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에 해당되는 글 425건

  1. 2011.03.04 이의 있습니다!
  2. 2011.01.01 소속이 어디인가?
  3. 2010.12.15 생로병사(生老病死) – 쿼터 라이프(Quarter Life)
  4. 2010.12.09 신앙은 아편이 아니다
  5. 2010.12.09 파루시아를 살다

이의 있습니다!

 

기도하려고 두 손을 모으는 것은 세상 불의에 대한 항쟁의 시작이다.” 칼 바르트가 한 말입니다. 기도의 동작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습니다. 몸 동작 중 가장 보잘것없는 축에 속합니다. 두 손을 모으는 것만큼 간단한 동작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담고 있는 능력은 우주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늘 이렇게 발휘됩니다. 십자가 죽음도 세상 만물 중 가장 보잘것없고 추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일어난 일은 우주적 구원이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매일 겪는 일이 세상의 불의입니다. 의롭지 못한 세상 때문에 마음 상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습니다. 세상 불의는 골리앗처럼 너무나 힘 세보이고 커 보이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앞에서 그저 한숨과 한탄만 흘러나올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위해 세상 불의와 싸우고 계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 불의에 대한 심판이요 최후 승리입니다.

가수 송창식씨가 어느 방송에 나와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삶의 규칙들이 이상하게 맘에 안 든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과 다르게 살 뿐이다.” 참 기인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이의를 가지고 살아가는지요? 세상의 이치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속편 하다고 생각해서 세상이 요구하는 삶의 조건을 모두 갖추려고 밤낮으로 애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의 있습니다!”를 당당하게 외치면서 부당하고 불의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바로 잡으려고 불편과 고난을 감수하면서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불의한 세상을 등지고 온갖 불편과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세상을 향해 등지고 살아간다 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과 발맞추어 살아가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적어도 이 세상의 불의를 감지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최소한의 양심과 행동은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의 있는 삶, 부당한 삶, 불의한 세상을 향해 항쟁하는 첫 걸음은 두 손을 모으는 것입니다. 기도는 세상 불의에 대한 항쟁입니다. 기도는 세상 불의를 바로 잡아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세상 불의에 이의 있습니까? 두 손 모으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세상 불의를 바로잡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바로 잡아 주실 겁니다. 이 소망 안에서 우리는 두 손 모으는 일을 끊임 없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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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가난자들의 어머니였던 테레사 수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혈통과 태생상 나는 알바니아인이다. 국적으로 나는 인도인이다. 나는 가톨릭 수녀이다. 나의 소명으로 말하면 나는 전세계에 속한다. 그리고 나의 마음으로 말하면 나는 완전히 예수님에게 속한다.

유대인들은 혈통을 따졌습니다
.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니면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구원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무시했습니다. 자신들과 이방인들을 철저하게 구분했습니다. 기업을 함께 누릴 형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인들은 국적을 따졌습니다. 로마 시민이 아니면 열등한 시민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을 노예 삼았습니다. 로마 시민과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을 철저하게 구분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나라 사람들은 로마 시민권을 따기 위해서 돈 거래를 했습니다(22:27-29).

요즘 기독교인들은 교파 또는 교단을 따집니다
. 개신교 입장에서 자신들은 ‘좋은 놈’이고, 가톨릭은 ‘나쁜 놈’이고, 정교회는 ‘이상한 놈’입니다. 개신교 안에서도 교단의 입장에 따라 위치가 달라집니다. 극보수, 보수, 정통, 개혁, 진보, 그리고 이단 등을 나뉩니다. 자기 교단만이 진리를 간직한 것처럼 우겨댑니다.
세상은 온통 줄 세우고 담을 쌓는 일에 바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이와
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2:14).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주인이나 종이나 구분이 없게 하셨습니다(3:28).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막힌 담을 허물고 계시는데, 우리는 허물어진 담을 다시 쌓는 일에 몰두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혈통도, 국적도, 교파∙교단도 아닙니다. 소명과 소속이 중요합니다.
 
테레사 수녀는 자신의 소명은 전세계에 속하고, 마음은 완전히 예수님에게 속한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에게 속해서 세상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이민교회 성도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혈통과 태생상 나는 한국인이다. 국적으로 나는 미국인이다. 나는 개신교 신자다. 나의 소명으로 말하면 나는 전세계에 속한다. 그리고 나의 마음으로 말하면 나는 완전히 예수님에게 속한다.

누구에게 속하여 무엇을 품고 사십니까
? 예수님에게 속하여 세상을 품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외의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소속을 따져 가며 줄 세우고 담을 쌓은 일은 복음을 배반하는 일입니다. 소속이 어디입니까? 나는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입니다.이 말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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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인생은 생로병사입니다. 삶이란 늙고 병들어 죽는 겁니다. 삶은 늙음과 병듦과 죽음에 대한 묵상 없이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현대 문명은 이것을 부정합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모른 채 합니다. 그것들을 삶과 분리시켜 놓는데 혈안입니다. 웰빙(Well-Being)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지 웰다잉(Well-Dying)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옛날에는 늙은이와 병든이 그리고 죽은이가 한 구역 안에 또는 한 집안에 함께 살았습니다. 요즘처럼 요양시설과 의료시설이 없어서 그런 면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차원에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가까이에서 생로병사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오히려 옛날 사람들이 삶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잠언 31:16)이는 말이 있습니다. 장수가 복이었고 백발의 노인은 지혜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백발의 노인은 존경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늙음이란 부끄러운 일처럼 여겨집니다. 늙으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늙은이를 짐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늙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당당하게 늙어야 합니다. 그게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병든이는 병원으로 또는 요양시설로 옮겨집니다. 물론 분주한 사회구조 속에서 병든이를 돌본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병든이를 돌보는 일이 남의 일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병원은 치료의 기능을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현대의 병원은 병을 우리의 일상에서 분리시키는 역할도 합니다. 병듦과 분리된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은 그래서 병듦에 서툽니다. 병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서툴고 병을 다루는 방법에도 서툴고, 특별히 병든이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일에 서툽니다. 병든이를 위한 위로의 말이 겉돌 뿐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부모가 죽으면 자식이 염도하고 매장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죽음에 대해서 알고 삶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 죽음은 전문가가 대신 처리해 줍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눈물 몇 방울만 찔끔 흘리기만 해도 어느새 내 앞에서 죽음의 흔적이 깨끗이 사라져 버립니다. 죽음에 대해서 묵상해 볼 겨를도 없이 일상으로 다시 내던져집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생로병사에서 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나머지 세 가지, ‘로병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삶은 반쪽 짜리 삶도 못 되는 사분의 일 쪽 짜리(Quarter Life) 삶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현대인의 삶이 얼마나 빈곤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현대인의 빈곤한 삶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늙는 것, 병드는 것, 그리고 죽는 것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기쁨을 충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삶은 늙고 병들어서 죽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무한 인생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생로병사를 철저하게 온 몸으로 받아들이십시오.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 마십시오. 그 앞에서 비굴해지지 말고 당당 하십시오. 이 세상의 생로병사를 잠깐 지나 우리는 곧 영원한 생명, 부활의 삶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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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19세기 중엽, 청나라(중국)는 영국과 무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청나라는 발달한 옷감제조기술을 바탕으로 영국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내고 있었습니다. 영국 상인들은 이에 대해 아편 무역을 통해서 이윤을 창출해 보려고 했습니다.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청나라의 하층민들 사이에 아편은 매우 인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나라는 아편 무역을 허용하지 않았고 영국 상인들을 홍콩으로 내쫓았습니다. 이것을 빌미로 영국은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영국이 승리함에 따라 청나라는 영국의 여러 가지 요구들을 들어줘야만 했습니다. 일명 아편 전쟁입니다.


19
세기의 사상가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유명한 말입니다. 아편은 마약입니다. 고통을 잊게 해주는 진정제 역할을 합니다.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청나라의 하층민들이 아편을 찾았던 이유는 육체적 노동에서 오는 고통을 잠시나마 잊어보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마약을 찾는 사람은 현재의 고통에서 탈출하려는 욕구 때문에, 그리고 쾌락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마약을 합니다. 고통에서 탈출한다는 측면에서 마약은 종교와 닮은 점이 있습니다. 종교가 타락하게 되면 마약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칼 마르크스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감사를 강요당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내 삶은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내 안에는 여전히 기쁨이 없는데 자꾸 감사하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을 믿고 미리 감사하라고 합니다. 감사를 강요합니다. 신앙이 폭력으로 다가옵니다. 신앙의 형태가 이쯤 되면 신앙이 아편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조작된 감사요, 거짓된 감사입니다. 뒤돌아 서면 금방 사라져버릴 감사입니다. 내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고, 내 삶은 여전히 공허하고 피곤하고 힘들고 지칩니다. 그러다가도 교회 와서 박수 치면서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눈물 흘리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고 마음이 시원해 지는 것 같습니다. 고통에서 해방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나면 내 마음은 또 먹먹해 집니다.

신앙생활을 이렇게 아편 맞듯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신앙생활인지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건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적 환각생활입니다. 감사는 은혜를 체험했을 때 나오는 것이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의 고단한 일상을 잠깐 잊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것에 대해서 억지로 감사를 만들어 내는 종교적 아편에 손대지 마십시오. 정말로 내 삶을 변화시켜 영원한 안식에 거하게 하는 복음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신앙은 아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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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파루시아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합니다. 날이 세상의 , 종말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새창조의 시간입니다. 모든 눈물이 사라지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참된 안식의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파루시아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파루시아를 오늘로 앞당겨 사는 사람들입니다. 눈물을 훔쳐내고, 죽을 사람이 아니라 사람처럼,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을 십자가에 못박고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파루시아를
산다는 것은 삶의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으로 중심을 옮기는 것입니다. 한자로 구속(拘束) 구속(救贖) 매우 차이를 지닙니다. 구속(拘束) 행동이나 의사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을 의미하고, 구속(救贖) 신학적인 용어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구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의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옮기면 그리스도가 삶을 구속(拘束)하는 역할 밖에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중심을 옮기면 안에서 구속(救贖) 역사, 자유의 삶이 발생합니다. 신앙은 구속(拘束) 아니라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拘束)하기 위해서 못박히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못박히셨습니다.

사실을 알고 깨닫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의 속에서 하나의 율법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율법이 아니고 은혜입니다. 나를 구속(拘束)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속(救贖)하는 것입니다.

파루시아를 산다는 것은 바로 은혜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으로 들어가 안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구속(救贖) 은혜를 입은 자는 필연적으로 파루시아를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참담해도 희망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시는 것을 보고, 믿음으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루시아를 사십시오. 신앙인의 삶은 파루시아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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