 있는지 알게 된다. 이것을 알게 되면, 내 삶의 어려움들, 또는 내 삶의 죄책감들이 내탓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럴 때 나를 찾아오는 자유는 정말 달콤하다.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가장 큰 서사인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몇 년 전 김누리 교수가 외쳤던 말이다. 그는 이 책에서 대한민국이 불행한 이유를 다음 세 가지로 꼽았다. 1) 분단상황, 2) 야수자본주의, 3) 68혁명의 부재

이 세 가지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거대서사들이다. 불행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이러한 거대서사의 희생자들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불행을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을 안타까운 일이다.

 

공부란 우리의 삶을 억누르는 거대서사를 보는 안목을 기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 거대서사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한 지혜를 기르는 일이다. 또한 불의한 거대서사를 몰아내고 새시대를 여는 힘과 용기를 키우는 일이다. 이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나도 모르게 불의한 거대서사에 희생당할 뿐만 아니라 그 불의의 협력자가 되어 불의한 거대서사를 관철시키기 위해 '열심'을 내는 어처구니없는 인생을 살게 된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 그러니 힘을 냅시다. 우리 서로의 삶을 보듬으며, 우리를 억누르는 불의한 거대서사에 저항합시다. 불의한 거대서사에 저항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입니다. 열심을 내지 맙시다. 그냥 좋은 사람과 만나 수다 떨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서로를 더 사랑합시다. 성공하려고 하지 말고 실패합시다. 그렇게 세상을 비웃어줍시다. 우리 모두, 가장 큰 이야기이신 하나님 안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병리적 신앙]

 

미국에는 거대한 심리적 병리 현상이 존재한다. 이는 인종차별에 기반을 둔 현상이다. 심리적 병리 현상은 세 가지다. Guilty(죄책감), Anger(분노), 그리고 두려움(Fear).

 

죄책감은 백인에게서 나오는 심리적 병리 현상이다. 분노는 흑인에게서 나온다. 두려움은 아시아인에게서 나온다. 미국 사회 이면에는 죄책감, 분노, 그리고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미국 사회가 건장하지 못한 이유이고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백인은 근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면서 세계를 정복했고,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많이 했다. 미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원주민 대학살의 역사가 있다. 5000만 명 정도를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잡아와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 사용했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명과 자연을 훼손한 일들이 즐비하다. 그 과정에서 백인은 '우월감'을 가지게 됐지만, 그 이면에서는 '죄책감'이 자리 잡았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백인은 '백인우월주의'를 바탕으로 자신들 이면에 있는 '죄책감'을 덮으려고 한다. 죄책감이 저변에 병리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은 '표리부동'이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사악한 마음을 품는다. 한 마디로, 속을 알 수 없다. 이들은 자신의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서 '선한 일'을 많이 한다. 무덤에 회칠이라도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한 일을 통해서 속죄하려고 한다.

 

흑인은 인종적으로 최고의 피해자이다. 사람으로 취급 받지 못하고 자신들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노예로 잡혀 와서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영혼이 있는 생명체로서 최악의 경험을 한 것이다. 그래서 흑인들에게는 '분노'가 많다. 분노가 많은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의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거칠어진다는 것이다. 감정 표현이 매우 거칠다. 미국에서 흑인은 같은 영어를 쓰지만 그 표현이 매우 거칠다. 제스처도 그렇다.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시아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산다. 삶 속에서 무슨 피해를 입을까봐 노심초사한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의 특징은 절대 다른 사람의 일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우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다. 자기가 피해 입는 것을 두려워하고, 남에게 피해주는 것을 꺼려한다. 피해를 입어도 그것을 입 밖에 꺼내기를 주저하고, 왠만한 일은 그냥 참고 넘어간다.

 

각 인종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병리적 현상은 각 인종의 신학과 예배에도 반영된다. 백인은 '죄와 용서의 신학'을 중요시한다. 백인들은 로마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고, 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셨다는 '복음'은 그들에게 그야말로 구원의 말씀이다. 게다가 이것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기도 한다. 자신들의 행동은 죄인인 '타자'를 구원하기 위한 구원 행위였다는 것이다. 우월감을 가지고 한 나쁜 행동들은 모두 그렇게 정당화 된다. 제국주의자들은 모두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일본이 뻔뻔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월한 자신들이 미개한 조선인들을 구원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졸개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흑인은 해방과 기쁨의 신학을 추구한다. 억압 당하며 산 이들에게 해방은 그 자체로 구원이다. 그래서 흑인들은 해방을 이야기하는 누가복음의 말씀이나 선지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같은 성경을 좋아한다. 예배에서도 그들의 울분을 토하고,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들을 벌주시고, 약자들을 신원해 주신다는 말씀을 들으면 '에이멘'이 합창처럼 터져 나온다. 눌린 억압을 풀어주고, 묶여 있는 분노를 발산할 때 이들은 기뻐한다. 그래서 흑인 교회의 예배는 기쁨이 충만하다. 늘 축제다.

 

아시아인의 신학은 백인과 흑인의 신학과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아시아인들의 신학은 대체로 '기복적 요소'가 강한데, 그 이유는 기복은 건강이나 물질의 복을 통해서 자신들이 가진 두려움을 극복하거나 달래주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아시아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씀에 감동을 많이 받는다. 두려움에 쌓여 있기 때문에, 그래서 소극적이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들에겐 하나님의 지도편달이 필수다. 그리고 자신들의 두려움을 보호해줄 보호막이 필요한데, 그것은 대부분 물질적 복이나 건강 또는 자식이나 가족들의 평안이다. 더이상 바라지 않는다. 사회 변혁이나 미래에 대한 깊은 관심도 없다. 그냥 자기와 자기 가족이 평안하면 그만이다.

 

각 인종의 신학이나 신앙 형태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각자 자신들의 병리적 현상을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기독교 신학, 신앙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백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죄책감(guilty)을 덮으려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하고, 흑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분노(anger)를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하고, 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두려움(fear)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유한다. 이렇게 각자 기독교를 전유하는 방식이 다르다 보니, 백인이 흑인 교회나 아시아인 교회에 가는 게 불가능하고, 흑인이 백인 교회나 아시아인 교회에 가는 게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도, 아시아인이 백인 교회나 흑인 교회에 가는 게 쉽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더 재밌는 현상은 지배계층은 백인들이 전유하는 기독교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흑인이든, 아시아인이든, 지배계층은 백인들처럼 '죄책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관찰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기독교가 점점 더 쇠락하는 이유는 역사와 몸에 맞지 않은 신앙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의 복음주의를 모방하고 있다. 복음주의는 '죄책감'에 쩔은 백인들에게 최적화된 기독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복음주의는 백인 남성 지배계급에 최적화된 기독교이다. 그래서 복음주의 신학은 '죄'를 강조한다. 일단 '인간은 죄인'이라는 명제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게 디폴트이다. 우월감에 젖어 있고, 그래서 자신은 지배계급에 속해야 하고, 그래서 '아래 사람들'(?)에게 저지른 나쁜 짓은 구원 행위이다. 이런 구조의 신학은 사실 한국인들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신학이며 신앙의 옷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허영심'이라는 게 있다. 사람들은 피지배계층으로 사는 것보다 지배계층으로 사는 것을 선호한다. 이것은 평범한 서민들도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이야기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드라마에서 재벌 이야기, 예쁘고 잘 생기고 잘 나고 성공하는 이야기에 더 흥미를 가진다. 그런 것처럼, 신앙도 이왕이면 지배계급인 백인들이 형성해 놓은 복음주의를 선호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그렇게 살고 싶은 욕망의 반영이고,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 이상 지배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미국의 복음주의를 모방한 한국의 대형교회를 선호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쇠퇴하는 이유는 다방면으로 살펴봐야 하겠지만, 분명한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가 심리적 병리 현상을 달래는 데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기독교 신앙이 그러한 심리적 병리 현상을 남몰라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런 병리적 현상을 달래고 치유하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심리 기저에 있는 병리적 현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를 자신들의 병리적 현상을 달래는 데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원래 가진 '전복성'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소 잡는 데 쓰는 칼을 닭 잡는 데만 쓰는 것과 같다. 우리 시대는 소를 잡아야 하는 상황인데, 손에 쥔 칼로 닭만 잡고 있다면, 칼의 쓰임새가 너무 축소된 것이고 아까운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아우라와 탈교회 현상]

왜 탈교회 현상이 나타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교회에 더이상 아우라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교회에 더이상 아우리가 없게 되었는가? 교회가 잘못해서? 목회자들의 일탈 때문에? 이 말도 맞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기술의 발전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교회는 급격히 쇠락했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과 교회의 쇠락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은 교회의 쇠락을 이끌었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이 교회의 아우라를 상실시켰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그의 저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아우라에 대한 논의를 진행시킨다.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서 예술작품에 있던 아우라가 어떻게 상실되는지를 추적한 것이다. 1936년에 쓰인 책이니까, 그때의 기술이란 사진과 영상 정도다. 하지만 사진과 영상은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던 아우라를 상실시키기에 충분했다. 사진과 영상은 원본의 아우라를 감소시켰다. 사진과 영상을 통해서 무한 복제될 수 있는 원본 작품은 원본만 존재하던 때와는 달리 더이상 고유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은 모든 일상을 가벼운 것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이 가벼워지는 이유는 모든 것의 일상(사생활)이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신비와 카리스마가 걷히니, 대상이 가진 아우라가 걷힌 것이다. 공영방송을 통해서만 접하던 정치인이나 사회적 지도층 인사들의 삶이 이제는 통제되지 않는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 가감 없이 노출된다. 그들의 근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사람들은 그들의 추잡한 사생활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것은 사회 전반에 걸쳐서 발생한 사회현상이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가톨릭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아동 성추행 문제가 반복되고 있었지만, 그것이 대중에게 까발려진 것은 인터넷과 SNS의 발달과 더불어 된 일이다.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할 수 있었던 시절, 불과 20년 전만 해도, 몇몇 사람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일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가톨릭에서 행해진 아동 성추문 문제를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개신교 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가지 추문들이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기독교를 일컬어 '개독교'라고 부르고, 목사를 일컬어 '먹사'라고 부른다. 통제할 수 없는 언론이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술의 발달은 굳이 교회를 가지 않더라도 종교적 욕구를 얼마든지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었다. 우리가 팬데믹을 통해서 경험한 것처럼, 인터넷을 통한 예배가 가능하게 된 것은 순전히 기술의 발달 덕분이다. 그래서 그 이전에는 없던 신조어들이 생겨났다. '대면예배', '비대면예배' 같은 것들이다. 예배는 그냥 예배였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예배를 구별한다. '대면'인지, 아니면 '비대면'인지.

거기다 인터넷, 특별히 유튜브의 발달로 인하여 담임목사의 설교가 갖는 아우라는 없어진 지 오래다. 손 안에서 내가 듣고 싶은 설교를 골라서 들을 수 있는 기술이 보급됐기 때문이다. 설교를 쉽게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마치 상품을 쉽게 비교할 수 있는 것과 같아졌다. 설교가 상품처럼 골라서 들을 수 있는 것이 된 이상, 설교가 갖는 고유의 아우라는 상실될 수밖에 없다.

교회가 제대로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도 중요하고, 목회자가 지성과 영성, 그리고 도덕성을 두루두루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러한 것이 잘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탈교회 현상을 당분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고유의 아우라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더이상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아우라를 갖는 일을 잘 하지 못한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상품을 파는 회사에서는 상품의 아우라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톱스타를 내세워 광고하기도 하고, 상품의 가격을 범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올리기도 하고, 한정판을 만들어 희귀성을 높여 아우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도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아주 쉽게 간파된다.

아우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교회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손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상품을 파는 회사들처럼 마케팅을 하는 것이다. 요즘 교회들은 대개 그러한 방식을 취한다. 한마디로, 어떻게 해서든 '스펙터클'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교회 건물을 빚을 내서라도 블링블링하게 짓거나 리모델링을 하고, 팬시한 프로그램을 돌려서 사람들의 환심을 산다. 좀 심한 곳은 목회자를 우상화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이유는 파괴된 아우라를 어떻게서든 다시 회복하여 교회 성장을 이루려는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의 아우라는 다시 복구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미 판도라 상자가 열린 시대에 살고 있으며, 모든 것이 까발려진 '투명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미 의심과 불신의 에너지에 둘려 있다. 의심과 불신의 에너지는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거나 붙들리게 하지 않는다. 의심과 불신은 분열을 불러온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은 모두 '분열의 일' 뿐이다.

기술의 변화는 인간에게 의식의 변화를 가져온다. 기술은 인간의 의식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제 AI의 시대를 맞고 있다. 이미 그 시대가 어떠한 시대가 될 지, ChatGPT의 론칭을 통해서 조금씩 맛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종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보 같은 짓은 변화를 거부하며 비의 또는 컬트의 집단으로 퇴화하는 것이다. 사실, 요즘 한국 사회를 떠들썩 하게 만들고 있는 이단 교회들은 모두 퇴행적 행동을 보이는 종교집단일 뿐이다.

정통교회라고 자부하는 교회들이 기술의 변화에 발맞추어 신앙과 교회를 재구성하는 데 게으르다면, 즉, 활발한 대화를 거부하고 오히려 이단 교회들처럼 퇴행적 행동을 하는 곳으로 나아간다면, 머지않아 이단과 정통교회는 한 통속이 되고 말 것이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나는 신이다'에서 보인 이단들의 퇴행적 행동은 그 강도만 다를 뿐이지 이미 정통교회 내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기술이 무섭게 발전하고 있는 이 시대에, 교회가 사는 길은 아무리 생각해도, 소통과 공부 밖에 없다. 무섭게 변하는 사회와 소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이는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격려의 말씀과 같다),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어떻게 해야 급격히 발전을 이루는 기술사회에서 교회가 지닌 고유의 아우라를 지켜내거나 또는 창조해 나가야 하는지 치열하게 '공부' 하는 수밖에 없다.

탈교회 현상을 너무 교회 자체적인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자책하거나 쉽게 비난하지 않으면 좋겠다. 물론 교회의 잘못과 목회자의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나, 아무리 교회와 목회자가 잘 해도 탈교회 현상은 막을 수 없는 쓰나미와 같다.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좋겠다.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아우라를 만들어 나가며, 인간성(humanity)이 한없이 무너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아파하는 '인간'(human being)'에게 삶의 의미를 되찾아 주고, 따스한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는, 기술사회를 올바로 이끌어 주는, 진리와 사랑의 교회를 세워 나가면 좋겠다.

Posted by 장준식

[안다는 것은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바다의 가능성은 수수께끼처럼 난해하다. ...인류는 깊은 심연의 바다보다 우주를 훨씬 더 많이 방문했다. 바다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바다를 존중하지도 않는다. 바다를 약탈하고 더럽히면서 죽이고 있다. 우리 자신도 함께."

(탄소로운 식탁, 232쪽)

 

우리교회에서 진행하는 [기후변화프로젝트]에서 읽는 책 <탄소로운 식탁>에서 인용하고 있는 자크 아탈리의 글입니다. <탄소로운 식탁>에서 저자는 우리의 먹거리와 탄소배출의 상관관계를 살피고 있는데, 축산업과 농업, 그리고 어업 순으로 상관관계를 보여줍니다.

 

우리 식탁에 고기가 올라오기까지, 우리 식탁에 곡물이 올라오기까지, 그리고 우리 식탁에 해산물이 올라오기까지, 우리는 그냥 무심히 먹고 즐거워하지만, 우리의 먹거리가 생산되는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하게 탄소를 배출하는 구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먹으면서 지구를 죽이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이대로 가다 가는 어느 시점, 우리는 더 이상 먹지 못하고 굶어 죽거나, 아니면 그냥 갑작스럽게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먹을 것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만큼 지구가 황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먹는 것 때문이죠. 물론 이러한 일을 상상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고 두렵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망치기만 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위의 문장에 나와 있습니다. "바다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바다를 존중하지도 않는다. 바다를 약탈하고 더럽히면서 죽이고 있다." 바다 뿐이겠습니까? 무엇이든,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려 하니, 그 대상에 대하여 경외심을 갖지 않습니다. 경외심이 없으니 존경도 없습니다. 존경이 없으니 마구 착취하는 것이죠.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했지만, 이것은 ‘앎’에 대한 왜곡을 낳았습니다. 왜 알려고 할까요? 우리는 그동안 앎에 대한 이유를 왜곡하며 살았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앎을 통해서 상대방을 통제하고 착취하고, 상대방을 통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썼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앎'을 내세워, 인간을 파괴하고 착취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지난 세월 우리가 지내온 전형적인 근대의 풍경입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야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안다’는 뜻의 히브리어’야다’는 아주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마치 남녀가 깊이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요. 깊은 사랑 안에 거하는 것만큼 성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성경에서 '안다'라는 말을 '야다'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앎이란 경외를 불러오는 것이기 때문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룩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앎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도 하나님을 앎의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일은 '경외'로운 일입니다.

 

상대방을 인식하고 알아간다는 것은 상대방을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앎은 경외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경외가 있어야 상대방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생기는 법입니다. 존경의 마음의 있어야 상대방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와 더불어 생명을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폭력과 착취도 들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기후위기를 겪고 있습니까? 앎에 대한 인식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는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곡과 무관심이 기후위기를 낳은 근본 원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야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에 대하여 안다면(야다), 그것은 경외이어야 마땅합니다. 앎을 통해서 경외 이외의 다른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앎이 아니라고 말 수 있습니다.

 

경외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앎은 앎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알려고 하는 자는 경외를 먼저 간구해야 합니다. '앎'이 알량한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우리 시대에, 앎에 대한 구도적 자세를 회복하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구원과도 같습니다. 안다는 것은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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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